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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미렉스 ( 사료용 유기태 미네랄 ) 원문보기 글쓴이: 새미숲
머릿말
임복은 나주임씨 16세이다
1521년 태어나서 1575년에 돌아가신 임진왜란(1592) 전(前)세대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맞아 셰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공적을
이루신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거북선이라 칭하는 철갑선도 중요한 승전요인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은 누가 언제 설계하고 제작하여 임진왜란에 전함으로 사용되었을까?
21세기르 살고 있는 우리는 거북선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나 체암 나대용 공을 떠올린다
임 복 ( 林 復 )
임진왜란이나 거북선, 충무공에 관련된 여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인물
그는 ..
충무공 이순신 , 체암 나대용 수은 강항선생 보다 한세대 전 인물로 나주 회진현 사람이다
수은(睡隐). 강항이 1605년 경에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임복과 거북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강항 (姜沆)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었고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과 일본의 여러 상황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겄다
전란으로 많은 국가 공적기록이 소실되어 승정원일기도 인조 부터 고종까지만 존재한다 .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 세대 강항의 당시 기록은 소중한 가치를 발한다
강항선생은 수은집 제4장 풍암 임공행장 에서 임복의 삶과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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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거북선 관련부분은
풍암공 임복은 1574년애 "과선(戈船)을 제조하여 왜란에 대비하자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칭찬하는 비답을 받았다
선조는 비변사가 각도의 수사(水使)로 하여금 그 모습대로 제조를 하여 갑작스런 변란에
대비토록 하였는데 십수년 후 통제사 이순신 등이 이 제도를 사용해 승리를 거두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강항의 기록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임 복의 친동생 임진 또한 임진왜란 직전 세대로
전라 병마수군절도서 ,경상 수군절도사 등 육군과 수군 등에 42년을 봉직한 무관이었다 는 것과
임복이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는 점이다
이 두가지 사실은
임복의 1574 과선(戈船)은 임진왜란 30여년 전부터 왜구와 마주치고 방비한 동생 임진의 수군의 경험도
뒷받침되었을 것이라는 것과 승정원 정자(正字) 로 1년 봉직한 임복이 사후 병조판서 추증된 사살은
1574 과선의 공적을 인정받은 것임을 시사한다.
1574~1605 년 임진왜란 전후의 시대에서는 거북선을 만들어 왜란에 대비케 한 것이
풍암 임복이었슴은 조정이나 민간 모두 아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18년전에 과선의 제도가 조선 수군에서 시행되었고 이 제도로 통제사 이순신등이 많은 승리를 하였다는
강항의 기록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 무렵이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발명된 것일까?
.충무공이 1591년 나대용등에 명하여 거북선을 .제조할 당시에 1574년 임복의 과선은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임복이 조정에 제공한 설계도가 나대용 등이 제조한 거북선과 동일한 것일까?
