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지방의 코리날도(Corinaldo)에서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지 고레티(Luigi Goretti)와 어머니 아순타 카를리니(Assunta Carlini)는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충실한 신앙생활로 인도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총명하며 예의 바른 마리아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마리에타(Marietta,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바다의 별 Maris Stella’의 축약형)로 불렸고,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1896년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져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농장마저 포기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팔리아노(Paliano) 인근의 콜레 지안투르코(Colle Gianturco)로, 1899년에는 오늘날의 라티나(Latina)와 네투노(Nettuno) 인근 레 페르리에레(Le Ferriere)로 이사 가서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며 루이지 고레티가 그만 건강을 잃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농장주인은 그가 하던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을 구했는데, 새로 농장에 온 사람은 조반니 세레넬리(Giovanni Serenelli)로 그에게는 17살 된 알레산드로 세레넬리(Alessandro Serenelli)라는 아들이 있었다. 1900년 마리아가 10살 때 병약한 아버지는 말라리아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린 나이지만 마리아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동생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편이었던 마리아는 첫영성체를 할 나이가 되었으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그녀는 어머니가 알려 주는 바를 암송하고, 어머니 친구의 도움을 받고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안 본당신부도 자주 그녀를 찾아 교리를 가르쳐줬다. 마침내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5월 29일 감격스러운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미사 중에 본당신부의 강론을 들으면서, 그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늘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그해 7월 5일 오후,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농장 일을 하며 이웃해 살던 조반니 세레넬리 가족과 그녀의 어머니도 모두 일을 나간 뒤였다. 그때 일하러 가던 중 핑계를 대고 돌아온 18살의 알레산드로는 자신의 셔츠를 기워 달라며 마리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베란다에 앉아 바느질하던 어린 마리아를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가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칼로 위협했다. 알레산드로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리아를 강제로 강간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큰소리로 “안 돼! 알레산드로. 이것은 하느님께 대죄를 짓는 거야!”라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가 끝까지 버티자 알레산드로는 이성을 잃고 날카로운 칼로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그녀의 몸에는 모두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뒤늦게 돌아온 가족들이 피범벅이 된 그녀를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다.
상처가 너무 심해 마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으나 의사들도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병원으로 찾아온 본당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마지막 영성체를 했다. 본당신부는 성체를 영해 주면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처럼, 너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든 알레산드로를 진심으로 용서해주겠느냐?”라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할 겁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해주실 거예요.” 이렇게 정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7월 6일 오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유해는 로마 남부 네투노에 있는 예수 고난회의 은총의 성모와 성녀 마리아 고레티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녀의 영웅적 덕행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순교자다운 죽음은 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그녀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한편 알레산드로는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종신형 대신 30년의 노동형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전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밤 한 어린 소녀가 머리에 화관을 쓰고 하얀 베일을 휘감은 채 손에 백합을 들고 나타난 것을 보았다. 자신이 참혹하게 죽인 소녀가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와 백합꽃을 전해 주는 꿈을 꾼 뒤에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며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은 형기를 모범적으로 마치고 출옥한 알레산드로는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어머니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어머니 역시 이미 자신의 딸이 용서했다며 그를 껴안고 기꺼이 용서해주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47년 4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는데, 그때 알레산드로는 시복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어린아이를 성인품에 올리는 문제로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교황청 시성성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수호한 그녀의 영웅적 행동을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0년 6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의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은총과 그 은총에 대한 굳은 결의의 응답에 의지하여 목숨을 바치고 동정의 영광을 잃지 않았다.”라며 그녀를 일컬어 ‘20세기의 성녀 아녜스(Agnes)’라고 칭송했다. 이 시성식 미사에는 성녀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회개한 후 새사람이 된 알레산드로도 참석했다. 알레산드로는 후에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평수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회개와 봉사의 삶을 살았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모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히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성도덕이 문란해지는 현대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6일 목록에서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집안일을 돕던 동정 순교자 성녀 마리아 고레티가 열두 살 때 순결을 지키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