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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 추자도 - 관탈도.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과
제주도 사이에 징검다리 섬들.
...................해남 땅끝마을..............
땅끝은 북위 34°17′21″, 동경 126°31′22″
소백산맥에서 갈라진 지맥의 한 가닥이
노령산맥이 되어 무안반도(務安半島)와
압해도(押海島)로 뻗어 내리고 또 다른
한 가닥은 무등산(無等山)ㆍ월출산(月出山)ㆍ
두륜산(頭輪山)으로 이어지면서
해남반도를 형성하는데,
이 반도의 끝이 땅끝.
"토말" 또는
"갈두마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全圖)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
육당최남선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로 잡아.,우리나라 3천리 금수강산.
.
...........사수도(獐水島 :장수도)...........
추자면 예초리 산121.,무인도(138,701m2 )
과거 주민이 거주했던 집터, 해녀 숙소,화장실.
..............................................................
사수도
추자도.
추자군도와 제주도
사이 관탈도(冠脫島)
제주해협에 위치한 무인도
제주항에서 30km 북서쪽에 있다.
행정구역상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하추자도 신양항에서 약 25km 남쪽.
조선시대 제주도 절해고도 유배인들이
이곳 뱃길에 이르러 '제주도에 다왔다.'는
생각에 갓을 벗었다 해서 ‘관탈’이라는 지명.
.
대관탈도
조선시대 황포돛배에 몸을 싣고
풍랑 심한 뱃길에 시달리다가 보면
유배죄인은 뱃멀미에 기진맥진했을 터.
한양에서부터
삼천리 절해고도
멀고도 험한 유배길.
갓은 상투튼 머리에
망건과 탕건을 쓰고
의관을 갖출때 사용.
의례를 중요시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갓은 위엄과 체통를 상징.
갓을 벗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것.
대관탈도.,절명여
소관탈도
소관탈도.,선상 낚시
똥여 & 뾰죽여
조선시대 한양에서 가장 먼 절해고도.,제주도.
사실 상, 살아서는 나올 수 없었던 중죄인 적거지.
추사 김정희는 어떤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된걸까?
머나먼 귀양지로 가다가 죽거나
먼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서 죽거나
음습한 귀양지에서 병에 걸려 죽거나
귀양생활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저절로 죽길 바라는 중죄인 정치인 적거지.
조선시대 유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은
'절해고도' 유배지에서의 '위리안치' 주거제한.
절망과 고통을 동시에 줄 만큼 가혹한 유배생활.
'숙종 ~ 영조' 시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어도 죽음에 가까운 형벌.
유배지에서 구사일생 환국 이후에는.,복수혈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유배 형벌은 당파싸움을 더욱 가중시켰고
조선 후기에는 당파싸움으로 4명 중 1명이 유배생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유배 형벌을 합친 것보다
조선시대 유배 형벌 사례가 훨씬 더 상회할 만큼 압도적.
특히, 조선 후기에는 유배 형벌이 지나치게 남용된 것 같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안쪽 가택연금이
조선시대 위리안치.
탱자나무 울타리 밖을 바라보다가
자칫, 가시에 눈이라도 찔리게 된다면
눈이 멀 수도 있는.,위리안치 유배 형벌.
유배 죄인이 보다 더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연산군이 만든.,위리안치.
그러나, 그 자신이
왕위에서 쫓겨난 후에
그 자신이 만든 형벌인
위리안치 2달 만에.,병사.
'얼마나 가혹했던 것일까?'
옛 기록을 찾아서 자세히 살펴본다.
연산군이 재위때 이미 만들어놓았던
교동 위리안치 유배지가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갇혀 죽을 자리가 되었던 곳이다.
조선왕조 왕권정치를 세우려 했던.,연산군.
그러나, 세도 권신들에게 밀려 폐위된.,군주.
위리안치는 왕권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연산군이 재위때 처음 만든 위리안치 적거지.
항명 권신들에게 일벌백계 엄포용 아니었을까?
결국, 연산군은 폐위된 군주가 되어 그 길로 갔다.
'연산군 압송' 재현 모형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1506)
○ 9월 2일 : 폐주를 교동에 안치하다.
"폐주는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않고
나와서, 땅에 엎드려 가마에 타며 말하길,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
○ 9월 3일 폐왕을 연산군에 봉하다.
박원종 등이 의논, 연산군으로 삼았다.
○ 9월 7일 : 심순경 등이 폐왕을 교동 안치.
심순경 · 최한홍 · 유계종 · 이곤 등이 폐왕을
교동에 안치하고 와서 복명하고 이어 아뢰길,
"지나는 일로(一路)의 늙은이나 아이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나와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상쾌히
여기는듯 하였습니다. 위리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圍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 보내고나서,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
여시(女侍)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 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했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 9월 8일 :
폐왕에게 건물과
의복을 내리다.
전교하기를,
"어제 전왕의 일을 듣고
슬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였다.
내가 종사의 경위(傾危)와 생민의
도탄 때문에 권고에 못 이겨,
사양하다 못해
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왕에게는 한편으로는 군신이고
한편으로는 형제이니, 정의의 간절함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다."
"지금 날씨가 차가워지니
의복과 물선(物膳)을 사람을 시켜
실어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정승 등이 아뢰기를,
"신 등으로 말하면 대의가 이미
끊어져 감히 마음을 기울일 수 없으나,"
"전하의 하교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신 것이니, 건물(乾物) 2바리와 의복
1 바리를 실어 보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 명하여 가시 울타리를 처마에서
10자쯤 거리를 두어 둘러치게 하였다.
○ 9월 10일
연산의 자제 시집 및 실록각에
간직된 경서문을 태워 없애다.
