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M2)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
요즘 불교계가 ‘개망신’을 당하고 있다. 연일 포털사이트 메인 뉴스 첫화면에 도박관련 사건이 보도 되고 있는데, 특히 ‘불교 도박 파문’이라는 굵은 글씨 제목으로 유인하고 있다. 그 글씨를 클릭하면 이번 도박사건 관련 모든 기사가 최신 뉴스에서부터 차례로 올려져 있다.
최신 뉴스를 보면 도박이라는 말 보다 ‘성매매’ 또는 ‘성매수’ 등 성과 관련된 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성호스님의 폭로에 기인한다. 성호스님이 스님도박에 이어 자승스님의 룸살롱 출입과 성매수 의혹에 대하여 폭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조계종 호법부 정념스님은 룸살롱 성매수 사건에 대하여 “자승 스님은 당시 장소가 적절치 않아서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나가셨다”고 반박하였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또 하나의 기사를 보면 이번 도박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성호스님의 과거 사생활에 대하여 보도 하고 있다. 성호스님이 ‘2004년 12월 25일 사찰에서 비구니스님을 성폭행 하려다 비구니 스님과 그 모친이 저항하자 두 사람을 폭행하고 도주했다’는 내용이다.
이쯤 되면 막가는 것 같다.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모든 싸움에서 가장 최후에 꺼내드는 카드가 성문제인데 성매매 관련 공방을 보니 갈데까지 간듯한 느낌이다.
시시콜콜하한 내용까지 보도
이렇게 스님도박사건으로 시작 하여 일파가 만파가 되어 룸살롱, 성매매 등으로 연일 보도 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문에서는 스님들의 사생활에 이르기 까지 시시콜콜하한 내용까지 보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도박 영상에 나오는 당사자들이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16일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출연한 조계종 호법부장 서리 정념 스님은 “화투는 일부 스님들의 놀이문화”라고 말했다. 그 발언에 대해 개혁 성향의 한 젊은 승려는 “미친 발언”이라며 격노했다. “만원짜리 수백장이 오고간 포커를 친 것이 재미라고 본다면 그건 부처님을 욕보이는 발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불교계에는 음주·흡연 등 계율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선사들의 ‘기행’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문화적 관용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역대 큰스님 가운데 기행을 일삼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젊은 승려들도 술을 ‘곡차’, 담배를 ‘향공양’이라고 순화해서 부른다. 이번 사태 관련자들이 상대를 향해 음주·도박을 일삼았다는 흠을 계속 들춰내는 걸 지켜보자면, 마치 조계종 승려 모두 음주·도박을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승려는 “스님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술·도박·여자 가운데 하나는 해야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돈다. 이는 큰스님들이 기행을 통해 알리려 했던 참뜻을 왜곡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다른 불교계 인사는 “남성끼리 폐쇄된 공간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가끔 화투 정도는 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작은 잘못이 모여 도박 사태를 낳았다”고 혀를 찼다.
(젊은 승려들 “포커가 재미? 부처님 욕보이는 발언”, 한겨레신문 2012-05-16)
기사에서 화투나 카드를 일종의 ‘놀이문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발언은 기름에 물을 붓는 격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생각하는 ‘스님상’하고 다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스님상은 ‘도인 이미지’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이 무엇이 아쉬워 세속에서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범부들도 하지 않은 화투, 카드, 곡차(술), 향공양(담배), 더구나 여자(매음)를 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용어들이 스님사회에서 나오는 것 자체를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네티즌 들의 반응은 비판을 넘어 비난과 비방, 조롱으로 일관한다.
가장 강력한 성명서
하지만 승가에서 화투, 카드, 곡차(술), 향공양(담배), 여자(매음)에 대한 것은 현실인 것 같다. 미디어붓다에 실린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에 우리들은 차마 부처님을 대하기가 송구할 뿐이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부처님오신날을 맞을 것이며 무슨 낯으로 봉축을 읊조릴 것이고, 또 부처님을 대할 것인가. 도박을 한 타락한 승려들만이 아닌, 전체 승가와 불교계를 향한 세상의 조롱과 비판에 우리 불자들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실제로 재가불자들 중에는 애써 불자임을 숨기는 경향이 늘어났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누가, 왜 이 자랑스러운 불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불자로 살아가는 것을 구차하게 만드는가?
