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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데이비슨
진리의 구조와 내용
(Davidson 1990, 정리: falanbada, 1999. 4. 19)
만일 사유하는 피조물이 없다면, 세계 속의 아무 것도, 아무 사물이나 사건도 참 또는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SCT, 279).
듀이는 실용주의적 진리론로 대변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i) 진리에의 접근은 철학만의 특권이 아니다. (ii) 진리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관심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듀이가 공박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의 대응설이다. 대응설은 진리를 사유와 실재 사이의 대응으로 간주한다. 이때 '실재'는 실험적 탐구나 일상적 관행을 통해 접근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듀이는 대응설의 이러한 위선을 경멸했다. 그는 '[대응설이] 철학자들은 과학(science)과 다른, 그리고 우월한 앎의 양식을 획득하기 위한 특권적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논제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되었다'(SCT, 279) 생각했다[1]. 듀이는 진리가, 심지어 철학적 진리조차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R. Rorty는 {실용주의의 결과}(1982)에서 진리가 철학적인 재미를 불러 일으킬 만한 것이 못되며[2], 바로 이것이 '실용주의의 귀결'이라고 주장한다(ibid., xiii). 진리의 범위가 인간의 비초자연적(nonsupernatural) 능력에 의해 한계지워진다는 생각은 C. S. Perce나 W. James같은 고전 실용주의자들에게 찾아 볼 수 있고, 현대에는 H. Putnam, M Dummett, R. Rorty 등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SCT, 280). 데이비슨은 실용주의자들의 진리설에 별 진지한 것이 없음을 암시하면서도, 실용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 즉 '진리를 인간의 바람, 믿음, 의도 및 언어의 사용과 어떻게 연관시켜야 할지의 문제'가 진리에 대한 사유에 있어서 관건임을 인정한다(SCT, 280).
그렇다면 인간의 태도와 진리 사이의 올바른 연결은 어떤 것인가? 진리의 바로 그 개념을 구성하는 그 연결은 어떠한 종류의 연결인가? 이 문제에 대한 데이비슨의 접근은 타르스키의 진리론을 경유한다. 데이비슨에 의하면, 타르스키의 진리 개념은 '하나의 언어에 관한 실질적(substantive) 진리들을 전달해 주는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SCT, 281). 그러나 타르스키 진리론에서 진리의 실질적 내용을 끄집어 내기 위해서는 타르스키가 서술한 것 이상의 개념이 필요하다. 데이비슨은 개입되어야 하는 그 이상의 무엇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진리론들과 다른 진리론, 즉 '진리 개념을, 사고와 행위를 이해하고 비판하고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도식의 본질적 부분으로 만드는'(SCT, 281) 진리론을 제시한다.
I. 타르스키의 진리론은 수축주의적인가?
F. Ramsey에 의하면, "'시저는 살해되었다는 참이다'는 단지 시저는 살해되었다를 의미할 뿐이다". '-는 참이다'(it is true that-)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잉여설(redundancy theory)이라고 한다. 잉여설은 'p라는 명제는 참이다'를 명제 'p' 자체와 동일시한다. 이것은 '-는 참이다'를 진리함수적 문장 연결사[3]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는 참이다'를 이와 같이 해석할 때, '-는 참이다'는 아무런 인지적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 나아가 '참된'(true)이 하나의 술어로 쓰일 경우(is true)에도, 진리 술어는 '푸르다', '둥글다', '미워하는 관계이다' 따위의 술어들과는 달리, 아무런 실질적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는, 내용 없는, 투명한 술어로 간주될 수 있다. 하나의 문장 뒤에 진리 술어를 적용하는 것은 그 문장을 주장하는(asserting) 또 다른 방법에 불과하다. 램지는 하나의 언어에 등장하는 모든 진리 술어를 잉여적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고, 긍극적으로 모든 맥락에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진리에 대한 독립된 문제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언어적 혼란이 있을 뿐이다"([사실과 명제], 142).
램지는 '그가 말한 모든 것은 진리이다'(everything he says is true)라는 표현에 대해, 만일 우리가 명제들을 aRb의 형식으로 한정한다면, 진리 술어를 제거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다: 모든 a, R, b에 대하여, 만일 그가 aRb를 말한다면, aRb. 램지는 모든 형식의 명제에 대해 이러한 번역을 확장하면, 비록 그 번역이 복잡해지겠지만,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사실과 명제], 143)고 주장한다. 모든 형식의 명제들에 대해 그 논의를 확장한 것은 타르스키의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타르스키의 진리론이 '참이다'를 메타언어 속에 포함된 술어로 간주함으로써, 램지 잉여설의 한계를 넘어섬에도 불구하고, 많은 철학자들은 타르스키의 진리론을 램지 이론의 계승으로 간주하였다. 이들 철학자들의 목록에는 Quine, Putnam, Rorty 등이 포함된다.
특히 Paul Horwich는 "진리 개념은 타르스키에 의해 완전하게 포착되었다"("실재주의의 세 형식", 192)면서, 타르스키 진리론에 나타난 것이 진리 개념에 담긴 모든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수축적(deflationary) 진리론'을 타르스키의 정의에 담긴 것 이외에 진리에 대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에 담긴 것이란 (i) 특히 탈인용부호적 특징으로 대변되는 진리술어의 형식적 특징들, 그리고 (ii) 예컨대 무한 연접문을 주장하기 위한 장치로서[4] 진리 술어의 유용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를 수축주의적 진리설로 읽을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이다(SCT, 284): 만일 진리 정의가 주어지고, '"눈은 희다"는 참이다'는 형식의 문장이 주어질 때, 우리는 그 문장이 '눈의 희다'와 동치(equivalent)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즉 '눈은 희다'가 단지 언급되기만 한 문장('"눈은 희다"는 참이다')은 문장 '눈은 희다' 그 자체와 동치이다. 그리하여 "눈은 희다"에 진리 술어 '참이다'(is true)를 적용하면, 인용부호를 벗기고, '눈은 희다' 그 자체가 등장하게 된다. 이때 진리 술어는 인용부호 벗기기 장치로 작용한 셈이다. 그러나 진리 술어의 이러한 탈인용부호적 성격은 진리술어가 타르스키의 정의에서 처럼 명시적으로 정의되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snow is white"는 참이다'라는 문장과 동치인 문장을 단순히 인용부호를 벗김으로써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가 한낱 탈인용부호적 정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에서 놀라운 것은 진리 술어가 어떤 의미론적 술어나 이외의 어떤 다른 술어들에 의해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이다(SCT, 285). 타르스키는 개별적인 언어를 위한 진리 술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즉 그가 정의한 진리 술어는 '영어에서 참이다', '독일어에서 참이다', '산술언어에서 참이다' 따위의 개별적 언어를 위한 진리 술어이다. 우리는 '독일어에서 참이다'를 정의하기 위해, 메타언어로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이때 '독일어에서 참이다'라는 술어는 독일어를 위한 진리 술어이지만, 이 경우에 영어에 속해 있는 술어이다. 메타언어인 영어를 위한 진리 술어, 즉 '영어에서 참이다'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메타메타언어, 예컨대 국어가 필요하다. 여하튼 타르스키는 하나의 개별적 언어를 위한 진리술어를 메타언어 차원에서 형식적으로 정의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바로 그 개념을 정의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각 언어를 위한 진리 술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엇을 추상해 내지 못했다. 이 점은 Max Black와 Dummett에 의해 지적된 바 있지만, 사실 타르스키는 처음부터 진리 개념의 정의불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리 일반의 개념이 정의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반적 정의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데이비슨은 타르스키의 진리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가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퍼트남이나 더메트처럼 타르스키더러 그가 진리를 정의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는 진리 개념이 새로운 언어에 대해, 또는 하나의 언어에 새롭게 도입된 낱말에 대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SCT, 287). 바로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타르스키에 있어서 진리 일반의 정의불가능성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르스키는 하나의 언어를 위한 진리 술어를 명시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먼저 각 기본적 술어나 이름들의 외연 또는 지시관계를 경우 경우마다 할당해야 했다. 이런 식의 정의는 그 다음의 경우, 새로운 경우, 나아가 일반적 경우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예컨대 타르스키의 정의는 만일 '눈'이 '숯'을 뜻했다면, 문장 '눈은 희다'는 눈이 검었을 때 그리고 오직 그때만 참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타르스키의 정의는 진리와 의미 사이의 본질적 연결을 확립해 주지 않는다. 타르스키 정의의 이러한 한계를 통해, 퍼트남은 타르스키 이론 자체를 비판하고, S. Soames은 타르스키 정의의 수축주의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타르스키가 작업을 통해 규정된 진리 개념은 진리의 모든 본질을 망라한 것이라는 생각이 Rorty, Ledds, M. Williams, Horwich, Soames, Quine 등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이 목록에서 Horwich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이들은 타르스키가 정의한 진리는 의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로티는 데이비슨까지 이 목록에 삽입시킨다.
그러나 데이비슨 자신은 위에 목록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타르스키의 진리론을 수축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더메트와 퍼트남의 방식으로서, 타르스키가 진리 개념의 본질적 측면을 포착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소에임즈의 방식으로서, 진리 개념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심오하고 흥미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데이비슨은 두 방식 중에 첫째 것에 점수를 준다. 왜냐하면 타르스키의 작업은 오히려 진리 일반의 개념이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타르스키의 정의는 진리 일반의 본질적 측면을 포착할 수 없었다. 만일 '국어에서 진리', '히브어에서 진리', '중국어에서 진리' 등의 개별적 언어를 위한 수 많은 진리 정의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 즉 하나의 단일한 진리 개념이 존재한다면, 타르스키의 정의가 가닿지 못한 진리의 어떤 측면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SCT, 288). 진리의 그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로, 절대적으로 기본적인 어떤 것'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타르스키의 이론은 그것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II. 타르스키식 진리론은 순수 논리적 이론인가?
타르스키 이론의 위와 같은 올바른 한계와 독립하여, 그의 이론에 대해 잘못 이해된 것이 있다. (이것 또한 그의 정의가 가진 나열적 성격에 기인한다.) 그것은 타르스키식 진리 술어가 심지어 경험적 진술의 경우에도 이것을 논리적 진리로 만들어 버린다는 지적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퍼트남은 타르스키의 설명에 대해 "하나의 설명이 실패할 수 있는 만큼 나쁘게 실패[했다]"("A Comparison of Something with Something Else", 64)고 혹평했다. 소에임즈는 타르스키식 진리 술어의 적용이 경험적 내용이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르스키의 작업과 양립할 수 없다("진리론이란 무엇인가", 425)고 주장했다. 그리고 J. Etchemendy의 주장에 의하면, 타르스키의 진리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T-문장들이 단지 논리적 진리일 뿐이며, 그래서 논리학이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것을 T-문장이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비록 T-문장들이 겉으로 대상언어에 관한 실질적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 언어의 의미론적 속성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심지어 그 언어의 문장들의 진리조건에 관해서도 전해주지 않는다"("Tarski on Truth and Logical Consequence", 57). 우리가 정의할 때의 'if and only if'를 공리나 정리의 'if and only if'로 혼돈할 때, 즉 약정적 정의에서 실질적 내용을 읽으려 할 때, T-문장으로부터 대상언어의 의미론적 속성에 관한 정보나, 대상언어 문장의 진리조건에 관한 정보를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 에취멘디의 설명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의 언어에 관한 실질적 사실들을 진술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T-문장 속의 진리 술어 자리에 '직관적 진리 개념 비슷한 것을 전송하는 술어'를 대입해야 한다(STC, 290). 그리하여 에취멘디에 의하면, 진리를 타르스키식 정의하려는 기획과 하나의 언어에 대한 형식적이면서 실질적인 의미론적 설명을 제공하는 기획은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전자는 '모든 맥락에서 찌꺼기 없이 제거될 수 있는 술어를 요구하고' 후자는 '고정된, 메타이론적인 진리 개념을 요구한다'. 결국 타르스키의 진리론과 언어의 해석을 위한 의미론 사이의 관계는 전혀 필연적이지 않다.
퍼트남, 소에임즈, 에취멘디가 공유하고 있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타르스키의 T-문장은 단지 하나의 언어에 관한 경험적 진리를 진술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동어반복 또는 '항진명제'(tautology)일 뿐이다. 퍼트남은 이 주장을 통해 타르스키가 정의한 것은 전혀 진리가 아니라고 결론내린다. 반면에 소에임즈는 진리의 수축주의적 성격을 옳게 설명해 주었다고 본다. 에취멘디는 경험적 의미론은 타르스키가 추구하지 않은 연구라고 생각한다(SCT, 290). 그러나 "진리의 의미론적 개념형성"(1944)에서 타르스키는 "의미론적 개념형성이 상당한 범위로 상식적 용법과 합치한다(conform)"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이 정의하려는 진리 개념이 일상적 진리 개념과 큰 차이가 없기를 의도했다. 여기서 타르스키가 생각하고 있는 일상적 진리 개념이란, "'한 언어의 표현들과 그러한 표현들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 및 사태 사이의 연결'을 표현하는 개념"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옛 낱말에 새로운 의미를 할당하기 보다 옛 개념의 실제적 의미'를 포착하기를 원했다(SCT, 291). 다시 말해, 타르스키는 그의 정의가 순수하게 약정적일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우리는 타르스키의 관심이 '오직 해석된 언어를 위한 진리를 정의하는 데' 있었다(SCT, 292)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의가 실질적으로 적합하고 일상적 용법과 어울릴 것을 요구했을 때, 그는 규약 T가 이 조건을 만족한다는 것을 논증하려 했다(SCT, 291). 그는 모든 T-문장들을 필함하게 되는 그러한 진리 술어는 우리의 직관적 진리 술어와 똑같은 외연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은 T-문장이 경험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SCT, 292). 그는 각각의 개별적 T-문장들을 진리에 대한 "부분적 정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의 언어, 즉 영어와 같은 해석된 언어가 주어지면, 우리는 '"눈은 희다"는 눈이 흴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참이다'의 형식의 모든 문장들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다". 결국 에취멘디, 소에임즈 및 퍼트남의 타르스키 해석은 타르스키의 원래 목표와 그의 성취의 본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취멘디와 타르스키를 화해시키기 위해 단지 "한 언어 L을 위한 진리 술어(말하자면, 's is trueL')에 대한 타르스키의 정의에다 타르스키의 술어가 L의 모든 그리고 오직 참된 문장들에만 적용된다는 진술을 첨가시키면"(SCT, 292) 된다. 'L의 모든 그리고 오직 참된 문장들'에서 '참된'이란 '진지한 의미론을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실생활의, 실질적인, 정의되지 않은 개념'이다. 데이비슨은 '타르스키의 술어는 L의 모든 그리고 오직 참된 문장들에만 적용된다'는 진술을 "진리 공리"(truth axiom)라고 부른다.
타르스키가 "형식화된 언어들 속에서 진리 개념"에서 기술한 형식화된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생각해 보자. 대상언어를 위한 진리술어의 정의들을 메타언어에다 첨가시키자. 그러나 이 정의들은 정의로 부르지 말고, '대상언어의 의미론을 기술하는 데 적합한 의미론적으로 유의미한 표현들'로 간주하자. 그러면 "이 새로운 체계는 대상언어의 의미론을 정확하게 기술하지만, 반면에 타르스키의 체계는 해석된 개별적 언어에 관한 어떤 것, 즉 참 혹은 거짓을 주장하는 데 쓰일 수 없는 한 술어를 정의할 뿐이다. 타르스키의 정의는 필함된 T-문장을 논리적 진리로 돌려 놓지만, 새로운 체계는 그들을 문장들의 진리조건에 관한 유익한 진술이 되게 한다"(SCT, 293). 메타언어 속의 진리 술어(이 술어는 대상언어를 위한 진리 술어이다)를 정의로 보지 않고, 경험적 적용을 지니고 있는 어떤 표현으로 간주한다면, 바뀌는 것은 대상언어의 형식적 체계 자체가 아니라, 그 체계를 기술하는 방법이다. 원래 타르스키의 체계가 무모순적이라면, 새로운 체계 역시 무모순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옛 개념의 실제적 의미를 포착하려는' 의도를 지닌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보다 분명해졌다.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가 순수하게 약정적(stipulative)이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T-문장들은 단순히 논리적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가정을 반드시 받아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데이비슨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만일 우리가 '태양의 행성이다'(is a solar planet)라는 술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고 생각해 보자. '만일 x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중 하나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x는 태양의 행성이다.' 우리는 이 정의로부터 예컨대 '지구는 태양의 행성이다'와 같은 정리(소위 P-문장)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즉 위의 정의를 '지구는 태양의 행성이다'를 필함하게 된다. 이 경우 '지구는 태양의 행성이다'는 논리적 진리인가 경험적 진리인가? 만일 우리의 정의가 순수하게 약정적 정의라면, 이것은 논리적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순수하게 약정적 정의가 아니라면, 이것은 논리적 진리인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하나의 정의가 순수하게 약정적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형식적 체계 그 자체를 들어다 봄으로써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그 정의를 만드는 사람의 취지(intention)와 관계한다"(SCT, 293).
