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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는 사람
주 요 한
개는 미칠 듯이 짖어댔다. 수십 마리나 수백 마리나 되는 누런 개들이 선율없는 부르짖음 소리가 약해졌다 커졌다 하여 어두컴컴한 하늘에 울리는 것이 머리털이 쭈뼛해지도록 두려움과 불쾌한 감정을 일으켰다. 연산촌(連山村) 정 거장 기수인 아쌔는 정거장 경계 말뚝에 반쯤 기대 서서 개소리 나는 편을 바라다보았다. 지옥같이 어두운 속에 멀리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는 불점이 하나 있고는 그 뒤로 하늘보다도 더 시커먼 언덕이 먹줄처럼 중간에 희미하게 가로 걸리었고 그뒤 어디서부터 (아마 연산장 거리) 그 흉악한 개 짖는 소리가 검은 날개를 펴고 훌훌 날아오는 것이었다. 천지는 그냥 『어둠』 하나로 채워 있었다. 정거장 구역 안에만 군데군데 세워 놓은 흐리멍덩하면서도 누러우리한 빛을 토하는 석유불 등대 때문에 흐릿하게나마 따스하게 보이는 밝음이 있었다. 그래 이 밝음의 그림자가 정거장 사면을 얼마만큼은 흐리흐리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눈이 미치는 데는 어디로나 캄캄한 밤뿐이었다. 하늘은 먹장을 갈아 분 것 같았다.
아쌔는 눈바람에 시달리어서 여름날 어린애들의 정강이같이 벌겋게 타고 주름진 얼굴이 옆의 등대 불빛에 반쯤 비치어서 보기 싫은 반사광을 내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사람 중에서는 아주 찾기가 힘든 정기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 눈방울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굴리었다. 그의 앞빠른 누런 턱과 코밑에 다보록하니 돋은 까만 수염은 때묻어 새까맣게 된 양털옷 주위 속에 반쯤 가리워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불룩하고 밉게 생긴 콧구멍으로부터 쉴새없이 새어나오는 더운 기운이 양털옷 벌어진 틈으로 허연 수증기가 되어 나와서 하늘로 구불구불 피어오르다가 어둠 속에 스러지곤 했다. 아쌔가 늘 자랑하는 새카만 고양이털 방한모가 희미한 불빛을 받아 반들반들 반사했다. 옛적 선비가 쓰던 관같이 생긴 고양이털 방한모를 쓰고 모양없는 덧옷을 입고 정강이까지 가리우는 개털 구두를 아쌔의 그의 발밑에 잿빛 그림자를 띠워서 이상한 괴물 같은 그림을 땅 위에 그려 놓았다.
마음 좋지 않은 한 찬바람이 휙 지나갔다. 그래서 아쌔의 덧옷 자락은 펄럭거리고 고양이털 방한모의 짧고 부드러운 털이 살랑살랑 물결지었다. 아쌔는 몸부림하는 듯이 오싹 몸을 떨었다. 왼편 삼등 대합실 쪽에서 낯익은 역부들의 큰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쌔는 한걸음 나서면서 웃음소리 나논 쪽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다시 바람이 휙 지나가면서 아쌔의 얼굴에 희고 쌀쌀한 눈을 한줌 뿌리고 갔다. 아쌔는 멈칫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리우느라고 두툼한 장갑을 낀 손을 이마에 대고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역시 하늘은 까맣다. 그러나 산뜻산뜻한 눈부스러기가 그의 얼굴을 스치곤 하는 것을 그는 감각했다. 등대 옆으로 희뜩희뜩한 눈송이들이 펄펄 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다.
"아 ! 또 눈이 오는구나 !"
하고 그는 천천히 대합실 쪽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손님 하나도 없이 텅 비인 지저분한 대합실 안에는 여남은밖에 안 되는 정거장 역부들이 모두 모여서 방금 터져나갈 것같이 새빨갛게 활활 타는 찌그러진 난로를 중심으로 둘러앉아서 얼굴들이 벌개 가지고 무슨 잡담들을 정거장이 떠나갈 듯이 하고 있었다. 아쌔는 시간을 보려고 역장실 출입문을 방싯 열었다. 역장실 뒤 바람벽에 걸린 둥그런 시계의 바늘은 열두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천진행(天津行) 최대 급행이 지나간 지 삼십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북경서 내려오는 봉천행 급행이 아직도 한 서간 후에야 이 정거장올 지나갈 것이다. 그 동안에는 이 정거장 쪽으로는 짐차 하나 얼씬 아니할 터이었다. 그러나 아쌔는 아직 한 시간 동안이나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니 천천히 역부들 틈에 끼여서 허튼 수작이나 한바탕 얻어 들으려고 허리지대 없고 낮은 동그란 의자를 하나 얻어 들고 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밖에는 그냥 눈이 오고 있고 이따금 이따금 지나가는 회오리바람 때문에 유리창 문들이 일제히 떠드릉 하고 무섭고도 구슬픈 소리로 울곤했다.
역부 회의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제각기 제 고향 자랑이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 꺼냈는지는 모르게 화제는 갑자기 미신에 가까운 도깨비, 귀신 이야기로 변하였다. 그래서 그중에도 나이 좀 어리거나 마음이 좀 약한 역부들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체 하나 속으로는 벌써 무서워져서 이야기하는 이의 입술을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열심으로 쳐다보다가는, 이따금 으르렁 거리는 창문짝을 놀란 눈으로 힐끗힐끗 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주 무서운 한 대목을 반쯤 꺼내놓고 침을 삼키노라 잠깐 말이 그친 때마다는 방금 그들의 뒤로 어떤 흉악한 귀신이 아가리를 활짝 벌리고 달려드는 것 같아서 몸서리를 오싹오싹 쳤다.
어디나 사람 모인 데에는 보통 있는 경향으로 여기서도 어느 새엔가 알지 못할 동안에 도깨비 이야기는 도적놈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래 어느 도적놈은 두 팔 밑에 날개가 있어서 하루에 꼭 삼 만리씩을 돌아다닌다는 둥 어디서는 도적놈 삼 백 놈이 큰 성내를 죽쳤다는 둥 이리저리 이야기가 방황하였다. 이때 아쌔는 가만히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 이번에 손미요(孫美瑤)를 총살했답디다."
