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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충혜왕(忠惠王)
휘(諱)는 정(禎)이요,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이다.
충숙왕(忠肅王)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충숙왕 2년 정월 을묘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호협하여 말타고 활쏘는 것을 좋아하였고, 재리(財利)에 밝으며 황음무도(荒淫無度)하여, 여러 소인들이 뜻을 얻고, 충직한 신하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바른말만 하면 반드시 베어 죽이므로 사람들이 처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과감하게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재위연수는 전후 6년이고, 수(壽)는 30이다.
경오 충숙왕 17년, 원 지순(至順) 원년
(충숙왕에 묶여 있으나 실제 충혜왕 즉위년의 기사입니다.)
○ 봄 2월에 전서원사(典瑞院使) 아로독두만태(阿魯禿頭曼台)와 객성대사(客省大史) 구주(九住)에게 명하여 세자 정(禎)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承相上柱國高麗國王)에 책봉하였고, 마침내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이 와서 국왕인(國王印)을 가져 갔다. (*당시 충혜왕이 몽고에 있었기 때문이다.)
○ 정미일에 원 나라에서 (충혜)왕에게 국인을 주었다.
○ 왕이 정무를 폐신 배전(裵佺), 주주(朱柱) 등에게 맡기고, 날마다 환관들과 더불어 씨름을 하여, 상하의 예절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는 배척을 당하고, 바른 말은 들어가지 못하였다.
기거주 이담이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의 행동은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동 일정을 좌우(左右)가 적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 이담이 아뢰기를, “사신의 직책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의 과실을 쓰는 자는 모두 서생(書生)이로구나." 하였다.
왕이 본래부터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는데, 이 때문에 더욱 미워하였다.
○ 왕이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맏딸에게 장가들었다. 이 사람이 덕령공주(德寧公主)이다.
○ 윤달(윤7월)에 상왕(이 원 나라에 가려고 해주에 있으니, 정승 정방길, 찬성사 강융, 전 평리 김원상(金元祥)이 아뢰기를,
“지금의 왕위는 전하(殿下)가 물려주신 것이니, 왕은 마땅히 성심으로 전하를 섬겨야 할 것인데, 도리어 원수와 같이 여기며 전하의 신하들은 모두 파직시켰습니다. 전하에게 의성창(義成倉)만을 붙여주고, 봉양할 물자를 제공하지 아니하니, 욕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또, 지금 왕이 용산 원자(龍山元子)와 우애하지 않은 마음이 있어 형세가 양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원자를 데리고 가소서." 하였다.
상왕이 드디어 덕비(德妃)에게 명하여 시골로 돌아가게 하여, 왕과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 왕이 원 나라의 우승상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국속(國俗)을 변경시키고자 한다'(나라를 없애고 몽고에 합친다) 하니, 상하에 놀라고 당황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더욱이 내가 우리나라에 와서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들으니, 어찌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
합하(閤下)께서는 간교한 말을 채납(採納)하시지 말고, 천자의 뜻을 넓혀서 토풍(土風)을 고치지 말게 하시어, 조상 전래의 업에서 편안하게 한다면, 어찌 오직 산과 못가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만이 성스러운 덕화를 사모하는 데 그치겠습니까. 우리 종묘의 신들도 지극한 인덕(仁德)을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하였다.
( 사료가 길고 앞의 충숙왕 항목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많이 줄였음.)
○ 상왕이 황주(黃州)에 이르니, 왕이 몽고식으로 길 위에 꿇어앉아서 맞아 뵈었다.
상왕이 이르기를, “너의 부모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찌 나를 보고 호례(胡禮)를 행하느냐. 또 의관이 매우 사치하다. 어찌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겠느냐. 속히 옷을 갈아 입으라." 하고, 훈계가 준엄하니, 왕이 울며 나갔다.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인길(李仁吉)은 간사한 것으로 왕에게 총애를 받으니 상왕이 이르기를, “너는 정말 개돼지이다." 하고, 장형을 가하여 섬에 귀양보내려 하였으나, 왕이 중지시켰다.
○ 병오일에 왕과 공주가 원 나라에서 도착하였다.
○ 8월 병진일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신미 원년(1331), 원 지순 2년
○ (4월) 사신을 원 나라에 보내어, 쌍성ㆍ여진(女眞)ㆍ요양(遼陽)ㆍ심양(瀋陽) 등의 땅에 흘러들어간 백성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도록 표문을 올려 청하였다.
○ (8월) 기내(畿內)의 사급전(賜給田)을 폐지하고, 그것으로 녹과(祿科)에 충당하였다.
○ 원 나라에서 환관 홍대불화(洪大不花)를 보내어 처녀를 구하니, 중앙과 지방이 소란하였다.