타르스키의 경우, 그의 취지는 직관적 진리 개념의 실제 의미를 포착하기 위한 것이었다. 타르스키가 진리 술어에 부과한 속성(한 언어 속의 참된 문장의 집합을 정의하도록 하는 속성)만 진리 술어가 가진 모든 속성이라면 이 술어를 도입하는 것이 무모순적임은 알려져 있다. 문제는 진리 술어다 또 다른 본질적 속성이 있고, 그래서 미규정된 이 속성을 타르스키의 진리 술어 속에 가미시킬 때 여전히 무모순성이 유지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미규정된 그 속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한, 진리 술어에 그 이상의 본질적인 속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타르스키 체계 내에서 작업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 아니다(SCT, 294). 이런 정책은 타르스키의 형식적 정교함을 활용하면서도, 그의 이론을 순수하게 형식적인 것, 공허한, 한낱 형식적인 이론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르스키의 진리론이 포착해 내지 못한 진리의 속성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의 이론은 사실상 진리를 정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타르스키의 작업을 이런 조명에서 보는 것은 어떤 의미 내에서 그가 심지어 개별적 언어들에 대해서도, 진리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 술어의 외연을 줌으로써 참된 문장들의 집합을 정의했지, 그 술어의 의미를 주지는 않았다. 이것은 T-문장들이 경험적 내용을 가진다고 우리가 결정한 순간 뒤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이것[T-문장들이 경험적 내용을 가진다는 생각]은 진리 개념에서는 타르스키의 정의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비슨은 아무 혼란 없이, 타르스키의 진리론을 언어에 관한 경험적 이론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데이비슨은 진리에 관한 다음과 같은 두 논제를 수용하지 않는다. (i) 타르스키의 진리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진리 개념과 대체로 무관하다. (ii) 타르스키의 진리 해석은 단순히 탈인용적이고, 이러한 진리 개념이 진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데이비슨은 (i)을 거부함으로써, 타르스키 진리론을 해석된 언어의 의미론을 구성하는 데 활용한다. 그리고 (ii)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타르스키는 우리가 진리 개념에 관해 알기를 원하는 것의 많은 부분을 말해 주었지만, [진리 개념에는 그가 말하지 않은] 더 많은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SCT, 295). 그것은 각 언어를 위한 진리 술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 즉 진리 술어 일반의 개념, 다시 말해 진리의 바로 그 개념이다. "진리 개념은 믿음및 의미 개념들과 본질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지만, 이 연결은 타르스키의 작업에 의해 논급되지 않았다. […] 타르스키가 우리를 위해 해 놓은 것은, 언어 속에서건 혹은 사유 속에서건, 진리가 만들었음에 틀림없는 패턴의 종류를 기술하는 방법을 세부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그러한 패턴 혹은 구조의 존재(presence)을 어떻게 정체확인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SCT, 295).
III. 원초주의적 진리 개념
만일 타르스키의 진리론이 진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면, 진리 개념은 단지 탈인용부호 장치로서의 유용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투명한 개념이 된다. 그리고 타르스키의 정의가 순수하게 약정적이라면, 진리 술어의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정리들 즉 T-문장은 한낱 논리적 진리에 불과하다. T-문장들이 아무런 경험적 진리도 산출하지 못한다면, 이것들이 대상언어 문장들의 진리 조건을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르스키의 정의는 단지 진리 술어의 외연에 불과하고, 그래서 진리의 내포는 그에 의해 취급되지 않았고, 취급될 수 없었다. 그의 이론의 범위는 외연성의 한계 내로 제한된다. 진리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 일부가 아니다(SCT, 295).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는 두 가지 한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진리 일반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없다. 먼저, 진리 술어의 적용이 번역에 대한 우리의 선이해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번역이라는 개념은 진리 개념보다 훨씬 더 어려운 개념이다. 만일 번역에 대한 개념이 먼저 주어져 있지 않다면, 규약 T는 진리 술어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스키는 번역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다. 둘째, 번역 개념이 필요 없는 경우, 즉 대상언어가 메타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 진리 술어에 대한 제약조건은 단지 구문론적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 그의 진리 정의는 진리 술어에 대해 말해 주지, 진리 술어의 개념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타르스키의 이론에서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참된 문장들의 집합은 낱말들(단칭어 및 술어들)과 사물들을 연결시키는, 만족 따위의 어떤 관계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규정될 수 없다"(SCT, 296)는 점이다. 만일 만족관계를 지시관계의 일반화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면, 타르스키는 문장의 진리값이 그 문장의 부분의 의미론적 특성(지시관계)에 어떤 식으로 의존하는지를 보여준 셈이다. 다시 말해 타르스키는 진리 개념을 통해 언어의 내부구조를 묘사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언어에 대한 기술을 얻기 위해 진리 개념을 먼저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SCT, 296). 진리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한 언어의 체계적인 기술에 대한 형식화에 선행한다. 다시 말해 후자 없이도 진리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규약 T는 교육에 의하지 않은 우리의 진리 개념 파악을 타르스키의 정교한 장치와 연결시킨다. 규약 T는 그 장치의 작용들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 개념과 일치한다는 것을 우리가 믿도록 설득한다"(SCT, 296).
진리에 대한 바로 그 개념의 내용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르스키의 형식적 체계를, 아무런 변경 없이, 활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일단 우리는 타르스키의 이론이 진리와 지시 개념의 본질적 측면을 수록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타르스키가 지시(만족) 및 진리를 회귀적으로 규정할 때, 오히려 지시와 진리가 원초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인정하면 된다. 이때 우리는 진리 술어가 '원초적'(primitive)이라는 표현이 '정의'와 잘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 정의'라는 표현에서 '정의'라는 낱말을 누락시켜 버리면 된다. 그리하여 결국 진리 개념은 '정의될 수 없다'. 오히려 진리 개념은 원초적이다. 타르스키의 진리론에서 진리에 대한 '정의'라는 표현을 제거해도, 그 형식적 체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SCT, 297). 단지 타르스키 이론의 마지막 단계, 진리에 대한 '명시적 정의'로 나아가는 단계를 빠뜨리고, 대신 그의 진리 정의를 진리에 대한 '공리화된 이론'으로 간주하면 된다. 타르스키 자신도 그 가능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The Semantic Conception of Truth", 352).
진리 개념의 정의가 불가능하고, 대신 그것에 대한 공리화된 이론이 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공리화된 이론의 예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런 이론들이 진리의 공리화된 이론과 어떤 유사점을 지니는지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Kolmogorov의 확률에 대한 공리화이다. 확률에 대한 공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i) 한 사건에 대한 확률은 0에서 1 사이의 값은 가진다. (ii) 서로 독립적인 각 사건에 대한 확률의 총합은 1이다. (iii) 두 독립적인 사건 a, b에 대해, a 혹은 b가 일어날 확률은 a가 일어날 확률과 b가 일어날 확률의 합이다. 이 공리는 확률에 독자적인 개념을 줄 만큼 충분한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공리들은 확률이 '상대적 빈도'인지, '신뢰의 정도'인지, '사건 발생의 경향성'인지 예단하지 않는다. 공리적 이론을 넘어선 실질 내용적 확률론은 확률이 무엇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밝히는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이것은 타르스키의 공리화된 진리론을 넘어선, 실질적 진리론이 담당해야 하는 과제와 유사하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결심이론(decision theory)과 관련하여, 선호(preference) 개념에 대한 램지의 공리화도 공리화된 진리론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 램지의 공리화된 선호 이론이 각 개별적 행위자에게 적용될 때, 이것은 각 행위자에게 독자적인 이론을 산출하게 되는데, 공리화된 진리론도 개별적 행위자에게 그에게 고유한 진리론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점은 각 개별적 언어에 대해 하나의 진리론이 제공되는 타르스키식 진리론과 비슷하다.
결심이론에서 문제는 한 행위자가 다른 것보다 이 사물 혹은 이 행위를 선호한다고 말하기 위해 만족되어야 하는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론의 경우에,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언제 T-문장들이 (그리하여 전체로서 이론이) 단체 혹은 개인의 언어를 기술하는지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이다"(SCT, 297). 그러나 공리화된 진리론(타르스키의 이론)은 이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 하나의 이론이 주어지면, 이 이론이 한국어에 적용되는지 적용될 수 없는지 결정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진리 개념에 대한 실질적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이제 우리의 과제이다. 이 부분에 대한 현대적 제안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양분할 수 있다.
(i) 인식적(epistemic) 입장: 진리를 기본적으로 인식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인간화시키는 제안. 예컨대 각종 정합설 및 실용설들이 여기에 속한다. Dummett과 C. Write의 반실재주의, 진리는 학문의 최종점에 있는 것이라는 Peirce의 생각, 진리를 과학적 이론의 수렴을 설명하는 어떤 것으로 보는 R. Boyd의 주장, Putnam의 내부적 실재주의, 진리는 세계 이론의 내부에 있다는, 그리고 진리를 우리의 인식론적 입장에 의존한다는 Quine의 이론 등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그리하여 "진리에 관한 상대주의는 아마도 언제나 인식론적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의 징후이다. 이것은 콰인의 경우이든, 넬슨 굳맨 그리고 퍼트남의 경우에도 참인 것처럼 보인다.
(ii) 실재주의적 입장: 대응론의 형식을 장려하는 제안(SCT, 298). 이 입장에서 진리는 사람의 믿음들과 완전히 무관하다. 우리의 믿음은 이저 저리하지만, 실재는, 나아가 실재에 대한 진실(진리)은 완전히 딴판일 수 있다. 즉 진리는 '철저하게 비인식적'이다. 퍼트남은 이러한 입장을 '초월적 실재주의'이라 표현했고, 이 때 진리는 '증거-초재적'(더밋)이다. 물론 퍼트남과 더밋은 이러한 입장에 반대한다.
인식적 입장에 의하면, 진리론은 인식론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진리는 '유한한 합리적 피조물들에 의해 여하간 입증될 수 있는 무엇'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실재주의'라고 불리우는 철학적 입장은 실재주의적 진리관에 의해 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리를 인간의 믿음 및 여타의 다른 태도들과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입장은 '실재주의적' 입장이 된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두 종류의 입장 모두에 대해 반대하고, 이들을 종합하려는 시도도 취하지 않는다. 먼저 두 입장 모두 회의주의를 불러 들인다. "인식적 이론들은, 관념론이나 현상론이 회의주의적이게 되는 방식으로, 회의주의적이다. 이 이론들은 그들이 실재를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실재를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회의주의적이다. 반면에 실재주의적 이론들은 참인 것이 우리가 믿는 것과 여하간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런 이론들은 '증거-초재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나머지 모든 지식들 또한 의심 속으로 던져 버린다"(SCT, 298-299)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는 여러 단계를 걸쳐 수행된다. 첫째, 대상언어의 문장에 대해나 정의이다. 둘째, 만족관계(일반화된 지시관계)에 대한 회귀적 규정이다. 이 규정은 Frege 및 Dedekind의 방법으로 명시적 정의로 변환된다. 셋째, 진리는 문장과 만족의 개념의 기반 위에서 정의된다. 데이비슨은 만족에 대한 회귀적 규정을 정의로 변환하는 과정을 누락시켜 버리고, 진리와 만족을 원초적인 개념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만족(지시) 개념과 진리 개념 중에 어떤 것을 기본적인 개념으로 채택해야 하는가? 문장의 진리가 낱말들의 의미론적 속성들(만족관계 또는 지시관계)에 의거하여 결정된다는 생각은 만족(지시) 개념이 보다 원초적인 개념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만족 개념보다 진리 개념이 보다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규약 T의 핵심적 기능이 직관적 진리 개념과 동일한 외연을 가지는 진리 개념을 결정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오히려 진리 개념을 기본적 원초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SCT, 299). 타르스키 자신도 규약 T에 호소할 때 진리 개념에 대한 선파악을 가정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이 직관이 어떻게 개별적 언어 속에서 작동하는지 세부적으로 기술하고자 하였다. 이때 도입되는 것이 지시적 개념, 낱말과 물품 사이의 관계, 소위 만족 관계이다.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언어 속의 어떤 패턴, 즉 논리적 형식들의 패턴 혹은 적절하게 입안된 문법들, 그리고 의미론적 의존관계들의 망상조직을 발생시킨다." 물론 문장에 관한 이야기, 혹은 문장의 각 사용(진술)에 관한 이야기, 즉 문장의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반드시 문장의 부분들의 의미론적 역할을 할당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지시 개념에 대한 선이해가 도입된 것은 아니다. 지시관계 없이 문장의 부분들에 대한 의미론적 역할을 할당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전통적인 관점에 상반된다. 전통적인 입장에 의하면, 문장을 구성하는 유한 개의 어휘를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문장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낱말의 의미론적 속성을 먼저 배워야 한다. 문장의 의미론적 속성들(무엇보다 진리 조건)보다 낱말의 의미론적 속성들이 보다 기본적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이에 대한 반대한다. 전통적 입장의 잘못은 설명의 순서를 혼동한 것이다(SCT, 300). 예를 들어 우리는 타르스키 진리론이 옳은지 그른지 검사하기 위해 그것이 올바른 T-문장들을 산출하는지 안하는지 살펴 본다. 이때 우리가 이러한 검사 기준을 채택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직관적인 파악에 의거하여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T-문장 자체 속에는 지시관계, 만족관계, 정식(well-ordered formula) 따위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진리론의 진위 여부는 지시 또는 만족에 대한 직관과 무관하다. 일단 우리가 올바른 진리론을 획득하면, 그 다음에 그 진리론이 '왜' 올바른지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이때 도입되는 것이 문장의 구조 및 부분들의 의미론적 속성이다. 이것은 과학에서 이론들과 완벽한 유비를 이룬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조직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되지 않는 혹은 간접적으로 관측되는 사물 및 힘들을 상정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직접적으로 관찰되는 것에 의해 검사된다"(SCT, 300). 언어와 관련하여 직접 관찰되는 것은 문장, 보다 자세하게 말하여 상황 속에서 문장의 사용, 즉 발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의미론적 개념은 진리이다. 반면에 지시 또는 만족은 단칭어, 술어, 문장 연결사 따위와 마찬가지로 이론적 개념이다. "이러한 이론적 개념들이 문장들의 사용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산출하는지 안하는지의 물음을 넘어서 이들의 올바름에 대해 물을 수 없다"(SCT, 300). 이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진리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한 언어를 위한 하나의 진리론이 올바른지의 물음이 우리에게 이치에 닿는 것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우리의 파악이다. [진리 개념에] 앞선, 또는 독립적인, 모종의 지식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SCT, 300). 이제 타르스키 진리론에 빠진, 진리 개념의 실질적 내용이 무엇인지 상당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빠진 것은 언어 사용자들과의 연결이다. 만일 문장의 사례들을 발화하거나 기재함으로써 그것들을 사용하는 피조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하나의 문장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진리 개념은 아무런 적용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 개념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무엇이나 진리 개념을 실제적 언어적 교류와 연관시켜야 한다"(SCT, 300). 타르스키식 어구로 다시 표현하자면, 하나의 진리 정의가 특정한 언어를 위한 진리 개념인지 아닌지 말하기 위해서 그 언어는 그 진리 정의와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진리론이 주어져 있을 때, 이 진리론이 한 화자에게, 화자들의 한 집단에게 올바르게 적용되는지 안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주어진 진리론이 특정한 언어에 적합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반적으로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진리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론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긍극적 증거는 화자들이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입수가능한 사실들에 놓여 있어야 한다. 여기서 입수가능한 사실이란 언어의 화자 또는 화자들의 집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원리상, 그리고 실제적으로 입수가능한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 의사소통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사실상 화자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화자의 발화에 진리 조건을 귀속시키기 위한 증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사 우리 모두는 타자가 발화할 진술에 적용되는 진리 개념을 충분하게 파악하고 있다.
즉 진리 개념은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이런 입장은 진리를 철저하게 비인식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인식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인가? 진리에 대한 이러한 원초주의적 입장은 특정한 언어를 위한 진리론이 참된 이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언어가 화자들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한 정보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그렇다면 원초주의는 인식적 입장 또는 주관주의적 입장이 아닌가?
IV. 대응설에 대한 반대
타르스키의 자신의 진리 정의가 진리에 대한 고전적 직관, 즉 실재와의 대응을 정당화시켜 줄 것을 기대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한 문장의 진리는 실재와의 일치(혹은 대응)에 놓여 있다." 데이비슨은 "사실들에 맞는"(1969)에서 타르스키의 진리론을 대응설의 일종으로 해석했다. 왜냐하면 타르스키의 정의에서 표현과 세계 속의 사물들과 표현 사이를 연관시키는 만족관계 또는 지시관계가 필연적으로 도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그 때의 해석이 하나의 '실수'라고 인정하고, 자신이 '대응'이라는 표현을 선호한 것에 대한 후회했다. 그는 "참과 앎의 대응설"(1983)에까지 대응론과 정합론을 종합하려고 시도하면서, '대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컨대, 그는 "정합은 대응을 산출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로티와의 토론을 통해, 자신이 더 이상 정합론자 및 대응론자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인정한다. 대신 데이비슨은 로티가 실용설을 포기하도록 설득시켰다고 주장한다.
대응설에 대한 일반적인 불평은, 대응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진 모호성뿐만 아니라, 믿음 또는 낱말들과 세계를 비교하여 맞추어 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다른 믿음이 선행하여 획득되어야 하는데, 이 믿음은 도대체 무엇과 대응되고, 대응되는 그 무엇과 이 믿음을 어떻게 또 비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끊임 없는 순환에 빠져들게 된다. 이 불평은 Otto Neurath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대안으로서 정합설을 제안했다. Carl Hemple은 대응이 '진술과 사실의 치명적인 대면'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대응설을 반대했다. 로티는 대응설이 진리 개념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합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건전하지 못하다. 비판자들은 진리에 대한 인식적 이론에 이미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비판은 진리가 인식적 개념인 경우에만 합법적일 수 있다. 데이비슨이 대응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참된 문장이 대응해야 하는 그 무엇이 어떤 물품인지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미 C. I. Lewis에 의해 지적된 바이다(An Analysis of Knowledge and Valuation, 1946). 루이스는 만일 참된 문장이, 그것이 사실, 또는 실재의 부분이나 세계의 부분이건 간에, 도대체 무엇과 대응한다면, 참된 문장은 전체로서 우주와 대응되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결국 모든 참된 문장은 하나의 단일한 품목에 대응한다. Frege도 비슷한 추론을 통해 이와 똑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s가 참된 문장이라면, 이것과 대응하는 어떤 것(사실, 세계의 부분, 실재의 부분, 또른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FACT라고 하자. 그리하여 참된 문장 s에 대하여, 's는 FACT에 대응한다'. 문장 속의 단칭어를 그것과 동연적인 다른 어구로 치환해도 문장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배수아는 <바람인형>이라는 소설집을 출판했다'에서 '배수아' 대신에 '<랩소디 인 블루>를 쓴 그 작가'를 대입해도 그 문장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배수아는 <바람인형>이라는 소설집을 출판했다'와 '<랩소디 인 블루>를 쓴 그 작가는 <바람인형>이라는 소설집을 출판했다'라는 문장이 동일한 어떤 것에 대응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동연적인 단어의 대입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문장은 원래 문장이 대응하는 것에 대응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제 's는 FACT에 대응한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만을 우리가 s 대신에 s와 동연적인 다른 표현 p을 대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s는 FACT에 대응한다'가 참이라면, 'p는 FACT에 대응한다'도 참이다. 그런데 문장의 외연은 그것의 진리값이다. 따라서 s와 동연적인 표현은 모든 참된 문장이다. 결국 우리는 '참된 모든 문장은 FACT에 대응된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것은 사실상, '임의의 참된 문장 s에 대하여, s는 TRUE이다'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진술은 사실에 대응된다'거나 '어떤 진술은 사실에 맞는다' 또는 '어떤 진술은 사실과 일치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런 표현은 단지 '어떤 진술은 참이다'라는 표현과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Peter Strawson은 이 점을 잘 간파했다(Truth, 1971).
