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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수도회]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1,15-17.20-26
† 복음 요한 15,9-17
★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를 떠나 국제적으로 번화한 항구 도시 코린토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퀼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재판에 넘기지만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계속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에 제자들이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부활하신 뒤에 당신을 다시 뵙게 되면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인사 명령을 받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물기 힘든 곳,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머물렀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코린토는 그에게 별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던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코린토는 복잡한 항구 도시인데다가 우상 숭배와 퇴폐풍조가 만연한
곳으로, 평판도 좋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지만 코린토 선교
활동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 갈리오 총독에게
넘겨주자, 총독은 바오로에게서 범법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손을 뗍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잘못도 없는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엉뚱하게 매질하여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매를 맞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했을까요?
그 뒤에도 코린토 사람들은 바오로를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난 다음, 내일 독서에 소개되는
아폴로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펴 나가자, 코린토 공동체는 바오로파,
아폴로파 등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교회
공동체를 세운 바오로의 권위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코린토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체험한 바오로의 복음 선포 기간 안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기간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직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코린토 사람들이 그를 크게 환영한
것도 아니고, 그가 꼭 필요하다고 붙잡고 매달린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 없어도 괜찮으니 이곳을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오로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그는 코린토에 머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또한 오늘 복음의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신뢰하면서 바오로는 좌절과
실패를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지나간 고통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아기를 낳은 엄마가 자기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과 감격으로 해산의 진통을 잊듯이,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어려움과 고통을 잊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신록(新祿)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성 빠코미오 아빠스(292-346) 기념일
사도18,9-18 요한16,20-23ㄱ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신록(新祿)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성모성월 5월, 부활시기의 나날이 축제 같습니다.
어제는 수도원 중앙 지대의 산같은 흙더미 위에서 찍은
수도원 주차장 및 불암산을 배경한 배밭 전경의 아름다운 사진을
다음 글귀와 함께 지인들에게 나눴습니다.
-신록의 기쁨/신록의 믿음
신록의 사랑/신록의 생명
신록의 빛/신록의 하느님!-
신록의 기쁨은 바로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겨울의 죽음을 통과, 봄의 부활을 맞이하여 신록으로 빛나는
'늦봄(故 문익환 목사님의 호)'의 자연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파스카의 신비를 상징하는 신록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가는 이들의 영혼은 늘 신록의 기쁨으로 빛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발하는, 영원한 청춘의 신록의 영혼들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기쁨이 영원한 신록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기쁨, 신록의
기쁨입니다.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세상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오직 파스카의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의 선물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영혼이 됩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바오로뿐 아니라 파스카의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입니다. 평생 주님의 '기쁨의
사도'가 되어 '신록의 기쁨'을 살았던 사도 바오로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바오로는 물론 오늘 기념하는 빠코미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이
신록의 기쁨을 살았습니다.
이런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하나되어 살 때
비로소 우리도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영혼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특히 교회의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성체와 성혈을 나눠드릴 때의 감격이 늘 생생합니다.
저에겐 늘 하루뿐의 날이듯 한 번뿐의 미사입니다.
흡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의 빛!'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진리!' '그리스도의 기쁨!'
'그리스도의 행복!'으로 들립니다.
이런 파스카의 주님과 우정(友情)이, 일치(一致)가 깊어질수록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됨으로 늘 신록의 기쁨, 영원한
생명으로 빛나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요한 16,20-23ㄱ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Your grief will become joy."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
신앙인으로 고도로 발달한 이 현 시대에 순례여정을 살아가면서 슬프고
우울해질 때가 있다. 왜일까? 사람들은 내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질 때 기뻐한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해주던
사람이 자기 곁에서 떠나갈 때에 우리는 그 빈자리와 거리를 바라보며
슬퍼한다. 이 빈자리는 곧 연약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요 우리의
모습이다.나에게 뿌리를 두는 기쁨은 영원할 수 없다.
오늘의 사회는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권력이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끊임없이 가진 자들의 이익 옹호에 앞장서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데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이들과의 재화의 재분배에는 인색하다. 언론은
정치권력에 길들여져 고유한 몫을 하지 못하고 가진 자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이 존엄한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항구한 기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재 상황을 앞에 두고 유혹에 빠지고, 슬픔에
젖으며 고통과 혼란에 빠진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동떨어진 우리 자신의 삶과 이 사회의 모습은 예수님 을 변두리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느님을 장식품처럼 여기는 주객전도의 태도, 믿음
없는 세상,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등을 돌림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듯 흘러가는 이 세상의 막강한 힘 앞에서,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때로는 패배감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기쁘게 살지 못한다.
우리가 그럴수록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16,20)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세상은 이제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 기뻐할
것이고, 제자들은 그런 세상에 남아 있게 되어서 슬퍼할 것이다. 세상적인
기쁨은 그렇게 예수님과는 무관하게 행동하고 남이 못되고 실수할 때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라고 말씀하신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보는 데에 있다(20,20).