"누가?"
하고 역부측에서 바보 영감으로 불리는 순직스럽게 생겼으나 얼떠보이는 덥 석부리가 입을 비쭉비쭉하면서 한마디 꺼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영감 앞에 앉아서 지푸라기를 난로 면에 댔다 떼었다 하면서 그 지푸라기 끝이 파리우리한 연기를 가늘게 피우면서 새까맣게 타들어 오는 것을 바라보고 혼자서 좋아하는 듯이 그 영감을 쳐다보며,
"누구는 누구야요? 나라에서이지 ! 나라에서 말구 누가 감히 손이나 건드리게요. 손미요가 소리만 한번 꽥 지르면 사람이 이백 명씩 죽어 자빠진다는데요."
하고 의기 양양하게 지껄이다가 갑자기 맞은편으로부터 오는 노려보는 눈치를 감각하고 본능적으로 훔칫하면서 원망스러운 듯 하고도 용서를 구하는 눈으로 구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석탄 나르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잠깐 동안 침묵했다가 이번에는 사믈사물 얽고 두어 오라기 노랑수염이 코밑에 가물가물하는 영악하게 생긴 역부가 하품을 하면서 물어 보았다.
"손미요가 누구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잠깐 있다가 아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손미요도 몰라요 ! 손미요가 바로 지난 여름 임성(臨城) 사건의 주인공 아닙니까? 새벽에 진포에 급행열차를 습격하고 양귀자(洋鬼子)를 수십 인이나 포독고(抱犢崓)로 잡아다 가두었던 그 유명한 마적 왕이 손미요랍니다."
이때까지 별로 이야기에 취미를 붙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재미가 난 듯이 턱을 받치고 잔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아쌔에게 모두었다. 이때까지 건득건득 졸고 있던 영감들도,
"무슨 린청[臨城]사건이 어드래?"
하면서 눈올 번쩍 뜨고 아쌔를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아쌔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여 전부터 벌써 여러 번 이야기하던 습격 사건은 생략하고 손미요가 부하들을 데리고 군대에 편입 되는 이야기로부터 비롯하여 바로 얼마 전에 총살을 당했다는 보도를 역장실에 있는 신문을 보고 알았노라는 이야기를 간단히 했다. 모두들 재미있게 들은 모양이었다. 중에도 끈끈하기로 유명한 바보 영감은 다시 그 우둔해 보이는 순한 눈알을 평화롭게 굴리면서 물어 보았다.
"그래 그 신문에 뭐랬습데까?"
"뭐래긴 뭐래. 그저 그 손미요 죽이던 얘기를 자세히 냈습데다."
하고 아쌔는 제가 신문을 능히 읽을 수 있는 학식을 가진 것을 큰 자랑으로 내밀었다.
"자세한 이야기가 다 났습데까? 하나두 빼지 않구?"
"그러믄요. 신문엔 그랬습데다. 이번 손미요 죽은 것은 나라에서 한 일이 아니라구 변명을 했습데다."
하고 아까 보았노라고 떠들던 아이를 힐끔 넘겨다보았다. 일동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져서 무슨 소리를 더 들어 보려는 듯이 아쌔의 입만을 들여다보았다.
"나라에서 안 죽이긴 무얼 안 죽였어! 나라에서 다 죽이라구 약속을 해서 죽이고는 누가 반대할까봐 입 막느라구 그런 소리를 다 지어내지. 이제 두구 보오. 그 부하들이 꼭 원수를 갚고야 마느니!"
하고 처음부터 입을 꼭 다물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만 살피던 역부로 들어온 지 며칠 안 되는 나이 젊고 산동서 왔다면서 절강(浙江) 방언 섞인 말을 하는 표독스럽게 생긴 사람이 흥분한 듯이 떠들었다. 아쌔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산동 사람의 말이, 끝난 후 수염을 손가락으로 비비꼬면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우물우물하던 바보 영감이 그만 단념한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아쌔를 그 몽롱한 눈으로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거야 누가 옳은지 알 수 있소? 그 신문에 나기는 장장군이 사사혐의로 죽였다구 그랬습데다. 하기는 또 나라에서 장장군에게 돈을 많이 주고 죽이라구 그랬는지두 모르지요. 그거야 누가 아나요? 좌우간 신문에는 그랬습데다."
하고 신문이라는 말을 힘있게 했다.
"신문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할까요? 신문엔 그랬습데다. 손미요가―군대에 들어오게 되니까 전에는 그 군대에서 장장군이 제일 권세가 높았는데 이번에는 손미요하구 권세가 같아졌다구요. 그래서 서기가 나서 죽일 생각을 품구 하루는 손미요에게 점심이나 같이 먹자구 청했더랍디다. 그래 그날 점심때 손미요가 오니깐 술 한잔을 대접하면서 손미요가 술 마실 적에 장장군이 미리 준비했던 횟가루를 휙 손미요 상판에다 뿌렸대요. 그래 손미요가 눈을 못 뜨고 돌아가는 판에 시위 병정들을 시켜서 결박지워 내다가 뜰에 가서 하나 둘 셋 하구 탕 놓아 죽였답니다."
하고 입에 침을 삼켰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듣고 앉았던 일동은 비로소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쌔는 다시 말을 이어서
"죄우간에 나라에서 그렇게 시켰다면 잘못이지요. 그걸 죽이지 않는다구 약조서까지 써놓고 들였던 사람을 그렇게 죄두 없이 죽인다구 하여 말이 되나요?"
"그러기 보오, 이제 꼭 원수를 갚으러 오느니!"
하고 산동 젊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슨 무서운 것을 내다보는 듯이 고개를 돌려 출입구 쪽을 건너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지마는 거기는 다만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시커먼 문짝이 가로막혀 있을 따름이었다. 산동 젊은이는 말을 이어,
"그러나 내가 어데서 말을 들으니깐 손미요의 누이가 하나 있는데 역시 이 근처 어느 산속에서 도적놈 여왕 노릇을 한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하루에 삼백 리나 사백 리 길 걷기는 우습게 안답데다. 아마 제 원수 갚으러 올걸요……."