임복의 1574년 과선과 이순신의 1591년 거북선은 대략 17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현재의 우리는 그 시대의 진실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강항의 기록으로 분명한 것은 1574년 임복이 제시한 과선의 제도가 임진왜란때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과선의 제안자 임복의 동생 임진은 임진왜란 수십년 전 왜구가 남해안을 침략할 당시 남해안 지역의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임복 형님의 과선의 제도가 시행된 후 1587년까지도 평안도수군절도사 ,함경도 수군절도사, 전라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수은집의 기록이 과선과 거북선이 완전히 동일한 것임을 입증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도 분명하다
1591년 거북선을 제조한 나대용은 임 복 보다 35세 후생으로 두분 모두 나주출신이다
기록된 사실은 선조가 어명으로 " 그 모습대로 제조하여 변란에 대비케 하라 " 것이고
통제사 이순신이 이 제도로 많은 승리를 하였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가록과 임복의 행적 등을 근거로
임진왜란때 활약한
거북선의 최초 설계자는 임 복
제작 또는 개량자는 체암 나대용
전함 운용자 는 충무공 이순신
임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1.관련 인물들
이 글을 이해을 돕기 위해 아래 인물들의 생년 사망년도 등을 참조합니다
임붕 1486 ~1553 승정원 좌승지 호남병마절도사 .경주부윤, 광주목사 나주 임씨 15세로 나주임씨 4대지파조가 되는 장수공 임익 정자공임복 절도공 임진 첨지공 임몽의 아비지 강항의 수은집에서는 승지공이라 칭함 |
임복 1521~1676 : 이글의 주인공 : 임붕의 둘째아들 나주회진 출생. 명종 2년 승정원 정자로 복무 과선지제를 상소 수군의 군선으로함 . .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 |
임진 1526 ~1587. : 임붕의 셋째아들 임복의 6세 연하 동생.. 전라병마,수군 절도사, 경상수군절도사.펑안도 ,함경도 병마 수군절도사 1546년부터 1587 전라,경상 평안,함경 벙마절도사 및 제주, 부안부윤 등 62세까지 42년간 재직 이순신, 원균 등의 선임 무관 임진왜란 5년전 사망 시인 백호 임제 의 부친. |
명종 1534~1567 (재위1545~1567) : 12세 즉위. 어머니 문정왕후, 외숙부 윤원형 임복 26세 명종13세 승정원 正字로 만남 |
이순신 1545~1598 충무공 구국의 영웅 |
선조 1552~1608 (재위1567~1608) 임진 왜란을 겪은 군주 호평보다 비펑이 많은 임금. |
나대용 1556~1612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에서 1591년부터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든 인물 임복과 같은 나주 출신으로 임복 보다 35년 후생 |
강 항 1567~1618 임진왜란 의병장이자 학자 . 일본에 성리학을 전함 수은집, 간양록 저서가 있슴 진주강씨 불갑자파 문중에서 매년 9월20일을 강항의 날로 지정 영광군 불갑면 상사화 축제 겸. 강항문화제 문예대전 콘서트등 행사 |
2. 풍암 임공(林公)의 행장(行狀)
(-국역 수은집 저자 강항 제4장:1989년 전라남도 발행 비매품 )
공의 성은 임(林)이요 이름은 복(復)이요 호는 풍암(楓岩) 이니 나주의 회진현 사람이다
나주의 임씨는 고려조부터 유명하였으나 판사재시사 비( 庇)가 직장 영방(永방)을 낳았고 영방이 정용장군 양간을 낳았고
양간이 호군 박을 낳았고 박이 낭장 돈세를 낳았고 돈세가 판도판서 수(秀)를 낳았고 수가행호군 선(宣)을 낳고 선이 탁(卓)을 낳으니 해남감무요 탁이 봉(鳳)을 낳으니 군기 소윤이요 봉이 휘 시소(始巢)를 낳으니 증 통훈대부 군기사정이요 시소가 휘 귀연(貴연)을 낳으니 증 통정대부호조참의요 귀연이 휘 평(枰)을 낳으니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행전러도병마우후이다 평이 휘 붕(鵬)을 낳으니 중종 인종 명종때의 명신이다 일찍 높은 과거급제하여 화려한 관작을 차례로 지냈는데 장신으로 산악처럼 서있어 서반의 관모에 옥흠을 듣고 있는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생김새나 재주가 뛰어난 사람으로 알 정도 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문무를 모두 갖춘 인재라 했는 데 승정원 좌승지로부터 경주부윤과 앙호(兩湖)의 병마절도사로 나아갔으니 2품의 질이다, 그래서 3세 모두 승지 (承旨)이었기 때문에 귀해진 것이다 함풍군 이종의의 따님과 혼인하여 신사 (1521년)년 4럴2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도량과 식견이 보통아이들과 달라 고을 안에 이상이 여겄는데 나이 십여살에 아버지 승지공 (귀래정공)을 따라 북으로 서울의 선생에게 가서 배웠는데 문리를 일찍 통달하고 문장도 잘하였디
열여덟살에 감시의 양시에 합격하였는데 급제 취소를 당했고 다음해 또 두 시험에 합격했다
20살(154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6세가 되는 병오년 봄 별시에서 문과의 을과 제7번째로 합격하였는데 그 대책이 사람들의 입에 자자하게 오르내렸다. 숭문원의 副正字를 제수받고 예규에 따라 至實正字로 옮겼으나 당시의 재상이 크게 쓰려 하였으나 공이 나이가 젊어 기운이 날카로워 요직에 있는 공을 꺼리는 간사한 사람들이 시와 술을 즐기고 법도를 지키지않는 다는 유언비어를 가지고 공을 중상하므로 평안도 삭주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 임금의 은혜로 3년만에 풀려 고향 나주회진으로 돌아왔다 . 공은 자연에 몸을 둘 뜻이 있었는데 이로인해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에 뜻이 없었다
회진은 영상강 하류에 있는데 강과 산의 경치가 호남우도에서 으뜸이다
부친 승지공(귀래정 임붕)이 남쪽지방을 오가면서 말년을 이곳에서 보낼계획이 있어 1552년에 임금께 물러남을 청하니
조정에서 이를 애석하게 여겨 특별히 光州 목사로 임명하여 공의 돌아감을 영화롭게 하였다.
