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거주하는 김대호라는 분이 쓴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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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으로 기억된다.
그 해 1월4일 미국 의회 1백3기 개회식이 열렸다. 장소는 워싱턴의 한복판에 위치한 의사당 본관 대회의장이었다. 기자실에서 기사 송고를 하고 있는데 제이 킴 호명이 들렸다. 김창준의 미국 이름이 제이 킴이다.
미국 의회 기자실은 기자들에게 매우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3층 기자실에서 문 하나만 열면 의사당 본관과 바로 연결된다. 좌석 배치도 환상적이다. 의장단 석 뒤에 앉아 모든 의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체크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제이 킴 호명을 듣고 바로 기자전용 좌석으로 갔다. 초선의원들의 선서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원 의장이던 폴리 의원이 물었다 “ 귀하는 헌법을 준수하고 모든 적으로부터
미국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제이 킴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귀 뒤쪽까지 쳐들고 “예스‘라고 답했다. 폴리 의장은 ”하나님 이 분을 축복하소서“라고 응수했다 .
선서를 마친 김 의원이 방청석을 올려다보았다. 부인 김정옥 여사와 가족들을 찾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 축하해주었다. 김 의원도 손을
들어주었다. 김창준 의원과의 첫 번째 만남은 이렇게 눈인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에 살다보면 연방 의원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 교과서에는 미국의 정치 구조를 대통령 중심제로 정의해놓고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무게 중심이 의회 쪽에 더 실려있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미국 의회는 막강할 수밖에 없다.
1776년 미국은 영국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다. 그 주체는 동부 13개 주의 대표로 구성된 식민지의회였다. 조지 워싱턴은 이 식민지 의회에서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뽑혔다.
그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도 이 의회였다.
모든 것을 법으로 따지는 나라에서 법을 만드는 의회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법안을 주로 행정부가 만들어 국회의 동의를 받는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입법 과정에 행정부는 일체 개입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전적으로 의회가 관장한다. 미국을 움직이려면 의회를 우선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나라 예산과 감사원도 의회 소관이다. 행정부의 고관들은 반드시 의회의 청문회와 임명 동의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검 또한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가 결정하면 대통령은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 기간 연장 철회 따위는 대통령에게 권한이 없다. 그 자신만만하던 닉슨 대통령도 의회가 탄핵절차에 들어가자 아예 사퇴해 버렸다.
워싱턴을 처음 여행 온 사람들은 빌딩의 높이가 의외로 낮은 것을 보고 놀란다 .
가장 높은 빌딩이 10-12층이고 나머지는 그 이하이다. 뉴욕이나 시카고에는 100층을 넘어가는 마천루 빌딩들이 줄을 서 있는데 유독 워싱턴만큼은 아담하다. 마치 시골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 이유가 참 흥미롭다. 건물의 고도 제한을 의사당 높이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의회 보다 더 높이 짓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의회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민간이 희생하는 셈. 미국 사람들은 그 만큼 의회를 사랑한다. 아니 존경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도시 구조도 의회 중심이다 마름모꼴의 한 중앙에 의사당을 배치해 놓았다.
워싱턴의 모든 번지수는 의사당으로부터 시작한다. 백악관은 서북쪽 구석에 치우쳐 있다.
취임선서 이후 103기 본회의가 시작됐다.
첫 발언자로 제이 킴이 나섰다 모두들 놀랐다.
미국도 의회에서 경력을 많이 따진다. 방 배치도 고참순이다 . 다수당의 최 다선 의원이 의장을 맡은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이런 풍토에서 까마득한 초선 의원이 개회식 날 첫
발언대에 나섰으니 화제가 됐다.
이날 발언의 주제는 미국 자치령에도 다른 지역과 똑같은 의결권을 부여하자는 민주당 제안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 발언으로 김 의원은 일약 유명해졌다.
그 대신 민주당 인사들한테는 확실하게 찍혔다.
김창준 의원은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사업을 하던 김수봉 씨의 외아들이다.
4대독자 이기도 하다. 청운초등학교을 다녔다. 보성중 재학 시절 6.25를 만나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도로 피난을 갔다. 대전중 재학 중 전쟁이 끝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로 진학했다.
대학은 중앙대로 갔다. 이내 중퇴하고 군에 입대한다. 군번은 10324385.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의무관으로 근무 중 악성 치질이 발생하여 후송되었다가 의병제대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
후송 기간까지 포함해 1년 남짓 군에 있었다. 본인은 병도 없었는데 빨리 제대하고 싶어 거짓으로 칭병을 한 나이롱 환자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유학 길에 오른 것은 1961년 1월.