정승 및 김감이 의계(議啓)하길,
"연산군의 자제시집(自製詩集) 및
실록각(實錄閣)에 간직된 경서문
(警書文)을 아울러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 9월 24일
폐세자 이황 ·
창녕대군 이성 ·
양평군 이인 ·
이돈수 등을
사사하다.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기를,
"폐세자 이황 · 창녕대군 이성 ·
양평군 이인 · 이돈수 등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일찍 처단하소서, 또 연산군의
폐비 신씨가 지금 정청궁에 있는데
선왕의 후궁과 함께 거처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동대문 밖 광평대군 집에
옮겨 안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명하여 황 · 성 · 인 · 돈수를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
○ 9월 25일
능천 부원군 구수영이
폐왕과 절혼하기를
원하니 윤허하다.
능천 부원군
구수영이 아뢰기를,
"신의 아들 구문경은 일찍이
패왕의 부마가 되었는데, 이제
죄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마음에
미안하니 절혼(絶婚)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정승에게 물으라고 전교하였다.
유순 · 박원종이 아뢰기를,
"과연 혼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법에 일곱 가지
버리는 것이 있으니 그의
청원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좋다
전교하였다.
○ 10월 4일 : 폐왕에게 갖옷과 음식을 보내다.
○ 11월 7일 : 연산군이 병이 나 의원을 보내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 군관 윤귀서가 와서 아뢰기를,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 하여 물도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도 뜨지 못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구병할 만한 약을 내의원에 물어라."
하고, 삼공에게 의논하여 의원을
보내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 11월 8일 : 연산군이 사망하니
대신들과 상사 문제를 의논하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 ·
군관 구세장이 와서
아뢰기를,
"초 6일에
연산군이 역질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죽을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상이 애도하고 중사 박종생을 보내,
수의를 내리고 그대로 머물러
장례를 감독하도록 하고,
"연산군을 후한 예로 장사지내라."
전교하였다. ....
등이 계하기를,
"연산군의 상사는 마땅히
왕자군의 예를 사용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12월 9일
폐주의 일을
중국에서 물을
경우에 대해
의논하다.
공조참의 유숭조가 아뢰기를,
"폐주가 교동에 내쫓겨 죽었으니,
만약 상국으로 와서 묻는다면, 미리
의논하여 대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중종 2년, 6월 2일
사국(史局)을 개설하여
폐주의 일기를 엮도록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왕에서 강등되어
교동도로 위리안치된
연산군이 유배됐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3개소가 존재한다.
봉황산 자락
교동읍성 내,
화개산 자락.
3곳 추정지 중
화개산 자락에
연산군 유배지를
추정 복원하여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원래, 소달구지는
사형수 만 탔기에
폐주 연산군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리라.
'자신이 살아서
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리라.
탱자나무 가시울타리가
겹겹이 하늘을 뒤덮으면
햇볕조차 보기 어려운 환경.
행여, 담장 밖을 바라 보려고
다가서면 가시에 찔리기 다반사.
칠흙같은 밤이면, 눈이 멀기도 십상.
낮이나 밤이나
자유롭지 못한
가시울타리 안.
제주도 귀양지에서도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힌
'위리안치 형벌' 중죄인.,추사.
그곳 유배지에서
갈고 닦아 완성된
그의 필체가 추사체.
은광연세 글씨는 1840년 김정희가 55세 나이에
제주에 유배온 직후, 추사체가 시작될 무렵 쓴 것.
김만덕 사후에 그 후손에게 써줬다는.,객주집 현판.
추사 김정희는
위리안치 중죄인
가시울타리에 갇힌채
그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객주(客主)의 현판'을 썼으리라.
김만덕 후손이 운영했다고는 하나
제주관아에서 관여하는.,객주(客主).
.....................객주(客主)....................
객주(客主)란 객상이 위탁하는 상품매매를
주선하여 수수료를 취득하는 중간상인 객점.
객상들 숙박업 및 화물의 보관·운반업을 담당.
위탁한 화물을 담보로 객상에게 자금을 대부
행상에게 곡물 등 매입자금 대부 및 어음 할인·
환업무 등도 겸하는.,포구 물상객주(物商客主).
..............................................................
秋史 金正喜(1786~1856)
'자선사업가였던 故 김만덕 객주의
은광(恩光)을 세상에 널리 기린다.'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 문신·실학자.,김정희.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을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던.,추사 김정희. )
.
그가 '객주'의 현판을 쓴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년에
유배생활 중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서 나왔던걸까?
왕실 외가 종친으로서
추앙을 받았던., 김정희.
경복궁 뒷산 북악산자락
백사실계곡 별장까지 소유.
그러한 윤택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제주도 귀양지의 생활은
뼈를 깍는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라.
청나라 유학파 금석학자로서
청나라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추사.
그를 아끼는 청나라 대석학들과의 인맥.
절해고도 위리안치
추사에게는.,생명줄.
백사실계곡.,추사 별장터.
조선시대 북한산 비봉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였음을
밝혀낸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
그는 그런 명예조차
잃어버린채 귀양생활.
북한산 비봉.,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백제 근초고왕에 비견되는
인물로 6세기 중반 백제와 동맹.
고구려를 견제했지만
백제가 방심한 틈에 일거에
한강유역 차지, 그후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점령하고 대가야 합병.
신라 역사 상
최대 강역을 개척.
그는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창녕
4곳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과시.
북한산 비봉에 북한산비는
오랫동안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영조 때까지도 이 비석은
고려 도선대사나 조선 창건 때
무학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751년 편찬된 이중환 '택리지'
기록에 같은 내용이 실려있었다.