1553년에 승지공 (귀래정 임붕)이 官所 에서 작고하니 동생 임 진 절도사와 더불어 喪을 받들고 돌어와 묘에 움막을 짓고
슬픔을 다하여 한결같이 옛 법도대로 했다
상복을 벗고도 오히려 부모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며 몸둘바를 몰라하더니 당(堂) 한채를 짓고 편액을 붙이기를 영모(永慕)라
하여 종신토록 생각하는 뜻을 붙었다
집에 거처함이 내외가 엄격했고 조상을 받들기를 禮 로 하여 誠과 敬이 모두 지극했으며 자식들이나 조카가 혹시 제사에 참여치 않으면 호되게 꾸짖었다
몸가짐을 매우 엄격히 하여 거처를 반드시 공손히 하고 비록 처첩이라도 일찌기 그 게으름을 보지 못했다 내외의 여러조카가 거의 20명이 되었는데 모시고 있으면 온화하여 아무리 취했어도 감히 시끄럽게 떠들거나 웃고 실례를 하지 못하였다.
절도공 임진 장군은 선생보다 6살이 아래였는데 관직도 높았으나 섬기기를 엄한 부친과 같이 하였다.
가세는 빈하지않아 평상시 유무를 묻지 않고 육친을 도와주었으며 멀고 가깝고를 묻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이 덕분에 불을 살라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남녀가 가난해서 시집장가를 들지 못드는 자는 집마다 혼수감을 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으며 鄕里 까지도 通財를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그래서 공이 작고하자 마을에서 모두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 어진 사람이 가셨다" 하였다
한가한 가운데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니 동생인 임진 절도공의 아들 正郞 제 (백호 선생) , 진사 임훤 현령 환(懽 ) 처사 택( 㡯)이 시와 문장으로 울리고 학행으로 드러났는데 모두가 공이 가르친 힘이었다
정묘 (1567년 선조 1년)년에 임금께서 다시 제수하여 특명하였으나 다시 논자( 論者)의 막은 바가 되었다. 공은 듣고도 개의치 않았다
유독 무락(武略)이 뛰어난 바 있어서 항상 변경의 허술함을 걱정하여 오랑캐가 엿볼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했는 데 갑술년(1574년) 섬오랑케가 일통을 내고 마니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놀랐다
공은 비록 자연속에 눌러 살고 있었으나 하루도 임금임을 잊지 아니하여 상소를 하여 변경에 관한 일 10여 조목을 써서 받치니 비답(批答)을 내러 칭찬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과선(戈船)의 제도는 비변사가 각도의 수사(水使)로 하여금 그 모습대로 제조를 하여 갑작스런 변란에 대비토록 하였는데 그 뒤 십수년만에 임진 변란이 생겨 통제사 이순신 등이 이 제도를 사용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니 비유 하자면 고의( 膏誼) 가 제후왕 (諸侯王)의 분봉을 차례로 받게 하자고 청했던 것이 수세대를 지난 후에 주부언(主父偃)이 거행하여 한(漢)나라가 마침내 편안해짐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