한국의 부정 부패가 너무 싫어 조국을 떠났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가진 돈이라고는 단돈 100달러. 식당에서 일하면서 체피 대학을 다녔다. 병원에서 걸레질도 했다. 이후 남 가주 대학으로 옮겨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전공은 환경공학.
상수도와 하수도를 깨끗하게 만드는 게 주특기.
1977년에 회사를 설립한다. 제이 킴 엔지니어링 Inc.
정부가 발주하는 폐수 처리장의 설계 용역이 주 업무였다. 주야로 뛰어 서부에 가장 큰 설계회사로 키웠다. 창립 15년 만에 미국 500대 회사로 발돋움했다. LA 타임즈는 이 성공담을 크게 보도했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있던 아내의 권고로 당시 새로 생긴 다이아몬드 바로 옮긴다.
여기서 김창준의 정치인생이 시작된다. 다이아몬드 바의 초대 의회 임기가 끝나고 2대로 넘어갈 때였다. 기존 의원 중에 한 명이 주 상원으로 가는 바람에 공석에 생겼다.
설계 전문가라는 점을 부각시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교통 환경 범죄 문제 등에 대해 자세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선거에서 1000표 차이로 상대를 누르고 당선됐다.
1년 반 쯤 의원 생활을 하고 있는데 시장이 공석이 됐다.
그 곳은 시 의원 들이 상호 호선으로 시장을 뽑는다. 여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1년 2월 김창준은 다이아몬드 바의 시장으로 공식 취임한다.
캘리포니아 주는 계속 인구가 늘고 있었다. 그 결과 연방 하원의석이 3석이나 증가했다.
김창준 시장인 살던 지역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른바 캘리포니아 제 41구역이다.
신설 선거구이다 보니 현직 의원이 없었다. 공화당에서 후보를 물색하다가 김창준 이란 인물을 주목하게 된다. 그 해 12월 테넌트가 찾아왔다.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로 공화당의 실력자였다. 출마를 권했다. 엔지니어 출신의 성공한 기업인으로 다이아몬드 시장에까지 오른 경력을 높이 산 것이다.
김창준 시장은 도전장을 냈다.
선거전이 시작될 때 인지도가 3%밖에 안되던 그는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10% 포인트 차이로 1위를 해 공천을 받았다. 본선에서는 민주당의 밥 베이커 후보를 두 배 차이로
따돌렸다. 제이 킴은 60% 베이커는 30% 였다. <계 속>
김 창준 전 의원은 숱한 기록을 세웠다. 최초라는 칭호가 무척 많다.
1992년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한국계 최초의 연방의원이 됐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김 전 의원은 또 공화당의 첫 아시아계 연방 의원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건국 이후 숱한 정치인들이 명멸했지만 아시아 태평양 지역 출신으로 연방의원에 까지 오른 인물은 지금 이 시각까지 김 전 의원을 포함 33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창준 의원은 워싱턴에 왔다. 의원 사무실은 캐년 빌딩 5층에 있었다. 4층 건물을 5층으로 개조한 것이어서 엘리베이트가 4층까지만 운행했다.
김창준 의원을 만나러 자주 드나들었다. 김 의원은 항상 바빴다. 움직이면서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 간혹 의원 식당에서 함께 식사도 했다.
김창준 의원은 영웅이었다.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살아있는 신화의 주인공이다. 미국에서의 인기는 더 높았다. 미국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자랑하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다. 무일푼에서 온갖 고생을 다음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는 것. 그 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 김 의원이 그 샘플인 셈이다.
성공 비결이 참 궁금하다.
영어도 잘 못하는 마이노리티 이민 1세가 시장을 거쳐 연방의원에 까지 오른 것은 기적에 가깝다. 아무리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김 전 의원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장 궤적을 보면 그런 측면이 있다고 볼 수 도 있다. 새로 선거구가 생기거나 기존의원이 다른 곳으로 가 공석을 만들어준 것 등이 큰 도움이 됐다고 본인도 시인한다
기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기회가 와도 주춤거리거나 기회가 온 줄도 모른다 . 김 전 의원은 찾아온 기회를 100% 활용하는 적극성을
지녔다.
가까이서 본 김 전 의원의 가장 큰 장점은 성실하다는 사실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회기 중에 한 번도 투표에 빠진 적이 없다.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체육관을 찾아 몸관리를 한다.
그는 또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소수인종이라고 스스로 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조한다. 소수인종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거꾸로 치고 나온다. 변호사와 선거전을 벌일 때는 자신은 법률지식이 없다는 사실을 실토한다 자기분야가 아니면 솔직히 시인한다 . 그 대신 “변호사들 특유의 술수가 없으며 참신하다”는 대목을 강조한다.
도전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겁이 없다.