1816년 7월 추사 김정희에 의해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해독되면서 진흥왕의 순수비로 확인.
'삼국사기' 진흥왕 29년조(568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었다.’
라는 대목과 정확하게 일치하였기 때문.
현재 국보 3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순수비는 많은 부분이 손상.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입은 총탄 자국까지 있다.
현재, 총 200여 글자 중
120여 글자 만이., 해독.
그중에 ‘진흥태왕(眞興太王)’ 4글자는
신라 최대의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서
강인한 기세를 뽐내고 있는 것만 같다.
.............................
.............................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가
만약 북한산 비봉 순수비를
판독하지 못했다면, 삼국시대
역사는 현재와 같이 알려졌을까?
.........................................
.........................................
한편, 창녕비는 일제때 소풍간 학생들이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 골짜기에서 발견.
진흥왕이 561년 가야연맹의 한 세력이었던
창녕을 정복한 기념으로 세운 진흥왕 순수비.
여기에 39명 귀족과 관료들의 이름이 새겨있다.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 아버지 김무력 등.
국보 33호 창녕비는 ‘순수관경(巡狩管境)’제목이 없다.
‘새로운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순수관경.
'척경비'지만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오늘날 '진흥왕순수비'로서 인정받고 있다.
이 비석에는 대가야 최후의 태자로서
'월광태자' 도설지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도설지는 562년 진흥왕이 책봉한 대가야 왕.
백제와 짜고 반란을 일으켜
진압 당한뒤 왕위에서 폐위.
결국, 그는 승려가 되어
현재 경남 합천에 위치한
월광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564년, 신라가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565년 북제의 무성황제는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봉했다.
진흥왕은 568년에 이르러 연호를
‘크게 번창한다.’는 뜻의 ‘태창(太昌)’,
572년에는 ‘널리 구제한다.’.,‘홍제(鴻濟)’
이는 그동안 그가 영토확장 전쟁을 마무리하고
외교와 내치에 전념하겠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576년, 진흥왕은 인재등용 목적으로 원화제도 시행.
그런데, 원화로 선발된 '남모'와 '준정' 사이에 불화.
준정이 남모를 물에 빠뜨려 죽이자 원화제도를 폐지.
화랑도로 바꾸었는데, 최치원〈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도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최치원 -
신라 융성기에 예비군 확보와
인재양성을 위한 국가적인 조직.
신라는 화랑 제도를 통해
김유신, 사다함, 관창, 반굴 등
충성심으로 무장한 인재들이 배출.
그들의 활약은 장차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밑거름.
진흥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43세 때인 576년 가을이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신라는 전성기를 이룩했고,
신라영토의 확장과 국력의 과시,
백성들에 대한 포용과 불교적인
교화를 실천했던.,신라 영웅 진흥왕.
추사.,난화
추사.,다산서당.
과천.,추사 박물관.
추사.,연중서옥
추사.,영정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 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 경주김씨의 정권 권력 싸움에서
경주김씨 세력이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된.,추사 김정희.
추사 제주도 유배 적거지는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
효종 때 네델란드 하멜 일행이
유배생활했던 적거지와 같은 곳.
'혹시, 광해군 때와 유사한
고초를 겪었던 것은 아닐까?'
.........................
..........................
광해군이 페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간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권신들이
부귀영화를 위한 반정이라고 비판했던 광해군의 유씨부인.
그만큼 그녀는 성리학 사상에 기반을 둔
가치관이 분명하고 뚜렸하였던 여자였다.
광해군은 유배생활 1년 반 뒤 유씨부인과도 사별하게 된다.
유씨부인은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홧병으로 운명.
광해군 일가 중 무사했던 사람은 박씨 가문으로 시집간 옹주 뿐.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 .
유배생활 중 몇 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광해군에게 아들을 잃고 서궁(덕수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반정 공신들은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과 광해군 파 관리들.
결사적으로 반정세력의 광해군 살해 기도를 막는다.
1624년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죽음의 위기
인조는 삼전도 수모를 겪은 후, 광해군을 제주도 적거지로 유배.
'절해고도' 적거지에 탱자나무 가시덤불 울타리 안으로.,위리안치
광해군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그가 절로 죽게 하려 작심한듯.
.
강화에서 교동으로
교동에서 태안으로
태안에서 다시 강화로
강화에서 제주도로 이배.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태안으로 이배,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 다시 그를.,교동도 안치.
이때, 서인 계열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오히려 보호하였다.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광해군의 복위에 몹시 위협을 느꼈던 인조는
그를 저절로 죽게하려 제주도로 보내.,위리안치.
.................제주도 광해군 적거지.....................
조선의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으로 폐허화된 도서지역.
제주도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어려웠던 유배지.
1641년 유배생활 18년 만에 향년 67세로 운명한.,광해군.
왕권정치를 확립하려다 권력 대신들에게 밀려 폐위된 왕.
폐위된 후, 18년 간 왕위를 되찾으려는 온갖 노력도.,수포.
조선 역사 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운명한 비운의 왕.
폐위되어 한양에서 강화도로 다시 제주로 가는 유배길.
'광해군 가족도 풍랑에 시달리고 뱃멀미에 시달렸으리라.'
한 배를 탔어도 중죄인은 가족 상봉이 허락되지 않는 뱃길.
그러나, 예외적으로 광해군 부부와 세자 부부는
궐과 동궁전에서 거느리던 몇몇 상궁 나인과 함께
제주 위리안치 유배를 함께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 도착 후, 광해군 일행들은 유배지까지 160리 길을
목에 칼을 차고 짚신만 신은채 꼬박 이틀간 걸어야 햇다.
겨울철이라 따뜻한 물을 구하지 못해 소변으로 세안했다.
