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삶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분명 ‘삶’은 과정 가운데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줍니다. 마치 여행처럼 말입니다. 세상에는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각 별들은 빛나는 계절과 시간이 다릅니다. 누군가 그 별을 발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게 존재의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저에게 지난 주간은 수많은 반짝 거리는 별들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동해에서 부산까지 다녀오며 다른 교단의 여성 신학자들, 성공회 여성직자들, 틔움 북콘서트에 찾아온 전국에서 온 이들, 다른 모델을 가지고 있는 네 개의 녹색 교회 사목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말에 만나게 된 아나윔 회원들의 각자의 다른 달란트, 저녁 식사에서 만난 청년들은 저에게는 별들의 반짝거림이었습니다.
발견하는 자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의 소리는 기억으로 잘 남아 저에게 더 넓은 움벨트를 가지도록 이끌었습니다. 움벨트라는 말은 생명체가 인식하는 세계인데 저의 움벨트가 확장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룬 이들의 소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소리에 한껏 귀를 열면서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숫자가 다가 아니라는 듯 다른 리듬을 가지고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으며 자기 세상에서 반짝임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축제에 가면 간혹 디제잉을 듣게 되는데 다른 리듬이지만 하나로 모여서 풍성한 흥을 돋구는 음악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아파트 원룸에 버려진 화분이 많은 데 너무 가여워 집에 가지고 와서 가꾸다가 잘 자라면 당근마켓에 내놓고 해서 여러 개를 팔았습니다.”(유명희 사제, 대한성공회 거제교회 시무)
“20명 남짓되던 교회에서 재개발이 되어 도시를 떠나게 되었을 때 농촌지역으로 옮기자고 한 것은 저였습니다. 그런데 절반이나 따라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30년이 지났는데 이 마을에 9가구였다가 지금은 45가구가 되었습니다. 땅 값이 오르고 길이 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사람들이 농촌이지만 행복하기 위해서는 도서관, 책방, 문화공간, 교회는 꼭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중입니다.”(백영기 목사, 쌍샘자연교회 시무)
“한동대학교 친구들이 한 둘 오길래 대학생 집밥 먹이기를 10년간 진행했는데 어느 날 한동대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 저녁기도를 노래로 드리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그 벅찬 감동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진으로 쓰러진 포항교회에서 다시 희망을 발견했던 순간이었어요.”(조명숙 부제, 은퇴)
“우리 교회는 그 옛날에는 1/3이 민주화투쟁하다 감옥에 갇혔던 적이 있었던 교회인데 나도 또한 평신도운동으로 목회자가 되었고 그 교회에 부임하면서 녹색교회도 아닌 곳에서 목회하기 싫어서 녹색교회 사명을 이어가기로 했어요. 더 이상 과거의 명성만을 위해 살기보다는 복음을 현재형으로 바꾸기 위해서 녹색교회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태선교사도 양성하고 햇빛발전소도 짓고 각종 캠페인도 하는 일은 교회를 다시 숨 쉬게 했습니다.”(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시무)
#3.
저에게 오늘 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도 그렇게 읽혔습니다. 예레미야는 1장은 소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아이라서 말을 못한다”고 절망하는 예레미야를 붙잡아주시고 용기 주시는 야훼와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그에게 능력을 내려주시고 미래를 보게 해주시는 게 아닙니다. “용기를 내라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너를 축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그 분의 부르심은 모세 때부터 그랬습니다. 떨기나무 아래에서 고통 받는 동족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예언자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모세는 주님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나서 증거를 달라고 했더니 ‘나는 곧 나다’(출애굽 3:14)라는 말로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래도 초기 예언자들은 기적을 베풀 능력이라도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능력이 충만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자연을 다스릴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예언자들은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그랬습니다. 아이라서 말을 못하겠다고 하는 데, 그 분이 주시는 말씀은 내가 너의 입술에 손을 대었다. 축복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과 방향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지 않습니다. 그랬던 예레미야가 오늘 2장에서 드디어 야곱가문, 이스라엘 가문 사람들부터 야훼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예언의 무게감과 그 떨림이 느껴집니다.
#4.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동북쪽 벤야민 진파의 땅 아나톳에서 에비야타르의 후손입니다. 아나톳은 남왕국의 전통 의식을 고수하던 예루살렘과는 구별되는 ‘변방’이었습니다. 아나톳에서 활동하던 사제들은 ‘이사야 전통신학’과는 구별되었으며 ‘중앙 제도권 사제들’과는 구별되어 ‘재야파’ 사제들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왕을 무려 5명이나 겪었는데요. 요시야,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치드키야였습니다. 유다 멸망 시기 40년을 다스렸던 시기였습니다. 그야말로 시대가 어렵기 짝이 없었던 시기였는데 그가 내디딘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이 됩니다.
특별히 예언자들은 비운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언이 실현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낫기 때문입니다. 기근과 병마와 각종 어려움이 내릴 것이라고 외쳐 되는 소리를 듣고 삶의 방향을 돌린다면 그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닌 가하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예언서를 계속 읽어야 하는 까닭은 저는 회심의여정을 겪어야 할 많은 것들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부의 재분배 정의는 중요합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돌아서야 할 수많은 타협들은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에게 박탈된 삶을 누릴 권리를 우리는 회복 시켜야 합니다. 지구촌에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차별과 폭력, 혐오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삶을 바쳐진 외침을 통해 어긋난 것들을 점검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5.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또 제가 만난 사역하는 이들, 또 감동을 선사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신앙 간증과 기도의 나눔처럼 모든 것은 발걸음을 포기하지 않는 삶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지도자들 안다는 이들에게 모진 소리를 해가면서도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자들에게만 아낌없이 나누시고 그에게 찾아오는 병자들만 고쳐주시고 길을 따라 다니는 이들만이 있었나 보다 오늘 예수님 곁에 있었던 많은 이들 특히 그에게 반목하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이들도 곁에서 물러나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말씀해주십니다. “낮은 자리에 앉아라”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사제의 종 말코스(요한 18:10)의 귀도 고쳐준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잡힌 그 순간에도 빌라도와 대화하셨습니다.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꽃들은 누가 보아주지 않는데도 피고 지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화려한 꽃들도 눈길이 가지만 풀이 자라 쪼그리고 앉아 뽑아야 하는 저 풀들도 그렇습니다. 찬 바람이 나기 시작하니 저 풀들이 꽃을 피우고 풀씨를 뿌리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6.
모든 준비는 하느님이 시킨다는 어제 아나윔회 참석하신 분의 나눔처럼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여정을 살아갑니다. 하늘의 별처럼. 제 때에 빛나며 하느님의 교향악의 한 부분, 한 리듬 만을 담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희망을 멈추지 마시고 삶 속에서 타협하지 말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을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제 태어난 아기의 웃음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저 풀씨 속에서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만난, 예언자로 비유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나요.
저에게는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과정, 그 치열함. 그 생명력, 그 초록, 생기넘침, 그 희망, 그 바램이 삶으로 녹아나 내가 마주한 순간의 빛깔과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저에게는 예언자가 되어 오늘 울림을 주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분명 그런 예언자가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걱정 소리 속에서, 때로는 음악의 한소절 속에서, 저 높은 가을 하늘 속에서 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돌아서게 하고 나를 다시 시작하게 하고,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을 꼭 알아채시기 바랍니다.
* 부산동래성당은 옛 교회에서 현재로 이전하면서 스테인글라스를 다 떼어와 제대배경 벽을 장식했습니다. 다시 이전 계획이 있는데 스테인글라스로 가져가 창문을 장식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정 속에 있는 선교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