하고 의미있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모두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앉아 있었다. 방금 손미요 누이가 도적놈을 데리고 정거장으로 달려드는 것같이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벌려 볼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껏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잘 들리지도 않
던 정거장 너머 개 짖는 소리가 지금은 아주 약하게나마 똑똑하게 들려 왔다. 모두 다 무서운 꿈이나 꾸는 것 같아서 몸서리를 쳤다. 산동 젊은이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갑자기 기지개를 본때 있게 켜고 일어서서 양털 두루마기로 목을 둘러 씌우면서 문을 열고 나아갔다. 모든 눈은 약속했던 듯이 그의 뒷모양을 바라다보았다. 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사람은 밖으로 나가 없어지고 찬바람이 휙 들어오면서 개 짖는 소리도 잠깐 더 크게 들렸다가 찬바람이 앉은 사람들의 후꾼후꾼하는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 때 개 소리도 다시 희미하게 들려 왔다. 모두 무슨 무서운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멍하니 앉아 어서 누가 이야기를 먼저 꺼냈으면 하고 서로 남의 얼굴들만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참기 어려운 깊은 침묵은 계속되었다.
이때 역장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금줄 두른 모자를 쓴 역장이 나왔다. 털외투 소매 밑에 가리운 손못걸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역장은,
"급행 지나갈 시간이 거의 됐으니 차차 나가서 일들 하오."
하고 위엄스럽게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는 어투로 뱉는 듯이 말했다. 일동은 어떤 금고에서 놓여나오는 듯한 감정으로 안심하는 한숨을 쉬면서 제각기 저 할 일을 하러 이리저리 헤어져 나아갔다.
산동 젊은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쌔도 플랫폼으로 나갔다. 그동안 함박눈은 쉴새없이 내리부어서 다른 사람 다니지 않는 플랫폼을 하얗게 덮어 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 기차 선로 위에도 하얗게 이불을 씌워 놓았다. 따라서 멀리 벌 밖으로도 하얀 눈이 덮여서 아까보다는 마치 달이 뜬 것같이 좀 훤해진 것 같았다. 추위도 아까처럼 혹독하지 아니한 것 같았다. 아쌔는 공연히 가슴이 기쁜 것도 같았고 슬픈 것도 같은 이상한 감정으로 빙그레 미소를 띠고 보드라운 눈 위로 거무레한 발자국을 내면서 플랫폼을 한번 왔다갔다했다. 상쾌한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갔다.
아쌔는 저 할 직분이 생각이 나서 바람을 막아 돌아앉아서 성냥을 그어서 두 편은 새빨갛고 두 편은 새파란 네모난 유리등에 불을 켜 플랫폼 한 끝까지 걸어가 서서 쉴새없이 내리붓는 함박눈을 마음껏 맞으면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멀거니 서서 눈이 미치는 데까지 허옇게 반사되는 끝없는 평야를 내다보았다.
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퍽 가까운 곳에서 쨍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아쌔는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후닥닥 그 소리나는 편을 바라다보았다. 정거장 바른편 버드나무 줄 뒤로부터 어물어물하는 수십 개의 검은 물건들이 우르륵 소리를 내면서 정거장을 향해 달려왔다. 아쌔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훔칫하면서 무엇이나 쥐고 내두를 것이나 없나 하고 번갯불같이 빠르게 사면을 휘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벌써 대합실 쪽에서 숱한 사람들의 미친 듯이 외치는 소리와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저편 쪽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 망치로 모두 때려부수는 소리가 모두 한데 뒤섞여서 처참하게 들려 왔다.
아쌔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을 수가 없어서 꿈꾸는 것 같은 머리로 급히 역장실 쪽으로 뛰어가서 창문으로 들여다 보았다. 삼등 대합실로 통한 문은 반쯤이나 떨어져 나가 있고 역장실 안에는 벌써 혹은 군복을 입고 혹은 누더기를 입은 한떼의 총 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장실 서랍에 늘 넣여 두었던 호신용 육혈포는 벌써 어떤 장대하고 흉악하게 생긴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마 역장이 대항을 해보려고 나대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즉시 빼앗겼을 것이다. 그리고 서너 사람은 벌써 역장에서 달려들어 팔뚝 같은 바오라기로 역장을 한 반쯤 결박지워 놓았다. 그리고 또 한떼 도적놈들은 이편 창문에 앉은 전신원(電信員)을 결박을 지우느라고 분주스럽게 돌아갔다. 전신원은 많은 사람한테 잡혀서 얽어매이면서도 그래도 어디로 구원을 청해 보려는지 한사코 발신 꼭지 쪽으로 팔을 끌어가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나무 문짝이 처참하게 쪼개져 나간 그 뒤 삼등 대합실. 안으로는 수많은 총 가진 도적놈들이 무엇이라고 고함을 치면서 왔다갔다 했다. 이때 그 사람들 틈을 헤치고 머리를 중국 고대 여자식으로 쪽진 채 아무것도 쓰지 아니하고 긴 칼을 빼어 바른손에 든 여대장이 들어왔다. 아쌔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 여인의 얼굴이야말로 마귀할미 그것 같은 연고이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고 입술을 잡아 물은 외씨 같은 얼굴에 거의 중앙에 있는 듯한 두 눈에는 불이 붙는 것 같은 악독과 살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이어서 얼마 전에 정 거장 잡역부로 들어온 산동 젊은이가 손에 도끼를 들고 즐거운 듯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들어왔다. 그래 거침없이 전신원 쪽으르 아직도아직도 몸부림을 하는 전신원을 한번 흘겨보고 전신 꼭지를 재미난 듯이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크게 웃으면서,
"흥 요렇게 다른 데로 구원을 좀 청해 보겠다구! 암만 해보려무나 되나, 내가 벌써 이 도끼로."
하고 바른손에 들었던 도끼를 쳐들어 보이면서,
"전신줄을 모두 끊어버렸어."