이때 광해군에게 불만을 터뜨린.,상궁.
"폐주가 유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이 고생을 해야한단 말이오?
주인을 잘못만난 죄밖에 더 있오. 말좀 해보시오."
"광해군은 당돌한 상궁의 불평불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채
나무라지도 못하며 가만히 있었다." 전한다.
유배지에 당도할 때까지
밥도 주지 않아 굶어야 했던
광해군 일행의 제주도 유배길.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두달 만에 생을 마감하였고.
광해군 부부 일행은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이배 중이었다.
일행 모두 숨이 겨우 붙어있어도 어차피 죽을 목숨.
이미 모두 죽을 고생을 겪은 후라 반 송장 같은 상태.
일행 모두 모진 목숨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
이는 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의 표출과
인조반정 세력의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폐위된 광해군 & 폐비 윤씨,
폐세자 질 & 폐세자빈 박씨.
4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4사람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까닭은
그곳이 감시하기 용이한 곳이기 때문.
반정세력은 4사람을 한곳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페비 윤씨는 강화부 동문 쪽에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강화부 서문 쪽에 안치.
폐세자 부부는 위리안치 두달만에 각각 운명한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폐세자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하려고 한듯.
그런데, 자살하는 과정이 몹시 기구하였다.
.
세자 질은 강화 유배지 집담 밑에 구멍을 뚫고 탈출 시도.
세자 비는 울타리 위에 올라가 망보다가 추락 후 자살한다.
남편이 탈출하다가 잡히자 더 살아갈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자 질'.,탈출 사건...............
세자 부부는 강화 적소에 위리안치되어 15일간
물도 마시지 않고 수의까지 만들어 놓고 죽을 각오.
그래도 목숨이 끊기지 않아 세자빈은 목을 매 자살기도.
마침, 여종이 들어선 발견해 가까스로.,회생.
어느날, 한양에서 보내온 인두와 가위를 받고
탈출을 결심하고 26일 동안 70척 땅굴을 파냈다.
세자는 땅굴을 통해 위리안치 적소를 벗어나
배로 탈출하려다가 실패 후, 마니산으로 향했다.
그곳 탈출이 여의치 않자 가야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산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헤메다가
나졸 최득룡에게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말았다.
이때 나무 위에서 망보던 세자비는 놀라 실족한다.
그리고, 절망상태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3일 후에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을 했다.
세자 빈의 최후가 안타까웠는지 호조에서는
옷과 이불을 내려 염습하게 하고 빈소를 차렸다.
세자 질은 한달 후, 사약을 받고.,향년 26세에 운명.
.......................................................................
1575(선조 8)~ 1641(인조 19).
조선 제15대 왕(1608~23 재위).
빛 光, 바다 海, 임금 君.,광해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를 차례로 잃은.,광해군.
그의 18년 간 유배생활은 수모와 모멸로 점철된 세월.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실은 1641년 7월 10일의 <인조 실록>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갈 때에 지은 시 한 편을 소개
"이때 듣는 이., 모두 비감에 젖었다" 며., 운명한 광해군을 추모.
...........제주도 대정현.,광해군 적거지............
제주도에서도 바닷가와 가깝고 지형이 낮은 대정현 동문 안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일어나는 독기) 기운이 극심한 곳.
피와 살로 된 몸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버티기가 어려웠던듯.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리고 사나운 바람과 안개 등
습기가 많아 옷, 재물, 곡식이 여름철만 지나면 썩어 무용지물
집이 낮아 바로 서기 어렵고 방도 좁아 무릎 추스르기 버거웠다.
온돌 연기와 그을음으로 의관이 더렵혀져 기거하기 힘든 환경.
집 동북쪽 모퉁이에는 '곡식 저장소' 목두(木豆)와 변소를 설치.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남쪽 문은 출입구, 서쪽 문은.,음식 배식구멍.
가시울타리는 4~5길 높이이고 둘레가 무려 50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오빠는 1776년 9월 흑산도로 유배
가시울타리 높이가 3길이며 4겹의 가시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가시울타리 높이 5~6m, 둘레가 12~13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가시가 처마까지 닿아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비록, 백주 대낮이라도
황혼 같이 어두웠으며
먼 하늘을 바라다보면
우물 속에 앉아있는듯.”
가시울타리 남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고,
그 바깥에는 사령들이 거처하는 경비소가 사방에 설치돼
토착 원주민들이 이곳을 산무덤이라 부를 정도였다는 기록.
'추사는 광해군과 같은 곳에서
어떠한 유배생활을 했던걸까?'
조선시대 제주도 출입항은 단 두곳 뿐이었다.
제주시 산천포구(제주항)와 애월에 있는 조천포.
조천포는 조선시대 내내 말을 육지로 보내던 항구.
귀양객을 비롯하여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출륙할때 이용한 조천포.
'조천포' 인근에 위치한
관아 객사.,'연북정(戀北亭)'.
구한 말.,연북정.
원래, 연북정은 조천성 바깥에 있던 고려시대 객사로
'선조 23년(1590) 이옥 절제사가 성을 동북쪽으로 돌려쌓고
정자를 그 위에 옮겨 세워서 ‘쌍벽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출륙금지령 제한구역
'제주도의 관문' 연북정.
'추사 김정희는
연북정을 통과할때
어떻게 들어 왔을까?'
'걸어서 통과했을까?'
혹시,'소달구지'우거를 타고
'소나 말을 수송하는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유배온 것은 아닐까?
소달구지(우거)는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만 탄다.
우거에 실리면, 이미 죽은 목숨.
'한양~제주도' 유배 소요비용은
국가의 부담일까? 자비 부담일까?
