군밤과
군고구마
'군'은 '구운'이 줄어서 된
말
'군참새-군만두-군오징어'의
'군'도 마찬가지
정월로 접어드니, 바람도 제법 차가웠다. 역시 겨울의 한고비는 정월인가 싶었다.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던 은이는 거실에서 오빠가 부르는 소리에 연필을 놓고 나가
보았다.
"은이야, 아빠가 회사에서 오시는 길에 동네 입구에서 군밤을 사 오셨단다."
"군밤?"
"응, 군밤. 아직 뜨끈뜨끈해. 껍질을 까다가 손 델라. 식거든 까 먹으렴."
"식기까지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 입에 군침이 도는데---."
"군밤 앞에서 군침이라? 삶은 밤이었다면 삶은 침이 돌았겠구나. 하하하."
오빠는 군밤을 손에 들고 호호 불며 껍질을 까 나가는 은이를 보고 놀려댔다.
"군밤과 군침. 똑같이 '군'자가 들어갔는데, 오빠, 설마 그 '군'이 서로 같은 뜻은
아니겠지."
"물론이지."
"그러면, '군밤'에서의 '군'은 어떤 뜻이고, '군침'에서의 '군'은 무슨
뜻일까?"
"알 것도 같은데, 그 뜻을 설명하라면 내가 자신 있게 할 수는 없지. 우리 군밤 먹으면서 아빠한테
자세하게 이야기 좀 듣자."
은이는 오빠와 함께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도 신문지 위에 군밤 몇 톨을 놓고 까서 들고
계셨다.
"허허허. 군밤 사다 줬더니 군밤 이야기까지 해 달라? 어떻든 너희들 맛있게 먹는데, 군밤 이야기가
맛있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편히들 앉아라. 아는 대로 설명을 해 주마."
아버지는 껍질 깐 군밤을 하나 입에 털어 넣고 나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우리 인간이 불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음식을 익히지 못하고 날로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식물의 열매 같은 것은 불에 익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불이 모든 음식에 다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의 발견으로 인간의 식생활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이 불을 이용할 줄 알게 된 것은
화산 때문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많다. 화산으로 인해 숲이 불타고 난 자리에 불에 탄 짐승의 시체를 먹고 보니 타지 않은 짐승의 고기에 비해
맛이 훨씬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래 보관할 수 있어서 두고 먹는 데도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래서, 인류가 가장 먼저 조리해 먹은 음식은 '구운 음식'이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불을 사용할 줄 알게 된 이 후부터 음식 조리법들이 하나하나 개발되기 시작했고, 저장 기술도 크게 달라졌다.
음식을 불에 익히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삶는 방법과 굽는 방법이 그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나무 열매 중에는 불에 익혀 먹어야 맛이 나는 것이 있다. 은행, 밤, 도토리 같은 것이 그것이다.
밤을 불에 구웠다면, 그것은 '구운 밤'이 될 것이다. 이 '구운 밤'이란 말이 줄어 '군밤'이
되었다. '군고구마', '군오징어', '군참새'의 '군'도 모두 '구운'이란 말에서 나온 것이다.
'구운'의 으뜸꼴(기본형)은 '굽다'인데, 이 말의 뜻은 국어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와
있다.
·굽다
① 불에 익히다.
②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들다.
③ 굳히기 위하여 가마에 넣고 불을 때다.
④ 사진의 음화를 감광지에 옮기어 인화하다.
밤이나 고구마, 오징어 같은 것을 불에 굽는 일은 위 ①의 뜻에 해당하고, 불을 이용해 숯을 만드는
것은 위 ②의 뜻에 해당하며, 벽돌, 도자기, 옹기 따위를 불을 이용해 만든다면 위 ③의 뜻에 해당한다. ④는 사진을 인화할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의 '굽다'라는 말은 움직씨(동사)인데, '굽다'가 그림씨(형용사)로 쓰이는 수도 있다.
"할머니는 등이 굽다."
위와 같이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는 뜻의 '굽다'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움직씨의 '굽다'는 활용을 할 때 '굽고', '굽는', '굽지', '굽던'처럼 '굽'이 그대로 따라
다니는 수도 있지만, '굽'의 'ㅂ'이 떨어져 나가는 수 있다. '구워', '구우니', '구운' 등이 그렇다. 움직씨에서 'ㅂ'이 떨어져 나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
눕다→누워, 누우니, 누운
·돕다→도와, 도우니, 도운
·줍다→주워, 주우니, 주운
어떻든 '구운 밤'이 줄어 '군밤'이 되었고, '구운 고구마'가 줄어 '군고구마'가 되었다.
그러나, '군침', '군소리' 등에서의 '군'은 '굽다'라는 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군'이라는 낱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풀이로 나와 있다.
·군; 쓸데없는. '가외'의 뜻을 나타내는 말.
따라서, '군말'은 '쓸데없는 말'의 뜻이고, '군식구'는 '가외(본래 있어야 할 것이 아닌) 식구'의
뜻이다.
'군것질', '군더더기', '군말', '군소리', '군손질', '군일', '군짓', '군침' 등에서의
'군'이 모두 같은 뜻을 안고 있다. 안 써도 좋은 데에 쓰는 돈은 '군돈'이고, 자고 일어나서 윗머리만 대강 빗는 빗질은 '군빗질'인데, 역시
같은 경우이다.
군밤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가을날, 조선의 끝임금인 순종이 홀로 창경궁 뒤 정원인 비원을 거닐고 있었다. 때는 그 아버지
고종 임금이 세상을 뜬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순종 임금은 상복을 입고 있던 터였다.