하고 잠깐 흥분된 듯이 얼굴을 히물거리면서 어이없고 놀라고 무서워서 정신없이 저를 바라보는 전신원을 한참이나 바라다보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고함을 힘껏 지르면서 책상 위에 놓았던 전신 꼭지판을 그냥 가지고 있던 도끼날로 한번 힘껏 내려갈겼다. 그러고는 그 전기 장치와 책상이 서너 갈래로 쩍 갈라져 떨어지는 위에 가 척 올라서서 그 도끼를 두 손으로 쳐들어 머리 위에 올려 가지고 부들부들 떨며 엉거주춤하고 있는 전신원을 노려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놈 네가 엊그제 뺨을 때렸지 이놈! 네 생각에는 너밖에 더 높은 놈은 없는 듯싶드냐? 나는 그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네 종질이나 할 줄로 알았드냐? 내가 다 일이 있어서 여기 와서 네 놈들의 수모를 받아 가면서 밤낮 종질을 했어, 에! 이 뻔뻔한 놈아, 글쎄 네가 내 뺨을 때려."
하고 한 발을 궁그르는 그 순간에 어느결엔지 벌써 도끼날이 짝 소리를 내면서 전신원의 골머리 속으로 푹 박혀 들어갔다. 와글와글하는 소리를 궤뚫어 외마디소리 비명이 들리고 전신원 몸뚱이에서 피가 탁 퍼져나와 그 근방 사면으로 확 퍼졌다. 제각기 무엇이라고 떠들던 도적놈들도 놀라는 듯이 모두 그쪽을 바라다 보았다. 산동 젊은이는 미친놈처럼,
"허 ! 허 !"
소리를 지르면서 도끼를 방향도 없이 내두르고 돌아갔다. 이 모든 일은 모두 눈 깜짝할 동안에 된 것이었다. 반 정신은 나가서 나무로 깎아 세워놓은 듯이 물끄러미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쌔는 몸에 소름이 쪽 끼쳐서 앗 소리를 치고 휙 돌아섰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편에서 시커먼 것이,
"어데 가?"
소리를 치면서 총부리를 옆구리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아쌔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아까 제가 서 있던 쪽으로 달음질쳤다. 그저 와그그 쨍쨍하는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가 열 발짝을 못 가서 그는 어깨를 무엇으로 단단히 얻어맞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성난 목소리와 발자국들이 왔다갔다했다. 잠깐 후에 정신을 차린 아쌔는 가만히 일어나서 두어 발짝 뒤로 움직여서 정거장 짐 창고 벽에 가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반쯤 뜨고 눈앞에 나타난 기막힌 광경을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그리 넓지도 못한 플랫폼은 질서 없는 발자국들로 막 뭉개 놓아 버렸다. 그리고 눈을 맞아가면서 시커먼 사람들이 저는 돌아다보지도 아니 하고 분주스럽게 플랫폼 위아래로 왔다갔다했다. 그리고 산동 젊은이와 여장군은 플랫폼 가운데 서서 그 사람떼들을 이것저것 지휘하고 있었다.
아쌔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쌔가 두번째 눈을 뜬 때에는 그리 분주하던 정 거장이 다시 차차 고즈넉해지기를 시작한 때이었다. 플랫홈 가운데는 아직 그냥 그 여장군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서 있고 여기저기 총을 멘 몇 사람이 죽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아쌔는 몸을 옴짝도 아니 하고 고개만을 가만가히 몰래 돌려서 사면을 휘돌아보았다. 정거장에 상관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아니 보였다. 아마 모두 어느 구석에 나처럼 얻어맞고 자빠져 있거나 무서워서 어느 구석에 숨어 박혀서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전신원 죽던 광경을 다시 회상하고 역장의 안부를 염려하는 동안에 그는 철도 선로 저편 쪽에서 땅땅 하는 망치 소리와 우런우런하는 사람 소리를 들었다. 그래 그는 얼른 고개를 홀려 그쪽을 바라다보았다. 한 백 야드 선로에 서너너덧 사람이 모여서 불을 밝게 켜들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아쌔는 숨도 아니 쉬면서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다해서 그쪽을 바라다보았다.
밝은 불빛 아래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어른어른하는 것을 보고 또 땅땅 하는 쇠망치 소리를 듣고 아쌔는 즉시로 그들이 철도 선로를 절단하는 줄을 알았다. 그는 망치를 쥐고 어른거리는 그림자 속에서 산동 젊은이의 그림자 같은 것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감각이 솟아서 치를 떨었다. 그러면 그 산동 젊은이는
단지 밥벌이 없어서 굶고 다니는 꺼울리가 아니었던가.
아쌔는 눈을 돌려 앞을 내다보았다. 앞으로 그리 멀지도 않게 허여무러하게 흰눈에 반사되는 평야는 반 시간 전에 꼭 같은 평평한 땅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시커먼 하늘과 땅이 모든 물건을 검은 보로 싸서 감추어 두었다. 그리고 플랫폼 위에 세운 연산(連山)이라고 쓴 네모난 유리등으로부터는 역시 누렇고 침침한 불빛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내리붓던 눈도 이제는 그치었는지 한참 만에야 한번 새하얀 부스러기가 펄럭펄럭 하면서 중판하게 하나씩 둘씩 등대 불빛에 반사되면서 소리도 없이 발바닥에게 유리된 그의 친구들을 만나러 땅 위에 떨어졌다. 아쌔는 춤추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따라 그의 시선의 위로부터 아래로 차차 내려오다가 바로 그 등대 밑에 이르러 한편으로 놀라면서 한편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는 감정으로 그 시선을 훔칫 멈추었다. 그의 눈은 바로 등대 밑에 바싹 다가세워 있는 조그만 네모난 발광체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 조그만 발광체는 이편으로는 파라우리한 광선으로 또 저편 쪽으로는 벌거우리한 광선으로 도적놈 발자국의 침략을 피한 판판한 눈 위를 곱게 반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쌔는 알지 못하게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저도 제가 왜 웃었는지 몰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 놓인 것은 바로 그가 잠깐 전에(도적놈들이 오기 전에 켜놓고) 이 때까지 여러 가지 놀람과 무서움과 홍분으로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도적놈이 정거장을 차지한 지금에 그 등이 무슨 쓸데가 있으랴! 아쌔의 직무는 빼앗겼다면 빼앗겼고 시작했다면 사직한 것이 아니랴! 아쌔는 자기가 벌써 근 십 년 동안이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결같이 이행하던 직무를 오늘이라는 오늘에 한해서는 할 수 없이 이행하지 못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운명을 생각하고 구슬픈 생각이 들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쌔는 다시 등대 밑으로부터 눈알을 굴려서 저 자신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제가 바로 창고 처마 밑 어둑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일변 놀라기도 하고 일변 기쁘기도 했다. 그는 도적놈들이 저를 얼른 잘 알아보지 못한 한편 어두운 구석에 천연으로 숨어 있게 된 것을 직각하고 조금이라도 더 제 존재를 그들의 눈앞에서 감추려는 듯이 몸을 더 움츠려서 담벼락에 가 바싹 붙어 앉았다. 이때 갑자기 그의 머리로 어떤 이상한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갔다. 그는 이 몽롱한 생각을 잡아보려고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거렸다.