승려들이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매음하는 것은 스님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5계를 스스로 파(破)하는 행위이다. 술(酒)과 매음(淫)은 당연히 파계에 해당하거니와, 이번 사태로 우리 재가불자들이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신도들의 인격을 죽인(殺) 행위이고,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의 수행과 포교를 위해 시주한 돈으로 도박을 했으니 이는 시주의 돈을 훔친(盜) 행위이며, 그런 승려들이 지금까지 입으로는 부처님 말씀을 설해 왔으니 이는 거짓말(妄)한 행위이다.
(정웅기 불시넷 운영위원장, “신망 갖춘 출·재가자 참여 비대위 구성하라”, 대불련 총동문회 ‘승려도박 사건’ 성명서 발표, 미디어붓다 2012-05-16)
스님들의 도박 어떻게 볼 것인가-정웅기.docx 스님들의 도박 어떻게 볼 것인가-정웅기.pdf
이번 스님도박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강력한 성명서가 나왔다. 대불련(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 타락한 스님들의 일탈행위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타락한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매음 등을 하는 행위는 오계를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파계’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비록 심심풀이 놀이 문화라고 강변하지만 화투나 카드를 잡게 되면 ‘술(酒)’을 마시고 담배를 피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매음행위(淫)’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이는 시주돈을 축내는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盜)’ 하는 것이 되고, 부처님과 불자들을 모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인격적 살인(殺)’을 범한 것이라 한다. 그런 스님이 신도들 앞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했다면 언행이 일치가 안되기 때문으로 ‘거짓행위(妄)’로 본 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미 삼아 심심풀이로 한 도박이 오계를 범하는 어마어마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계를 범하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오계를 어기면 죽어서 처참한 곳, 비참한 곳, 불행한 곳, 즉 ‘악처’에 태어나게 된다고 말씀 하셨다.
도박사건과 관련된 공동체의 허물 일곱가지
그렇다면 스님들의 일탈행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정웅기 불시넷(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운영위원장은 불교닷컴에 장문의 글을 기고 하였다.
이번 도박사건이 불거진 것은 스님들의 잘못도 크지만 그런 잘못이 일어나게 한 토양도 문제라 한다. 불교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도박시건과 관련된 공동체의 허물
(출처: 정웅기 불시넷 운영위원장, “신망 갖춘 출·재가자 참여 비대위 구성하라”, 대불련 총동문회 ‘승려도박 사건’ 성명서 발표, 미디어붓다 2012-05-16)
재가불자들의 허물
표에서와 같이 일곱가지 허물이 있지만 그 중에 재가불자들의 허물도 있다. 그것은 스님들의 부적절한 일탈행위에 대하여 묵인 하거나 방조 한 것을 말한다. 스님들의 일탈을 보면 지적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허물이거니 하면서 “곧 돌아와 참회하겠지” 하며 내버려 두는 것 보다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의 허물을 보고서도 지적 하지 않았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불자가 받게 되어 있다. 스님들이야 절에서만 살기 때문에 모르지만 불자들은 사회에서 타종교인과 함께 살기 때문에 스님들의 일탈행위로 인하여 사회 문제화 되었을 때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불자라고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자임을 일부로 숨기게 되고 심지어 ‘개종’하는 사례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고한 글이 현실이 되어
스님들의 놀이문화 중의 하나라는 화투와 카드, 심지어 도박, 그리고 술, 담배, 여자를 밝히는 것 등 일부 ‘철부지’ 스님들의 일탈 행위, 그리고 이를 몰카로 촬영하고 또 이를 검찰에 고발하여 사회법으로 처벌을 시도 하는 ‘무개념’ 스님들이 벌이는 행태로 인하여 연일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 되었을 때, 이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예고성 글도 있다. 도박사건이 터지기 전에 법응스님은 불교닷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 하였다.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조계종의 고위급들이 추문에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도 ‘아니다’라는 부정은 고사하고 해명조차도 없으니 산지사방에 의혹만 증폭되고 종단위상은 말이 아니다.