대응설에 대한 참된 반대이유는 그 이론이 진리를 인간이 그것을 획득할 수조차 없는 초재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반대이유는 대응설이 진리 담지자(진술, 발화, 문장)가 대응하는 품목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는 데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참된 문장이 대응하는 것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품목들 중 어떤 품목들인지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발화, 진술, 문장, 준문장적 항목, 두뇌 속의 신경상태의 배위(J. Fodor) 따위들이 도대체 무엇인가의 '표상' 또는 '재현'으로 불려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도대체 이런 것들이 표상할 무엇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문장들을 진리로 만드는 품목들로서 사실들을 포기하면, 우리는 동시에 표상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실과 표상] 각각의 합법성은 다른 것의 합법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SCT, 304).
데이비슨이 한 때 타르스키 진리론을 대응설의 한 양식으로 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그가 문장이 대응할 만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진리와 그래서 실재는 누군가가 믿거나 알 수 있는 어떤 것과 무관하다'는 실재주의적 진리관에 중요한 무엇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입장을 종종 '외부 세계'의 관점에서, 의미의 관점에서, 진리의 관점에서, 실재주의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비슨이 '대응'이나 '실재주의'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이들 표현을 통해 '인식적 관점들이 그릇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내 입장을 실재주의의 한 형태라고 부르기 위해 가졌던 합법적인 이유는 오직 더밋의 반실재주의 비슷한 입장들을 거절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실재 또는 진리가 우리의 인식적 능력들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는 교리를 거절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SCT, 304-305) 그러나 전략상 '실재주의' 및 '대응'을 사용한 것은 '실수'였다. 그는 인식적 입장의 대안으로서 오직 실재주의적 입장밖에 없다고 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인식적 이론들과 실재주의 이외에는 다른 입장들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수였다. "실제적인 것과 참된 것이 '우리의 믿음들과 독립적이다'는 슬로건을 거절하거나 받아들는 것은 무익하다." '실제적인 것과 참된 것이 우리의 믿음들과 독립적이다는 교리를 거절하는 것'은 예컨대 '어떤 것을 믿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 않는다' 따위의 평범한 문구를 거절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믿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 않는다'라는 상투문으로부터 '믿음과 진리 사이에 아무런 연결도 없다'라고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
V. 인식적 진리관에 대한 반대
진리를 인식적 개념으로 만드는 다양한 형태의 주관주의가 있다. 이것들은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인간의 사고 및 의도들을 진리와 연결시킨다. 데이비슨은 이들 모두가 전혀 만족스러운 입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이비슨은 정합설을 인식적 입장의 일종으로 분류했다. 만일 '일관된 문장들의 집합 속에 포함된 모든 문장들은 참되다'는 것이 정합설의 입장이라면, 이런 종류의 이론은 아무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정합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예컨대 노이라트나 카르납(한 때)는 일관성이 진리성을 산출하기 충분한 것은 단순히 '문장들의 집합'이 아니라 '믿음들의 집합' 혹은 '참인 것으로 여겨진 문장들의 집합'임을 분명히했다(SCT, 305). 바로 이것 때문에 데이비슨은 정합설을 인식적 입장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일관된 믿음들의 상이한 집단들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합설에 무엇인가가 더 첨가되어야 한다.
콰인은 다음과 같은 정합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것이 진리가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장들이 있다. (이 점에 콰인의 진리론은 대응설적인 경향이 있다.) 그것은 소위 관찰문장으로 불리우는 문장이다. 관찰문장의 진리조건은 '활성화된 신경 말초의 패턴'에 놓여 있다. 관찰문장을 제외한 여타의 다른 문장들은 관찰문장과의 연관 및 다른 문장들과의 논리적 관계를 통해 경험적 내용을 얻는다. 최종적인 이론의 진정성은 그것이 참된 관찰문장을 얼마나 잘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콰인에 의하면, 모든 관찰문장들을 똑같이 잘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상이한 이론들이 있을 수 있고, 이들 이론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 '각 이론은 다른 이론의 용어들을 빌려서 정의될 수 없는 최소한 하나의 술어를 보유하고 있다.' 콰인은 상이한 두 이론의 진위 문제에 대해, 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SCT, 306). 한 사고 방식에 의하면, 두 이론 모두 참되다. 다른 사고 방식에 의하면, 화자 또는 생각하는 사람은 주어진 시간에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사용하는 이론은 그에게 참되고, 다른 이론은 거짓이 된다. 만일 그가 다른 이론을 선택하면, 예전에 채택한 이론은 틀린 이론이 되고, 새롭게 채택한 이론이 참된 이론이다. 바로 이것이 진리는 '내재적'이다는 그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이다. 두 이론이 양립할 수 없는 문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은 비교적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 '지금' 따의의 지시사가 없는 동일한 하나의 문장이 한 사람에게는 참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심지어 한 사람에게서도 한 때에는 참이고 다른 때에는 거짓이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힘들다. 진리 개념의 인식론적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혼란의 원인이다.
퍼트남의 내부적 실재주의 또한 진리를 내재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콰인에게 진리는 이론에 상대적이지만, 퍼트남에게 진리는 '한 사람이 받아들이는 전체 언어와 개념적 도식'에 상대적이다. 두 문장이 서로 모순되지만, 화자에 따라서, 즉 화자들의 개념적 도식에 따라서, 둘 다 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다른 사람에게 다른 문장이 참이다. 그러나 양립불가능한 두 문장이 어떻게 동시에 참이 될 수 있는가? 퍼트남은 진리를 '이상화된 정당화된 주장가능성'과 동일시한다. 여기서 '이상화된'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더밋은 '이상화된'을 달지 않는다.) 이 단서는 퍼트남의 입장을 실재주의의 한 형태로 부르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 입장은 인간의 주장이 수렴하게 만드는 모종의 '문제사실'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퍼트남은 자신의 실재주의를 '인간적 유형의 실재주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고전 형이상학적 실재주의자들이 귀하게 여기는,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옳게 주장가능한 것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우리에 대하여 옳게 주장가능한 것에 관한 문제사실이 존재한다는 믿음"(Realism and Reason, 1983, p. xviii)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당화된 주장을 할 수 있는 별도의 이상화된 조건이 있다. 만일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오류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놀라운 것은 자신의 입장을 위한 퍼트남의 유일한 논증은 형이상학적 실재주의가 용납될 수 없다는 논증뿐이라는 점이다(SCT, 307).
진리의 인식론적 위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퍼트남의 입장은 더밋과 닮아 있다. 더밋은 '진리가 확정적으로 주장가능한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해 더 확신에 차 있다. 퍼트남은 진리값의 2가 원칙을 버리는 데 주저한다. 이 차이는 퍼트남이 실재주의자이고, 더밋이 반실재주의자라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퍼트남은 진리를 '이상화된 정당화된 주장가능성'과 동일시하고 더밋은 '정당화된 주장가능성'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이들이 거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데이비슨에 의하면 더밋도 퍼트남의 '이상화된 조건' 비슷한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장의 진리값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 달리지는, '진리'가 상실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겨 버린다. "[일정한 조건이 만족되었는지를 인식하는 인간 화자들의] 실제적 능력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사람 마다 다르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지 않다"(SCT, 308).
퍼트남과 더밋은 모두 진리가 철저하게 비인식적이다고 주장하는 대응설적 진리관, 퍼트남의 표현을 빌자면, 초월적 실재주의를 비판한다. 초월적 실재주의는 인간의 거의 모든 믿음이 틀릴 수 있음을 암축한다. 더밋은 유일한 대안으로서 진리는 철저하게 인식적이라는 반실재주의를 제안한다. 퍼트남은 인간적 실재주의를 제시하지만, 더밋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더밋의 반실재주의는 진리를 보증된(warranted) 주장가능성과 동일시하고, 퍼트남의 인간적 실재주의는 여기에 '이상화된'이라는 단서를 덧붙인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진리이론과 의미이론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가 실재주의 대 반실재주의, 철저한 인식적 진리관 대 철저한 비인식적 진리관의 대립 구도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데 반대한다. 실재주의와 반실주의는 모두 '간주관적 표준으로서 진리의 역할을 진리로부터 박탈한다'.
VI. 진리론과 언어적 현상
진리이론은 각각의 문장들에 진리조건을 부여하는 일종의 경험적 이론이다. 그러나 문장은 추상적인 대상이다. 문장이 진리조건을 가지기 위해서 이것은 먼저 화자나 기재자에 의해 소리나 쓰여진 것 따위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론이 취급하는 실질적 대상은 언어 사용자의 발화 또는 글(writing)이다. 문장은 발화 또는 글의 유형(type)들을 이론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문장을 도입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문장은 단숨에 동일한 유형의 모든 실제 발화와 기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문장은 만일 그것이 발화된다면 주어진 유형의 발화 혹은 기재의 진리조건이 무엇이 될지를 규정할 수 있게 한다"(SCT, 309). 그런데 발화('기재'에 대해서는 단순성을 위해 언급 생략)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 각 발화는 그것의 행위자와 발생 시간을 가진다. 하나의 발화는 특수한 유형의 사건, 즉 의도적 행위이다(SCT, 309). 진리론은 문장의 발화로서 간주될 수 있는 '문장적 발화'(sentential utterance)에 관심을 가진다. 여타의 다른 발화에 대한 문장적 발화의 우선성은 진리론이 제공하는 진리조건이 문장의 진리조건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리 술어가 작용되는 대상이 바로 문장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진리론은 문장에 진리조건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다. 진리론은 문장이 발화되었을 때 그 문장의 발화가 참이되는 조건을 또한 규정한다. 비록 그 문장이 현실적으로 발화되지 않는 그런 경우에도 진리론은 그러한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진리론은 언어 행위자의 언어 행동의 양상을 기술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한다. 진리론은 어떤 복합적 능력을 기술한다.
데이비슨은 "하나의 발화는 화자가 그것이 일정한 진리 조건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될 것을 의도할 때만, 그러한 진리조건을 가진다"(SCT, 310)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한다. 그들에 의하면, 말의 의미는 화자의 의도와 거의 무관하다는 것이다. 대신 의미는 화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다수, 지식인, 명문 출신(best-born) 등이 말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는 Tyler Burge와, 크립키의 주장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이 입장은 다음과 같은 귀결을 가진다. "한 화자는 그의 청자에게 완벽하게 이해가능할 수 있고, 그가 해석되기를 의도하는 대로 정확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그는 그가 말하는 것을 통해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모를 수 있다"(SCT, 310). 왜냐하면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의도와 완전히 다를 수 있고, 대신 사회적 요소(지식인이나 명망가들의 화법)에 의해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도와 화자의 발화의 의미가 무관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진리와 의미의 본성에 관해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아무런 귀결을 산출하지 못한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청자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 화자의 마음의 상태이다. "성공적인 언어적 의사소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에서는 일정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화자의 의도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도된 노선을 따라 화자의 의도에 대한 해석자의 인식을 통한 화자의 말의 실제적인 해석이다"(SCT, 311).
데이비슨이 취하는 언어관은 다음과 같다. "비록 발언을 통한 의사소통이, 내가 살펴 볼 수 있는 한, 어떠한 두 화자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것을 요구하지 않지만, 물론 화자들이 해석되기를 의도하는 방식(how)과 그들의 해석자들이 그들을 이해하는 방식 사이의 맞음(fit)을 요구한다"(SCT, 311). 언어 공동체 속에서 언어 행동의 수렴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후자의 요구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비슨은 언어를 '화자와 해석자, 또는 화자 및 언어 공동체에 의해 공유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 언어 공동체에서 발생되는 수렴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실천적 물음은 비록 중요하지만, 데이비슨은 이런 주제들이 의미이론, 진리이론, 의사소통이론을 구성하는 데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개인적 화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이론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진다. 이제 진리론은 화자와 해석자를 연결시키는 기능을 한다. 진리론은 화자의 언어적 능력과 관행을 기술한다. 진리론은 해석자로 하여금 화자의 발화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해석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이 말은 화자 또는 해석자가 진리이론의 내용에 대한 명제적 지식들을 사전에 가지고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론은 다만 화자의 발화가 참이 되는 조건을 기술한다. 그래서 진리론 자체는 화자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론은 화자의 의도의 명제적 내용에 관한 어떤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자신의 발화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해석되기를 바라는 의도이다(SCT, 312). 그리고 해석자는 화자를 해석하기 위해 진리론에 대한 어떤 명시적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해석자가 화자에 대해 아는 무한대의 지식을 기술한다. 다시 말해 진리론은 화자가 발화할 수 있는 무한대의 문장들이 발화될 때 어떤 조건 아래에서 그 문장들이 참이 되는지를 규정해 준다. 그래서 진리론에 대해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음과 같다. "만일 해석자가 그 이론의 명시적 명제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화자의 발화의 진리조건을 알 것이다"(SCT, 312).
이런 의미에서 진리이론은 의미이론이다. 진리론에 대한 명시적 지식은 화자의 발화를 이해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진리론은 화자가 자신의 발화가 어떻게 해석되기를 의도하는지를 기술함으로써 의미론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이해란 화자가 해석자가 파악하기를 의도하는 의미의 이해를 말한다.) 진리론은 일종의 경험적 이론이다. 진리론이 옳은지 틀린지의 검증은 그것의 귀결들(T-문장들)을 통해 수행된다. 여기서 각 T-문장들은 일종의 자연법칙이다. 이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의 T-문장은 어떤 개별적 화자에 대해, 그가 주어진 하나의 문장을 발화하는 모든 시간에, 그 발화는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참이 될 것이다고 말해 준다'(SCT, 313).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 항상 그 문장을 참이라고 말하는 T-문장은 이 점에서 자연적 법칙의 형식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T-문장들은 전칭적으로 양화된 쌍조건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사실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하나의 진리론은 구두적 행동의 기본적 측면을 기술하고, 설명하고,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한 한 이론이다. 진리 개념은 그 이론에 중심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가 지극히 중요한 설명적 개념이라고 말하는 데 정당화된다"(SCT, 313).
그렇다면 (일종의 자연적 법칙으로서) T-문장의 진리는 어떻게 확증되는가? 이러한 물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무게 측정 이론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일 x의 무게가 y의 무게보다 크거나 같을 때, x는 y와 H(at least as heavy as) 관계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관계 H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리를 얻을 수 있다. Reflexivity: a는 자기 자신 a와 H의 관계에 있다. 추이성(transitivity): 만일 a가 b와 H의 관계에 있고, b가 c와 H의 관게에 있다면, a는 c와 H의 관계에 있다. 비대칭성(nonsymmetricity): a가 b와 H의 관계에 있다고 해서, b가 a와 H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H의 반사성, 추이성, 비대칭성은 H에 대한 공리이다. 선호 이론에 있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만일 행위자가 b를 하는 것보다 a를 선호하거나, 동등하게 좋아할 때, a는 b와 P(약한 선호)의 관계에 있다고 하자. P도 반사성, 추이성, 비대칭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P에 대한 공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는 H이나 P 자체를 정의하지도 못하고, 그러한 관계가 언제 성립하는지 결정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론이 검사되고, 사용될 수 있기 위해서 먼저 H나 P의 해석에 대해 무엇인가가 말해져야 한다. 무게 측정 이론이나, 선호 이론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보다 무겁다', '보다 좋아한다'에 대한 해석을 미리 전제한다. 이것은 진리론의 진리 개념에 있어서도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진리에 대한 '행동주의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가능한가? 데이비슨은 행동주의적 정의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어떠한 명시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도 잘못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분명하고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보다 간단하고 혹은 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을 좋아해서, 그것을 환원시키려는 꿈을 꾸는 것은 무익하다"(SCT, 314). 따라서 데이비슨은 진리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진리 개념에 대한 '형식적 속성'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특히 이 개념이 언어와 같이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구조에 적용되었을 때, 이 개념이 가지는 형식적 속성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 진리 개념과 관련된 적합한 프로젝트이다. 그렇다면 데이비슨이 묻는 문제는 이것이다. 진리론은 어떻게 개별적 화자 혹은 화자들의 그룹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이론을 위한 증거와 이론 그 자체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정식화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이론을 위한 증거가 원리상 공적으로 통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과 해명되어야 하는 개념들을 미리 가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증거가 공적으로 입수가능한 것어야 한다는 요구조건은 행동주의나 검증주의적 토대에 대한 열망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것(언어)가 사회적 현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심적 현상들은 일반적으로 사적(private)이거나 아닐 수 있지만, 타인에 의한 어떤 사람의 발언의 올바른 해석은 원리상 가능해야 한다. 자신의 말이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화자의 의도는 물론 가장 숙련되고 박식한 청자에게도 모호한 채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올바른 해석와 의미 및 진리조건들과 관련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입수가능한 증거 위에 기초지워져 있다. Dewey, G. H. Mead, Quine 및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L.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했던 것처럼, 언어는 본래적으로 사회적이다. 이것은 진리와 의미가 관찰가능한 행동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될 수 있다거나, 그것이 '단지' 관찰가능한 행동일 뿐이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고, 의미는 전적으로 관찰가능한 행동, 아니 오히려 손쉽게 관찰가능한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의미들이 판독가능하다는 것은 행운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인 입수가능성은 언어의 한 구성적 측면이다."(SCT, 314).