저 ― 편에서 선로를 절단하던 도적의 떼는 일을 마치고 두런두런하면서 이쪽으로 왔다. 아쌔는 눈을 번쩍 뜨고 본능적으로몸을 움추렸다. 도적놈의 떼는 플랫폼으로 올라와 아쌔 있는 곳은 본체 만체하고 천천히 걸어서 출구 쪽으로 갔다.
눈은 확실히 멎은 모양인데 하늘은 그냥 새까맣다. 아쌔는 두려운 듯이 선로가 절단된 곳을 바라다봤다. 눈이 미치는 데까지는 꺼뭇꺼뭇한 밉살스런 발자국들이 보일 뿐이요 그 뒤로는 평야인지 하늘인지 분간을 못하게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 아마 무서운 음모의 구렁텅이가 숨어 있을 것이었다. 아쌔는 기차가
그 근처로 급속도로 달려오는 상상을 하고 몸서리를 쳤다. 아쌔는 벌써 도적놈들의 계획을 대강 짐작을 했다. 짐작이 아니라 꼭 알아 맞혔다. 도적놈들은 이렇게 시골 조그만 정거장을 점령해서 사방으로 통신을 절단해 놓고 이 근처엔 선로를 끊어놓아서 이제 얼마 아니 있다가 지나갈 최대 급행 객차를 탈선시켜 놓고는 그 틈을 타서 습격을 하려는 것으로 아쌔는 생각했다.
『홍, 먼젓번 린청 사건 비슷하게…….』
하고 혼자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 산동서 왔다는 놈은…… 내 그러기 전부터 행동이 좀 수상하다더라니…….』
하고 그는 그 젊은 놈이 눈앞에 보이는 듯이 얼결에 손을 내저으면서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내어두른 것이 갑자기 후회가 나서 제 부주의를 속으로 원망하면서 숨을 죽이고 도적놈들이 서 있는 쪽을 바라다보았다. 여장군은 어느새 어디로 가버리고 총 멘 도적놈들이 그냥 꼼짝 아니 하고 서 있었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아쌔 있는 쪽은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쌔는 비로소 안심 하고 후 ㅡ한숨을 내쉬었다.
여장군과 산동 젊은이가 이야기를 하며 걸어 나왔다. 둘이 다 아까보다는 퍽 가라앉아서 안정해진 모양이었다. 아쌔는 귀를 기울이고 다만 한마디라도 빼놓지 않고 들어 보려 결심 했다. 둘이서는 아쌔 숨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산동 젊은이가,
"그리고 부하들은 철로 절단선 근처 좌우편에 충분히 매복을 시켜놓았습니다. 또 그 나머지는 모두 대합실에 몰아넣고 조용히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
하고 의미있는 듯이 어둑신한 선로를 내다보고 다시 돌아서 저편쪽으로 둘이서 걸어갔다. 그리고 아쌔는 다시 산동 젊은이가 여장군더러,
"이제 십 분만 있으면 오게 되었습니다."
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십 분―십 분만 있으면 급행열차는 전복된다. 승객을 죽는다. 물건은 빼앗긴다…….』
하고 아쌔는 슬프게 생각했다.
산동 젊은이는 플랫폼으로 왔다갔다하면서 도적 놈 대여섯에게 제가 그동안 정거장에 있으면서 급행차가 지나갈 적에 역부들이 어떻게 하던 것을 본 대로 가르치고 지도하느라고 야단을 쳤다. 물론 남이 보기에는 정거장에는 매일 있는 것과 같은 상태요, 별일이 없는 것으로 보이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가 정거장에서 밤마다 쓰느라고 많이 만들어 둔 횃불대를 하나 들고 나왔다. 그것은 이 정거장은 촌 조그마한 정거장인 고로 대개의 급행차는 머무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하기 위하여 밤에는 횃불을 붙여 플랫폼 위에 가만히 세워 놓아서 앞에 아무런 위험도 없으니 하고 마음 놓고 지나가라고 저편에서 기차를 몰아오는 기관수에게 암호를 하는 습관이 있는 것이었다. 횃불대를 받아든 도적놈은 구부리고 서서 횃불을 켜 놓으려고 꿈지럭거리고 있고 그 밖에 두어 도적놈이 그 옆에 서서 우두커니 들여다볼 뿐으로 그 나머지는 산동 젊은이까지 모두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정거장은 어제도 그렇고 그저께도 그랬으며 몇 해 전에도 그랬던 것같이 다시 조용하여졌다. 새까맣게 어두운 대지 한구석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한 점 쌀알같은 정거장에 끝없이 어두운 하늘과 땅 한가운데 고즈넉히 떠 있는 것 같았다. 정거장이 조용해지면 해질수록 아쌔의 머리는 더 분주하게 되었다. 헤일 수 없이 많은 연락 없는 생각들이 순서도 없이 실꾸러미 뭉쳐놓은 것같이 아쌔의 머릿속으로 뭉켜 돌아갔다. 아쌔는 고개를 쳐들고 그 실뭉텅이의 어느 곳이나 한 곳을 붙잡아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무효였다. 거진거진 그 실끝을 붙잡을 듯할 때에는 남실남실하던 그 실끝은 그만 어디론가 쑥 빠져 달아나서 그 헝클어진 얽거리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쌔 생각에는 제가 그 실끝 하나만 단단히 붙잡을 수가 있으면 그 헝클어진 것은 솔솔 풀려 나와서 제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를 찬찬히 조직적으로 생각도 하고 계획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쌔는 너무 분주하였다.
