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첫 토요일 성모 신심) 하느님을 만나는 곳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 처음 갔을 때 그 규모와 현란하다고 느낄 정도의 성당 내부 장식에 압도되었다. 여기저기 둘러 보고 사진 찍고 그러고 있는데 저 앞 제대에서 미사가 봉헌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사가 봉헌되는 곳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성당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게 영 이상하고 죄스럽기까지 했다. 그곳은 성당이 아니라 관광지가 돼버렸다.
다윗이 자신은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 즉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둔 상자가 아직도 천막에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2사무 7,2) 그런 다윗이 하느님께 기특해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집은 궁궐 같은 성전이 아니라 온 세상 우주 만물이고 또 나와 우리 삶의 자리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1-2) 성당은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 특히 나와 내 삶이 있는 곳에 더 잘, 더 생생하게 살아 계신다. 나의 관심과 걱정, 바람과 고통, 기쁨과 슬픔이 있는 나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계신다. 그래서 실제로 성당보다는 내 방이 기도하기에 가장 안전하고 적절한 장소다. 방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내 모든 삶이 시작되는 내 마음, 내 영이 하느님을 만나는 진짜 성전이다.
외람되지만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 집은 천막이 어울린다.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고 누구든지 와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에 하느님은 계시기를 원하신다. 존경하는 한 수녀님은 평생 한 가지 꿈이 있었다. 휴전선 근처에 큰 천막이라도 치고 거기서 사람들이 누구나 와서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분 고향은 평양이고 남북이 갈라지기 전에 평양 교구 내 수녀회에 입회했다. 하지만 그런 꿈과는 달리 휴전선 근처 땅에 천막 대신 큰 집과 농장이 들어섰다. 그런데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에서 남북 화해를 위해서 매일 밤 9시에 모든 교우가 기도하자고 권고한다. 그 수녀님보다 하느님이 화해와 평화를 얼마나 더 원하시는지 알겠다. 하느님은 그의 꿈을 이렇게 이루어주셨다.
이제 성모님이 그 계약의 궤다. 그 상자에 하느님의 계명이 있었던 거처럼 성모님 안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 예수님이 계셨다. 지금도 성모님 계신 곳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신다. 아드님이 없는 성모님은 성모님이 아니다. 성모님 인생에서 예수님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에게 베드로 대성전이나 명동 성당보다 차원이 다른 더 큰 의미였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런데 그 성전이 파괴됐다. 베드로 대성전이나 명동 성당도 그럴 수 있다. 성당은 파괴될 수 있어도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내 안에 계시며 내가 죽어도 거기에 계신다. 내가 믿지 않아도 하느님은 살아 계신다. 성모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예수님께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 삶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 된다. 성모님께 청하고 바라고 미워하고 매달리는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다.
예수님, 제가 아니라 주님이 저와 가까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의 어머니를 저희 어머니가 되게 하신 이유를 아주 잘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쩐지 몰라도 저는 주님이 주신 성모님을 통해서 주님께 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방이 성전인 것은 이 이콘이 제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