(법응스님, 조계종 망칠 소지 있는 교역직 나가야 한다, 불교닷컴 2012-04-23)
이 글은 이번 도박사건이 나기 전에 작성된 글이다. 마치 이번 도박사건의 파문을 예견이라도 하는 것 같다.
불자 백만명이 빠져 나갈 것이라고
글에서 스님은 교역직을 가진 스님들이 조심해 줄 것을 이야기 하였다. 들리는 추문이 신문과 방송 등 매스컴에 공표 되었을 경우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라 하였다. 아마도 조계종이라는 간판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 사건이 터졌을 때 조계종 불자수가 ‘100만명’은 감소할 것이라 내다 보았다.
불행하게도 스님이 경고한 말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연일 신문과 방송, 인터넷 포탈 메인에서는 조계종과 불교관련 추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갈 수 알 수 없다.
검찰에 고발하였으므로 불자들은 보기 싫어도 스님들이 포토라인에 서는 것부터 공판을 받기 까지 수 개월간 보아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국민들은 스님들을 모두 타락한 자들로 볼 것이고 불자들은 자신이 불자라고 말하고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에 따라 오로지 기도와 방편불교에 길들어진 불자들은 불교와 등을 돌릴 것이고 개종이 속출할지도 모른다. 스님이 말한 백만명이 빠져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한세대후 한국불교는
이렇게 철부지 스님들, 무개념 스님들, 개판치는 스님들이 끊이지 않을 때 한국불교는 머지 않아 소수종교로 전락 하고 말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예측보고서가 있다.
불교미래사회연구소 퇴휴스님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를 내어 놓았다.
▲ 종교지형 장래 추세. 위에서부터 종교인구, 불교, 개신교, 천주교 예측 그래프. (출처: 한국불교 지금 이대로 간다면2044년 대한민국은 천주교 국가, 미디어붓다 2012-02-06)
그래프를 보면 빨간색 표시가 불교이다. 그런데 해가 가면 갈수록 신자수가 감소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초록색으로 표시된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보라색으로 표시된 천주교는 예외이다. 오로지 천주교만이 해가 갈수록 신자수가 증가 하여 마침내 한세대가 지나면 우리나라 ‘최대종교’로 부상할 것이라는 시나리오이다.
어디까지나 가상시나리오에 불과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불교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신자수가 많은 종교가 불교(22.8%)인데 앞으로 30년 후가 되면 불과 한 자리 수 대의 ‘소수종교’로 전락한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관적인 예측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계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지금 같은 상황이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승가는 무사안일과 무식과 무위도식 소위 ‘삼무(三無)현상’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 나는 도박, 음주, 매음, 은처 등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니 더욱 더 비관적이다. 이런 도박사건과 같은 일들이 연이어 언론과 매스콤에 공개 된다면 한세대가 지나기 전에 불교는 소수 종교로 전락할지 모른다.
재가불자 없는 승가를 상상할 수 없다. 재가불자들이 재보시하고 승가는 법보시함으로 불교가 유지 되는데, 재가불자들이 모두 빠져 나간다면 승가 역시 존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루빨리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은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다.
삽바사와경(Sabb?savasutta?, 모든 번뇌의 경, M2)에서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철부지 스님들, 무개념 스님들은 부처님의 일생부터 공부해야 한다.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실천하여야 한다.
심심풀이 화투나 카드로 시작하여 도박, 음주, 매음 등을 하였다면 이는 자신과 싸움에 진 것이다. 다른 말로 ‘번뇌’에서 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번뇌를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번뇌를 끊은 방법이 있다. 삽바사와경(Sabb?savasutta?, 모든 번뇌의 경, M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과 봄이 없어서가 아니라 번뇌의 소멸에 관해 잘 알고 또한 잘 보기 때문에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번뇌의 소멸에 관해 잘 알고 잘 보는가? 이치에 맞게 정신을 쓰는 것(如理作意)과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생겨난 번뇌는 더욱 증가한다. 그러나 이치에 맞게 정신을 쓰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번뇌는 끊어진다.”