『십 분, 십 분밖에 아니 남았다. 아니 지금은 아마 오 분밖에 아니 남았을 것이다. 그러면 어서 시간 늦기 전에 무슨 일을 하기는 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은 불가능의 일이다. 그래도 그래도…….』
하는 급한 생각이 항상 그 실끝을 끌어다가 혼돈 속에다 집어넣곤 하는데 아쌔는 기가 막히게 골이 났다. 전신이 몹시 초조해져서 우들우들 떨렸다.
횃불은 소리 없이 희고 검은 연기를 피우며 발갛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벌건 불빛을 받고 서 있는 두 셋의 총멘 도적놈들은 죽은 듯이 꼼짝도 아니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역시 깜깜하고 눈으로 덮인 평야는 역시 잠잠한 속의 큰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견딜 수 없는 침묵 속에서 홀로 아쌔의 머리가 한없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눈과 귀는 지금쯤은 두세 마일 저 一편에서 앞에 놓인 커다란 함정은 꿈에도 아니 생각하고 마음 턱 놓은 기관수의 솜씨 아래서 한 시간에 삼십 마일씩이나 가는 속도로 우러렁거리면서 세차게 달려오고 있는 그 기차를 보거나 그 소리를 들어 보려고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은 한 초 한 초 지나갔다. 횃불은 불꽃을 얻어 활활 타올랐다. 아쌔는 다시 머리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왼편 쪽을 주의깊게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꿰뚫을 수 없는 검은 장막에 다만 바늘 구멍만으로도 찾아보려는 듯이.
바로 이때였다. 아쌔는 정말로 그 바늘 구멍을 발견했다. 왼편 쪽으로 저 끝에 아마 두서너 마일쯤 밖에 캄캄한 속을 꿰뚫고 별인지 등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좁쌀알 같은 빨간 점 깜박깜박하는 것이 보인 것이었다. 아쌔는 모르는 결에 흑 하고 몸을 떨었다.
"마침내 때는 이르렀다!"
하고 구는 땀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때까지 멍하던 머리가 갑자기 씻은 듯이 의심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쌔는 조금도 가리우는 것이나 의심나는 것이 없이 제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달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다만 한 가지 남은 길이라는 것도 확실히 인식했다. 지금 이때는 아쌔로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밤은 캄캄하게 어둡고 정 거장 근처는 철통같이 도적놈들에게 싸여 있다. 그리고 어두운 저기에는 기차 선로가 절단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도적놈들이 매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급행 열차는 ― 매우 무사히 지나다니던 금행 열차는 마음 턱 놓고 제 힘껏 달음질 해 오는 것이다. 이제 몇 분만 이대로 지나가면 기차는 절단된 그 선로까지 와서 거꾸러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는 피, 매, 고함, 고생, 공포, 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아무래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기차는 이 길로 오지 않게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지금 플랫폼 한구석 어두운 속에서 아쌔 하나가,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하고 몸을 뒤꼬고 있는 것이다. 전신원은 죽었다. 역장은 지금은 어느 구석에 결박지운 채 우그리고 있을 것이다. 다른 역부들도 모두 혹은 죽었거나 혹은 어디 숨어서 우둘우둘 떨고만 있거나 또 혹은 도적놈들의 지시하에서 쪼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쌔 하나밖에는 없다. 아쌔는 사면에 야수를 두고 혼자 살아서 고민하는 파선과 같은 생각이 났다.
『혼자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혼자밖에 다른 이는 없다. 그리고 혼자 이 많은 도적들을 대항하고 싸울까 하는 한 큰 미덥지 않은 공포와 또한 한없는 법열에 그의 가슴은 뛰놀았다.
혼자! 혼자 하기는 해야겠다. 그러나 어떻게 하리오, 한 삼사십 야드 저 ―편에 있는 소옥(小屋)으로 뛰어가서 선로 맞추는 데를 앞으로 잡아 젖혀 버리면 그뿐은 그뿐일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기차는 절단된 선로는 발길도 아니 들여놓고 이편 안전한 길로 평안히 달아나 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설혹 숨어 있던 도적들이 총알깨나 쏜 대야 급히급히 달아나는 차에 그리 많은 해를 줄 것은 없을 것이다. 많아야 유리창이나 몇 개 깨어질지언정 결코 인명에는 손해가 없게 될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일이 가능한가? 지금에 정거장을 중심으로 하고 똑똑히 살피고 있는 눈은 더욱 많았다. 그 많은 눈들을 속이고 아쌔가 거기까지 걸어갈 수가 있다는 것은 기적이랄 수밖에 없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때 능히 기적을 바랄 수가 있을까? 또 설혹 소옥(小屋)까지 간단들 거기는 도적놈의 떼가 벌써 지키고 섰지 아니하리라고 말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거기 많은 도적의 떼가 매복해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거기까지 가는 것이 첫째 불가능일 뿐만 아니라 거기 가더라도 아무 일도 해보기 전에 벌써 방지될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 아쌔에게는 다만 한 가지 길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다만 혼자서 다만 한 가지 일을 하여야 할 운명을 가진 것이다. 그래 그는 다만 그 한 가지 길인 등대 밑에 세워 놓은 신호등을 바라다보고 두 손을 마주 비비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돌려 기차 오는 편을 바라다보았다. 저―편 아직 먼곳에서 기차 머리불은 아까보다도 퍽 더 똑똑하게 깜박거리면서 움직여 오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아쌔의 다리 근육이 벌떡 일어서고 상반신이 흠칫 일어섰다. 눈 깜짝할 동안에 그의 전신은 플랫폼 밖으
로 나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때 어떤 번갯불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그만 다시 펄썩 주저앉았다. 그는 얼굴을 돌려 플랫폼을 바라다보았다. 두서넛의 총멘 도적들이 벌겋게 비치는 횃불 빛을 잔등에 받아가면서 지루한 듯이 기차 오는 편을 깜짝 아니하고 바라다보고 있는 것을 아쌔는 보았다. 그리고 근처에 엎디어서 때를 기다리는 수십 혹은 수백의 도적놈들이 일제히 저를 향하여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달그락거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몸서리를 쳤다. 수백 눈이 저를 조롱하는 눈으로 바라다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는 맥없이 쓰러져셔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를 번갯불같이 스치고 간 것은 죽음이라는 무서운 두 글자이었다. 이 일을 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아쌔는 생각했다.
