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_충북 보은을 다녀오다
221121. 송혜영
토요일 이른 아침 6시 반에 집을 나선다. 오늘의 목적지는 충청북도 보은이다. 결초보은의 '보은'과 같은 뜻인가. 들어서나 알던 그 곳에 생전 처음으로 가 본다. 남편의 대학 친구가 부모님의 고향인 보은에 자리를 잡은지 1년 반이 되었고 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으니 이번에 한 번 놀러오라는 제안을 받은 터라 세 집이 모이기로 했다. 이왕 가는 것 일찍 나서서 주변의 명소에 들르는 게 좋겠다. 블로그를 뒤적이던 남편은 말티재 전망대로 네비를 맞춘다. 고속도로까지 올리는데 막히지 않은 것에 기뻐하며 휴게소에서 식사도 하고 여유를 부리며 4시간 정도 걸려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말티고개는 조선시대에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이 곳을 지나던 중 고개가 너무 험준하여 어연에서 내려 말로 갈아 탄 곳이라는 이야기에서 유례되었다고 한다. 빙글빙글 데크를 돌아 전망대에 오르는 길에 아주머니 한 분이 작년에 왔을 때는 여기 단풍이 환상적이었는데 이번 해는 늦었네 하신다. 11월 중순은 단풍구경하기엔 확실히 늦었다. 그런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속리산의 겹겹이 웅장한 산세와 그 안에 쏘옥 담긴 듯한 12굽이 꼬불길의 풍경은 그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전망대의 끝에는 한 4m 정도 바닥에 지지대도 없이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난간이 있는데 아이들이 흔들린다 하면서도 겁도 없이 왔다 갔다 한다.
전망대 오가는 길에 눈에 띄는 것으로 보은탄생 600주년 기념비가 있다. 고려시대까지 이 곳은 보령으로 불려왔으나 조선 3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된 이후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심신을 다스리고자 속리산 법주사에 와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돌아가는 길에 지명을 보은으로 고쳤다고 한다(1416년). 이 '은혜를 갚는 땅'은 지난 2016년에 지명 탄생 600주년을 맞았고 보은탄생 1천년이 되는 해에 열어보도록 타임캡슐을 조성해 놓았다.
전망대 까페에서 대추빵과 대추롤케이크를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먹는데 서은이가 비치된 책자를 유심히 살피는 것을 보고 그러셨는지, 까페 주인장께서 메모지와 스티커가 든 기념품 하나를 가지고 나오셨다. 둘이 사이좋게 쓰라며 주시는데 정이품송 스티커도 있고 디자인이 꽤 귀엽다. 이런 게 꼬마들에겐 행복이고 재미 아니겠는가. 정말 사이좋게 소중히 나누며 즐거워한다.
속리산 국립공원 초입에 정이품송이 있다. 도로에서도 보이지만 내려서 나무를 따라 조성해 놓은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600살 정도 되는 이 나무는 세조가 요양하러 속리산을 갈 때 임금이 탄 가마가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리더니 돌아가는 길에는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다. 그래서 세조임금이 지금의 장관급인 정이품의 품계를 내려주었다고.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나무는 키가 15m로 우뚝 솟아있고 가지를 뻗은 모양새도 준수하여 정이품의 기품을 갖추었다. 남편이 중학생 때 수학여행을 와서 봤을 때만 해도 가지가 뻗은 모양이 원뿔형으로 좌우가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3년 강풍과 2004년 폭설로 가지들이 피해를 입어 한 쪽 날개를 접은 듯한 모양이다.
어떤 것은 원형 그대로 오래 오래 두고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얼마 전에 기독교 문화유산 시리즈인 <전주 비빔밥과 성자 이야기>를 읽는데 백 년 전에 전주선교를 준비하러 간 정해원과 구도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드디어 찾은 감동을 나누며 답사에 동행했던 두 장로님이 교회에서 이 땅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만들면 좋겠다는데 나도 적극 동의하며 은송리에 가서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장의 말미에 덧붙인 '뒷이야기'에는 옛 선교사 사택이 2004년에 허물어 없어졌다고 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그 가치를 모르는 새 없어진 것도 아니고 알고 애쓰던 사이 일이 그리 되어서 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와 의미를 담은 나무이든 건물이든 어떤 것이나 마음처럼 모두가 잘 남아 있기는 힘든 것 같다.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도 아래 돌만 남아 그 흔적을 그려볼 뿐이지 않은가. 서울의 5대 궁궐이 그러하고 경희궁은 정말 몇 개의 건물만 겨우 정비하여 한 때 왕가가 살았던 궁궐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건재하지만 노쇠한 정이품송에 대한 응원의 마음을 지닌 채 법주사로 향했다. 나는 법주사가 그렇게 유명한 사찰인지 몰랐다. 그저 우리나라의 절은 산 속 아름답고 고요한 정취 속에 있다는 것. 오늘은 그 곳이 속리산 자락에 있어 더 기대된다는 정도로 나선 길이다. 주차하고 입구까지는 사람들이 붐비는 국립공원이나 등산로에서 볼 수 있듯 각종 먹거리와 특산물 장터가 즐비하다. 딸~ 하고 불러 뻥튀기 하나씩을 쥐어주는 인심 좋고 수완 좋은 아주머니 덕에 아이들이 닭다리 만들어 뜯어먹으며 신났고, 법주사 매표소부터는 속리산의 깃대종*이라는 하늘다람쥐 흉내를 내며 훨훨 날아 들어갔다.