만일 선생이 당시에 부름을 받았더라면 그 포부를 다하여 세상에 남긴공훈과 업적이 어떠하였겠는가
공은 스스로 세상에 수용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오직 높은 데 올라서서 바라보는 흥치 (興致)와 낚시질을 즐기며 만년에는 가야금을 배워고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생각을 폈다, 고향에 파묻혀산지 10여년 동안 입에 고향사람의 옳음과 그름을 말하지 않았고 원근의 아는이 모르는 이 모두가 큰 인물 높은 덕으로 우러렀으니 관인 들도 금주(錦州 :나주의 옛이름)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문전을 찾아갔다,
박상국(朴相國) 淳 이나 허제학(許提學) 업이나 정판서 종영(宗榮) 이 모두들은 명성을 끊이지 않고 전하였으며 면앙거사 송사재 순(純)이나 영파거사 박첨지 개(慨)도 말을 타고 많이 찾아왔고 당시의 명사들이 영모당에 글을 쓴 것이 무려 수백수나 되는데
안관찰사 (安觀察使) 현(玹|이 시를 짓기를
효자가 당을 연 곳이 (孝子開堂處) 선인의 옛날 대로다 (先人舊日臺)
올라봄이 구경을 좋아함이 아니라 (登臨非好賞) 부모를 사모하여 돌아올 줄 모른다 (思慕不知回)
구름은 태산을 바라볼 길을 끊었고 (雲絶太山望) 바람은 정수를 향하여 온다(風從庭樹來)
종신토록 한 없는 뜻을 (終身無恨意) 쇠경에 참으로 처던하기어려워라 (哀境定難裁)
하였으니 이는 공이 50세 나이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뜻을 읊은 것이다
김상국(金相國) 명원(命元)이 적은 글귀에는
안락은 잡고 있으면 항상있고 (安樂持常有)
뜬 이름은 어쩌다가 와도 사절했다 (浮名謝尙來)
라는 말이 있으니 공이 덧떳한 길을 밟으며 자적함을 읊은 것이다
임자년 간에 공이 영모당의 남쪽에서 반송 하나를 얻었는데 서리고 얽혀있어 오륙십명을 가리워 줄 만했다
공은 항상 그 아래에서 우두커니 날을 보냈는데 만년에는 소나무로 인하여 정사 (精舍)를 짓고 명명하기를
고송(孤松)이라 했다, 박관찰(朴觀察) 민헌(民獻)이 명(銘)해주기를
만그루 소나무는 군자가 많은 것을 비할 것이요
외로운 소나무는 절조의 개특함을 나타냄이라
고송 (孤松) , 고송이여 !
그 사람 아니면 누가 능히 알리요
하였다
박(朴)은 문장의 대가이다 간단한 말과 토막글자로써 사람들은 경중을 따지는데 공에게 이런 글을 썼은 즉 공은 비록 시골에 물러나 있었으나 비슷한 또래들에게 이렇게 추앙을 받았었다.
공은 벙자(1576년) 4월18일 안방에서 별세하셨으니 향년56세 였다.
김공명원(金公命元)이 당시 나주목사로 있다 돌아가심을 듣고 임곡(臨哭)을 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상례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이 해 여름에 금성(나주의 옛이름)의 남쪽 가장동의 의 서쪽 건좌손향(乾坐손向)의 언덕에 묻으니 선영에 따른 것이다
공은 초취 재취가 자식이 없이 일찍 죽고 세번째 (三室) 로 진사 서모 (徐某)의 따님을 맞아 두 아들을 낳았다
공이 임종하실때 큰 아드님 서는 일곱살 둘째 협은 겨우 네살이었다.