『나는 오늘 밤 여기서 죽는다. 왜? 정거장 역부 노릇을 해먹을 망정 삶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요, 가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나 하나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나의 어머니 ― 늙어서 눈까지 먼 어머니, 내 아내, 내 가장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또 내 아들, 내 조상의 대를 이을 외아들, 그들을 가난이라는 벌판 위에 내어버리고 내가 오늘 죽을 수가 있나! 나만 죽으면 그들도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이 될 것이다. 누가 보호해 줄 사람도 없고 먹여 주고 입혀 줄 사람도 없다.』
아쌔는 뚜렷하게 그의 앞에 나타나는 어머니, 아내, 아들의 얼굴들을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죄 하는 듯이,
"아니오, 아니오. 이 세상 천만 사람의 목숨보다도 당신들이 내게는 더 귀하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내가 왜 목숨을 내놓아요. 내가 일생에 보지도 못하고 상관도 없는 그 승객 수백 명을 살린들 당신들을 못살게 한다면 내게 무슨 쓸데가 있겠소. 아니오, 나는 가만 있을 테요."
하고 속으로 주문 외듯 외었다.
아쌔는 생각했다. 사실말이지 자기는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역장 통신원이 모두, 이유는 하여간에 찍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홀로 기수가 도적을 방어하지 못한다고 일후에 나라에서 벌 내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제 몇 분 혹은 몇 십분 동안을 눈 딱 감고 귀 딱 막은 후 그냥 그 자리에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면 첫째는 제 목숨을 살릴 것이요, 둘째는 제 가족올 살릴 것이다. 지금 아쌔에게는 피하지 못할 중대한 선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절대로 자유인 동시에 또 황급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선택을 할 기회는 이제 사실로 몇 분이라기보다 몇 초밖에 아니 남은 것이었다.
아쌔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이상한 감정을 내리누르고 부인을 하려고 애를 썼다.
"나와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내 가족이나 또는 내 몸이나 살려야지."
하고 그는 자꾸자꾸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생각으로 그의 머리 전체를 채워서 다른 생각이 생길 틈이 없게 해보려고 애를 썼지마는 그것은 무효이었다.
어느 구석에선가 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법률이나 풍속의 책임이라는 것보다 사람이라는 이 인생의 책임이라는 것이 더 중한 것이라는 암시가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렇다. 법률상으로 볼 때 지금 열차를 타고 오는 수백 혹은 수천 사람이 몰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무 책임도 돌아갈 것이 없었다. 따라서 아무 별도 받을 리가 없었다. 오늘 밤만 이대로 지나가면 내일부터는 다시 평화스럽게 일을 계속할 것이요 월급을 받아서는 사랑하는 부모 처자를 기를 것이다. 그러나 아쌔는 사람이었다. 과연 오늘 밤 일과 같은 경우에 사람으로서의 아쌔에게 사람으로서의 아무런 책임도 없으며 따라 벌도 없을 것인가.
아쌔는 괴로워서 몸을 비틀었다. 지금 아쌔는 괴로워서 몸을 비틀었다. 지금 아쌔의 눈앞에는 급행열차 삼등칸 안 모양이 아련히 나타났다.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딴딴한 나무 걸상을 침대 겸 베개 겸 하고서 울렁덜렁 몸을 들치우면서 화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어린이, 여편네, 사나이들이 똑똑히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린애들이 앞에 놓인 두 개의 함정을 꿈도 아니 꾸고 온전히 깊은 잠에 들어 무슨 재미난 꿈을 꾸는지 어여쁜 입술을 방긋거리면서 그 토실토실한 주먹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광경이 똑똑히 바라다보였다.
아쌔는 다시 몸을 떨었다. 그리곤 이번에는 그는 그의 눈앞에 나타난 제 집안을 바라다보았다. 어머니와 아들이 화평히 잠들었고 아내가 명일날 아들 신길 신을 깁고 있는 것이 보이였다. 그의 아들은 머리만 내어놓고 이불을 푹 쓴 채 눈썹 사이를 행복스럽게 생끗생끗하면서 쌕쌕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아내와 어머니는 아니 보이고 곤히 자는 아들의 모양만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바로 옆으로 이상하게도 방금 조금 전에 보이던 기차 속에서 잠자는 아이 모습이 나타났다. 쌍동이 같은 두 아이, 형제 같은 두 아이는 둘 다 사랑스럽게 웃음을 띠면서 서로 돌아누웠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두 광경이 들어가 마주 붙어서 한 그림이 되었다. 그것은 급행열차 삼등실이었다. 마음 놓고 잠자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이 뒤섞이어서 잠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금시로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머니, 아내, 아들로 변해졌다. 이 구석에서도 저 구석에서도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이 잠자고 혹은 주먹으로 두 볼을 비비면서 일어나려고 하기도 한다. 아쌔 처 자신까지가 그 기차 속에 담겨져 끌려가는 것같이 몸이 들추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모든 환상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는 희미하게나마 확실하게 기차의 대지 위를 달리는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희미한 덜컹 소리와 미약한 지진 같은 흔들림이 아쌔에게는 화약 뭉텅이에 성냥불 대인 것 같은 영향을 주었다.