증거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개념은 이론이 최종적이 산출하는 것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이 조건은 어떤 것을 해명적으로 분석하려는 모든 시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것은 충족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언어적 현상들은 단지 의미, 지시, 진리, 주장 등등의 진기한 아취가 있는 어휘들로 기술되는 행동적, 생물학적, 혹은 물리학적 현상-일종의 사실 혹은 기술의 이러한 유형에 대한 다른 것에의 단순한 수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개념적 환원의 가능성을 보증하지 않고, 또는 그것의 전망을 약속하지도 않기 때문이다"(SCT, 315). 이 문제에 대한 데이비슨의 해결방안은 다음과 같다. "언어적 재능 및 소양의 직접적 심리적 여건은 내포적 어구로 기술되는 태도와 상태 및 사건들 속에서, 즉 의도적 행위와 욕구, 믿음, 그리고 소망, 두려움, 희망 및 시도들 같은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다양한 명제적 태도들과 그들의 개념적 부수물들이 발언이 발생하는 배경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해가 중심적인 인지적 및 능동적 태도들의 연동하는 설명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언어적 사실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SCT, 315). 이러한 다양한 내포적 개념들이 보다 행동주의적이고, 신경학적인, 보다 심리학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믿음, 욕구 및 의미는 하나 혹은 다른 두 개로 환원시키거나, 설명 및 기술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기본적 개념에 대해 설명은 이 세 개보다 상위 개념이든 하위 개념이든, 여하튼 이 세 개 모두와 등거리에 있는 어떤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작업을 착수하기 위해 규약이나 규칙에 호소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규약과 규칙들은 언어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가 그들을 설명한다"(SCT, 316). (그리하여 언어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비언어적 의향 또는 지향을 전제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한 시도이다?) 여기서 의미와 의도(믿음와 욕구의 곱)가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연결은 명제적 태도들에게 구조를 제공하고, 그들이 체계적으로 취급될 수 있게 맞추어 준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 지향적 태도들(믿음, 욕구 등) 사이의 상호의존관계는 너무나도 완전하여 각각을 따로 떼어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먼저 욕구에 대해 놓아 두고, 믿음에 대해 이해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토대로) 욕구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데이비슨이 제시하는 유일한 대안은 화자의 말에 대한 해석을 산출하게 하는 접근방법, 이와 동시에 이 접근방법이 화자에게 믿음과 욕구를 귀속시키는 기초를 제공해 주는 그러한 접근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의 목표는 명제적 태도의 개별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SCT, 316).
VII. 결심이론으로부터 교훈
이러한 접근방법에 대한 모델은 베이지안 결심이론(Bayesian decision theory)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이론은 램지에 의해 개발되었다. 결심이론은 합리성의 지향적 세 가지 지향적 측면(믿음, 욕구, 의미) 중에서 두 가지, 즉 믿음과 욕구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결심이론은 '선호'(preference)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선호는 다른 것을 취하지 않고 특정한 행위의 과정 또는 사물을 취하는 것이다. 선호는 두 가지 고려사항의 곱이다. (i) 욕구(relative desirabilities): 다양한 가능한 결과들에 대한 가치부여 (ii) 믿음(subjective probabilities): 특정한 행위가 취해지거나 특정한 사건 및 사태가 조건으로 주어질 때, 그러한 귀결들이 어느 정도의 확률을 가지고 일어날지에 대한 판단. 합리적 행위자는 결심할 때, 그가 행위의 각 귀결들에 할당한 확률을 고려하여, 가능한 결과들의 상대적 가치가 최대가 되는 그러한 행위를 선택한다. 행위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행위자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그는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그리고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쪽을 선택한다. 즉 그는 기대된 효용을 극대화한다.
결심이론은 다음과 특징을 지고 있다. 설명의 대상, 즉 단순(simple, ordinal) 선호 또는 '선택사항들 중에서 선택'은 비교적 관찰가능성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가치부여 또는 '기수적 가치'(cardinal value)와 '확률에 대한 주관적 믿음'을 포함하는 설명적 메커니즘 자체는 관찰가능하는 것이 아니다. 관찰자는 행위가 어느 정도 강도의 주관적 믿음 및 상대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관찰자가 알 수 있는 것(서수적 선호 또는 단순 선호)은 알려지지 않은 두 요소(믿음의 정도와 상대적 욕구의 강도)의 합작품이다. 만일 상대적 욕구의 강도(기수적 선호)가 알려져 있다면, 행위의 선택(결심, 서수적 선호?)은 믿음의 정도(결과에 대한 주관적 신뢰도, 확률)가 어떠했는지를 밝혀 줄 것이다. 만일 믿음의 정도가 알려져 있었다면, 그의 선택은 결과들에 대한 가치부여를 드러내 줄 것이다. 그러나 관찰가능한 증거(행위 선택, 선호)으로부터 어떻게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결정해 낼 수 있는가?
램지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했다. 먼저 그것의 부정과 비슷한 정도로 그럴듯한 명제를 찾아낸다. 예컨대 일기예보에 내일 비올 확률이 50%라는 보도가 나왔다면, '내일 비가 온다'는 명제는 그것의 부정과 반반으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이런 명제는 무한한 계열의 결정을 구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예컨대 '내일 우산을 쓰고 나가야 겠다', '내일 소풍을 취소해야 하겠다' 등등.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계열의 결정은 가능한 모든 선택사항의 가치를 부여하고, 발생가능성에 주관적 믿음을 가늠하는 측정장치가 된다. 예컨대 만일 행위자가 내일 소풍을 취소하는 선택(결심)을 했다면,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행위자는 소풍의 즐거움보다 비를 맞지 않고 덜 고생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또는 비가 오지 않은 날 소풍을 가서 소풍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일 비가 오는 쪽으로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고, 비를 맞으며 소풍을 가는 것은 고생할 가능성이 많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등등.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든 명제들에 대한 행위자의 믿음의 강도를 측정하는 계산절차를 얻게 된다.
램지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단순 선호 또는 단순 선택(가치부여의 강도 또는 욕구도)의 허용가능한 패턴에 대한 제약조건을 규정한다. 이 제약조건은 임의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제약조건은 '사람의 선호 또는 선택 행동을 위한 이유의 만족스러운 설명의 한 부분'이다. 제약조건은 행위자가 개별적인 가치, 궁극적인 가치에 대해 합리적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개별적인 가치들이 서로들끼리 형성하는 패턴에 있어서, 그리고 행위자의 믿음들과 결합하는 방식에 있어서 합리적일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이론은 상당히 강한 규범적 요소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요소는 선호, 믿음, 이유 및 지향적 행위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결심 이론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관찰되는 것 속에서 패턴은 행위자의 선택 행동의 이해가능성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이것은 행위들을 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행한 것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결정한다"(SCT, 317). 나아가 이 패턴은 관찰가능한 것들과 상대적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들로부터 보다 정교한 종류의 사실들(믿음의 정도, 각 가치부여들 사이의 차이의 비교)을 이끌어 내는 이론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보다 복잡한 사실들은 관찰가능한 보다 단순한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고, 관찰가능한 것들은 이론 자체를 검사하는 데 사용되는 증거적 기초를 구성한다.
베이지안 결심이론은 결코 믿음과 선호 개념을 비내포적 용어를 통해 정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이론은 하나의 내포적 용어(결과들 사이의 서수적 선호)를 이용하여, 주관적 기대치(믿음의 정도)와 가치에 있어서 차이의 비교(욕구의 강도)라는 두 개념에 내용을 줄 수 있었다. 여기서 믿음과 욕구를 서수적 선호로 환원시킨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그러나 비교적 복합한 이론적인 개념(믿음, 욕구)을 공적으로 관찰가능한 행위와 가까운 개념(선호)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이론은 두 개의 기본적이 연동하는 명제적 태도(믿음과 욕구)들 중 하나를 먼저 안다고 가정하지 않고, 동시에 이 두 개념에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SCT, 317). 원래 결심이론은 사람의 선호 또는 선택을 설명해 주는 태도와 믿음들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구두적 해석이론을 포함해야만 한다. 즉 행위자가 그의 말로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방식에 대한 이론을 추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행위자가 가지고 있는 명제(서수적 선호, 단순 선호, 단순 선택?)를 개별화시키고 정체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VIII. 의미이론
의미에 대한 콰인의 접근은 결심이론에 해석이론을 첨가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의미에 대한 콰인의 접근은 결심에 대한 램지의 접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SCT, 318). 의미 자체를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모든 증거는 공적으로 입수가능하는 것이어야 한다. 콰인은 입수가능한 관련된 증거들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떻게 의미를 이끌어 내는 데 사용될 수 있었는지 묻는다. 관찰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환경 속에서의 언어적 행동이다. 이 언어적 행동으로부터 문장에 대한 일정한 태도가 상당히 직접적으로 추론된다. 마치 선호가 선택으로부터 추론되듯이 말이다. 콰인에게, 관건이 되는 관찰가능한 것은 동의와 이의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들로부터 화자가 일정한 종류의 사건들에 의해 하나의 문장이 참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SCT, 318). 그렇다면 화자가 문장을 참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데이비슨은 그것을 두 가지 고려사항의 결과로 본다. 하나는 화자가 그 문장이 의미한다고 여기는 것, 다른 하나는 화자가 믿고 있는 것. 그러나 이 두 개(믿음과 의미)는 모두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해석자에 의해 비교적 직접적으로 관찰가능한 것은 이 두 태도의 결합물이다. 증거(관찰가능한 것)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두 태도의 설명적 역할은 무엇인가? 이 상황은 베이지안 결심이론의 사례와 거의 비슷하다. 결심이론에서는 선택들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믿음과 욕구의 역할의 얽힘을 해결하려고 했다.
콰인의 해법과 램지의 해법은 대체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램지는 어떤 일정한 상황에서 단순 선호를 일정하게 유지시키고 믿음을 결정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와 비슷하게 콰인은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믿음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콰인의 중심적 발상은 타자에 의한 한 행위자의 올바른 해석과, 해석자와 피해석자 사이의 믿음의 상당한 불일치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해석은 불일치의 정도를 철저하게 제한한다. 그리하여 해석자가 타인을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 전에 자신의 믿음과 피해석자의 믿음 사이의 일치를 전제하는 것은 정당하다. 해석에 있어서 이러한 제약조건을 'the principle of charity'라고 한다. 이 원리는 믿음과 의미 중 어느 것도 사전에 안다고 가정하지 않고, 이 둘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의미를 미리 안다고 가정하는 방식, 또는 분석-종합의 구분을 가정하는 방식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다(SCT, 319).
N. Wilson이 원용했고, Quine이 의미 문제에 활용한 이 '사랑의 원리'를 데이비슨은 전면적으로 확장한다. 이 원리와 관련하여 콰인과 데이비슨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데이비슨은 화자의 언어를 해석자의 언어로 번역할 때, 해석자는 화자의 언어 L의 의미론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화자의 의미론은 (화자의) 진리론으로부터 유도되는 T-문장에 의해 전달된다. 여기서 화자의 언어 L를 위한 진리론은 해석자의 언어 M, 즉 메타언어로 표현된다. 여기서 콰인과 데이비슨의 기획은, 만일 화자의 진리론이 주어질 때, L로부터 M으로 번역하는 번역교본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번역교본이 주어진다고 해서, 화자의 언어를 위한 진리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진리론은 번역교본 이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만일 해석이론이 진리론의 제약조건을 준수해야 한다면, 해석이론은 번역에 필요한 것 이상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번역을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의 구조는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사랑의 원리가 강요하는 것은 '화자가 동의하는 문장들의 패턴은 논리적 상항의 의미론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가정한다면, 우리는 논리적 상항을 검출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결심이론의 경우처럼, 여기 선도적 원칙들은 규범적 고려사항들로부터 유도된다. 믿음들 사이의 관련들은 결정적인 규범적 역할을 담당한다. 해석자는 모든 해석이 놓여있는 이해가능성의 그 토대를 허물지 않고서는 그 자신의 합리성의 표준으로부터 거대한 혹은 명백한 이탈을 수용할 수 없다. 행위자의 발언 혹은 행위를 이해할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패턴, 대략, 모든 합리적 피조물들에 의해 공유되어 있음이 틀림없는 패턴의 존재에 의존한다. 우리는 타인의 언어와 믿음들에 우리 자신의 논리학을 투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이것은, 참인 것으로 여겨진 문장들이 (이성의 내에서) 서로 논리적으로 일관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가능한 해석의 하나의 제약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SCT, 319-320).
논리적 상항(그리고, 혹은, 아니다, 모든, 등등)의 해석은 화자 언어의 제1차 양화논리적 구조을 드러낸다. 논리적 상항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다. 콰인은 논리적 상항의 번역을 위해 논리적 일관성을 번역의 원리로서 도입하는데, 이것이 그의 사랑의 원리이다. 그는 이 원리의 적용범위를 논리적 상항의 번역으로 한정했다.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은 다만 논리적 상항에 대한 해석을 보장해 줄 뿐이다. 언어의 번역은 논리적 상항의 번역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여타의 다른 번역을 위해서는 화자와 해석자 사이의 논리적 일치(논리적 일관성)을 넘어선 더 많은 일치가 요구된다. 데이비슨은 이 점을 간파하고, 사랑의 원리의 적용범위를 전면적으로 확대한다.
단칭어(singular term)와 술어(predicate)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규명은 행위자(발화자)가 참인 것으로 인정하는 문장들에만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 상항에서 단칭어 및 술어로 나아가는 해석적 진보는, 그것뿐만 아니라, 행위자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문장들을 참인 것으로 여기도록 야기시킨 세계 속의 사건과 사물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이룩된다(SCT, 320). 사건과 사물들은 화자와 해석자가 공동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다. 행위자로 하여금 'this is a dog' 따위의 문장을 참인 것으로 여기도록 야기시킨 환경은 'this is a dog'을 '이것은 개이다'로 해석하게 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를 제공한다. 여기서 해석자는 'this is a dog'라는 문장, 또는 'a dog'라는 단칭어, 'is a dog'이라는 술어 따위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해석자는 행위자가 개가 앞에 있을 때 혹은 없을 때, 'this is a dog'에 규칙적으로 동의하거나 이의한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화자 언어를 위한 진리론의 정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화자에 의한 'this is a dog'의 발화는 화자(행위자)에 의해 개라는 사물이 주위에서 관찰될 수 있을 때 그리고 오직 그때만 참이다.
'dog'의 해석은 지시사의 도움을 크게 받는데, 지시사는 세계 속의 사건과 사물을 술어나 단칭어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관찰어 및 관찰문장에 대한 데이비슨의 해석방법은 콰인의 {말과 사물}에서 제시한 방법과 비슷하다. 그 둘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전달가능한 내용(의미)를 결정하는 세계 속의 사건과 사물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콰인에게 그것은 신경 말초의 자극 패턴이다. 화자는 신경 말초의 자극 패턴에 의해 문장에 동의하거나 이의한다. 그래서 "만일 화자와 해석자가 근촉적 자극작용의 동일한 패턴에 의해 각자의 문장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도록 부추겨졌다면, 화자의 관찰문장은 해석자의 관찰문장과 '자극적으로 동의적'이다"(SCT, 321). 여기서 콰인은 '의미는 각 화자에게 직접적으로 입수가능한 증거에 의존한다는 경험주의적 발상'을 현대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다. 데이비슨에게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를 경헝하는 물품은 신경 말초의 자극 패턴이 아니라, 보다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다. 즉 그의 접근 방식은 외부주의적이다. "해석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상황에서) 화자와 해석자 둘 다에게 두드러진 외부 사물과 사건들에, 해석자가 화자의 말이 주문제로 삼는다고 간주하는 바로 그런 사물과 사건들에 의존한다. 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원촉적 자극이다"(SCT, 321).
그런데 '원촉적 지시이론'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원촉적 지시이론이 '참이라고 믿어진 것'과 '참인 것' 사이의 중요한 간격, 즉 오류를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유는 원촉적 이론은 진리를 믿음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데이비슨의 해법은 두 개의 해석적 정책(devices)에 의거한다. 첫째, 화자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해석자는 화자가 문장에 동의하도록 부추긴 사건과 사물들만을 주목하는 것을 넘어서서, 화자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의 측면들을 관찰할 채비를 잘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이것은 해석자의 화자가 발화한 문장 중에 특별한 문장에 무게를 둘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화자가 양을 잘못보고 염소라고 말하는 오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정책 때문이다. 둘째 정책은 문장의 상호활성(interanimation)에 관계한다. 화자는 하나의 문장의 진리를 다른 문장의 진리를 지지하는 증거로 간주하는데, 이것이 '문장의 상호활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즉 문장들은 서로의 진정성을 활성화시킨다. 콰인은 문장들 사이의 의존관계의 증거로부터 논리적 상항의 해석을 이끌어 내었다. 데이비슨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문장들 사이의 상호활성, 그들 사이의 의존관계가 소위 관찰어의 해석에서도 역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장의 상호활성이 오류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놓여 있다.
