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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 단편 "산 그늘" 낭송회 2014/08/21 14:33 | 추천 0 스크랩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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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에서 최근단편소설 졸작 ‘산 그늘“ 낭송회
지난 8월 17일(일), 오후 7시, 경북 영주시의 시장 한 귀퉁이의 천막을 친 장소에서 영주 시민 백여명과 영주 장욱현 시장 참석하에 작은 문학인 모임이 있었다. 필자의 근작 단편소설 졸작 “산 그늘” 낭송회가 있었다. 꼭 필자의 소설만을 낭송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분들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초청문인으로서 작품이 낭송된 소설가는 나 혼자 뿐이었다. 모임은 영주 시 소재 선영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김만용씨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나의 작품 낭송회를 영주에서 가지는 것이 어떠냐고 처음으로 전화를 한 기관은 조선일보였다.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이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했고, 한국문인협회의 추천이 있었다고 했다. 주관자는 문협 영주지부라고 했다. 영주는 나의 고향이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 후에 문협 영주지부장 김덕우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정을 상의했다. 나는 수락의 조건을 달았다. 오래간만에 영주를 방문하게 되어서, 7시에 시작한다니, 내가 2시쯤 도착할 터이니, 나의 성장지인 부석과 부석사, 그리고 고모님이 사셨던 순흥을 좀 돌아보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잠시 재학하였던 영주국민학교를 돌아보게 해 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김덕우씨는 기꺼이 좋다고 했다.
2시쯤 영주 역에 도착하였더니, 박하식(소설가), 최상호(시조시인), 임종걸(시조시인)씨가 코란도를 몰고 나와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에 거주하고 있지만, 문단경력이 쌓인 중견문인들이다. 우리는 백년지기처럼 서로들 의기가 투합하였다. 곧장 영주 시내에 있는 영주국민학교로 차를 몰았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닌 것은 2학년 때가 아닌가 한다. 당시는 영주서부국민학교였었던 것같다. 동행한 최상호 시인이 나의 이 학교 8년 후배였다. 구정권의 김계원 장군이 이 학교 출신이고, 전 의원 홍사덕씨가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김계원 장군이 재직시 후원한 강당이 서 있었다. 나는 지금 이 학교에서 같이 다녔던 어떤 분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석 가는 길에 있는 순흥에 둘러, 옛 순흥 도호부 시절의 동헌이 있던 자리에 가 보았다. 동헌은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 건물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다만 현 면사무소 정원에 옛 순흥도호부의 부사들의 공덕비가 스무개쯤 서 있었고, 동헌의 정원과 연못이 한 쪽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슨흥은 그 역사가 기구하기 짝이 없는 시골 소도시다. 원래 조선초기에는 안향의 백운동서원이 설 정도로 전국적인 대읍이었다. 그래서 도호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순흥의 뒤산인 소백산 너머가 노산군이 유배와있던 영월이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세조의 정권찬탈 후, 단종의 복위운동을 하던 금성대군이 여기 순흥에 위리안치되었고, 마침 당시 순흥 부사였던 이보흠이가 여기 사람이라, 영월과 소통하면서 복위운동을 꾀했다. 운동이 실패하고 난 후,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사사되었고, 수많은 순흥사람들이 참수되었다. 참수된 순흥사람들의 피가 소수서원을 돌아가는 9곡 죽계천을 오래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동시에 순흥 도호부는 폐쇄되었고(1457), 마을로 강등되었다. 1683년(숙종 6년)에 부로 복귀되었으니, 126년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1895년(고종 32년) 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수하에 여러 군들은 인근의 봉화와 영주로 갈라주고 지금은 면소재지로 남아 있다. 왕조사회에서 하나의 도시가 어떻게 영락의 길을 걷게 되는가하는 전형을 보는 것같아 마음이 퍽 씁쓸하였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의 재단을 둘러보고, 일행과 함께 기념촬영하였다. 인근에 있는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부석으로 향했다. 소수서원은 조선의 500년 통치철학이었던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안향을 향사하는 곳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었다. 그래서 이 서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서원에 가면, 이 서원을 처음 지은 풍기 군수 주세붕과 안향, 그리고 이원익(서인 정권하에서의 남인 영의정, 광해군 참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구명하였다.)과 이황(조선 성리학의 집성자)의 초상이 원본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서 큰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순흥과 소수서원을 돌아본 후, 부석으로 차를 몰았다. 부석은 대략 65년 전, 필자의 아버님이 지서주임으로 계셨던 고장이다. 필자는 당시 미취학아동이었으나 당시를 어렴프시 기억할 수 있다. 당시 지서는 소백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빨치산들의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었다. 당시 빨치산들은 인근의 소백산과 일월산에 웅거하고 있었다. 아버님의 부석지서는 중세시대의 옛 고성처럼 아주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수 없이 많은 총안이 담벼락에 뚫여 있었다. 그리고 성벽의 네 귀퉁이에는 기관총이 장착된 망루가 있었다. 