(삽바사와경-Sabb?savasutta? -All Desires-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docx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pdf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번뇌를 잘 관찰하라고 하였다.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 ‘이치에 맞게 정신을 쓰라’고 하였다.
전문술어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ra)’
이치에 맞게 정신을 쓰라는 것은 ‘주의 기울여 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ra)’이다. 이를 한자어로 ‘여리작의(如理作意)’ 라 한다. 마나시까라는 술어는 번역자마다 번역어가 다르다.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은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하였다.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생소한 말이다. 사전을 찾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선가에서 예로부터 사용되던 말이라 한다.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정신을 잘 쓰는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요니소 마나시까라’라는 술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술어에 대하여 해설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4. 지혜와 해탈> 8번 주해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이라 번역되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ra)에서 yoni는 ‘자궁’이나 ‘모태’를 나타내며 여기에다 ‘so’ 라는 접미어를 붙여서 탈격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모태로부터, 근원으로부터’의 뜻을 나타낸다.
manasik?ra는 manas(意, 마음)의 처소격을 만들어 거기에 √k?(하다)를 붙여서 말 그대로 ‘마음에 만든다, 마음에 둔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yoniso manasik?ra는 ‘아주 근원에서부터 잘 마음에 새겨 사유한다, 깊이 통찰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국에서는 여리작의(如理作意)로 옮겼고 서양학자들은 ‘wise attention(지혜로운 주의)’ 혹은 ‘systematic analysis(체계적인 분석이나 사유)’ 등으로 옮기고 있다.
먼저 경의 어떤 문맥에서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면 이 술어가 뜻하는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M2)에서 부처님은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은 버려진다.”
고 하신다.
또 상윳따 니까야, 제 12편, 인연상응(Nid?na-sa?yutta)의 여러 경들에서
“연기에 대해서 아주 깊게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해탈을 성취한다.”
고 나타난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유명대경(有明大經, Mah?vedalla-sutta)」(M43)에서는
“지혜로운 주의를 반연하여 정견(正見)이 생겨난다.”
라고 나타난다.
그리고 아울러 yoniso upapari-kkheyya(근원적으로 [지혜롭게] 되새겨 봐야 한다)는 표현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요니소 마나시까라와 같은 의미라 하겠다.
(주해 모음, 김한상 번역 및 역주, 1.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2.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 3.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석에 따르면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ra)는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아주 근원에서부터 잘 마음에 새겨 사유한다, 깊이 통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에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을 때 이 마음을 잘 관찰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한 주의 기울임
그런데 이런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으로 관찰 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 될까. 경에서 부처님은
“manasikaroto anuppann? 마나시까로또 아눕빤나 ceva ?sav? uppajjanti, 쩨와 아사와 우빳잔띠 uppann? ca ?sav? pava??hanti” 웁빤나 짜 아사와 빠왓단띠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생겨난 번뇌는 더욱 증가한다.”
“When attending unwisely non-arisen desires arise, and arisen desires grow”
고 하였다.
심심풀이로 화투나 카드를 하였을 때 이것이 도박으로 발전되고, 술을 마시게 되고, 여자를 찾게 되는 이치와 같다. 한 번 번뇌가 일어나면 것 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는 ‘지혜롭지 못한 주의 기울임’을 말한다.
‘지혜롭지 못한 주의 기울임’ 은 ‘요니소’에 부정 접두어 ‘a’가 붙어 ‘‘아요니소 마나시까라 (ayoniso manasik?ra)’라 한다.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
그렇다면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이란 어떤 것일까.