미국유학 첫 해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된 적이 있다. 영어를 못하던 그는 미국 여학생을 한 명 포섭한다. 모든 연설은 그로 하여금 대신하게 한 것. 이게 동정표를 얻어 당선이 됐다. 초선 의원이면서도 첫 연설을 자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생에는 곡선이 있다고 했던가.
김창준 의원은 선거법 위반혐의 등으로 곤욕을 치른 다음 1998년 4선 고지에서 탈락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선거법 위반이라고는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하다. 잘 나가던 사람이 넘어지면 동정을
하기보다는 고소해 하는 게 세상 인심이다.
낙마한 후 김 전 의원에 대해 비난하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미주 한인 100주년 기념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백미는 훌륭한 코리안 아메리칸을 뽑아 축하해주는 것.
여기에 김창준 이란 이름이 없다. 이민 1세로 연방의원까지 올라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김 의원은 조국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민 2세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 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런 인물이 이민 100주년 행사에 빠져있다.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답이 기관이다. 훌륭한 분이기는 하지만 사생활이 이상하단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주류사회 진출을 소망으로 살고 있다. 술 먹는 주류가 아니라 백인이 주도하는 미국에서 주인으로 살고자하는 것이다. 그 꿈은 김창준 이라는 사람이 이미 몸으로 실현했다.
이민 백주년 행사에서 그런 인물을 왜 배제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고려대가 지난 해 김창준 전 연방 의원을 동북아연구소 연구교수로 추대했다. 인재는 인재만이 알아본다고 했는데 어윤대 총장 출범이후 고대의 세계화 움직임이 남다르다.
김 의원은 고대 교수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박사학위도 없는 사람에게 교수 직분을 주는 일은 흔치않은 일이다 . 시련 끝에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김 전 의원에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80의 나이에 출애급을 시작했다. 김 전 의원의 호적상 출생은 1939년생이다. 만64세이다. 실제로는 66세이다 . 적수공권으로 어메리칸 드림을 이룬 그 정신으로 못할 것이 없다. 특히 대학은 김 전 의원을 더욱 성숙한 인물로 거듭나게 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가까이서 본 김 전 전 의원은 너무 부지런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당장에 무엇을 하려고 안절부절 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 이번 기회에 한국 사회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제안을 하고 싶다. 김 전 의원은 유학을 떠나기 전 1950년대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을 간혹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교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다른 일을 벌이기보다는 대학의 연구시설을 활용해 한국을 입체적으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 전 의원이 신문을 만든다는 풍문은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한국의 자리에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특히 한국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
김 전 의원은 다이아몬드 바 시장에 당선된 직후 인 1992년 1월 한국을 방문했다.
연방의원에 당선된 직후에도 한국을 찾았다. 이 때는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의 충북 옥천의 유세에 까지 참석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술수가 난무하는 한국 정치에 이용만 당했다.
이러한 잦은 한국 방문과 유착이 워싱턴에서의 김 전 의원 생명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선거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을 때에도 현대 등 한국계 기업으로부터 편법으로 후원금을 받았다는 혐의에 시달렸다.
물론 김 의원의 몰락 배경에는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의 시기 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겉으로는 한국과의 관계에서 꼬투리를 잡고 나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공 사석을 막론하고 한국에 대한 비난을 자제해달라는 부탁도 하고싶다.
비난은 김 전 의원에 대한 비난으로 다시 돌아온다. 비난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격려가 조국에 더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또 있다. 사람을 아끼라는 주문이다.
김 전 의원은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배경으로 큰 업적을 이루었다. 돈 한푼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선거운동을 해준 자원 봉사단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김 전 의원에게 여쭙고 싶다 .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는가.
김 전 의원을 욕하는 사람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다.
그대들은 김 전 의원을 얼마나 잘 아는가.
흑인들은 최초의 연방의원을 지낸 사람을 기리는 기념관을 지어놓고 있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한국에서 군복무까지 마치고 미국에 이민 와 연방 의원까지 역임 했다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이다. 호불호를 떠나 김 전 의원은 우리의 자랑이다. 우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성경에 보면 "사람 중에 의인은 없다" 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단점은 숨겨주고 장점을 키워주는 것이 미덕이 아닐까
우리도 이제 김창준 기념관를 추진 해보면 어떨까. 김 전 의원을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의 후손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주인이 따로 없는 나라이다. 성공하면 주인이다.
한국계 연방의원이 10명만 나와도 미국의 한국 대접이 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은 미국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생존하고 있다
미국의 심장에 들어가 미국을 흔들 능력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김창준 전 의원의 인생 유전 스토리는 우리도 얼마던지 미국 의회를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제2 제3의 김창준이 계속 쏟아졌으면 한다.(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