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26/아름다운 우애]“형님 먼저” “아우 먼저”
고향동네에 살면서 내심 가장 부러운 ‘사람관계’가 있다. 바로 형제간의 우애友愛가 그것이다. 우리 동네 이장님, 1955년생 양띠, 서울시청에서 정년퇴직한 후 곧바로 어머니 혼자 계시는 고향집에 정착했다. 장남으로, 아래로 남동생 셋과 여동생 둘이 있다. 이 양반, 퇴직 전부터 귀향준비를 착착 했던 모양이다. 들판 논 1200평에 복숭아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농사일이라고 객지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했는데, 얼마나 했었겠는가? 그런데 너무 적응을 잘하고 있다. 연전에는 마을행정을 책임지는 이장里長이 되었다. 요즘세상엔 시대착오적인 것같아도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줘도 부족할 만큼 마을을 위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헌신하고 있다. 면이나 군, 군의회 등 어디를 찔러야 마을의 현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요령’이라면 요령을 알고 있다고나 할까. 그것은 ‘동네 일’을 앞장서 해결하려는 안테나를 세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이장 얘기가 아니고, 이장 형제들의 우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바로 밑 남동생(59년생)은 전주에서 슈퍼마켓을 크게 하는데, 철따라 형이 생산하는 농산물(복숭아, 매실, 대봉시 등)을 팔아주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남동생(61년생)은 파출소장 출신의 경찰인데, 퇴직한 후 백화점 관리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셋째 동생은 현직 경찰, 미인들인 여동생 둘은 제법 재력도 있는 모양이다. 이장의 모친은 90이 넘었어도 여전히 곱고 음전하시기가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이다. 형수야 큰며느리이고 식구이니까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와 일손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 서울에서 동생들이 수시로 내려와 자원봉사를 하고 간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동생들도 다 가정을 꾸려 며느리, 손자까지 있는데, 2박3일씩, 어느 때에는 휴가도 내 형님의 농장일을 도운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슈퍼하는 동생도 틈만 나면 내려와 어머니와 형님을 위해 점심을 사는데, 동네에서 어울리는 형의 친구, 후배들에게 항상 같이 가자고 한다. 아름다운 우애이다. 볼 때마다 감동을 한다. 장남인 큰형이 모친과 함께 고향을 지키고 있으니, 일년에 수시로 대가족이 모여 마당에서 파티를 연다. 김장을 같이 한다. 이런 흐뭇한 모임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흔치 않은 게 ‘망할 놈의 세태世態’가 아니던가.
우리 세대라면 대개 5남매 이상은 될 터여서, 나로선 위로 형 셋과 아래로 여동생 셋, 그러니까 4남 3녀,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닐 터. 우리집도 10여년 전에는 양친이 다 계셨으므로 너무나 당연한 고향 풍경이었다. 허나, 이제는 영-영 아니다. 나는 속절없이 그런 모임이 한없이 그립고 재연再演이 되었으면 하는 가냘픈 소망을 갖고 있지만, 인력으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장댁 모임이나 농번기 자원봉사를 바라보면서 항상 부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발적인 헌신들이 그냥 생겼겠는가. 이장의 부친은 친 남동생과 함께 한 동네에서 평생을 사셨다. 우직한 동생은 분가를 한 후에도 형님집 일이 끝난 후에야 당신네 집 일을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말하자면 모든 농사일이 “형님네 먼저, 우리집 일은 그 다음”이었다는 것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익숙한 일이었다.
왕년에 농심 라면 선전을 하면서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면서 서로 먼저 드시라고 양보하는 광고가 있었다. 기억하시리라. 또한 초등학교 방학책이었던가? 달 밑 아래 형님네 논 노적가리에 나락 한 다발이라도 더 갖다놓으려는 동생과 형이 마주쳤다는 미담을 기억하시리라. 이장 부친의 형제애가 딱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로부터 찬사가 끊어지지 않을 수밖에. 부모님 말씀도 아니고 형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위하면서 한 동네에서 평생 고락을 같이 하는 형제가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 동네 한암양반과 군곡양반 형제 이야기이다. 예산 봉수산의 의형제마을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고도 한다. 아버지와 숙부의 우애를 보고 어릴 적부터 배우고 몸에 익힌 이장님 형제들이니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동생들의 안부전화에 이장은 힘들어도 힘들지도 모를 것같다. 쌀방아 찧었다고 10키로, 20키로씩 다섯 동생에게 택배로 보내주고, 떨어지면 언제나 전화하라는 큰형, 큰오라버니가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더구나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고 있으니, 동생들 입장에서는 최고의 버팀목이 아니겠는가.
아, 나도 지난해 바로 위 형님이 내려와 위로저녁을 사주셨다. 동생과 수시로 어울리며 사는 선배와 친구, 후배들을 다 부르라는데 살풋 감동했었다. 누가 보아도 이처럼 아름다운 회식이 어디 있을까. 기십만원이 드는 것도 아니고, 동생과 동고동락하는 지인들과 함께 모처럼 시간내어 밥 한 끼. 역시 우리나라는, 아니 농촌은 언제까지나 정情이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한다. 어젯밤에도 슈퍼하는 동생의 전화다. “형님, 복숭아 다 팔렸으니, 상품 있으니 갖다 놓으세요” “동생, 고마워” 역쉬다! 최고다! 이장님네 형제우애가 백 년, 천 년 지속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나는 책 한 권과 한 명의 친구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다. 방송인 이기환 지음 "우리 큰형 이야기"(절판)가 그것인데, 대가족 장남으로서 역할, 책임과 의무 등에 대해 일상에서 벌어지는 디테일한 장면들이 기억된다. "장남이 바로서야 가정이 바로선다"는 진리일 터. 대가족의 화합과 우애는 어찌 됐든 '큰아들의 몫'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사형제의 장남인 나의 친구는 방학 때마다 동생들과 중국 오지여행을 보름 넘게 다닌 게 열 손가락이 다 돼간다는 말을 듣고 2008년에 썼던 편지이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으리라. 알록달록우리소리누리집 : [은행잎 편지 17신]형제우애의 본보기인 친구에게 (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