아쌔는 다시 아무런 관념 사상 토론이 없이 번갯불같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사슴을 본 범보다도 더 빠르게 걸핏 등대 앞올 지나는 듯이 서 반 길이나 되는 플랫폼을 내리뛰어서 선로 위에 섰다, 그리고 극한 흥분으로 무의식하게 『어허 ! 어허 !』 소리를 지르면서 그는 그의 바른손에 들린 신호등을 그의 키와 팔이 미치는 데까지 높이 쳐들고 막 내두르면서 미친 듯이 기차를 마주 향해 달음박질쳤다. 아쌔는 첫번에 기차가 아직 한 반 마일 가량 밖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저도 무엇이라고 하는지 모를 뻔한 고함을 지르면서 신호등을 그냥 내두르면서 달음박질했다. 아쌔가 휘두르는 신호등이 앞으로는 새빨간 반원의 불줄을 공중에 그리고 뒤로는 새파란 불줄을 그려 놓았다. 사면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외치는 모두들보다 더 날카롭게 여장군의 성난 외침 이 들려 왔다. 그리고 사면에서,
"죽여라 죽여라!":
하는 무서운 소리가 나는 듯하자, 팽, 팽 하는 총소리가 시작하다가 마지막에는 기관총 여러 개를 한꺼번에 사격하는 것 같은 복잡한 총소리가 고요하던 하늘을 떠나보낼 듯이 어지러이 들려 왔다. 무슨 한없이 빠른 물건들이 아쌔의 몸 사면을 스치고 횡횡 지나가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이 두려운 혼잡이 아쌔에게 십 배나 되는 더 큰 열을 부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욱 소리를 지르면서 선로 위를 껑충껑충 뛰어가면서 선로 절단된 데까지 간 때 쨍강하고 그의 신호등 유리가 산산이 헤어져서 아쌔의 머리에 온통 뒤집어 씌우면서 불이 꺼져 버리고 말았다. 아쌔는 더욱더욱 열이 나서 미친놈처럼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면서 깨어진 등을 그냥 내두르면서 앞으로 더 뛰쳐갔다. 그러나 그가 서너 발짝을 더 못 가서 그는 그의 잔등을 무슨 무거운 쇠망치 같은 것으로 얻어 맞는 것 같은 감각을 인식하면서 그만 앗 소리 지르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잠깐만에 그는 그가 눈 쌓인 선로 위에 가로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디라고 형용할 수는 없이 온 몸이 아프고 쓰림을 깨닫고 제 주의에는 희고 깨끗한 눈이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제 피로 빨갛게 물들여지는 것을 직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들을 오래 생각지 아니했다. 그의 머리는 다시 그 기차와 도적놈들의 생각으로 분주하여졌다.
그는 무슨 소리를 들어 보려고 전 정신을 귀로 모았다. 확실히 기차 소리는 멎었다. 울컹거리는 소리는 없어졌다. 그리고 다만 파장파장하는 성난 발자국 소리들과 명절날 오독도기 쏘는 소리 같은 총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나? 그러면 나의 이만한 노력도 그만 허사가 되었는가 하는 비감한 생각이 핑 돌아갔다. 바로 이때 그는 분주한 총소리와 고함 소리 속으로 새로이 울려오는 기관차의 푸푸 소리와 덜그럭 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 들여 고개를 소리나는 편으로 돌리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기관차 머리불이 펄럭거리고 있고 그 앞으로 무엇들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았다. 아쌔는 손바닥에 땀을 홀려가며 정신없이 그것만 바라다보았다. 기관차 머리불이 차차 멀어지고 푸푸 소리가 차차 희미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아까보다 더 큰 외침 소리와 혼잡한 총소리를 들었다.
아쌔는 안심하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러면 기관수는 아쌔의 신호를 보고 기차를 급히 멈추었다가 총소리를 듣고 급히 뒷걸음을 쳐서 달아난 것이다. 아쌔의 일은 이루어진 것이다. 근 십 년이나 매일 하던 직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계속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그 직무를 이행하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그
리고 마지막 이행으로 죽음을 얻었고 그 죽음으로 그 『영원한 삶』을 산 것이 었다.
기차 머리불은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저ㅡ편 수평선에서 까물까몰하고 그리 요란하던 총소리도 뚝 그쳤다. 다만 기쓰고 기차를 따라가며 총질하던 도적놈들이 제각기 무엇이라고 제 분풀이를 부르짖으면서 급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그는 들었다. 그리고 시커먼 것들이 아쌔 옆으로 혹은 넘어뛰어서 정거장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잔등과 목에 맞은˙ 상처도 찬 눈에 마비가 되어 아픈 줄을 알 수가 없고 구름 없는 하늘 같이 새맑은 그의 머리에는 만족감과 환희의 감정으로써 가득채워져 있었다.
"사람 노릇 했다."
하는 감정이 아쌔를 끝도 없는 즐거움 속으로 그의 정신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도적놈들의 발자국 소리가 차차 멀어졌다. 후환을 무서워하는 그들은 한 시각도 지체하지 못하고 급급히 도망질치는 것이었다. 아마 복수로 역장을 죽여 버리고 가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싹 소리도 없이 다시 고즈넉해졌다. 언제부터인지 다시 곱고 느릿한 함박눈이 펄펄 내려와서 상기된 아쌔의 얼굴을 덮고 몸뚱이를 덮었다. 아쌔는 절반 꿈속같은 속에서 다시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컹컹 하는 소리 속으로 은은히 들리는 제 아들의 목소리를 그는 듣는 것 같았다.
"아버지 ! 아버지 !"
그는 대답을 하려 했다. 그리고,
"오 ! 너도 사람 구실을 하여라."
하고 말하고 싶었지마는 절대로 불가능이었다. 벌써 그의 관능은 그의 지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냥 꿈속같이,
"아버지 ! 아버지 !"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자는 듯이 무의식하게 되었다. 함박눈은 그냥 내리부어 아쌔를 곱게 둘러 덮었다.
〈1925〉
2016년 11월 2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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