비관찰어에 대한 해석은 조건적 확률에 상당부분 의존한다. 조건적 확률은 행위자가 어떤 것을 자신의 이론적 술어의 적용을 위한 증거로 여기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이론적 개념 혹은 그것의 언어적 표현의 역할을 규명하고, 그리하여 해석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이론적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낱말들에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일반적으로 전체론적이고 개연론적(probabilistic)이다. 따라서 우리는 화자가 하나의 문장을 참인 것으로 여기는 정도, 즉 그의 주관적 개연성을 우리가 탐지할 수 있을 때만, 그러한 관계들을 알아챌 수 있다"(SCT, 322). 분명한 동의와 분명한 이의는 주관적 개연성의 극단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도들을 신념의 강도에 의해서 단순한 동의와 이의 사이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믿음의 정도는 해석자가 직접적으로 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강도는 보다 기본적인 태도에 근거해 해석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결심이론에서 보았던 것이다.
IX. 믿음-욕구-의미의 통일이론
언어적 해석이론과 베이지안 결심이론은 서로에게 이바지 한다. 두 이론 중에서 어느 이론이 더 기본적인지는 말할 수 없다. 단순하게 이 두 이론을 합할 수도 없다. "요구되는 것은 믿음의 정도와 띄엄 띄엄 등급의 바람직함(desirablitlties) 및 발언의 해석을 산출하는 통합된 이론, 욕구나 믿음이 미리 개별화되어 있었다고 더구나 양화되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은 해석자가 행위자의 명제적 태도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세부적으로 알기 전에, 해석자가 행위자 속에서 인지할 수 있는 어떤 단순한 태도 위에 근거되어야 한다. 다음의 태도가 이에 맞을 것이다: 행위자가 다른 문장의 진리보다 이 문장의 진리를 선호할 때, 행위자가 그의 두 문장들을 향해 가지는 태도"(SCT, 322). 하나의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는 그 문장을 발화하는 화자이고, 그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해석자의 임무이다. 해석자는 구두적 행위자가 다른 문장이 아니라 이 문장을 참인 것으로 여기기를 더 좋아하도록 야기시킨 세계 속의 에피소드와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행위자가 발화한 문장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해석자는 화자의 발화의 의미를 모르고도, 화자의 믿음을 모르고도, 화자가 두는 가치의 무게(바람직함)를 모르고도 그 정보를 알 수 있다. 문장들 중에서 특정한 문장들을 더 좋아하는 행위자의 선호 패턴으로부터 행위자의 욕구, 의미, 믿음을 도출해는 것이 데이비슨의 통일이론이 수행해야 할 바이다.
통일이론(unified theory)의 방법론에 대한 예상되는 반론은 다음과 같다. 다른 문장보다 이 문장이 참이 되었으면 하는 선호는 그 자체로 일종의 지향적 상태이고, 그래서 수 많은 심리학적 요인들을 통해 행위자가 그러한 상태(선호)에 있다는 것을 탐지할 수 있다. 데이비슨은 자신의 이론의 목적이 지향적 상태를 피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면서, 그러한 선호가 일종의 지향적 상태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프로그램은 '개체화된(individuative) 지향적 상태', 즉 '내포적 상태', 또는 '명제적 대상을 가진 상태'를 피한 채, 의미, 욕구, 믿음 등에 접근하는 것이다. 다른 문장의 진리보다 이 문장의 진리를 더 좋아하는 문장선호는 외연적 관계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행위자와 두 문장을 관계시킨다. 문장선호는 문장이 의미하는 것을 모르고도 탐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장선호를 그 출발점으로 취하는 해석이론은 비명제적인 것(비내포적인 것)으로부터 명제적인 것(내포적인 것)을 얻어 내는 이론이다. 데이비슨의 야심은 비명제적인 것에서 명제적인 것으로 합법적으로 건너 뛰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통일이론이 성취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데이비슨은 화자가 다른 문장의 진리보다 이 문장의 진리를 선호한다는 비명제적 증거로부터 문장에 대한 화자의 믿음의 강도(주관적 개연성)를 도출해 낼 수 있음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통일이론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데이비슨은 그 가능성을 Richard Jeffrey의 결심이론에서 찾는다. 제프리의 이론은 선호의 대상, 주관적 개연성이 할당되는 대상, 상대적 가치가 할당되는 대상을 명제로 취급한다. 그는 명제가 참이라는 선호로부터 주관적 개연성과 상대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방법을 세부적으로 보여 주었다(SCT, 324).
제프리의 방법론에서 문제를 이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출발점은 명제들에 대한 행위자의 선호이다. 그런데 데이비슨의 통일이론의 출반점은 비명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아직 개성화되지 않는 것, 특화되지 않은 것, 다른 것과 구별되지 않은 것, 해석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명제는 '의미를 가진 문장', 그리하여 내포적인 어떤 것이다. 만일 제프리의 이론이 행위자가 선호하는 명제가 알려 있다고 시작하는 것은, 언어를 해석하려는 데이비슨의 본래 문제, 즉 명제적 태도를 개성화시키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문제의 해결으로 삼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래서 우리는 명제에 대한 선호가 아니라, 아직 해석되지 않은 문장에 대한 선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제프리의 방법은 오직 명제의 진리함수적 구조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명제들이 보다 단순한 명제들의 연언, 선언, 부정 등의 적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식에 의존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진리함수적 연결사에 대한 규정 또는 해석이다. 이것은 논리적 일관성을 통해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데이비슨은 선호에 대한 사실로부터 어떻게 진리함수적 연결사에 대한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자세하게 기술한다(SCT, 326-328). 만일 진리함수적 연결사에 대한 해석이 주어진다면, 제프리의 이론의 출발점을 명제에 대한 선호에서 문장에 대한 선호로 바꿀 수 있다. 논리적 상항 또는 진리함수적 연결사에 대한 해석이 고정되면, 제프리의 방법을 통해, 모든 문장에 대한 주관적 개연성(믿음의 강도)과 상대적 바람직함(가치평가, 욕구)을 고정시킬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그런 문장에 대한 해석을 위한 의미이론을 산출하는 데 충분하다. 선호는 일종의 행위자의 평가적이고 인지적 태도이다. 이것에 대한 앎은 결국 그 행위자의 믿음과 욕구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한다.
X. 이해 일반의 가능근거
데이비슨이 지금까지 개괄한 통일이론은 실제적인 상호이해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처음에 언어와 개념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는지의 문제, 즉 발생론적인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데이비슨은 가능한 한 근본적인 수준에서 우리의 기본적 명제적 태도들(믿음, 욕구, 의미)의 의존관계를 보여 주려 했다. 그는 믿음, 욕구, 의미 모두를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원리상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만일 이것을 보여 줄 수 있다면,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모종의 구조를 생각과 바람 및 발언에 부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도대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해석의 가능근거를 묻는 것을 철학적 질문이다. 데이비슨은 이 질문에 답하려 했던 것이다.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각, 바람, 발언 및 행위의 규범적 성격이 타인들에 대한 태도의 올바른 귀속 위에 부과하는, 그리하여 그들의 발언에 대한 해석과 그들의 행위들에 대한 설명 위에 부과하는 구조'이다. 내포적 상태들의 귀속을 수행하는 이론을 통제하는 규준들에 대해 데이비슨이 언급한 것들은 비록 서툴고 불완전하지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개선시키는 길은 사유와 행위에 모든 해석에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합리성의 표준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개선하는 것이다(SCT, 325).
"관찰문장의 명제적 내용이 (대개의 경우) 화자와 해석자 둘 다에게 공통적이고 두드러진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언어 학습에 대한 상식적 관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사유과 의미 사이의 관계를 위한, 진리의 역할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위한 심오한 귀결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화자들이 관점을 공유하는 기초적 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화자들이 공유하는 것이 공통 세계에 대한 대체로 올바른 그림이라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의사소통 둘 다의 궁극적 근원은, 화자와 해석자 및 세계를 관련시킴으로써 사유와 발언의 내용을 결정하는 삼각형이다. 이 근원이 주어진다면, 진리에 대한 상대화된 개념을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리가 여하튼 합리적 피조물들의 태도와 관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관계는 이제 상호인간적 이해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밝혀진다. 부드러운 상호인간적 이해의 필수불가결한 기구인 언어적 의사소통은 서로 이해된 발화들에, 그것의 내용이 결국 참인 것으로 여겨진 문장들의 패턴과 원인들에 의해 고정되는 그러한 발화들에 달려 있다. 해석의 개념적 버팀목은 진리론이다; 따라서 진리는 결국 믿음 위에, 그리고 더욱 더 궁극적으로 정서적 태도들 위에 놓여 있다"(SCT, 325-326).
Note
[1] 여기서 듀이는 '어떤 종류의 진리 개념이 있는가'라는 물음과, '어떤 종류의 진리들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두 물음은 완전히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SCT, 280).
[2] 데이비슨에 의하면, 로티의 이러한 듀이 해석은 온당하지 못하다. 듀이는 진리(truth)를 '작동하는 어떤 것'(what works)으로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진리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듀이는 '작동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흥미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듀이가 주장한 것은 진리들(truths)이 철학만의 특수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SCT, 281). 듀이는 일단 진리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진리와 인간의 태도들 사이의 연결에 대해 언급할 만한 철학적으로 중요하고 교훈적인 주제들이 많이 있다고 보았다. 로티는 "실용주의와 데이비슨 그리고 진리"(1986)에서 데이비슨의 진리관을 듀이의 그것과 비교한 적이 있는데, 데이비슨은 진리와 인간 사이의 듀이식 연결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데이비슨의 진리관에 대한 로티의 곡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원만희, <실질적 진리관 연구: Davidson과 Putnam을 중심으로>(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4), 62쪽-67쪽.
[3] '-는 참이다'를 문장에 첨가되는 일종의 문장 연결사로 간주한다는 것은 '-는 참이다'를 이중부정(--)과 비슷한 언어적 장치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는 참이다'를 '#'로 간략하게 쓰면, #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장 s에 대해, #s는 s를 산출하게 되는데, 만일 s가 참된 문장이면, #s는 참된 문장을 산출하고, s가 거짓된 문장이면, #s는 거짓된 문장을 산출한다. 램지의 주장대로, 만일 이것이 #의모든 내용이라면, #는 진리함수적 문장연결사 중 하나인 이중부정(--)과 똑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셈이다.
[4]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에서, 복합문장의 진리값은 그것을 구성하는 단순문장들의 진리값 또는 원자적 정식(atomic fomula)들의 진리값에 의해 회귀적으로 정의된다. 그리하여 무한히 많은 단순문장들로 구성된 복합문장의 진리값을 정의하는 것, 그리하여 그런 문장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진리를 정의하려는 것의 어리석음
(데이비슨, 1996, 요약: 파란바다, 99.3.31-5.4)
에서, 소크라테스는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것은 거룩함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거룩한 것의 목록이 아니다. 또한 "어떤 것이 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그것은 거룩하다" 따위의 거룩한 것과 동연적인 개념도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어떤 것을 신에게 귀하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은 그것이 거룩하다는 점일 수 있지만,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신이 귀하게 여긴다는 점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와 플라톤의 대화들은, 특정한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반례를 제기하고, 정의를 수정하고, 또 다시 반례가 제기되고, 결국에 가서는 개념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소피스트들이 흐느끼고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아름다움, 용기, 미덕, 우정, 사랑, 절제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정의는 도출되지 않는다. 플라톤이 흡족하게 여겼던 정의는 오직 '소피스트'의 정의이다(FOL, 263).
에서 플라톤은 경험적 지식을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지식를 참된 믿음 플러스 알파인 것으로 간주했다. 플러스 알파는 예컨대 믿음을 정당화하거나 보증하는 어떤 것이다. 바로 이 알파에 해당하는 것이 플라톤의 사유뿐만 아니라 인식론사 전체를 혼동에 빠뜨렸다. "(기억과 지각작용 및 의도적 행위에 대한 설명에도 개입되어야 하는 것처럼), 정당화된 믿음을 분석함에 있어서도 개입되어야 하는 인과적 요소와 합리적 요소들의 조합은, 경우의 성격상, 보다 분명하고, 보다 기본적인 어휘로 된 정교한 정식화에 맞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은 플라톤에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은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FOL, 263-264)"
지식에 대해 정의하려는 데 있어서 플라톤이 유일하게 실패를 인정한 것은 보증의 개념이다. 그는 진리나 믿음 개념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현대의 우리의 탐구와 다를 바 없다. 비록 우리가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이 개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때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걱정하지만, 우리가 믿음, 기억, 지각작용 및 앎 따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진리 개념에 대해서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양으로 말한다. 우리는 이 점을 흄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인식의 회의주의를 정식화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회의주의를 잊어버렸다. 의도적 행위에 대한 분석에 착수하면서 이 개념에 곤란을 느끼는 심리철학자가 만일 이 개념을 믿음, 욕구 및 인과성을 통해 올바르게 분석했다면, 그는 당분간 믿음과 욕구 및 인과 개념에 대해 미리 다 알고 있는 듯 이들 개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분석에 대해 흡족해 할 것이다. 분석 목표가 의미일 때, 언어철학자들은 의도와 규약 따위에 대해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이러한 상이한 기본 개념들을 서로 관련지으려는 우리의 시도들이 비록 취약하거나 흠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시도들은 보다 분명하고 혹은 심지어 보다 근본적인 개념들과의 관계에 의해 기본 개념들의 올바르면서 해명적인 정의를 산출하려는 우리의 노력들보다 더 잘 되어가고,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FOL, 264).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철학자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뽑은 진리, 앎, 믿음, 행위, 원인, 좋음, 옳음 따위의 개념들은 우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 중에서 가장 초보적인(elementary)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이들 개념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어떤 개념들도 가질 수 없는 그런 개념들이다. 이들 개념의 성격이 이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다 더 단순하고 분명한, 그리고 보다 더 초보적이고 근본적인 개념을 통해 이들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들 개념의 중요성이 놓여 있을 것이다. 이들 개념을 정의하기 위한 토대적 개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들 개념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이다.
위의 원초적 개념들 중에서 무엇보다 더욱 원초적인 개념은 진리 개념이다. 진리 개념은 무어와 러셀 및 프레게가 인정했고 타르스키가 증명했듯이, 정의불가능한 개념이다(FOL, 265). 그렇다고 진리 개념이 신비적이고 모호하며 변덕스러운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진리 개념을 정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믿음이나 욕구 따위의 개념과 관련시킴으로서 진리에 관해 해명하고 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진리 개념을 성격규정할 수 있는 짤막한 공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진리를 탐구의 최종점에 있는 것이다, 라든가, 진리는 학문의 성공을 설명해 주는 어떤 것이다, 라든가 하는 것은 그 명백한 반례의 존재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현대의 논의에서 인기를 더해가는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최소주의 또는 수축주의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진리는 의미와 실재 따위의 다른 개념들과 아무런 중요한 연결도 가지지 않는 상대적으로 하찮은(trivial) 개념이다'. 데이비슨은 수축주의에서 "진리 개념에 보다 많은 내용을 주입하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흥미를 끄는 것이 없다"(FOL, 265)는 주장에 대해 공감한다. 그는 수축주의자들이 거부하는 것에서 거의 옳다 하더라도, 수축자들의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데이비슨이 왜 수축주의를 수용할 수 없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A) 있는 것에 대해서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지만, 있는 것에 대해서 있다고 말하거나,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참되다.
그러나 타르스키는 "진리에 대한 의미론적 개념화"(1944)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정식을 "충분히 정확하지도 분명하지도 않다"고 불평했고, "진리와 증명"(1969)에서는 이 정식이 "충분히 일반적이지 않다"고 논평했다. 일반적이 않은 이유는 (A)가 문장들을 있는 것에 관해 말하거나, 없는 것에 관해 말하는 문장들로 분류한다는 점이다. 문장들을 이러한 두 개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타르스키는 (A)의 대안이 되기나 하듯이, 다음과 같은 정식들을 제시한다.
(T1) 한 문장의 진리는 실재와 일치(혹은 대응)에 놓여 있다.
(T2) 만일 한 문장이 존재하는 사태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참되다.
(T3) 참된 문장은 사태가 그러 그러하다고 말하는데, 사태가 진짜로 그러 그러한 문장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은 차라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 (A)이 타르스키의 정식 (T1), (T2), (T3)보다 더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정식 (A)가 진리에 대한 타르스키 자신의 작업들과 더 좋은 조화를 이루는 정식이다. 정식 (A)가 (T)들 보다 우수한 데이비슨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T)는 사태(state of affairs)를 언급한다. 그래서 문장에 대응되는 것으로 가정되는 어떤 품목이 진리 개념을 특징짓는 데 좋은 방법을 제공하는 것인 양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또는 사태가 의미론에서 유용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타르스키 자신의 진리 정의는 문장이 어떤 것에 대응된다는 관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히려 우리는 타르스키의 정식에서 "사태"라는 표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둘째, (A)는 (T3)처럼 '그러 그러하다' 따위의 모호한 빈 칸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A)는 타르스키의 규약 T에 대한 일반화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셋째, (A)는 문장의 진리가 그 문장의 내부 구조, 즉 문장의 부분의 의미론적 특징에 의존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점은 다시 타르스키의 진리론의 정신과 조화를 이룬다.
타르스키의 진리론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다음과 같은 규약 T를 도입하자. 규약 T는 's는 p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L에서-참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이다. 여기서 's'는 하나의 문장에 대한 기술 또는 이름이고, 'p'는 그 문장 자체이거나, 그 문장에 대한 번역이다. 물론 번역은 메타언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그 의미론적 구조가 알려져 있는 언어에서 수행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L'은 우리가 정의하려는 진리 술어 '참이다'가 위치하고 있는 언어이다. 즉 우리는 '언어 L을 위한 진리 술어'를 정의하려고 한다. 타르스키의 진리론은 다음과 같다. 한 언어 L을 위한 진리 술어의 만족스러운 정의는 모든 규약 T의 사례들을 진리론의 정리로서 필함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FOL, 267). 즉 만일 어떤 진리 정의가 규약 T의 모든 사례들을 필함하지 않는 정의라면 그것은 진리 정의가 될 수 없다.
