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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창 22:7-14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7-14 / 올라가는 도중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여쭈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지금 손에 희생제물을 잡을 칼하고 불씨만 들고 가시지 않아요? 그런데 제물로 바칠 짐승은 어디 있지요?'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응, 걱정 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런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계속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9) 이제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곳까지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거기에다 제단을 쌓아 올리고 그 제단 위에 장작을 포개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삭을 꽁꽁 묶어서는 제단 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리고 칼을 들어 아들을 제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 11)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왔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는 것이었다. `예, 듣고 있습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12) `멈추어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내가 분명히 알았다. 네가 그렇게도 아끼는 외아들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바치는 걸 보니 네가 얼마만큼 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네가 얼마나 나를 신뢰하고 섬기는지 내가 잘 알게 되었다.' 13) 아브라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그런데 숫양 한 마리가 가시덤불에 뿔이 걸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브라함은 그곳으로 가서 숫양을 끌고 와서는 이삭 대신에 그 숫양을 번제물로 잡아 드렸다. 14)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다'는 뜻으로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산에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주신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삭을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고 맹세하십니다.
아들을 잡으려 함(7-10)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이삭은 궁금한 점을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대답은 아브라함이 이번 일을 언약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결심을 하였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죽인 아들을 도로 살려내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히 11:19).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주실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믿음 안에서 결박한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심적으로는 죽인 것과 동등합니다.
하나님의 인정(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은 사건의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또 다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이 이번 시험에서 통과한 것을 인정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독자 이삭을 바친 것과 동일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행위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여기서 경외(히. 야레)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느꼈다는 뜻이라기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낌으로써 시험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13-14) 아브라함은 즉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습니다. 이는 자신의 말(8)대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였고, 그 숫양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대신하여라는 단어는 대속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을 번제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믿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대속의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을 준비하신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예루살렘에서 준비하십니다(마 20:28). 이 산이 다윗 이후에 예루살렘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의도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적용: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쳐야 하는 큰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시험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어떤 것을 요구하실 때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유익하고 온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요구하실지라도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설 교 >
여호와 이레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10여년 쓰고 폐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폐차장에서 운전석 밑에 있는 뭔가를 잡아당기니 트렁크가 열리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10여년을 타면서 그런 기능이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섬겨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하나님에 관해 알게 되는 진리도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의 나이를 20대로 보는 사람도 있고 10대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37세 미만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20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이도 120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20세가 되어서도 하나님에 대해 계속해서 배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알아야 할 진리가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한계도 없고 지루함도 없습니다. 신학교 도서관에 가보면 하나님에 관한 수백만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하나님에 관한 책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무한하고 끝도 없이 계속 알아가야 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70세에 하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50여년을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경험했지만 12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배워야 할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우는 것에는 나이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년기가 되어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교훈은 매우 기본적이고 단순한 진리였습니다. 기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고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세계적인 골프선수들도 연습할 때는 항상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자신의 기본자세에 잘못된 것이 있는지 점검해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장 단순하면서 기본적인 신앙의 진리로 항상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둘째, 아브라함이 배운 진리는 무엇을 예표하는 것인가? 셋째,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배움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이 세 가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Ⅰ.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교훈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진리는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인데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붙어서 합성된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치료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여호와 라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여호와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이레’는 무슨 뜻이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신다’(God sees)는 의미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God provides)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교훈은 하나님이 보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보고 계신다는 진리를 아브라함보다 먼저 깨달은 여자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종인 하갈입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사실을 알고 자기의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방황하다가 샘물에서 물을 먹고 주저앉아 있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라에게로 돌아가서 복종하라는 말씀을 듣고 하갈은 돌아가서 이스마엘이 장성할 때까지 평안하게 잘 지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하갈이 방황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낳고 기를 것인가 염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로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샘물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이고 ‘라해’는 살아계신 분이란 뜻이고 ‘로이’는 나를 감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브엘라해로이’라고 하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우물’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의 여종 하갈보다도 이 진리를 늦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두 가지를 보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럼에도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는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마음이 있는지를 다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사람은 얼굴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왕상 8:39).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드린 기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하나님이 다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정직해야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필요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대신해서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시더라도 기도로 구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뭐가 부족하십니까? 건강이 필요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돈이 필요하신 분도 계실 것이며 명예가 필요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돈도 명예도 다 싫고 마음의 평강이 필요하다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공급해주실 능력이 없으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사람은 저런 필요가 있구나”하면서 안타까워만 한다면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실뿐만 아니라 친히 공급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배운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보실 뿐만 아니라 친히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3).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수양을 공급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9~10). 저는 ‘잡는다’는 동사가 개나 소를 잡을 때만 쓰는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폼으로 찌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이삭을 죽이려는데 하나님의 공급이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1).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찌르려고 하는 순간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불러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수양이 수풀에 걸려있어서 이삭 대신 단 위에 올려놓고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급의 때를 사람이 미리 알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급의 때를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2년 뒤에 100억짜리 로또복권에 당선되게 해주시겠다고 가르쳐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때부터 은행에서 빌려다가 받기도 전에 100억을 다 쓰고 오히려 빚을 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급의 때를 알려주시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공급의 때를 맞이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1). 하나님은 우리의 해가 되시고 방패가 되십니다. 그리고 정직히 행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보시며 공급해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가 있으시면 하나님의 공급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Ⅱ. ‘여호와 이레’는 무엇을 예표하는 것인가?