조선시대 유배인은 대부분 자비 부담.
공적인 업무 차 가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죄로 벌을 받으로 가는 때문.
형리들이 숙식비 청구 비리 非一非再.
그리하여,유배 비용이 너무 과중해
경제적으로 패가하는 일도 비일비재
유배에 동원된 관리 유흥비까지 부담.
그 비용을 미리 넉넉히 내놓지 않으면
머나 먼 유배길이 고생길일 수 밖에 없다.
먼 유배지 일수록 정신적 물질덕 고통 가중.
조선시대 3천리 유배지로서
제주도 대정현은.,중죄인 적거지.
망망대해 절도안치 & 위리안치 유배지.
육지에서 소나 말과 함께
배타고 제주도에 들어올 경우
사람 아닌 가축 취급이 비일비재.
그뿐만 아니라
출륙금지령 제한구역
육지로 돌아갈 수 조차 없는
제주도 유배지로 들어 왔다면
유배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살아 있더라도
어차피 죽을 목숨.
.
연북정(戀北亭)은 유배 중죄인에게 가혹한 제주도의 관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忠情)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연북정(戀北亭)
건물은 높이 14척 축대 위에 동남쪽을 향해 건축.
축대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 쌓여 있다.
이곳 성곽 옹성 위에 망루 용도로 지은듯한.,연북정.
문헌 기록에 의하면 1590년(선조 23)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
1599년(선조 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이라 개칭하였다.
제주 대정현 적거지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관문.,연북정.
조선시대 대역죄를 문초 할 경우
먼저 곤장을 쳐서 반죽음을 만든 다음
주리를 트는 것으로부터 국문이 시작된다.
그 다음으로는 바닥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위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다시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형졸이 올라가서 인정사정없이 흔들어대는.,압술형.,형벌.
모반을 꾀하는 자는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능지처참.
빈역죄인 직계존속과 직계비속 경우, 나이 16세 이상 모두 교수형.
15세 이하 아들 및 어미와 딸, 처첩, 친척들은 모두 종으로 삼는.,형벌.
유배지에서 제수명을 다하기란 극히 어려웠던 조선시대.
제주도 거제도 추자도 유배지는 농사짓기도 척박한 환경.
풍년에도 굶어죽는 척박한 절해고도의 견디기 힘든 외로움.
특히, 유배지에서 유도화 밭을 가꾸는 노역은 두려운 일.
유도화 뿌리는 사약 원료로 쓰여질 만큼 독성이 강한 나무.
언제 사약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유배지.
사약을 받으면 부인은 관비로 끌려가고 가문은 쑥대밭
사대부 안방마님도 하루 아침에 지방관아 방지기로 전락.
방지기 소임은 지방 출장 온 역관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일.
관비로 전락한 안방마님이 하급관리들의 잠자리 시중들기.
출장 온 중국사신 및 역관에게 기생처럼 숙청 드는., 방지기.
안방 마님에서 관비로 전락하면, 정절마저 지킬 수 없는 처지.
남편은 귀양생활, 아내는 관아의 방지기,
아들은 노비로 전락하고, 딸은 관비 생활.
딸은 관기로 입적되면 대물림 천민 신분으로 살아야한다.
꽃다운 20대 나이의 딸은 사치 관비가 되어 숙청드는 신세.
양반 규수가 하루 아침에 천민인 관기로 전락하는 비참한 삶.
젖뗀 어린 아들까지 추자도로 보내져 노비로 성장.
안방 마님은 하루 아침에 지방관아의 관비인 방지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평생 소식조차 들을 수 없게 된다.
역적의 어린 아들은 추자도로 보내지고
역적의 20대 딸은 숙청드는 관비가 되고
30~ 40대 나이이면 허드레 일을 하는 관비.
양반 가문이라도 하루 아침에 몰락했던 조선시대.
그나마 사약은 죄인이 편히 죽을 기회를 주는 왕명.
그래서, 북쪽 임금을 향해 4배를 올리고 받았던 사약.
추사 김정희는 어떠한 형벌을 받으면서
중죄인 적거지 이곳까지 유배온 것일까?
'한양 - 해남 땅끝마을' 소달구지길.
해남 - 완도-청산도-추자도-관탈도 등
징검다리처럼 육지와 제주도를 잇는 뱃길.
제주항에서 약 45km 떨어진.,상.하추자,
추포, 횡간도 4개 유인도와 38개 무인도.
추자도 최남단에 무인도인 관탈도가 있다.
유배객이 이곳에 도달하면 다왔다는 생각에
갓을 벗은 섬이라 하여 '관탈도'’이라는 지명.
관탈도에서 불과 30분이면 제주도에 도착한다.
1637년 광해군은 이곳에 들어와
3년만인 67세에 병사한 열악한 곳.
추사는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 때문에
현종 6년(1840) 55세 때 무고한 누명을 쓰고
현종 14년(1848)까지 9년간 유배되었던.,적거지.
1940년 추사 아버지
김노경은 고금도 유배.
추사는 9년간 제주 유배
1840년~1848년(추사 63세)
그로부터 3년 후인 1851년
추사는 다시 3년간 북청 유배.
이듬해 추사는 유배가 풀려
경기도 과천에서., 71세 서거.
................................
.................................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
추사는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하던 곳.
추사 적거지에서 바라본 '용머리 해안' 산방산.
제주시 남제주군 대정읍성 동문자리.,추사 적거지
남재주군 대정읍 추사 적거지는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대신에 돌담이다.
그러나, 주변 산과 바다는 창살 없는 감옥.
고려 말, 삼별초 섬멸 후 1세기 간 원나라 직속령.,제주
원나라 왕족이나 왕권을 위협했던 신하 170 명 유배가 최초.