타르스키가 고집했듯이 만일 진리 술어의 정의가 유한해야 한다면, 비록 문장의 수는 무한하지만, 이것이 유한한 어휘로부터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진리 술어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 술어를 정의함에 있어서 타르스키가 염두에 두었던 언어는 그 언어 속의 모든 문장들이 존재 양화문 혹은 그것의 부정문, 그리고 그런 문장들의 진리함수적 복합문의 형식으로 둘 수 있는 그런 언어이다. 따라서 "충분히 일반적이지 않은" 정식 (A)에 타르스키가 추가한 것은 고작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문장들로 구성한 복합문이다. 왜냐하면 아라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유형의 문장들은 바로 존재 양화문 또는 그것의 부정문이기 때문이다. 복합문의 진리값은 그 구성문장의 진리값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타르스키의 업적은 존재 양화문의 진리값이 그 문장의 구조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을 일종의 대응론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타르스키는 진리를 정의하기 위해 만족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만족 개념은 '사실'이나 '사태' 등의 품목과 무관하다. 문장을 만족시키는 것은 항목들의 나열, 즉 항열(sequence)인데, 이것은 사실도 사태도 아니다. 만일 타르스키가 대응론자가 아니라면 그는 수축주의자인가? Etchemendy과 Putnam은 타르스키가 의미론적 개념으로서 진리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Leeds, Horwich, Soames, Quine 등은 그가 진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비록 그가 수축주의자는 아니지만, 수축주의에 거의 가깝다.
타르스키의 진리론은 특정한 개별 언어에 대한 진리 술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의 진리론이 진리 일반에 대해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의 진리론은 이 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모든 언어 L에 대하여, 그리고 L의 모든 문장 s에 대하여, 만일 s…L…이라면, 그리고 오직 그 때만, s는 L에서 참이다'라는 정의는 있을 수 없다"(FOL, 269). 따라서 우리는 타르스키의 작업에서 진리 개념의 수축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오히려 Etchemendy과 Putnam처럼, 타르스키가 의미론적 개념으로서 진리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전혀 의미론에 종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더 그럴듯하다. 그래서 타르시키의 진리 개념은 일반적인 진래 개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타르스키의 진리론이 특수한 개별 언어들과 세계 사이의 모종의 관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타르스키가 진리 개념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해 주었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르스키는 그 개별적 언어들을 위핸 진리 정의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 즉 진리 일반의 개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슨은 타르스키가 유일무이한 진리 개념에 대해 정의하려고 시도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르스키는 오히려 특수한 언어들의 의미론적 구조를 특징짓기 위해서 진리 개념을 도입했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진리 개념을 보다 기본적인 개념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진리 술어를 언어 전체로부터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규약 T는 진리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대한 후보 또는 차선책이 될 수 없다. 타르스키가 개별적 언어를 위한 양화문장의 의미론을 취급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수축주의의 지지자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타르스키 진리론을 수축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타르스키가 강조했던 또 다른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가 수용했던 제약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진리를 정의하지 않았거나, 완전히 특징짓지 않았고, 그리할 수 없었다"(FOL, 269)는 점을 모르고 있다.
콰인은 여러 해 동안 일관되게 진리에 대한 수축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특히 그는 진리 술어를 인용부호 벗기기 장치로 간주한다. "각별히 '눈은 희다'에 대한 진리의 귀속은…어느 모로 보나 눈에 대한 흼의 귀속 만큼이나 우리에게 분명하다"(FLPV, 138). "확실히 탈인용 설명에 대해 논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PT, 93). "진리는 탈인용이다"(PT, 80). 콰인의 입장에 의하면, 진리 개념을 의미 개념에 비해 그토록 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진리의 탈인용적 성격이다. 콰인에 의하면, 의미이론과 지시이론은 서로 합작될 수 없을 정도로 근본적으로 상이한 분야이다. 의미이론은 동의어, 의미, 분석 등 따위의 다소 조악한 주제를 다룬다. 반면에 후자는 진리 개념을 포함하여 '훨씬 덜 애매하고 덜 신비로운'(FLPV, 137) 개념을 취급한다. "우리는 정말이지, [개별적 언어 L에 대한 'L에서-참'의 정의와] 비슷하면서 단일한, 변항 'L'에 대한 'L에서-참'의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심지어 변항 'L'에 대해서도, 'L에서-참'에다 고도의 이해가능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여, 우리가 그 관용구(L에서-참)의 사용을 꺼려할 것 같지 않다"(FLPV, 138; 강조는 인용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어면 영어, 국어면 국어 따위의 개별적인 언어 L에 대해서 'L에서-참이다'를 정의하는 타르스키의 회귀적 절차와 그의 규약 T이다.
규약 T와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에서 나타난 진리의 탈인용부호적 특징은, 이것이 진리 개념이 가지고 있는 모든 내용이라는 생각과 합작된다면, 진리와 의미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을 야기시킨다(FOL, 271). 그러나 콰인의 저술은 그 반대 상황을 제안한다. 즉 진리와 의미는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콰인은 "규약에 의해 진리"(1936)에서 "의미의 관점에서…, 하나의 말은 그 말의 문맥의 진리 혹은 거짓이 결정되는 범위가 무엇이든지, 그 범위까지 한정된다고 말해질 수 있다"(WP, 89)고 언급했다. "시종일관, 언어 학습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진리값들을 배분해야 할지를 학습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데이비슨과 [입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진리조건들을 배우고 있다"(RR, 65). 그리고, "타르스키의 진리이론은 의미이론의 바로 그 구조이다"(TT, 38). 그러나 만일 탈인용부호적 성격이 진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면, 어떻게 진리가 의미를 결정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는가?
최근에 콰인은 "진리가 숭고의 어떤 것을 품고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진리에 대한 추구는 고귀한 추구이고, 끝이 없는 추구이다"(SS, 67)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입장은 <말과 사물>에서 실질적 진리론에 실망하면서, 잉여설적 입장을 피력하던 때와 상당히 다르다. "학문은 진리를 포고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것은 실재주의의 어법이고, 이것은 술어 '참'의 의미론에서 중요한 것이다"(SS, 67).
Horwich는 보통의 수축주의자들이 회피하는 문제에 과감히 도전한다. 그 문제는 우리가 타르스키의 정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진리 개념의 모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수축주의자들은 '진리의 비상대화된 개념'에 대해 침묵한다. 일단 호르위치는 진리의 제일차적 담지자가 문장이 아니라 명제라고 주장한다. 비록 명제가 진리 담지자라는 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지만, 수축주의를 옹호하려는 맥락에서는 매우 의외이다. 만일 진리 담지자가 명제라면, '참이다'라는 술어에 맞는 항목은 명제이다. 그래서 진리 술어를 가장 잘 적용한 것은 '그 문장은 참이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그 명제는 참이다'라는 표현이다. 따라서 호르위치의 최소주의 진리론에서 공리로 사용하는 도식은 다음과 같다.
(H) p라는 명제는 p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참이다(The proposition that p is true if and only if p).
이 도식은 이론의 공리로 간주되기 때문에, 도식 (H)의 모든 사례들의 총합은 이론의 모든 공리들을 구성한다. 이제 호르위치의 최소주의 진리론은 다음과 같다. 도식 (H)의 사례들이 진리 술어의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때, 우리는 이미 진리 술어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 것이다. (FOL, 272).
데이비슨은 위와 같은 호르위치의 최소주의 진리론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다. 이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이론을 거부할 이유를 가지게 된다. 첫째, 호르위치의 공리 도식 (H) 또는 그것의 사례들에 모호한 점이 있다. 공리 (H)의 한 사례,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 라는 명제는 소크라테스가 현자일 때 그리고 오직 그때만 참이다'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문구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 라는 명제"(the proposition that Socrates is wise)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 라는 명제"에서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라는 문장은 명제를 지시하는 단칭어 역할을 하는가, 명제를 표현하는(기술하는) 역할을 하는가? 문장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의 의미론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칭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명명하는지, 술어 '현자이다'가 어떤 품목에 대해 맞는지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문장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론적 특징을 이용하여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 라는 명제"의 지시관계를 산출해 낼 수 있는가?(FOL, 274) 즉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 라는 명제"는 무엇을 지시하는가? 결국 도식 (H)의 한 사례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문장,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의 외양은 도식 그 자체, 또는 도식의 사례 그 자체를 이해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도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H*) 문장 "p"에 의해 표현된 명제는 p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참이다(The proposition expressed by the sentence "p" is true if and only if p).
위의 (H*)의 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문장 "소크라테스는 현자이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소크라체스가 현자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참이다'. 이런 수정으로부터 우리는 인용된 문장을 하나의 언어에 대해 상대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호르스키의 도식 (H)에 대한 데이비슨의 반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식 (H)의 한 사례에서 똑같은 문장이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라는 명제"라는 작용장치적(functional) 표현 뒤에 등장한다. 이 작용장치적 표현 뒤에 올 때 그 결과는 하나의 단칭어, 즉 하나의 술어의 주어를 산출하게 된다. 또 한 번은 단순한 일상적 문장으로서 등장한다. 이론 자체의 외양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이 반복, 즉 똑같은 문장의 되풀이를 제거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 되풀이의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그 문장의 똑같은 의미론적 특징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즉 그 문장의 의미론적 성격들을 활용하여, 도식의 사례 자체의 의미론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데이비슨에 의하면, 어떻게 이것을 수행할 수 있는지 불투명하다(FOL, 274). 따라서 우리는 도식 (H)에서 똑같은 문장의 그 반복의 결과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데이비슨이 제시한 호르위치의 최소주의에 대한 두 번째 난점은 다음과 같다. 수축주의는 진리가 투명하고, 청정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 개념을 다른 개념 또는 관념들과 따로 떼어 내어 독립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개념들 또한 진리 개념으로부터 떼어 내어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호르스키는 진리 개념과 다른 개념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개념들이 진리 개념과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는 말했다(FOL, 274). 그러나 데이비슨에 의하면, 진리 개념 없이는 의미 개념과 다른 명제적 태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진리 개념 없이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호르스키는 진리 개념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 없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언급했다. 하나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진리조건을 아는 데 놓여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하나의 문장을 이해한다면, 일반적으로 그것의 진리 조건들을 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나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주장가능성 조건들"(assertability conditions) 또는 "고유한 사용"(proper use)을 아는 데 놓여 있다. 주장가능성이란 그 문장을 발화하거나 단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호르위치는 이 주장가능성 조건들 속에는 그 문장이 참되다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슨은 "만일 진리가 하나의 주장가능성 조건이라면, 그리고 그 주장가능성 조건들을 아는 것이 [그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진리 개념을 가지지 않은 채 하나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지"(FOL, 275)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L. Wittgenstein과 H. Grice에 의해 제안된 여러 선구적 모범들을 따르는 M. Dummett과 H. Putnam 및 M. Soames 등의 대가들은 의미가 진리개념을 불러들이지 않는 주장가능성(또는 사용) 개념에 의존하는 것인 양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슨의 입장은 이러한 입장의 정반대에 놓여 있다.
진리 개념과 의미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데이비슨의 이유는, 수 없이 많은 주장(assertion) 또는 단언들 중에서 특히 이해와 관련되어 있는 주장은 이미 진리 개념을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 주장을]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 문장이 참되다고 우리가 믿을 때만"(FOL, 275; 강조는 인용자) 하나의 문장을 주장하는 우리는 정당화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언어를 세계와 묶어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문장들이 참이라고 여기도록 전형적으로 야기시키는 조건들이 우리 문장들의 진리조건들을 구성하고(constitute), 그리하여 [문장들의] 의미들을 구성한다는 점이다"(같은 쪽; 강조는 저자). 화자 또는 언어의 의미론을 개발시키기 위해 어떻게 진리론을 형식화해야 할지 최소한의 몇몇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지만, 주장가능성 또는 사용 개념을 기초로 하여 의미이론을 형식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화자 혹은 언어의 진리이론과 무관하게 그 화자 혹은 그 언어의 의미이론을 개발시켜야 한다면, 이것은 불행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FOL, 275). 데이비슨의 결론은 수축주의적 진리론의 전망은 어둡다는 것이다.
진리에 관한 이러한 아포리아의 원인은 무엇인가? 데이비슨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발상의 마법에 여전히 걸려 있다. 즉 우리는 계속해서 관념의 본질, 다른 단어들로의 중요한 분석, 경건의 행위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답하는 것, 발화와 문장 및 믿음 혹은 명제를 진리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답하려 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홀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단어들을 가지고 혹은 그것들에 관해서 그 이상의 것을 말하기 위해 서두로서 우리의 단어들을 정의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신입생의 오류에 빠져 있다"(FOL, 275).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진리를 정의하려 그렇게 많이 시도했었는가? 타르스키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진리가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정의했다. 호르스키도 아니다. 그는 그 시도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누가 진리 개념을 정의하기를 원한다고 자백하는가? 개념을 정의하고자 하는 충동은 개념에 대한 간략한 기준, 도식, 힌트 따위를 제공하려는 시도를 가장하여 표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호르위치의 도식은 Dummett의 정당화된 주장가능성, Putnam의 이상적으로 정당화된 주장가능성, 대응론과 정합론의 다양한 정식들과 비슷한 등장 배경을 가진다. 데이비슨은 이 모든 것들이 비록 정의는 아니지만, 정의의 대용물을 얻으려는 시도로 본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진리의 경우, 그런 대용물은 존재하지 않는다(FOL, 276).
그렇다면 데이비슨은 위의 여러 진리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적 이론을 가지고 있는가? 데이비슨은 여기서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일단 이 방법론은 부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진리의 정의는 물론, 준정의적 구절, 공리적 도식, 간략한 공식을 전혀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법론이 긍정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리 개념과 이것에 몸통을 제공하는 인간 태도들과 행위들 사이의 연결들을 추적하려는 시도하는 것"이다. 데이비슨의 방법론은 측정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그 영감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아직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에 명료한 제약조건을 부과하고, 그런 다음에 그런 이론의 어떤 모델이 직관적으로 희망하는 속성들을 가지는지를 증명하는 이론들로부터 유래한다.
진리는 그것이 적용되는 실재적 대상, 세계의 상태가 존재한다. 그것은 발화, 믿음의 상태, 기재들이다. 진리가 적용될 대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진리 개념에 관심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항목들이 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상태, 사물과 사건의 내용을 규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형식적 진리이론에 부과하여, 우리는 진리가 어떻게 이러한 경험적 현상에 대해 서술하는지 말해야 한다"(FOL, 276-277). 비록 타르스키의 진리정의가 경험적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정의가 화자의 실제적 관행에 맞출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정의를 경험적 문제에 적용하고, 이것은 올바른 것인지 묻는 것을 이상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정의라는 것을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비슨은 이러한 거리낌을 없애기 위해 타르스키가 만족에 대한 공리화에서 진리에 대한 명시적 정의로 나아가는 최종적 단계를 생략할 것을 제안한다. 결과는 '거세된 정의'이다. 데이비슨은 이 거세된 정의를 일종의 이론으로 부른다. 그리하면 진리 술어는 이제 정의되지 않은 원초적 개념으로 남게 된다. 정의되지 않은 그 원초적 개념은 일반적, 직관적 개념이다. 이것은 어떠한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진리 일반이다. 바로 이 개념에 비추어 우리는 타르스키의 정의의 적합합을 늘 은밀하게 검사해 왔다. "우리는 이 개념이 인간 행위자들의 발언과 믿음 및 행위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인간 행위자들의 발화와 믿음에 진리조건을 할당함으로써, 발화와 믿음들을 해석하기 위해 진리 개념을 이용하고, 우리는 그런 행위와 태도들의 진리의 그럴듯함을 평가함으로써, 그것들을 판단한다"(FOL, 277). 그렇다면 이제 관찰과 귀납에 의해서, 우리가 경험적 문장의 진리조건이 무엇인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경험적 문제가 남게 된다. 만일 경험적 연결이 없다면, 진리 개념은 아무런 적용대상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도 도대체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램지는 개연성 개념이 명제적 태도에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개연성은 믿음의 정도에 대한 척도이다. 믿음의 정도(주관적 개연성)의 개념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주관적 개연성은 전적인 확신보다 작고, 전적인 불신보다 큰 믿음의 정도를 말한다. 이것은 행위자 자신에게도 해석자에게도 관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램지는 선호 개념을 정의하지 않고 몇 가지 제약조건을 부과함으로써 그것의 경험적 내용을 드러내려 한다. 이를 위해 그 자신의 가치와 믿음에 부합하면서 명제(사태 또는 사건)의 진리에 대한 선호를 조정하는 이상적인 행위자를 생각한다. 램지가 선호에 대해 부과한 제약조건은 이상적인 행위자의 선호 패턴이다. 램지는 이 패턴을 공리화했다. 먼저 선호 패턴이 합리적이게 되는 조건을 준다. 그 다음, 만일 이 조건이 충족되면, 행위자의 선호로부터 행위자의 욕구와 주관적 개연성의 상대적 강도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램지는 모든 행위자가 완벽하게 합리적이라고 가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거의 충분하게 합리적이라고 가정했다. 이런 가정은 결국 그의 이론이 주관적 개연성 개념에 내용을 주기에 충분한 가정이다. 램지의 전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관적 개연성(믿음의 정도) 개념은 행위자나 관찰자 모두에 의해 관찰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개념은 기본 효용(cardinal utility, 주관적 가치평가)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주관적 개연성과 주관적 가치평가(evaluation)는 그 공리적 구조에 의해서 단순(simple) 선호와 연결되어 있다. 단순 선호는 실제적 선택 행위의 구체화를 통해서 중대한 경험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 데이비슨은 램지의 이 전략을 진리이론에 적용시킨다. 합리적 결심이론과 진리론둘 다는 우리가 언어를 지니고 있는 다소간 합리적인 피조물의 행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종의 구조를 기술한다. 그 구조 속에서 우리는 정의되지 않은 개념, 즉 주관적 개연성(믿음)과 주관적 가치(바람), 그리고 진리에 내용을 부여한다.