먼저 ‘모리아 산’은 무엇을 예표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구절을 살펴봐야 합니다.
첫 번째 구절은 역대상 21장 25절에서 26절입니다. “그 기지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대상 21:25~26).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여호와께서 번제단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역병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역병을 내린 이유는 다윗이 사단의 격동을 받아서 이스라엘 인구를 계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이 인구 계수를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구를 계수하다 보면 숫자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사단의 격동을 받아 인구 계수를 한 죗값으로 7만 명이 역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잘못은 제가 했는데 왜 백성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냐고 묻자 하나님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에게 금 육백 세겔을 주고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속죄의 장소(place of atonement)입니다.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바로 모리아 산입니다.
두 번째 구절은 역대하 3장 1절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 3:1).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리아 산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모리아 산은 속죄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집이 세워진 장소(place of Lord’s house)인 것입니다.
세 번째 구절은 요한복음 19장 17~18절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 19:17~18). 예수님이 가운데 못 박히시고 두 강도가 양쪽에 못 박혔는데 여기가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이며 모리아 산입니다. 모리아 산은 그렇게 높은 산이 아니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이 보기에 꼭 해골처럼 지형이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덕을 예수님 당시에는 해골을 의미하는 골고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 안에 있고 골고다 언덕은 성 밖에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골고다 언덕은 불과 300m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성벽을 쌓기 전에는 한 장소였습니다. 성벽을 쌓으니까 성전은 성 안이 되고 골고다 언덕은 성 밖에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곧 골고다 언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죗값을 위해서 속죄하신 속죄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리아 산의 제사’는 무엇을 예표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 네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삭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어떻게 바칠 수 있었습니까? 제자 중 한 목사가 목회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울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목사가 가서 아무리 위로를 해도 당신은 아들이 안 죽어봐서 모른다며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위로해도 안 되니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이제 그만 우십시오. 집사님은 둘 중에 하나가 죽었지만 하나님은 집사님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셨는데 하나님의 심정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그제야 울음을 그치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삭 외에도 육신의 자손이 많았습니다. 이스마엘도 있었고 사라가 죽은 뒤 그두라에게서 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자손은 이삭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기꺼이 바쳤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면 당신의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주셨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아브라함이 이삭을 기꺼이 드린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삭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삭의 나이는 약 20세이고 아브라함은 약 120세이니 아버지가 묶을 때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아버지가 나무를 벌려놓고 그 위로 올라가라면 올라가고 묶으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린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8).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된 줄로 믿습니다. 이삭의 순종은 예수님의 순종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서 택하신 백성의 죗값을 대신 갚으시고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8).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장 김용기 장로님은 어렸을 때 잘못해서 어머니가 불러다가 종아리를 걷으라고 한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종아리를 걷으니까 어머니가 눈을 감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았고 회초리 소리가 크게 나는데 이상하게 자기 종아리는 안 아픈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자신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린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자신을 대신 때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김용기 장로님은 어머니 앞에 엎드려서 잘못을 빌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죽어야 마땅한 자리에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 걸어가는데 삼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다 수양을 공급받아 이삭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한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이삭이 살아난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인간의 필요를 보시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공급해주심으로 속죄를 성취하신 복음의 진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대신 죽은 수양은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완전히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영안이 전혀 떠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리아 산에서와 골고다 언덕에서의 복음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Ⅲ. 아브라함은 어떻게 모리아 산까지 나아가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아브라함이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구원은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듣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해줍니다. 요즘 머리도 좋고 생기기도 잘 생긴 사람들이 대학도 좋은 곳을 나와서 온통 잘못된 것을 배웁니다. 대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서 매일 ‘주사파’ 사상을 배워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혼자 믿고 끝나면 그나마 괜찮지만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자기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학교도 좋은 곳을 나와서 공부도 잘하는 학생들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 잘못된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엇을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공산주의 사상을 계속 들으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밝은 노래를 불러야 됩니다. 슬픈 노래를 자꾸 부르면 인생이 슬프게 흘러갑니다. 옛날에 윤심덕이라는 여자가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배에서 떨어져 죽은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 그대로 자신을 위해서 친히 어린 양을 준비하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결국 말씀대로 친히 수양을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한 대속제물 되심을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 받고 의인이 되어 죽어도 천국에 가고 죽은 후에 생명의 부활을 해서 아름답고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생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여호와 이레’의 진리를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다 아시고 때가 되면 다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