그후 조선시대 본격적인 유배지로 등장한 시기는 연산군 이후.
연산군은 강화도 위리안치 2달만에 숨을 걷우웠다.
31세 한창 젊은 나이에도 견디기 힘들었던.,위리안치.
제주도는 5년 이상 유배형 또는 종신형 '유형 제 1 번지'
종신형을 선고 받은 유배자들 숫자가 압도적.
광해군, 김정희를 비롯 200 여명이 거쳐간 곳.
한번 들어가면, 거의 살아 나올 수 없었던 유배지.
유배 초,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년 뒤, 대정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 집으로 이사.
1948년 이곳은 제주 4·3 사건 때 불타 빈터만 남았다.
1984년 이곳은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건축.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며 지냈다.
추사적거지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은 높이 평가된다.
헌종 6년(1840) 안동 김씨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오게된 추사 김정희는 유배 초기에
표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후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1948년 4.3항쟁때 강도순의 집이 불에 타 없어져서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었다.
.
대정읍성 동문자리안쪽에 자리잡은 이곳은
기념관과 함께 초가 4채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시와 서화 등 작품 탁본 64점과 민구류 142점이 전시.
.
추사는 천자문 저자 한석봉과 쌍벽인 명필.
추사는 동학혁명의 사상적 중심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인 성향을 보면 연관이 있다.
.
추사는 함흥 황초령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해석.
1816년 북한산 비봉의 비문을 처음 판독해 냈던 학자.
궁중사찰 승가사에 묶으며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판독.
.
그전까지 무학대사가 세운 비로서 알려졌던 순수비.
그렇게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았던 추사.
청나라 유학파 경제학자이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는 병조참판까지 관직에 올랐지만
제주 9년, 북청 2년 등 13년간 귀양살이.
말년에는 사찰을 오가며 여생을 보낸 인물.
추사(1786-1856)는 성리학이 점차 폐단을 드러낼 무렵
새로운 실학 학문을 요구하던 19세기 전반에 활동하였다.
서예, 그림, 경학, 금석학, 천문학, 불교학에 뛰어난 인물.
실학은 정권에서 소외된 사상가들이 농민의 어려움을 대변
전통질서 붕괴를 막고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개혁 사상.
조선 말 성리학의 폐단과 병폐를 바로 잡으려던 깨끗한 인품.
'추사는 정약용과 더불어 실학 사상가.'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에서 당대의 석학.
청나라 고증학, 금석학, 청조학(淸朝學)의 제 1인자.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1879~1948)는
추사가 청나라 연경 학자들과 얼마나 깊이 교류했는지 고증.
추사는 한국인으로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을 차지한 위인.
1856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에서 71세로 생을 마감.
그곳 산등성이를 넘어 앵무봉 화암사에도 걸려있는., 추사 필체.
예산 화암사.,추사 필체
백파스님, 초의스님은 추사와 40 여년 호연지기들.
초의스님과 추사는 다산서원에서 처음 만난.. 지인.
정약용의 실학사상 영향을 받았던 초의스님과 추사.
세 사람 모두 차를 좋아했다.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이 어려워
풀(艸)과 나무(木)를 합쳐 차(茶)
차는 당나라에서 유래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있고
인도에서 허황후가 갖고 왔다는 남방 전래설이 있다.
지리산 화개골 쌍계사 일대는 우리나라 차문화의 요람.
다성(茶聖)이라 불리우는 초의스님의 詩 '취금설.
대흥사 개울가에 사는 물총새를 차맛에 비유한 시.
초의스님의 저서 '동다송(東茶頌)'에 실려있는 시.
"새벽 이슬 촉촉이 머금은 찻이파리 물총새의 혀 같네"
동다송은 중국의 차문화, 약효 및 명품 차를 소개한 책.
초의스님의 詩들은 한반도 차 문화를 엿보게 해주는 유산.
그는 해남 땅끝마을 인근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에서 운명.
1997년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초의선사
그의 출생지는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
그 높은 정신을 기려 생가복원, 유물 전시관
초의선사 추모비 추모각 다도관 등도 건립
15세에 출가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년간 수행
선 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 큰 족적을 남긴 분.
특히 당시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사
당시 명맥만 유지해 오던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
초의선사는 다산 추사 등 당대 최고 석학들과 교분.
불교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다.
무안읍에서 목포 방면으로 약 18km 정도 진행
목포 예술고교에서 우회전하면 초의선사 생가.
2006년 10월 전남도청 이전으로 활기찬 무안군.
'추사와 초의스님은 목숨걸 만큼 깊은 우정.'
초의스님은 제주도 유배지까지 추사를 찾아갈 정도.
그당시 제주도로 출항하는 배는 땅끝마을에서 출발.
조선 말기 제주도는 살아 다시 나오기 어려운 유배지.
'추사는 어떻게
'출륙금지령 지역'
제주도 유배지에서
무사히 살아 나왔을까?'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851년에는 '예송논쟁'으로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아버지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머물게 된다.
1858년(철종 7)10월 10일
7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세한도나 추사체로만
그를 평가한다는 것은
추사의 일부 만 보는 것.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할만큼
추사의 경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김한신의 증손이라는 명문가의 배경.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시 금석학
경학 불교학 서예 회화 등에서 최고봉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국제적인 석학.
추사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출세의 길을 걸었다.
1809년(24세) 생원시험과 1810년(34세) 문과 급제.
1839년 형조참의 후, 세도정치 틈에서 화를 입은 가문.
1830년 자신의 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에 유배되더니
1840년 윤상도 옥사가 재론되며 자신도 제주도에 유배.