큰 아들은 서는 경인년 (159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기해년(1599)에 올라 은대(銀臺 승정원) 춘관(春官(예조) ,하관(夏官벙조 )의 낭(郎)을 지내고 지금 무장현감 (茂長縣監) 을 맡고 있으며 서는 전 부사(前府使) 임 식 (林植)의 따님과 혼인하여 두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큰 아들은 연이니 전별좌 홍서익의 따남과 혼인하였고 딸은 전병조좌랑의 제에게 시집갔다.그 다음의 해니 아직어리다
둘째 아드님은 협 은 전목사 (前牧使) 박광옥(朴光玉)의 따님과 혼인하여 두아들을 두었고 일찍 졸(卒)하었다 (1598.2)
협의 두아들은 아직 어리다
아 ! 공은 신장이 팔척이요.요대가 여러 아름이었으며 생김새가 매우 훤출하고 덕기 (德氣)가 크고 깊어 공을 아는 사람은 그 속을 존경했고 공을 모르느 사람은 그 밖을 존경했다
하늘이 주기를 이렇게 풍후하게 해놓고 운명은 이렇게도 인색하게 준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번 물리쳐 등용하지 않고서는 다시는 회복시키지 않아 떼로 나는 새들만 하늘을 가리웠으니 그 또한 운명이리라.
그러나 공이 일찌기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찌기 죄없이 버림을 받았으니 내가 못한 일을 자식들이 반드시 하리라
서가 자라 입신함에 이르러 문행과 충신으로 가문의 명성을 이었고 모든 니이든 선생들 중 서를 만나본 사람들은 서를 보고
바록 노성인 (老成人은 없어도 아직도 모습과 법도는 있다고 하였으며 모든 손자 들도 우뚝우뚝 두각을 내밀고 있으니
이것을 보면 공의 말이 맞았고 임씨의 복은 아마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沆은 서와 이성(異姓)의 천륜(天崙)으로써 공의 세계(世系) 자상하게 들었던 터라 감히 내 자신의 재주없슴을 잊고
그 중 큰 절목(節目)을 뽑아서 행장(行狀)을 만들어 세상에 발표할 만한 군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올긴이 註
수은 강항은 임복의 큰아드님 서(초휘 업)가 무장 (지금의 고창)현감으로 있을 때 이 행장을 기록하였다함 . 위글은 1989년 강항 수운집 국역내용을 옮긴 것인데 큰 아드님 서의 첫 이름 업이 박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어 여기서는 서로 표기하였습니다
업과 박은 모두 마음심변의 희귀 한자입니다
위의 강항 선생의 기록은 나주임씨 족보 기록으로 유추하여 1605~1610년 사이에 쓰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2023.5.27
3. 글 및 옮긴이
:
정자공 임 복의 14대 손 이며
수은 강항선생의 385년 後生 임 정 택 (林 井 澤 )
4. 부 록
수은집 睡隱集 이란?
조선 중기의 학자인 강항(姜沆 : 1567~1618)의 시문집.
4권 4책. 목판본. 1658년(효종 9)에 문인 윤순거가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있을 때 간행했다. 서문은 송시열이 썼다.
권1은 시, 권2는 부(賦)·전(箋)·계(啓) 등이다. 권3은 소(疏)·문(文)·기(記)·서(書)·잡저 등을 실었다. 문 2편은 임진왜란중에 조선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가, 조선과 일본이 서로 통호하여 전라도·경상도 지역에는 조선과 일본군이 섞여 거처하고 있다고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여 요동에서 관리가 파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실무근임을 밝히는 글이다. 전라도 유생을 대표하여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청원하는 상소도 있다. 기 가운데 〈중수문묘기 重修文廟記〉는 임진왜란중에 불탄 문묘를 재건하는 기록이다.
권4는 행장·묘지·묘갈 등이다. 행장 중 김천일과 윤진의 것은 임진왜란중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당시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김천일의 행장은 1만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로서의 활약상에 중점을 두어 전투과정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간양록 看羊錄〉은 자신의 의병활동부터 일본에 잡혀가기까지의 과정과 일본의 풍물을 기록한 것으로 이전에 단행본으로 간행했던 것을 합편한 것인데, 〈간양록〉의 서와 발문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별집은 시와 문을 보충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수은집 4장 과선지제로 통제사 이순신이 승리한 부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