이는 경에서
“Manasikaroto anuppann? 마나시까로또 아눕빤나 ceva ?sav? na uppajjanti, 쩨와 아사와 나 우빳잔띠 uppann? ca ?sav? pah?yanti.” 웁빤나 짜 아사와 빠히얀띠
“이치에 맞게 정신을 쓰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번뇌는 끊어진다.”
“When attending wisely non-arisen desires do not arise, and arisen desires fade.”
고 하였다.
술이 마시고 싶다는 번뇌가 일어 났을 때 이를 잘 관찰하면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 마음’이 일어나면 ‘이전 마음’은 사라지게 되어 있어서 번뇌가 끊어진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스스로 생각한 것을 설한 경
샅바사와경에서 ‘삽바사와’라는 말은 ‘삽바(Sabb?, 전체, 일체)’와 ‘아사와(?sava, 번뇌)’의 결합어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모든번뇌의 경’이라고 경의 제목이 붙여졌다. 그런 삽바사와경은 다른 경들과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였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의 경우 제자들이나 외도들 또는 재가자들이 물으면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삽바사와경의 경우 부처님이 스스로 생각한 것을 설한 것이다. 이런 점은 경의 앞부분에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모든 번뇌에서 자신을 수호하는 법문에 관해 설할 것이다. 듣고 잘 새겨라. 내가 설명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번뇌를 끊는 방법 일곱가지
이와 같이 부처님이 스스로 설한 경은 흔치 않은데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떤 점을 이야기 하였을까. 부처님은 경에서 번뇌를 끊은 방법에 대해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설하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 일곱가지
스리랑카 담마키띠 비구로부터 들은 강의
위 표에서 첫번째의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dassan?)’를 보면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이지만, 정신을 쓰고 있는 것’에서 세가지가 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존재의 번뇌,무명의 번뇌를 말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동국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스리랑카 담마키띠비구로부터 들었다. 담마키띠비구에 대한 동영상 강의(제1회 빨리어 강좌) 를 듣고 글을 블로그(어떻게 해야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에 올려 놓은 바 있다.
담마키띠 비구가 첫번째 항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dassan?)’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충설명을 곁들여 정리 하였다.
첫째, ‘까마 아사와(k?ma ?sava, 욕망에 기인한 번뇌)’이다.
이를 ‘욕망에 기인한 번뇌’라 한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쳤을 때 육근을 즐김에 따른 번뇌라는 것이다. 특히 안이비설신과 같은 오근을 즐김에 따라 생겨나는 번뇌를 ‘빤짜까마(pa?ca k?ma)’라 한다.
눈으로는 형상을 즐기고, 귀로는 소리를 즐기고, 혀로는 맛을 즐기는 것등이다. 눈으로 형상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눈의 시야에 들어온 형상의 대상을 감각적 욕망으로 즐기면서 형상에 대한 갈애가 일어날 때 그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 한다.” (청정도론, 제17장 통찰지의 토양)
이러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뿌리 깊은 것이어서 아라한이 되어야만 없어 진다고 한다.
눈으로 형상을 즐기는 것 뿐만 아니라 귀로도 소리를 즐긴다.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소리를 즐기게 되는데, 이때 소리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맛에 대한 갈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나 ‘맛집’을 순례하는 ‘식도락가’처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좋은 예일 것이다.
이처럼 오근을 즐김에 따라 더욱 더 갈구하고 바라는 갈애가 일어나는데, 이는 욕망에 기인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바와 아사와(bh?va ?sava, 존재에 기인한 번뇌)’이다.
이를 ‘존재에 기인한 번뇌’라 한다. 이는 죽고 싶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죽더라도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바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상견(常見)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D.i.14)”라는 견해가 일어나는데, 이런 견해에 대한 취착 때문에 계와 의식으로 청정해진다고 믿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자아를 영원한 것이라고 거머쥘 때(탐욕) 그 자아를 청정케 하고자 그에게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이 일어나는데, 이는 죽어서도 천상에 태어나 영원히 살고 싶은 욕구(상견)이다. 따라서 존재에 기인한 번뇌는 상견과 탐욕이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아윗자 아사와(avijja ?sava, 무명에 기인한 번뇌)’이다.