1786년 (정조10년) 충남 예산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던.,추사.
........................
........................
추사는 흥선 대원군이 어릴때
서예, 그림 등을 가르쳤던 스승.
추사가 말년에 마곡사에 기증한 불경 400 여권과 불상.
청나라 유학시절그가 북경 사신으로 오가며 모은 소장품.
그 소장품들을 아낌없이 기증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추사.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귀가길에 71세로 운명.'
조선 사대부로는 드물게 부인을 애도한 추사의 '망부가'.
그가 생전에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
축첩제도가 성행했던 이조시대에 보기 드문 애처가 '추사'.
悼亡(도망) - 김정희 作
저승엘 가서 월하노인과 송사를 해서라도,
다음 세상에서는 부부의 지위를 바꾸리라.
나는 죽고 그대는 천리 밖에 살아 있어,
그대로 하여금 이 애통함을 절감케 하리.
1840년(헌종 6년) 제주 대정리에서 귀양살이 할때
한양에서 옥바라지하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던 시.
제주 귀양살이로 아내 임종도 못본 애통함을 담은 시.
'월하노인은 남녀 간 부부 인연 맺어준다는 노인.'
8년 후 1848년(헌종 14년)에 제주에서는 풀려났으나,
3년 뒤 1851년(철종 2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이듬해 과천 관악산 기슭 초당에서 향년 71세로 별세.
'명필 문장가이자 시인이고 화가였던 김정희.'
불교에 관한 이해는 범인을 능가할 경지의 '추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준 화가 추사의 그림.
추사는 이조의 명필로 유명한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건축.'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왕의 사위.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의 여인 중에서 유일했던 열녀.
명필인 증조부 재능과 열녀 증조모 절개를 닮은 추사.
화순옹주는 38세에 운명한 남편따라 10일 만에 운명.
물 한방울 입에 대지않고 통곡하다가 숨을 거둔 열녀.
병든 남편을 지극 정성 간호할 만큼 금술 좋았던 부부.
영조는 옹주에게 음식을 먹고 기운 차리라 일렀지만
이를 거부하고 죽자 딸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현재 추사 고택 열녀문은 영조 손자인 정조가 내린 것.
추사는 청나라에서도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인물.
불교를 탄압한 유림과는 적대관계지만 왕실과 인척.
영조는 이조 27 왕 중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왕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영조는 슬하에 공주는 없었기에 화순옹주를 애지중지.
'추사가 명문가문의 혈통 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왕의 딸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주(公主)와 옹주(翁主).
조선 초기에는 왕실 여인들의 호칭은 모두 공주였다.
성종 때부터 공주는 정실부인의 딸, 옹주는 후궁의 딸.
공주는 품계상 무계(無階)이며, 외명부에서 가장 상위.
옹주도 왕비 및 대비와 마찬가지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
'추사가 13년간 귀양살이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충남 예산 출생. 1809년(순조9) 생원, 1819년(순조19) 문과 급제
충청우도 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판을 역임.
24세 때 청나라 연경에 유학. 1840년(헌종6) 윤상도 옥사에 연루.
제주도 9년 유배생활 후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2) 헌종의 묘천 문제로 북청 귀양
이듬해 풀려나는 등 총 1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린 '세한도'는 추사 대표작.'
소나무는 허리를 굽혀서라도 빛을 추구하는 삶.
잣나무는 음지에서도 바르고 곧게 살아가는 삶.
즉, 송백(소나무, 잣나무)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
잣나무는 음지에서 살아도
소나무는 음지에서 죽는다.
소나무가 살 곳은 오직 양지.
음지(불의)와 타협조차 할 수 없는 소나무의 삶.
하여, 소나무 지조는 잣나무 절개보다도 선비답다.
송백은 옛부터 바람직한 선비의 마음 가짐을 뜻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늘 푸른 송백.
'세한도'는 곧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그림.
제자에게 송백 같은 선비가 되라는 스승의 가르침.
...........................세한도...................................
추사는 55세에 제주도로 귀양가 9년간 고통의 유배생활.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섬에서 혼자의 힘으로 살던 추사.
삭탈관직 스승을 유배지까지 찾아 온 역관인 제자 이상적
'청나라에서 귀한 책을 구해 계속 유배지로 보낸 제자.'
역관(통역관) 이상적은 청나라를 오가며 스승을 방문.
형벌 위험을 무릎쓰고 스승을 돕는 제자가 고마웠던 추사.
그 제자를 위해 추사가 그린 '세한도'는 <현재 국보 180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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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의 그림.
그곳까지 찾아온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송백에 비유.
추사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준다.
'날이 차가워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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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마음을 담아 그린 세한도는
후지츠카 치카시 소장품이 되었다가
1944년 손재형이 넘겨 받았고 현재는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위탁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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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쓴 작품.
추사 연구가 후지즈카 소장했던 추사에 관한 많은 자료.
2차 세계대전 말 미군의 동경 폭격으로 대부분 타버렸다.
'그래서, 그 명성에 비해
전해오는 추사 유품은 희귀.'
1856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에서 71세로 생을 마감
그곳에서 산등성이 넘어
앵무봉에 있는 화엄사에도
걸려있는 추사 김정희 필체.
추사는 조선의 명필로 유명한 김한신의 증손자.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왕의 사위.
하순옹주는 이조 왕실의 여인 중에서 유일한 열녀이다.
재능은 재능을 낳고,
사상은 사상을 낳고,
명필은 명필을 낳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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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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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조선조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조선후기 학자·서화가·금석학자.
본관 경주(慶州), 충남 예산 출생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할아버지 때부터.