단풍은 이미 졌고 발 밑의 낙엽도 하도 밟고 다녀서 가루들이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스락거리고 우리를 둘러싼 나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대부분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그 끝이 보일 정도로 길쭉길쭉하다. 숲 속을 거닐면 나도 키 큰 나무가 된다 했나 숲이 주는 맑은 기운에 이미 보은에 와서 누릴 것은 다 누린 듯 하다. 금강문 오른편으로 세조길 산책로가 있는데 속리산 등산로로 연결된다 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 길까지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법주사에 팔상전이 유명하다지. 금강문 너머로 엄청 키가 큰 금동미륵보살이 눈을 사로잡는데 남편은 내심 발걸음이 바쁘더니 팔상전 앞에서 멈춰선다. 나도 이게 도대체 뭐길래 하는 마음으로 다가선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5층 목조탑이다. 법주사를 처음 만들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것을 선조 38년(1605)부터 인조 4년(1626)에 걸쳐 벽암 대사가 주관하여 다시 세웠다.' 와우! 신라 성덕왕(720년)때 조성되었다니 돌로 된 이 기단은 1500살이란 말인가? 탑신도 600여년 전에 지은 모습으로 지금 남아있는 거란 말이지?
실내로 들어서니 팔상도가 붙여진 사각 기둥은 바깥의 나무들처럼 곧게 뻗어 5층까지 연결된다. 탑을 지지하기 위해 층별로 나무를 조립하듯 연결하였고 꽤 화려했을 것 같은 오방색의 무늬들이 빛이 바랜 그대로 옅게 보인다. 사방을 돌고 나와 다시 탑을 바라본다. 5층이라 하지만 각 층이 넓어서 아주 안정되고 진중한 느낌이다.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탑이라니 정말 대견하지 않은가. 잘 살아남았다고 마음으로 쓰다듬으며 사방으로 눈을 돌리는데 또 같탄할 일이 많다. 쌍사자석등, 석연지를 비롯하여 국보 3점, 보물 13점 등이 있고 2018년 6월에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다.
보은의 매력에 빠져 즐거운 마음으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시골의 전원주택으로 알고는 왔지만 생각보다 더 잘 가꿔진 모습에 탄성이 나온다. 40대 우리네 감성을 넘어서는 깊이다. 올해 초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지만 오랜 시간 돌보신 흔적들로 가득한 집. 마당에는 장독대가 서른개 정도 늘어서 있고 곳곳에 잘 가꿔진 소나무, 꽃나무와 잔디가 둘러싸 있다. 차고에는 집과 정원을 손보는 연장들로 가득하고 그 옆에는 겨울 내내 때어도 충분할 듯한 장작이 높고 단정하게 쌓여 있다.
앞마당 텐트와 의자를 아지트로 아이들은 신났다. 스카이 콩콩을 돌아가며 타더니 윗마당에서 축구를 한다고 난리다. 축구공이 다섯개쯤 되는데 공을 차다 밖으로 나가면 동네 어른들이 주워다 이 집으로 가져다 주신단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도 마당엔 모닥불로 온기가 있어 어른도 아이도 시간을 모르고 노는데 중앙의 종에 눈이 간 가은이가 줄을 당겨 땡땡 소리를 낸다. 가은아~ 저녁이라 치면 안 돼 만류하는데 안주인이 바로 괜찮다고, 치고 싶은 데로 치라고 한다.
30여 가구가 웅기중기 모인 이 작은 마을에 아이가 있는 집은 중3부터 4살까지 삼남매를 키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자기 다음으로 가장 젊은 분이 50대 후반이고 아이들은 장성하여 도시로 나갔으니 말 다 했다. 마을의 어른들은 이 집에 김치며 장아찌며 반찬도 가져다 주시고 사람들 오는 것도 좋아들 하신단다.
다음날 아침, 아빠 셋, 아이들 다섯이 개울에 물고기를 잡는다며 통발을 설치할 겸 마을 산책을 나서는데 마을 어른 한 분이 지나가시며 '와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이 나는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 '생명을, 생기를 이어줘서 고마워' 이 소리로 들렸다.
첫댓글 하아, 제가 살고 싶은 모습이 이 글에 있네요.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