일단 우리가 진리를 관찰가능한 인간의 행동과 연결시키는 문제는 모든 태도의 내용을 할당하는 문제와 분리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결심이론과 진리이론을 통합하는 보다 큰 통일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이론은 합리성의 주요한 규준들을 구체화하는 이론이 될 것이다. 행위자의 생각과 행위에 있어서 합리성의 그러한 규준이 부분적으로 실현되면, 해석자는 그 행위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그 규준의 실현이 행위자를 이해가능하게 만든다.
사유의 조건
(Davidson 1989, 정리: 파란바다)
"사유의 존재를 위한, 그래서 특히 사유들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위한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만일 일인칭 마음과 자연세계를 공유하는 다른 사려깊은 피조물들이 없다면, 그 마음 속에 사유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CT, 193). 여기서 하나의 사유는 명기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어떤 심적 상태이다. 세계의 본성에 관한 어떤 하나의 사유는 틀릴 수 있고, 그러한 사유들 모두가 역시 틀릴 수 있다는 이유로, 어떤 철학자들은 사유들이 마음의 바깥과 전혀 무관할 수 있다거나, 세계는 (사유의 내용과) 완전히 다른데 사유들은 이러저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또 어떤 철학자는 이러한 회의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사유는 자기 자신의 사유에 관한 사유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적 의심은 마음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적 상태에 대한 사유는 바로 이러한 의심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기 때문에, 확실하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논의들이 대개 유아론적 관점 또는 일인칭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도 의심받았다. 만일 어떤 마음의 내용이 다른 마음의 내용과 논리적으로 무관하다면, 그래서 마음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다른 마음을 알 수 있겠으며, 또한 다른 마음은 어떻게 그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만일 당신이 바깥을 볼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 있다면) 다른 누구도 [당신의] 안쪽을 볼 수 없다"(CT, 194). 데이비슨에 의하면, 여기서 발생된 문제는 단일한 문제가 아니라, 별개의 두 문제들이다. 하나는 내가 타인의 마음을 아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이 나의 마음을 아는 문제이다. 후자의 문제는 L. Wittgenstein에 의해 해결의 기미가 엿보였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증거를 요청하지 않지만, 타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언어적 행동을 포함하여 타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마음에 대한 앎은 심적인 상태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면 행동의 관찰에 근거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면 관찰에 근거할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적법한가? 합법성과 관련하여 두 문제가 새롭게 발생된다. 첫째, 왜 증거없이 획득된 앎이 증거 위에 근거된 앎보다 더 확실해야 하는가? 둘째, 두 가지 종류의 기준으로서 적용되는 술어나 개념이 단일한 술어나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예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는 심적 개념과 타인들에게 적용되는 심적 개념을 각각 따로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심적 상태와 타인의 심적 상태가 같은 종류의 상태라고 간주할 이유가 있는가? 달리 물어, "나는 왜 내 마음이 내가 타인들에게서 탐지하는 심적 상태들과 비슷한 심적 상태를 가진다고 생각해야 하는가?"(CT, 194)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삼인칭적 관점에서 출발해 보자.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의 사람은 어떻게 또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다음과 같은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가장 단순한 경우들에 있어서, 하나의 믿음을 야기시키는 사건들과 대상들은 그 믿음의 내용 또한 결정한다"(CT, 195). 예를 들어, 노란 어떤 것의 명백한 출현에 의해, 차별적으로 그리고 정상적인 조건 아래에서 야기된 믿음은 노란 어떤 것이 출현해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이 우리의 가장 평이한 판단들이 항상 옳다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판단들의 인과적 내력은 판단의 내용의 주된 구성적 특징을 제공한다"(같은 쪽)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 내용에 있어서 '외부주의'라는 입장이다.
외부주의는 타인의 믿음이 무엇에 의해 유발되었는지 검토함으로써 그 믿음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해석에 적합한 외부주의는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는가? 만일 외부주의가 옳다면,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회의주의는 초점을 잃게 된다.
만일 어떤 사유들의 내용이 그 정상적인 원인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그 사유들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그 사유들을] 유발시키는 사건들과 상황에 대한 지식은, 사유자가 그러한 사유들을 유발시키고 있는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따로 설정하거나, 그것을 위한 증거를 찾을 것을 요구할 리가 없다. 물론 외부주의는 심지어 가장 단순한 유형의 판단들조차도, 개별적인 지각적 판단들이 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외부주의가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판단들의 내용이 옳은 판단들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각적 판단들이 잘못되는 것이 왜 일어날 수 없는지이다(CT, 196).
사유의 본성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가 삼인칭적 관점을 채택할 때, 우리는 외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일인칭적 관점에서 볼 때, 외부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데이비슨의 답변은 긍정적이다.
다음과 같은 조건반사와 언어학습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개에게 음식을 줄 때 마다 종을 울리면, 나중에 개는 종소리가 들릴 때 음식을 주기 전에 벌써 타액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유아가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옹알거리다가 우연히 어머니 앞에서 '엄마'라는 소리를 내게 되었을 때, 아이에게 유쾌한 자극이 제공되면, 유아는 나중에 어머니 앞에서 '엄마'라는 소리를 내뱉게 되는 성향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지능을 가진 피조물들은 학습이나 조건반사로 통해 일정한 자극에 대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아마도 지각 유사성이나 일반화는 학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종소리와 음식 제공의 조건화는 다른 개에게 유사하게 일어날 것이다. 음식 제공이 '개의 관점에서' 유사하게 타액의 분비를 야기시키는 것처럼, 종소리는 개의 관점에서 유사한 행동을 유발할 것이다. 만일 피조물들에게 이러한 지각 유사성 메커니즘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아무 것도 학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극의 위치'에 관한 의문이 있다. 개의 경우에, 종소리가 '자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극으로 말하자면, 개의 귀에 전달된 공기의 진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아니면 말초신경의 자극작용은 어떤가? 분명히, 종소리가 만드는 음파과 같은 패턴으로 개의 귀에 공기의 진동을 일으키면, 또는 말초신경에 적절한 자극작용을 가하면, 조건화된 그 개는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자극에 관한 한, 자극이 근촉적(proximal)이면 일수록 보다 확실한 자극이 될 것이다.(여기서 '근촉적'(近觸的)이란 '촉발의 접촉점에서 가까운' 또는 '신경의 중추에서 가까운'을 뜻한다. 반대로 '원촉적'(distal)은 '촉발의 접촉점에서 멀리 떨어진' 또는 '신경의 중추에서 멀리 떨어진'을 뜻한다.) 그리고 유아의 언어 학습의 경우에서, 유아가 반응한 것은 어머니라는 물체가 아니라, 물체 표면에 의한 자극작용의 패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개가 종소리에 반응하고, 유아가 어머니의 모습에 반응한다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출현할 때, 어머니의 모습에 반응하고,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에 반응한다. 다시 말해 원촉적 원인에 의해 우리의 반응이 유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개의 타액 분비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개의 행동을 유발시킨 것을 주목하고 그 원인을 그러모은 후, 그것이 종소리였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종소리인지 일정한 주파수를 가진 공기의 진동인지 아니면 청각신경의 감각세포에 가해진 자극인지 알 수 없다. 유아가 어머니의 출현에 응하여 '엄마'라고 반응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엄마'라는 발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그것이 세계 속에 있는 어머니라는 품목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피조물들의 행동의 원인을 세계 속의 사건과 사물에서 찾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스럽다. 오히려 다른 피조물들에게 닿거나 비치는 음파 패턴이나 가시광선 패턴의 유사성을 우리 자신이 판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게 발생되는 말초신경의 자극작용을 관찰하거나, 자극작용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의 학습과 조건화 과정을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하나의 피조물이 사유를 가질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유아의 언어 학습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유사성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유아는 어머니의 출현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해야 한다. 둘째 우리도 어머니의 출현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어머니의 출현들에 대한 유아의 반응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아의 반응들을 유발시킨 자극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유사하다고 판단하는 유아의 반응들을 역시 우리가 유사하다고 판단하는 사건들과 물품들과 연관시킴으로써, 아이의 반응과 관계되어 있는 자극의 출처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삼각작도와 비슷하다. 첫째 선분은 유아에서 어머니에게로, 둘째 선분은 우리에서 어머니에게로, 나머지 선분은 우리에서 유아에게로 그어진다. 연관된 자극의 출처는 첫째 선분과 둘째 선분이 수렴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어머니라는 대상 또는 어머니의 출현이라는 사건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자극작용과 유아에게 발생한 자극작용은 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자극이 유입되는 선분을 향해 바라보는 우리의 전망과 유아의 전망은 두 개의 주관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전망이 수렴하여 자극 지점에서 교차한다는 것은 그 자극이 간주관적인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자극은 공통의 공간에서 객관적인 자리를 가진다. 따라서 삼각작용에 연루된 관찰자나 주체가 만일 어떤 개념을 가진다면, 그 개념은 공통의 공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공적인 어떤 것의 개념이다. 만일 간주관적 교차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피조물의 반응이 무엇에 의해 유발된 것인지, 다시 말해 그 반응이 무엇과 관계되어 있는 반응인지 말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예컨데 그 반응이 피부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바깥의 대상이나 사건과 연관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아론적 세계는 아무 크기일 수 있다. 말하자면, 유아론적 세계는 크기를 가지지 않고,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CT, 198).
결국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 자극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두 피조물들을 요구한다. 이때 두 피조물들 역시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래서 첫째 피조물과 상호작용하는 둘째 피조물이 없다면, 하나의 피조물이 어떤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지 대답할 수 없다. 그리고 나아가 그 피조물이 무엇에 관해서 믿음을 가지거나 무엇을 의미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둘째 피조물이 없다면, 첫째 피조물이 사유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떤 피조물이 사유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먼저, 그 피조물과 상호작용하는 다른 피조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상호작용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두 피조물은 그 상호작용에 반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상호작용은 영향을 주고 받는 두 피조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과'를 배우는 학습자는 사과가 나타날 때 자신이 '사과'와 유사한 소리로서 반응할 때 교육자가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예컨대 보상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교육자는 학습자로 하여금 자신이 유사하게 지각하는 것에 대해, 예컨대 사과에 대해 유사하게 반응하도록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학습자와 교육자의 생득적 유사성 반응들은 매우 비슷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학습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유사하지만, 교육자의 관점에서는 유사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화자가 되거나 해석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은 자기자신과 충분히 비슷한 타자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CT, 199)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의 피조물이 사유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생득적 유사성 반응들을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지적 피조물이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둘째 피조물의 유사성 반응들이 첫째 피조물의 그것들과 거의 비슷해야, 첫째 피조물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 어떤 자극에 의한 것인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피조물의 반응이 사유로 여겨질 수 있기 위해서, 그는 자극에 대한 개념, 즉 대상(object)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종소리나 책상이 두 (또는 더 많은) 집합의 유사성 반응들-우리는 [이것을] 사유의 선분들이라고 말해도 거의 괜찮을 것이다-의 교차에 의해서만 확인되기 때문에, 책상이나 종소리의 개념을 가지는 것은 어떤 삼각형, 한 꼭지점은 자기자신이고, 다른 꼭지점은 자기자신과 유사한 어떤 피조물이고, 셋째 꼭지점은 한 공간에 위치하여 그래서 공통적인 것이 된 대상이나 사건(책상이나 종소리)인 삼각형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꼭지점, 즉 둘째 피조물 또는 둘째 사람이 자기자신과 똑같은 대상에 대해 반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이 마음 속에 똑같은 대상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둘째 사람은 자신이 하나의 꼭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똑같은 삼각형에서 첫째 사람이 다른 꼭지점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해서 그들이 그렇게 관계맺고 있다는 것을, 즉 그들의 사유들이 그렇게 관계맺고 있다는 것을 아는 두 사람은 그들이 의사소통 속에 있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는 다른 이에게 말해야 하고, 다른 이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CT, 199).
따라서 데이비슨에 의하면 모든 명제적 태도는 사회적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이 개념을 가지기 위해서, 또는 그 공통체 속에서 이 개념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i)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ii)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 공통 세계에 관한 사유의 방식을 공유하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주관적, 간주관적, 객관적
(Davidson 1996, 파란 요약, 98. 10. 6)
철학에서 관심을 가지는 앎의 문제는 다음 세 문제로 크게 요약할 수 있다. 주관적 앎: 우리 자신의 마음에 관한 우리의 앎. 간주관적 앎: 다른 사람의 마음의 관한 우리의 앎. 객관적 앎: 자연에 관한 우리의 앎. 데이비슨은 그의 최근 논문 "주관적, 간주관적, 객관적"[1]에서 이 세 가지 지식 사이의 관계를 개괄한다. 철학사에 이 세 개는 따로 따로 접근되었는데 데이비슨에 의하면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2]. 이 세 가지 경험적인 지식은 나름대로 구별되는 특징은 가지고 있다. 나는 자기-지식(self-knowledge)을 가진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일어나는 감각작용은 알고 내가 생각하고 원하고 의도하는 것을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immediately) 안다. 다시 말해 "나는 일반적으로 내가 나 자신의 마음의 내용에 관해 아는 것을 증거나 조사에 호소하지 않고 안다."(SIO, 156) 그래서 자기지식은 매개를 거치지 않은 앎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 예외가 다른 자기지식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만 그 예외는 수용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나 주위의 세계에 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즉, 나는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지각'한다. 지각적 믿음은 나 주위에 있는 사물들과 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 '직접적으로'(directly) 유발된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 관한 앎은 나의 감각기관의 기능에 의존한다. "감각들에 이런 인과적 의존성 때문에 자연의 세계에 관한 우리의 믿음은 모종의 불확실성에 노출된다."(SIO, 156) 또한 나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구두적 행동을 포함하여 어떠한 행동도 보지 못한다면 나는 그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알 수 없다. 타인의 행동이라는 매거를 거칠 때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의 명제적 내용에 대한 우리의 앎은 우리 감각에 결코 직접적이지 않다."(SIO, 156) 그러나 이들 세 종류의 지식들은 똑같은 실재의 다른 측면에 관계할 뿐이다. 이들 지식들은 실재에 접근하는 양상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똑같은 세계가 세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역사적으로 인식론자들은 이들 세 지식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 하였다. 예컨데, 개념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어떤 지식인가? 어떤 철학자들은 그 직접성과 확실성을 이유로 자기지식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두 지식을 연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은 자기지식으로부터 외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유도하고 이것과 타인의 행동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다른 종류의 지식을 이것으로 환원시키려 했다. 이런 여러 시도들은 데카르트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물론 이런 문제들 자체가 미몽이거나 미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데이비슨은 "이들 지식의 세 형식 중 아무 것도 하나나 다른 두 종류로 환원될 수 없다"(SIO, 157)고 논증한다. 이것은 세 가지 지식을 통합하려는 환원주의자의 기획의 실패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예고된 바이다[3].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앎을 따로 따로 생각하는 데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서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외부 세계에 관한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많은 회의주의적 논증들은 타인의 마음에 관한 문제에 별다른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에 관한 앎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접근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타인의 행동을 관찰한다는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외부 세계에 대한 앎을 의심하면서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회의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믿음들과 그들의 주관적 경험들의 전체는 그들이 가지는 믿음들 중 임의의 믿음의 허위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세계에 관해서 무엇을 믿는지에 관계되는 진리는 [세계에 관한] 그런 믿음들의 진리와 논리적으로 무관하다'(SIO, 158)고 가정한다. 바로 이 가정으로부터 타인의 마음과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 가정을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담긴 내용에 관한 어떠한 앎도 외부 세계에 관한 믿음의 진정성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이것에서부터 마음의 작용에 관한 진리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정신(the mind)과 자연 사이에 논리적 또는 인식적 장벽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밖을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바같에서 안으로 보는 것 또한 막는다."(SIO, 158)
타심의 문제에 접근하면서 이처럼 종종 자기인식의 문제와 세계인식의 문제를 분리한다. 어떤 이들은 어떤 심적 상태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행동의 일정한 형태가 바로 그 심적 상태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먼저 타인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과 자신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 사이에 발생되는 비대칭성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는 간접적으로 접근하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으로 접근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 행동주의자들은 행동적 증거가 타인에게 심적 상태를 올바르게 귀속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증거는 자기 자신에게 그 심적 상태를 귀속시키는 것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만일 두 지식 사이의 비대칭성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결국 실지로 두 종류의 심성 개념을 가지게 된다. 타인에게 적용되는 심적 상태와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심적 상태. 타인의 심적 상태는 행동 따위의 외부적 표출에 의해서만 알려지고 나의 심적 상태는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나와 그들의 심적 상태는 모두 사람의 심적 상태이다. 나는 그들에게 타인이고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자아이다. 두 번째 문제는 타인의 마음을 행동에 의해 접근하는 것의 타당성 문제이다. 타심의 문제에 대한 이런 방법이 만족스럽다면, 타인이 행동을 인식할 수 있는 만큼 세계의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문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하필 외부 세계에 대한 회의주의만 유독 끈질지게 문제가 되는가? 나의 심적 상태와 타인의 심적 상태가 유사하다는 것이 보증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타인의 경험을 추정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데이비슨은 이런 세 가지 인식에 관한 문제의 근원을 해명하기 위해 이들 지식들을 모두 수용하면서 서로간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는 전반적인 그림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그는 이들 세 가지 형식의 인식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점을 강조한다. 이 세 가지 인식은 모두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어떤 것 하나를 제거할 수 없다. 그리고 데이비슨은 이들 지식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한 데 얽힌 문제들을 다음과 같은 세 문제로 분석해 낸다. (i) 마음은 어떻게 자연의 세계를 알 수 있는가? (ii) 하나의 마음이 다른 마음을 아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iii) 자연에 대한 지식, 특히 행동은 어떻게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을 산출할 수 있는가?(SIO, 160) 데이비슨에 의하면 이 세 문제는 따로 떼어 고찰되거나 둘이나 하나로 압축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세 종류의 지식이 하나 혹은 둘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이들 지식 중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는 잘 지낼 수 없다. 데카르트와 흄적인 회의주의자들은 사람이 자연 세계에 대한 인식 없이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 자기자신의 마음에 관해 아는 것으로 충분하며, 아마도 자기지식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SIO, 160) 그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매우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자연적 세계에 관해 그렇게 철저하게 의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모르고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회의주의자들은 마찬가지 동인으로 타인의 마음에 대한 앎을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데이비슨이 나, 세계, 그리고 타인에 관한 지식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회의주의를 강하게 반대하는 것과 관계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언어 없이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볼 때, 자기의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잘 지낼 수는 없다. 데이비슨은 이것은 논증하고 한다. 먼저 믿음은 앎이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기 위해, 세계의 형세들을 식별하고, 상이한 상황들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렁이나 해바라기도 이것을 한다. 하나의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 외에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 외양과 실재, 한갓 겉보기와 있음 사이의 대비를 헤아릴 것을 요구한다."(SIO, 161) 가령 해바라기는 태양빛의 방향을 잘 감지할 수 있고 백열등을 태양빛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해바라기에게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을 귀속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착각하고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에게 믿음을 귀속시킨다. 믿음이란 참될 수도 거짓될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항상 항상 오류를 범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참되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객관적 진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에 관해서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이미 객관적 진리에 대한 개념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자신의 마음에 관한 믿음, 자연적 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리 개념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만일 언어가 사유에 본질적이라면, 사유는 의사소통에 의존한다[4]. 비트겐슈타인은 사적인 언어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객관적 진리 개념의 원천이 개인상호간의 의사소통에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었다.(SIO, 162) 만일 언어가 공유되지 않는다면 언어를 옳게 사용하는지 그르게 사용하는지 구별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타인과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말의 올바른 사용을 객관적으로 검사할 수 있다. 따라서 오직 의사소통만이 객관성의 표준을 제공할 수 있다. "한 피조물이 공유된 언어에 의해 제공되는 그 표준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피조물이 진상(the case)인 것으로 사유되는 것과 진상인 것 사이의 구별을 하는 것으로 믿을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런 구별 없다면 사유라고 분명하게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SIO, 162)
의사소통이 있는 곳에서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화자의 발화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화자와 청자는 어떻게 이것을 공유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언어가 인간에게 어떻게 처음으로 주어지게 되었고 유아가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합당한 철학적 사색'은 언어 구사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발화를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SIO, 163) 그러나 이것에서부터 언어와 의사소통에 관한 원초적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은 콰인과 데이비슨이 잘 보여준 바이다.