순종 임금은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알밤 한 톨을 주워 들고 손바닥에 받쳐들더니 흐느껴 울었다.
고종 임금이 살았을 때는 고종과 순종은 자주 비원을 거닐었었다. 알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고종은
이를 주워다가 화로에 구워 재를 털고 아들 순종에게 먹이곤 했었다. 순종이 자란 후에는 비원에서 주운 밤을 손수 구워다가 임금인 아버지 고종에게
바치길 일삼았는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아들 순종이 갖다 주는 '군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순종은 고종이 돌아간 후에는 그 영전에 다른 과일과 함께 군밤을 받쳐 올렸다고 한다. 제사 때 꼭
군밤이 놓이지 않으면 제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순종이 비원에서 알밤 한 톨을 주워 들고 흐느껴 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올벼와
올고구마
'올'은 열매 익은 정도가
빠름을 나타내는 말
올감자, 올오이, 올벼, 올밤
등이 그 보기
' 참깨 들깨 거둔 후에
중오려 타작하고,
담뱃줄 녹두 말을
아쉬워 작전하랴?
장 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닛지 마소.
북어쾌 젓조기로
츄셕 명일 쇠어 보세.
신도주 오려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션산에 졔물하고
니웃 집 나눠 먹세. '
이 노래는 〈농가월령가〉8월령에 나오는 대목을 조금 고쳐 옮긴 것이다.
이 노래를 지금의 말로 쉽게 풀어 보면 이러하다.
참깨 들깨 거둔 후에
올벼 일찍 타작하고,
담배 몇 잎, 녹두 몇 말을
아쉽지만 팔아야지?
장 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잊지 마소.
북어 한 쾌 젓조기로
추석 명절 쇠어 보세.
햅쌀 술 올벼 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로 바치고
이웃 집이랑 나눠 먹세.
이 노래에서 참깨와 들깨를 거둔 후에 '중오려'를 타작한다고 했다.
'중오려'는 벼의 일종으로, '꽤 일찍 익는 벼'를 뜻한다. 여기서의 '중'은 한자의 '중(中)'이고
'오려'는 '올벼'가 변한 말이다.
올벼>올여>오려
이 노래 속엔 또 '오려송편'이란 말도 있다. 이것은 '일찍 익는 올벼로 빚은 송편'을 뜻한다. 역시
'올벼'를 '오려'라 했다.
우리말에 열매 같은 것이 익는 정도가 이르게 됨을 나타내는 말로 '올'이라는 앞가지(접두사)가 있다.
그래서, '올밤'이라고 하면 이르게 익는 밤을 뜻하고, '올콩'이라고 하면 이르게 익는 콩을 뜻하며,
'올팥'이라고 하면 '이르게 익은 팥'을 말한다. '올무'라는 말은 '일찍 자란 무'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올벼'라고 하면 이르게 익는 벼를 뜻한다. 이 '올벼'의 상대되는 말이 '늦벼'로서 늦게
익는 벼를 뜻하고 있다.
'올되다'라는 말이 있다.
올되다= ①(열매가) 제철보다 일찍 익다.
②나이에 비하여 철이 일찍 들다.
"올해는 날씨가 늘 좋아서였는지 열매들이 올되어 나오고 있어."
열매들이 올되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열매들이 모두 일찍 익어 시중에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의 '올'은 '일찍'이라는 말로 옮겨 풀어도 그렇게 괜찮을 것이다.
"그 아이는 올돼서 벌써 부모님께 효도할 줄을 아는구먼."
여기서 '올돼'라는 말은 '일찍 철이 들어'란 듯이 된다. 역시 '올'을 '일찍'이라고 풀어도 그리 큰
무리가 없는 말이다.
'올되다'란 말은 '일되다'나 '오되다'란 말로 쓰기도 한다. 즉, '올돼서' 대신 '일돼서'나
'오돼서'로 쓸 수도 있다.
'올되다'의 반대되는 말은 '늦되다'이다.
"애가 늦돼서(발달 과정이 늦어서) 아직 말을 잘 하지 못해."
"올해는 열매들이 모두 늦되서(늦게 익어서) 아직 참외가 시중에 안 나왔네."
'올'과 '늦'이 서로 상대적 의미로 쓰이는 예는 많다.
·
올감자-늦감자
·올밤-늦밤
·올콩-늦콩
·올벼-늦벼
'올밤'이나 '올벼' 같은 말은 옛날부터 씌어 왔던 말이다.
·'올밤 벙근 가지'(올밤이 벌어진 가지)
·'올벼 고개 속고 열무수 살지거다'(올벼는 고개 수그리고 열무는 살이 쪘다)
그런데, '올'이 '올다'는 말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옛말의 뜻으로는 '올다'가 '오르다'나
'온전하다'의 뜻으로만 나오는데, 이 말은 '이른'의 뜻인 '올'과는 뜻이 사뭇 다르다.
'금년'이라는 뜻의 '올해'라는 말에서 이 '올'이라는 말이 '이른'의 뜻인 '올'과 친척말이 되지
않나 싶다.
'오라비'란 말은 '오빠'를 높여 부르는 말인데, 이 말은 '올'과 '아비'가 합쳐진 '올아비'에서
나온 것이다.
올+아비=올아비
올아비>오라비(오래비)
'압'은 원래 '남자'를 뜻한 말일 듯한데, 이 말에서 '아비'가 나오고 '아버지'가
나왔다.
그렇다면 '오라비(올아비)'는 '아버지가 될 사람'의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