당시 충청도 53현에서 한 칸씩 지은 53칸 집
행랑채 19칸이 손실되어 현재 34칸만 남아있다.
앞으로 예당평야가 펼쳐지고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는 명당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 안채와 안채 뒤쪽에 사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
조선 후기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추사 김정희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 추사 김정희 선생.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독서와 사색을 통해 교양이 몸에 배었을 때 가능하다는 관점.
시서화 삼절 가운데서도 서(書) 부분이 특히 그렇지 않나 싶다.
시가 읽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畵)은 보는 예술이라는 측면
글씨(書)는 양쪽을 겸비한다는 의미.
고택 안채에 나무 한그루조차 조경된 게 없다.
영조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한 때문
'ㅁ자 모양의 집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괴로울, 부족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무 한그루만 심었다.
안채에는 부엌 만 있다.
이것도 왕실에 대한 예의.
영조는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이 죽은 후
딸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곳까지 내려온 영조가 딸에게 밥먹으라 명했지만
그 뜻을 거스르고 굶어죽자 정려문을 하사하지 않았다.
당시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게 큰 죄인 때문
결국, 화순옹주 조카인 정조가 정려문을 하사해
임금의 핏줄로는 유일한 정려문이 이곳에 생겼다.
정려문 옆으로.,'월성위 & 화순옹주' 합장묘
월성위 묘의 비석 글씨는.,'정조대왕의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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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북정(戀北亭)..................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조선중기 정자.
원래, 조천성 바깥 객사로., 첫 축조 연대(?).
선조 23년(1590) 이옥 절제사가 성을 동북쪽으로
돌려 쌓은 다음 정자를 그 위에 옮겨 세워 ‘쌍벽정’.
‘쌍벽’이란 말은 청산도 푸르고 녹수도 푸르러서 쌍쌍이
푸르기 때문이라는, 제주도 특유의 풍치를 담은 것이란다.
선조 32년(1599)에 성윤문 제주목사가
그 건물을 보수하고 ‘연북정’이라 개칭.
‘연북(戀北)’은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북쪽 임금에게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는.,뜻.
'그리움일까?' '원망일까?''사모일까?' '충정일까?'
조선시대 제주도는 창살 없는 감옥.
망망대해 '제주도 관문' 연북정(戀北亭).
유배죄인 관문이자, 신구(新舊) 관리.,관문.
죄인이나, 신구 관리나
모두 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이 연북정은
여러 차례 보수.
확실한 기록은 없다.
건물은 높이 14척의 축대 위에 동남향으로
조천포구 옆에 자리 잡았는데 건물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전면 3칸, 측면 2칸)을 쌓았는데
전후좌우 퇴와 기둥 배열 방식 등이
모두 제주도 민가와 같고, 바닥은 마루.
내부는 개방. 지붕은 물매가 낮은 합각지붕.
사각 주초에 각기둥, 기둥머리에 퇴보를 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장혀를 보내어 도리를 받쳤는데
사괘맞춤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바닥은 툇간이 토상(土床),
내진에는 우물마루로 되어
사방이 정자처럼 틔어있지만,
예전에는 석축 벽을 둘러 사용.
단청도 없는 간결함과 더불어,
내진고주(內陣高柱)의 보아지와
판대공의 투박한 마무리, 지붕의 물매가
낮은 것 등이 특징(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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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죄인 유배지'였던.,제주 대정현
추사 유배지는 '광해군. 하멜 일행과 같은 곳.
조선시대 - 제주도.,추사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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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0.,추사유배지 전경.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제주특별자치도
지방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추사적거지를
'추사유배지(秋史流配址)'로 명칭을 변경,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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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8.
국가지정 사적으로 승격된 제주도 추사유배지(秋史流配地)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 예술혼을 기리는 유물전시관.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추사기념관(188㎡)이 1984년에 지어져
낡은데다 2층으로 재현한 초가들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일자
이를 헐어내 유물전시관을 새로 건립키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안성리 1661의1 일대 5천245㎡에 2010년까지
3년간 75억원(국비 및 지방비 각 50%)을 투입해
건립하는 추사유물전시관은 기존 건물 부지에 대한
유물발굴조사 뒤 연면적 1천192㎡로 규모로 세워진다.
유물전시관은 추사선생이 제주 유배생활 때 남긴
'세한도(歲寒圖.국보 188호)'를 모티브로 설계했고,
지하층은 전시관 사무실 관리실, 지상층은 추사기념홀.
추사는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 옥사에 연루.
제주도로 유배돼 9년 동안 머물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며 많은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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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조선시대.,'유배의 땅' 대정현
제주 대정현.,대정읍성
대정현
제주 추사유배지.,추산관
추사유배지(제주특별자치도 지방기념물 제59호)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제주특별자치도 지방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추사적거지를 '추사유배지(秋史流配址)'로 명칭을 변경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지정했다고 2007년 10월 10일 밝혔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생애..............
1786(정조10)∼1856(철종7).조선 말, 문신·실학자·서화가.
조선조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출계란 양자로
그 집 대를 이음.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
(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
그가 문과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할 만큼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 급제
그는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 유배.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1836년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 역임.
1834년 순조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1848 9년간 제주도 유배
헌종 말년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김씨 득세 시기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과천과 인연은 1851년 당시 영의정이던
친구 권돈의 일에 연루되어 북청으로 유배
풀려난뒤 과천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추사는 삭탈관작된 생부 김노경의 복원을 위해
한양에서 가까운 과천의 주암동에 묘역을 모시고,
아버지가 조성한 과지초당에 4년 동안 거주하면서
불이선란도, 판전, 대팽고회 대련 등 작품을 남겼다.
과천에서 봉은사를 오가던 그는 71세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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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지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