이를 ‘무명에 기인한 번뇌’라 한다. 자연이나 사물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되는 번뇌를 말한다. 특히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因果)’를 몰랐을 때 더욱 더 그렇다.
우리나라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 ‘인연(因緣)’이다. 그래서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이라 하고, 헤어지는 것도 “인연이 다 되어서”라고 한다. 이때 인과 연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단지 ‘인연’ 또는 ‘인과’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연과’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세가지로 부른다. 즉, 원인과 조건과 결과이다. 이를 붙여 부르면 ‘인연과(因緣果)’가 된다.
빠알리어에서 ‘인(因)’은 원인의 뜻으로 ‘헤뚜(hetu)’라 한다. 그리고 ‘연(緣)’은 조건의 뜻으로 ‘빠띳짜(patiica)’라 한다. 여기에다 ‘과(果)’를 결과라 하는데 빠알리어로 ‘팔라(phala)’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자들이 말하는 인연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연과(因緣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과를 빠알리어로 읽으면‘헤뚜 빠띳짜 팔라(hetu pattica phala)’가 된다.
무명은 모르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세상의 끝을 찾아 우주 끝까지 가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1미터 몇십센티 되는 몸안에 우주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이 세상의 끝을 다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항상 ‘헤뚜 빠띳짜 팔라(hetu pattica phala, 因緣果 )’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찾는 것은 번뇌
또 하나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dassan?)’에서 중요한 사항은 현재 한국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수행방법에 대한 지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부처님은 경에서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는 것’에 대하여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등의 15가지를 지적 하였다. 이는 현재 선종에서 추구하고 있는 ‘참나’를 찾는 것에 대한 지적과 거의 같다.
더구나 부처님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나타나는 여섯 가지 견해’ 에서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는 말은 ‘소아가 대아를 찾는 것’ 즉, 진아(참나)를 찾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힌두교의 아뜨만과 브라만 사상을 비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간화선 수행방법에 대한 것을 지적한 것처럼 보인다.
또 부처님은 경에서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 역시 ‘자아와 이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속주의를 비판하고 있어서 유일신교의 영혼관과 창조론을 비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에 정신을 쓰는 것에 대하여 모두 번뇌라 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부모 미생전에 나는 누구 이었는가?” 등과 같이 의문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게 정신을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에서 벗어 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들이 화두를 들면서 “이뭐꼬” 하거나 “어째서 무자라 하였을까?” “어째서 판치생모라 하였을까?”하며 화두 참구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만 키우는 결과이다.
샅바사와경을 보면 부처님이 마치 오늘날 한국의 수행상황을 예견하고 설한 것처럼 보인다. 선사들이 항상 최상승법이라고 말하는 간화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만 증장시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은 잘못된 수행방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관찰에 의해서 끊어야 할 번뇌라 하였다. 그렇다면 관찰에 의해서 끊어야 할 번뇌는 무엇인가
간화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
관찰에 의해서 끊어야 할 번뇌는
1)존재의 실체가 있다는 환상, 2)매사의 의심, 3)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와 같은 번뇌는 중생을 윤회에 묶어 놓기 때문에 ‘결박’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박이 간화선 수행에 모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간화선에서 나를 찾는 것은 ‘나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존재의 실체가 있다는 환상에 해당된다. 이른바 유신견 (有身見, sakk?ya-di??hi)을 말한다. 이러한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해탈과 열반을 이룰 수 없다. 또 성자의 흐름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가 있다’는 등 존재의 실체가 있다는 환상에 대하여 번뇌라 하였다. 간화선에서 “이뭐꼬” 하며 의문과 의정을 일으키는 것은 ‘매사의 의심’에 해당된다. 이를 다른 말로 ‘회의적 의심 (vicikicch?)’이라 한다. 이는 법에 대한 의심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런 의심 역시 번뇌에 해당된다.