해석자는 화자의 발화의 내용에 자신의 믿음의 내용을 부여한다. 해석자는 타인의 명제적 내용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 "믿음들, 욕구들, 발화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결정하는 의도들을 포함하여 의도들은 맨눈으로 보여질 수 없다."(SIO, 163) 그러나 해석자는 화자가 자신의 발화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는 관찰될 수 있다. 화자가 문장을 참인 것으로 여긴다거나, 참이 되기를 원한다거나, 저것보다는 이것이 참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고 여기는 것은 해석자가 그 태도의 내용이나 문장의 의미를 알지 못해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비슨은 화자의 이런 태도를 '특화되지 않은'(non-individuative) 태도라 부른다.(SIO, 164) 콰인에게 특화되지 않은 태도는 화자가 질의에 대해 동의하거나 이의하는 태도이다. 그는 화자의 이런 태도를 화자의 발화의 의미를 위한 증거로 삼았다.
화자가 하나의 문장을 참으로 여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믿는 것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문장이 의미하는 것 때문이다. 화자의 발화를 해석하기 위해서 화자의 믿음과 발화의 의미를 방법론적으로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믿음와 의미를 분리시키기 위해 화자의 믿음이 해석자 자신의 믿음과 비슷하다고 간주한다. 이 방법은 화자가 원리상 해석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화자가 정말 해석가능한 존재라면 사랑의 원리라고 불리우는 규범적 원리가 그를 해석하는 데 반드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원리는 '정합의 원리'와 '대응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정합의 원리는 해석자로 하여금 화자의 사유에서 상당한 논리적 일관성을 발견하도록 부추긴다. 대응의 원리는 해석자로 하여금, 세계의 동일한 생김새에 대해 화자도, 해석자 자신이 비슷한 환경에서 응답하곤 하는 [것과 비슷하게] 응답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부추긴다."(SIO, 164) 전자는 화자가 가진 믿음들에 대해 논리적인 진정성을 인정하고, 후자는 화자가 가진 믿음들에 대해 세계 또는 실재와의 참된 관련성을 인정한다. 성공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이 두 원리가 해석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공적인 해석은 필연적으로 해석되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합리성을 부여한다."(SIO, 165) 올바른 해석의 본성에 의하면 "일관과 사실들에 대응의 인간적(interpersonal) 표준은 화자와 화자의 해석자 둘 다에 적용되고, 그들의 발화들에, 그리고 그들의 믿음들에 적용된다."(SIO, 165)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인간적 표준이 객관적인 표준인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진리의 객관적 표준이 하필이면 의사소통에 의해 설정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콰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세계의 두드러진(salient) 일정한 측면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 사람들은 잡다한 감각적 촉발에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이것은 진화과정에서 생존가치를 지닌 반응의 방식만 보존되기 때문이다. 유사한 반응의 방식은 학습을 통한 조건화에 의해 어른에서 아이에게로 전수된다. 그러나 이것은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식물의 굴광성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빛이 있는 쪽으로 굴절되지 않는 식문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데이비슨은 묻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반응들이 유사하다고 말하게 하는가?"(SIO, 165) 데이비슨에 의하면 사물들이 유사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개념 또는 '의식적인 무리지우기'(conscious groupings)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순한 등급매기기 또는 조건화(conditioning)는 유사성을 감지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자신의 조건화 과정을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유사한 자극들과 응답들을 '의식적으로' 모을 수 있고, 그것을 개념과 연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연선택이나 학습에 의한 조건화(conditioning)와 개념에 의한 편성(grouping)의 차이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는 '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유사하게 보이는 어떤 사물을 분류하여 그것을 '돌'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런 분류는 우리와 다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발화와 연관시킨다. 그래서 한국인은 외국인들의 'stone', 'pierre', 'Stein', '石' 따위가 '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들에 대해 유사한 분류를 한다. 이것은 해석자가 화자의 구두적 행동을 해석할 수 있는 외부적 배경이다. 이것은 해석 상황뿐만 아니라, 언어의 학습에서도 기본적이다. 학습자는 교육자의 구두적 행동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 예컨데 반복되는 '돌'이라는 음향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 속의 사건이나 사물과 연관시킨다. 학습자가 거주하는 세계는 교육자가 거주하는 세계와 동일한 세계이다.
화자가 '돌은 차갑다'라고 말하면 해석자는 그것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시킬 뿐만 아니라, 그 말을 화자의 생각이나 믿음과 연관시킨다. 만일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면, 다시 말해 화자와 해석자에게 공통의 자극의 없다면, 그래서 그들이 공통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화자의 사유나 발언은 해석자에 의해서 아무런 내용도 부여될 수 없을 것이다. 순이에게 벌어지는 사건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벌어지는 사건과 다르다면 순이의 사유나 믿음은 도대체 아무런 내용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피조물이, 자극들을 식별함에 있어서, 그가 감각적 표면에 [가해지는] 자극들을 식별하고 있는지, 아니면 더 바깥쪽의 어디의 자극들이나 혹은 더 안쪽의 어디의 자극들을 식별하고 있는지"(SIO, 166)의 문제는 세계의 공유와 사유의 공유를 전제하기 전에는 문제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자극에 대한 자각적인 식별은 해석자와 해석되는이 그리고 세계, 이 세 개의 피조물들이 '삼각형'으로 완전히 연결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5].
나와 타자는 다른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는 것에 대해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말이 통하고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는 것에 어떤 교차점(intersection)이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나와 타자의 믿음의 원인이 흘러들어오는 방향을 다르지만 그 방향을 따라가서 교차하는 세계의 어떤 지점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공통의 자극의 출처가 된다. 나와 타자는 각자의 자극에 대한 서로의 반응을 주목하고 그 반응을 세계으로부터 온 자극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교차점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나와 타자가 대화가 부드럽게 수행되고 있을 때, 우리는 사유를 공유함과 동시에 세계에 벌어지는 사건과 사물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속의 공통의 원인이 결정될 때, 우리의 사유의 내용은 결정되고, 나는 나의 마음을 알고 타인의 그의 마음을 알게 되며 이와 동시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해석자와 해석되는이, 그리고 세계 사이의 삼각형은 사유와 언어에 내용을 부여한다.
나의 믿음은 세계에 의해 유발된다. 타인의 믿음도 세계에 의해 유발된다. 그리고 나와 타인은 대화(dialogue)를 나눈다. 이때 오가는 것은 객관적 진리이다. 곧, 세계에 대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지식은 불가능하다. 의사소통은 타인의 사유와 발언이 명제적 내용을 가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아무와도 의사소통할 수 없다면 나 자신의 사유가 명제적 내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의사소통이 없다면 명제적 사유는 불가능하다."(SIO, 167) 따라서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은 모든 사유와 모든 지식에 본질적이다."(SIO, 166-167) 그런데 "사유에서 본질적인 삼각작용(triangulation)은 의사소통 중인 사람들이 공유된 세계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SIO, 167) 그래서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은 오직 그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SIO, 167) 다시 말해, 내가 타인을 마음을 알기 위해서 나는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데이비슨이 옳다면, 세계에 대한 지식과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 없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명제적 내용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제 거꾸로 내가 나의 마음을 모른다면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귀속이란 사랑의 원리 속에서 자기 자신의 믿음과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타인이 아무런 믿음과 사유도 공유하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또는 세계에 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타심지, 세계지 그리고 자기지는 서로 의존하고 있고 이들 중 하나 없이는 다른 둘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 세 가지 지식이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고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의 이 세 종류는 삼각대를 이룬다. 만일 어느 다리라도 잃어버리면, 아무 성분도 서 있지 않을 것이다."(SIO, 176)
올바른 해석론은 지식이 가능하기 위해 세 가지 지식이 삼각작용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의 본성은 우리의 가장 단순한 믿음들의 다수가 참되다는 것과 이들 믿음들의 본성이 타인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둘 다 보장한다."(SIO, 167) 다시 말해 올바른 해석은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이 거의 참되고 알려질 수 있으며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다. 우리가 세계를 공유하고 사유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구두적 응답들을 일으키는 자극들이 그런 구두적 응답이 의미하는 바를 또한 결정하고, 응답들과 동반하는 믿음들의 내용을 결정하기"(SIO, 167) 때문이다. (올바른 해석은 바로 이 점을 애초에 감안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유가 "우리의 세계관이, 이것의 가장 평이한 측면에 있어서, 대개 올바르다는 것을 보증한다."(SIO, 167)이다.
믿음은 잘못된 감각작용에 의해 유발되기도 하고, 그래서 세계에 관한 특정한 믿음들은 잘못될 수 있으며, 수 많은 믿음들이 다른 믿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용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들은 세계에 대한 이런 대체적인 그림과 이 그림 속에서 사람의 위치에 의해 알려지고, 참과 거짓이 평가되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그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표준이나 기준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믿는 것의(of) 진리'와 '내가 믿는 것에 관한(about) 진리' 또는 '세계에 관한 진리'가 논리적으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특정한 개별적인 믿음이 틀릴 수 있지만 "우리 믿음들의 뼈대와 조직(fabric) 속에서 충분한 수가 나머지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 참된 것이 틀림없다면"(SIO, 168), 나의 마음에 대한 나의 지식과 자연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은 전체론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행동에 대한 나의 지식과 타인의 마음에 대한 나의 지식 또한 전체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식의 품종들 사이에 논리적이거나 인식적인 장벽들은 없다"(SIO, 168)[6].
그렇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품종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의 명제적 내용을 누가 물어보면 나는 그냥 나 자신의 문장을 이야기한다. 비가 온다! 이 문장은 비가 오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참이다. 나의 마음을 알기란 비교적 쉽지만, 타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의 명제적 내용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으로 올바르고, 공유된 세계관의 맥락 속에서만"(SIO, 173) 가능하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과 나의 마음을 아는 것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있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추론적(inferential)이고, 여타의 것들 가운데, 그 사람의 발언과 다른 행위와 우리의 공적인 환경 속의 사건들 사이의 관찰된 상관성에 의존한다."(SIO, 173)
그리고 다른 이유 때문에 타심의 지식과 세계의 지식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 그리고 이것이 전제하는 다른 마음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객관성의 개념의 기반"(SIO, 173)이라는 점이다. "마음들의 공동체는 앎의 기준이다. 이것은 모든 것들의 척도를 제공한다. 이 척도의 적합성을 묻거나, 혹은 보다 궁극적인 표준을 찾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SIO, 174)[7]. 이 척도의 적합성을 묻는 것은 마치 프랑스 세브르에 있는 국제도량형국(SI)에 보관되어 있는 백금과 이리듐으로 만든 질량 원기(原器)가 정말 킬로그램의 기준인지 아닌지 묻는 것과 같다. 나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사하기 위해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믿음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진리를 발견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늘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세계의 인식자이다. 사람은 세계를 아는 존재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이념이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살면서 인간이 될 때 현재에 실현되는 본성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사유의 객관적 측면의 불가피성"은 사유의 주관적 측면을 말소하는가? 아니다. 자기지식은 직접적이고 타심지식은 추론적이기 때문에 두 지식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남는다. "우리의 사유들은 우리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안다는 점에서 '내부적'(inner)이고 '주관적'이다."(SIO, 174) 그러나 데이비슨은 객관적인 것에 대한 주관적인 것의 우위성, 외부적 실재에 대한 주관적 세계의 우선성, 타인에게 나타나 보이는 세계에 대한 나의 세계의 우선성을 거부함으로써 주관성의 지위를 재정립한다. 그가 그린 "사유와 의미의 그림"에서 다른 마음들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밑그림이고 자기지식은 그 바탕 위에 채색된 물감이다. 다시 말해 자기지식은 타심과 세계의 지식을 근거로 기술된다. "그리하여 객관적인 것과 간주관적인 것은 우리가 주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본질적이고, 주관성이 형식(form)을 취하는 맥락을 구성한다."(SIO, 175) '사유의 조건'은 바로 '일반적인 세계관의 공유'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유의 소유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형성하고(form) 품고 있는 그 사유들은, 우리가 타인들과 거주하고 있고,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계 속에 개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심적 상태들에 관한 우리의 사유들조차 똑같은 개념적 공간을 점유하며 똑같은 공공의 지도(public map) 위에 위치하고 있다."(SIO, 174)
따라서 물리학적인 입장과 도덕적 입장이 광범위하게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가 얼마나 멀리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는지 또는 데려다 줄지에 한정된 한계점은 없다."(SIO, 176) "확실한 것은 우리 개념들의 명석성과 유효성이 타인들에 대한 우리 이해의 성장과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다."(SIO, 176) 우리의 모든 명제적 지식들이 이미 객관적이라면, 실재의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 다가서려는 것은 무의미한가? 아니다. "우리의 명제적 지식은 비개인적인 것(the impersonal)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the interpersonal) 속에서 그 기반을 가진다."(SIO, 176) 그래서 나의 사적이고 인격적인(personal) 관망(outlook)이나 '안으로 들여다 보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타인들과 공유하는 자연적 세계를 우리가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접촉(contact)을 상실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들의 사회의 회원임을 인지한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나 자신의 생각들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타인들의 생각을 계측할 능력을 결여할 것이다. 타인들의 생각들의 계측(gauging)은 내가 그들과 함께 똑같은 세계 속에서, 세계의 가치들을 포함하여 세계의 주된 특징(major feature)에 대한 많은 반응들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봄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 자신과의 접촉(touch)을 상실할 것이라는 위험은 없다."(SIO, 176)
Note
[1] Davidson, D., 1996, "Subjective, Intersubjective, Objectinve", in Current Issues in Idealism(Coates, P., Hutto, D., eds., Bristol: Thoemmes, 1996), pp. 155-177. 이 논문을 참고하거나 인용할 때 SIO로 약칭하고 참고하거나 인용한 쪽수를 병기할 것이다. 이 논문의 이전 형태는 A.J.Ayer: Memorial Essays(1991)에 "Three Varieties of Knowledge"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2] "인식의 세 종류는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인식적 상황의 상호의존적 양상을 형성한다"(SIO, 156).
[3] 그러나 환원주의의 실패는 대개 회의주의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의 마음에 관한 앎의 기초 위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앎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의주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콰인 등에 의해 '타인의 마음에 관한 우리의 앎은 오직 우리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에만 놓여 있을 수 없다'(SIO, 157)는 것이 주장되기도 했다.
[4] 데이비슨에게 여기서 의사소통은 같은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같은 말을 사용하는 화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SIO, 162, n. 2).
[5] 이것과 관련된 데이비슨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until the triangle is completed connecting two creatures, and each creature with common features of the world, there can be no answer to the question where a creature, in discriminating between stimuli, is discriminating between stimuli at the sensory surfaces or somewhere further out, of further in. Without this sharing of reactions to common stimuli, thought and speech would have no particular content-that is, no content at all"(SIO, 166).
[6] 이후의 내용을 간단하게 중략하고 결론부로 건너가겠다. 중략된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데이비슨은 해석에 있어서 불확정성이 해석의 한계가 아니라 해석의 본성임을 물리적 측정과의 유비를 통해 해명한다.(SIO, 168-169) 그리고 불확정성과 무법칙론의 관계를 해설한다. 물리법칙과 심적인 것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차이의 본성을 규명함으로써 심적 개념과 물리적 개념 사이의 관계를 해명한다(SIO, 169-172). 심적 개념은 규범적이고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이 인과적(irreducibly causal)이다. 그리고 그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분할을 설명하는 "보다 기본적이거나,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SIO, 172)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7] 원문은 다음과 같다. "A community of minds is the basis of knowledge; it provides the measure of all things. It makes no sense to question the adequacy of this measure, or to seek a more ultimate stan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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