지서의 뒤안과 뒤산 정상을 연결하는 지하굴이 파여져 있었다. 이번에 가보았더니, 모든 것이 다 헐려버렸고,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으나, 지서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은행나무와, 지서의 건물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서, 신기하고 또한 감격스러웠다. 이런 내용을 졸작 장편 소설 “바람의 여인”(실천문학 간)에서 변용하여 다루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부석사 관람은 포기하였다. 순흥에 다시 들러 유명한 순흥묵밥을 역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순흥막걸리에 곁들여 먹었다. 박하식 선생은 일생, 매일신문 영주지국장으로 근무하시면서 영주일원의 문학발전에 기여하였고, 자신이 수많은 소설을 발표하신 이 지역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올해 77세이신데도 건강하시여, 고향 후배를 위해 기꺼이 동행해 주셨고 막걸리 잔을 들어 부라보해 주셨다. 7시에 영주 시내에 있는 낭송장으로 들렸다. 한 3년전쯤에 영주 무섬에서 있었던 젊은 문인들과의 해후에서 나를 초청해 주었던 박승민 시인과 이 지역 젊은 문인들의 지주이신 권석창 시인이 오셨다. 그리고 봉화에서도 대표적인 두 사람의 문인들이 일부러 나를 만나러 와 주셨다. 김동억씨와 김제남 씨가 그분들이다. 이분들은 봉화 문협의 역대 회장을 역임한 분들이다. 이분들은 봉화사람들이고 봉화 문협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봉화문학을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현거주지는 영주이다. 현 영주문협 회장 김덕우씨도 만찬가지라고 한다. 영주 봉화는 이웃이고, 역자적으로 지역적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친밀성을 가지고 있다. 혼맥으로 학맥으로 얽혀져 있어서 이름만 다를뿐 같은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 역시 고향은 봉화군 상운면이지만, 집안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영주사람들, 혹은 안동사람들과 혼인을 해서 같은 지역이라는 감정이 아주 강하다.
나는 집사람을 전남대학교에서 만났다. 학내에 몇 명 안되는 총각교수 처녀 교수였었다. 미혼교수들끼리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모임이 있어서 가끔 만났다. 서로들 어디 학교 출신이며 고향이 어딘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집 사람은 서울 본토백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경상도 억양이 있는 것같아서 물어보았더니, 백 퍼센트 서울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중구 주교동에서 태어나서 방산국민학교를 나왔고, 경기 여중고를 나와서 연세대를 나왔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고향이 어디냐고 재차 물었더니, 경상도 봉화군 물야면 오록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했더니 내 말을 듣고 있던 방청객들이 다들 소리내어 웃었다. 집 사람이 박수를 받고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근 10분이 넘게 나는 나의 졸작의 일부분을 낭송하였다. 낭송이 끝난 후, 사회자인 김만용 교장과 대담을 한 10분 간 했다. 나는 오늘 세분 원로문인들과 같이 돌아본 순흥 도호부 유적과 금성대군 유적지 그리고 소수서원에 대한 나의 감상을 이야기 했고, 부석지서를 둘러본 감회를 이야기 했다. 지금 발전된 영주에대한 감상을 말하라기에, 아마도 지금 여기 오신 분들 중에서 6.25 전의 영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박하식 선생과 본인 뿐일 거라고 했더니 다들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시 아마도 5 살 정도 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까마득하고 가물거리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박하식 선생은 12살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분명한 사변 전 영주의 모습을 잘 기억하시고 있을 것이다.
하룻밤 자면서 고향의 정취를 더 즐기시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다음 날 강릉 갈 일이 있어서 막차를 타고 상경하였다. 대략 2시간 반이 걸린다. 고향 영주 봉화에 대한 북받히는 감회가 가슴을 채워왔다. 나는 작년에 수많은 조상들이 묻힌 고향 봉화를 찾아 벌초하고 예를 차렸다. 나는 부모님의 묘소를 나의 성장지인 대구 인근의 공원 묘원에 모셨다. 그래서 고향 선대 어른들의 묘소는 고향 종가댁의 4촌들이 관리하고 있는 셈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대구 부모님 묘소를 찾아야 한다는 핑계로 고향 영주봉화 어른들의 묘소에는 사실 등한히 했다. 그런 나의 회환을 다룬 중편소설이 지난 봄 한국소설에 발표한 중편소설 “벌초”이다. 나를 불러준 영주 봉화 고향 문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전화로 강태규시인(영주 작가회의 회장)이 이번 가을 영주작가회의 10주기 기념일에는 기념작품집에 꼭 작품을 주고, 그리고 꼭 와달라는 부탁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65년 전에 살았던 부석 지서 옛 건물 순흥 묵밥을 먹고 있는 일행, 정소성, 임종걸 시조시인, 최상호 시조시인, 박하식 소설가, 김갑영 졸작 단편 "산그늘"을 낭송하고 있는 필자 ,왼편은 사회자 김만용 교장 영주 국민학교를 찾은 일행 옛 순흥 도호부의 정원을 찾은 필자 소백산 너머 영월에 유배된 노산군의 소통하면서 복위를 꾀하다 사사된 순흥부사 이보흠의 재단 단종으이 복위를 시도하다 사사된 금성대군의 제사 금성대군의 제사 금성대군의 제사 뒤에 서 있는 천년 수명의 거수 고향 문인들의 축배 일생 대구매일신문 영주 주재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소설을 발표한 박하식 선생 소수서원 내부 수수서원 들어가는 숲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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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미 있는 고향방문이었군요. 처음 만나는 시골의 문인들과 금방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참 좋고 부럽습니다. 저도 지난번 회진에서 느꼈는데 문화는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한번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