간화선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부모 미생전에 나는 누구 이었는가?”등의 의문을 가지며 수행하는 것은 ‘잘못된 수행방법’에 해당된다. 이를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labbata-par?m?sa)’이라 한다. 줄여서 ‘계금취견’이라 한다. 이와 같은 집착 역시 번뇌를 유발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간화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간화선은 번뇌만 증장 시킬 뿐이다.
그래서 일까 간화선 수행자들이 수행이 잘 되지 않을 경우 자포자기 하거나 내부적으로 폭발하여 그 스트레스를 참을 수 없어 막행막식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행자로서 해서는 안될 술, 담배, 화투, 포커, 도박, 매음 등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번뇌를 증장시키는 수행을 한 결과 일 것이다.
젊은 스님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수행을 하면 기쁘고 행복하고 편안해져야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선정수행에서 얻어지는 것과 버려지는 두가지 이점이 있다.
얻어지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여 희열(喜, p?ty), 행복(樂, sukha), 평온(捨, upekkh?) 등 좋은 것들이다. 반면 버리게 되는 것은 감각적 욕망(k?m?chanda), 악의(vy?p?da), 해태와 혼침(th?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회의적 의심(vicikich?) 이렇게 다섯가지인데, 이를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ca-n?vara?a)라 하여 오장애로 부른다. 이렇게 선정에 들면 행복하고 편안해지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간화선 수행을 하면 그런 것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한 강연회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참선을 처음 경험한 듯한 젊은 스님이 청중 속에 들어있었는데 강연을 마친 스님에게 젊은 스님이 물었다.‘참선을 하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앉아있나’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고,그러니 어찌 해야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강사 스님의 대답이 상당히 어려웠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나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앉아있어라.” 그 말을 듣는 젊은 스님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답을 들려주셨다.
(들풀, 어려운 때일수록 크고 바른 서원 세워야......, 열여덟 번째 인연: 전 고려대학교 철학과 연구교수 조준호 박사, 불교포커스 2012-03-23)
어려운 때일수록 크고 바른 서원 세워야.docx 어려운 때일수록 크고 바른 서원 세워야.pdf
들풀이라는 필명을 가진 이가 조준호 박사와의 대담에서 위와 같은 말을 하였다. 어느 강연회에서 어느 젊은 스님이 강사스님에게 참선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하여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냥 내려 놓고 앉아 있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젊은 스님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듣기에 따라 막연하게 이야기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한다든가 자세한 설명은 없다. 다만 혼자서 깨쳐 나가야 한다. 희열, 행복, 평온으로 가득해야 할 수행이 번뇌부터 찾아 오는 것이다. 더구나 나를 찾는 것은 번뇌를 증장시키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였는데, 젊은 스님은 번뇌를 안고 수행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참나를 찾다 찾다 못 찾으면 어떻게 될까. 자포자기상태에서 막행막식으로 폭발하게 될지 모른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도박사건이나 대불련 동문회에서 문제제기한 “술(酒)과 매음(淫)” 한다는 이야기도 간화선 수행과정에서 번뇌가 증장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닐까.
뛸듯이 기뻐하며
하지만 부처님은 이와 같은 식으로 답하지 않았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환희 하거나 심지어 ‘뛸듯이 기뻐 하였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가르침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환희용약’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외도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귀의 하였다는 장면을 초기경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과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Khaya? vir?ga? amata? pa??ta? 카양 위라-강 아마땅 빠니-땅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과 소멸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The sage of the S?kyas realised the ceasing, greedless pleasantness in his concentration There is no comparison to that Teaching. This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Teaching,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Ya? buddhase??ho pariva??ay? suci? 양 붓다셋토 빠리완나이- 쑤찡 Sam?dhi m?nantarika??am?hu, 사마-디 마-난따리깐냐마-후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훌륭하신 깨달은 님께서 찬양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그 삼매와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That which the enlightened chief described as pure, the concentration without an interval, Of concentrations, there is no compare to it This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Teaching,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Ratana Sutta-보배경-寶石經 4-5번 게송,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Ratanasutta,보석경) 4-5번 게송 IMee OoI 창
2012-05-17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