그렇다! 슬픔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꾸려면 그분의 부활의 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것으로서 항구한 기쁨이며 세상을 무력하게 하는
기쁨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시고, 또한
‘평화’와 ‘기쁨’을 그들에게 주신다. 우리도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처럼
그분의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림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이나 문제,
의심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16,22).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됨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억누를 수 없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 안에
머무르게 된다. ‘예수님을 다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 삶을 통하여
세상의 힘이 아무리 죽이려 해도 결코 죽여지지 않는 부활을 살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도 이런 전폭적인
받아들임을 통해 종말론적인 기쁨을 살아야겠다. 이 기쁨 안에서 모든
부당함, 혼란, 유혹, 고통은 잠시 지나가는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이제
나를 보아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의 힘으로 어떤 어려움과 고통 중에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away)를 외치며 주님을 증거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서울] 부활 제6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여당,
야당, 정부는 분명 모두 국민을 위해서 대책을 마련하는데,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연금은 대상자가 일정부분 비용을 부담하고,
해당 기관에서 일부 지원을 해서 은퇴를 하면 매월, 혹은 일시불로 수령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은행이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고령화로 인해서 연금을 수령해야 할 대상자가 늘고
있으며, 출산율이 적어져서 연금을 부담할 사람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산출한 연금수령액으로 지불을 하면 연금은
줄어들고, 나중에는 연금을 내지만 수령액이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연금에 대한 운용을 투명하게 하고, 연금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을까요? 가끔은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은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신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리에 계시고,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야 하는 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 주셨고, 말씀으로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을 때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따랐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생각과 말은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없습니다.
뼛속까지 유대인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그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박해하였던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생각을 바꾸었고, 새롭게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큰 은총과 특전을 받은 신앙인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심으로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사목방침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입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새로운 복음화, 새로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사람이 되신 것은 겸손의 복음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신 것은 희생의 복음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드린 것은 봉사의 복음화입니다. 참된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더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봉사와 사랑을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지고 이기고의 괴로운 진실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지고 이기고의 괴로운 진실
유태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였기에 앓던 이 뺀 듯 승리를 느꼈지요.
허나 3일 만에 그 승리기분은 큰 고민되어 권력으로 버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이스라엘 권력자들은 예수라 하면 매우 귀찮아합니다.
그래도 사도들이 온갖 수난과 고통을 버틴 힘은 이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부활로 얻은 최고의 기쁨은 사도들의 절대 기쁨이었습니다.
가톨릭이 사도로부터 이어내려 오기를 고집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주님을 기억하면서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제가 자전거 타는 것을 보고 “신부님처럼 젊다면, 저도 지금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 50대 후반의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젊다’라는 말을 잘 듣지 못합니다.
제가 신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부르는 호칭도 30대 초반에 주로
‘총각’으로 불렸다면, 이제는 ‘사장님, 아버님, 아저씨’ 등등의 말을 듣고
있지요. 문제는 이제 이런 호칭들을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저 역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마음은 10대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께서는 당신보다 젊은
제가 부럽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나이 때문에 못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현재 60대의 나이에도 산악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해외일주도
하십니다. 또 어떤 신부님께서는 젊은 청년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참, 은퇴 후에 홀로 배낭을 짊어지고 세계 일주를 하신 형제님도
생각나네요.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나이’라는 문제의 이유를 만든 것이
아닐까요?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기 보다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요즘 수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반에서 함께 수영하시는
분 중에서 연세가 좀 있으신 자매님이 계십니다. 체력도 별로 좋지 않고,
실력도 늘지 않습니다. 이 분을 보고서 수영강사가 자극을 주려는지
이렇게 말씀하세요.
“조금 더 열심히 해서 더 높은 상급반에 올라가셔야지요.”
그러자 “나는 선수될 것 아냐. 여기서도 충분히 운동이 되는데 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요. 전문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굳이 속도를
내어서 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남들의 시선을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만족과 기쁨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을 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남에게
자신의 기쁨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박해의 위협에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자신의 마음 안에 받아들일 때,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남들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기준 아래에서 철저히 생활하셨습니다.
주님을 기억하면서 이제 세상의 시선에 연연해서 자신의 기쁨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내가 되지 맙시다. 대신 주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을 내 것을
만들어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각각 어떤 특별한 연령대 밖에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 존재한다. 주의 깊은 사람은 그것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커다란
횃불로 키워 내 생을 밝힌다(무라카미 하루키).
의정부교구 덕소성당. 몰래 신자석에 앉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기도
두 형제님께서 대화를 나눕니다.
“저는 ‘하기 싫어 죽겠어.’라는 생각이 들 때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 말씀에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요. ‘하느님, 부디 제가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내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대화가 아닐까요? 주어진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진암 100년 성당을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그 터입니다.
◈ [청주] 기쁨의 원천|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요한16,20-23)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기쁨의 원천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새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또다시 참아 내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할 여자가 어여쁜 아기를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을 겪듯이
우리 또한 아픔의 시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한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 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고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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