(기묘년(1339)에 충숙왕이 죽은 후 충혜왕과 심양왕 고가 벌인 왕위 쟁탈전은 충혜왕 기사 참조할 것)
경진 후(後) 원년(1340), 원 지원 6년
○ (정월) 원 나라에서 전왕을 형부에 가두고, 또한 김인연(金仁沇)ㆍ김륜(金倫)ㆍ한종유(韓宗愈)ㆍ홍빈(洪彬)ㆍ이몽가(李蒙哥)ㆍ이엄(李儼)ㆍ노영서(盧英瑞)ㆍ안천길(安千吉)ㆍ손수경(孫守卿)ㆍ윤원우(尹元佑)ㆍ남궁신(南宮信)을 옥에 가두고, 중서성(中書省)ㆍ추밀원(樞密院)ㆍ어사대(御史臺)ㆍ한림원(翰林院)ㆍ종정부(宗正府) 등 5부(府)의 관원을 시켜 여러 가지로 이들을 심문하였다.……
○ 3월에 채하중(蔡河中)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탈탈대부(脫脫大夫)가 황제에게 아뢰어 전왕을 석방하고, 왕위에 복위하게 하여 주었다." 하였다.
○ (4월) 계사일에 왕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 원 나라에서 기씨(奇氏)를 책봉하여 제2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본국 행주(幸州) 출신으로 총부산랑(摠部散郞) 자오(子敖)의 딸인데, 황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식(軾)ㆍ철(轍)ㆍ윤(輪)ㆍ원(轅)은 모두 황후의 오빠이다
○ 12월에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은퇴하기를 청하였다.
당시에 왕이 북궁(北宮)에서 걸어서 송강(松岡)까지 와서 새사냥을 하는데, 조년이 지름길을 통해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고생하시던 때를 잊으십니까. 이제 불량배들이 왕의 위엄을 빌어서 부녀자를 약탈하고 재화를 빼앗아, 백성들은 그 생활에 즐거움을 갖지 못하고 있사오니, 신이 생각하기에 화(禍)가 조석에 다가올 듯합니다. 이런 것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잡스러운 오락을 즐기십니까.
전하께서 노신의 말을 들으시어 아첨하는 것들을 물리치시고, 어진 사람을 통하여 힘쓰고 정성을 다하여 정치를 도모하시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닐지 않으신다면, 노신은 비록 죽을지라도 땅 속에서 눈을 감겠습니다." 하였다. ……
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 (3월) 남궁신(南宮信)에게 베[布]2만 필(匹)과 금ㆍ은ㆍ초(鈔) 등의 물품을 가지고 원 나라에 가서 팔게 하였다. …… 이때 왕은 재물 모으기를 일삼았다.
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 (3월) 나라의 마굿간을 짓는데, 인가 1백여 채를 헐어 넓게 담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좋은 말을 빼앗아 그곳에 채워 넣으며, 또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그에 소속시키고, 호군(護軍) 한범(韓範)에게 명하여 그 조(租)를 거두어들이는데, 운반하는 수레를 하루에 1백 대씩 사용하였다.
○ 정승 채하중(蔡河中) 등이 직세(職稅)를 없앨 것을 청하였다.
전에, 폐인(嬖人) 영부금(寗夫金)이 왕명을 받아 강릉도(江陵道)에 가서 인삼을 구하였는데 이때 인삼이 귀해서 많이 얻지 못하여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서 마음대로 직세를 징수하고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강릉도에 가서 보니, 벼슬에 있는 사람이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매우 많았으므로, 신이 전하를 위하여 그 직세(職稅)를 징수하여 주ㆍ군에 보관하여 두고 전하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벼슬이 있으면서 지방에 가서 사는 자가 강릉뿐만 아니요, 5도가 모두 그러하오니, 만일 신의 계책을 따르시면 국가에 유리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대언 민환(閔渙)이 그것을 권하였다.
그리하여 폐인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직세를 징수했는데, 6품 이상은 베 1백 50필, 7품 이하는 1백 필, 산직(散職)은 15필이었다.
사람들은 영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혹은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며, 혹은 배를 타고 달아나기도 하므로, 산택(山澤)에 불을 질러 그들을 수색하고, 화가 그들의 친족까지 미치니,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그러므로 하중(河中) 등이 그 폐단을 없앨 것을 청하여 왕도 그 말대로 하려하였으나, 환(渙)이 또다시 권하여 더욱 다급하게 직세를 징수하였다.
경상도에 한 산원동정(散員同正)이 있었는데, 몹시 가난하여 가산을 다 팔아도 그 액수를 충당할 수 없어서, 그 딸이 아버지가 욕을 당할 것을 마음아프게 여겨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것을 팔아 베[布]로 바꾸어 납부하고, 아버지와 딸이 모두 함께 목매어 죽었다.
또한 선세를 징수하니, 배를 갖지 않은 자까지도 해를 입었다.
왕이 비록 음란하고 방종하여 무도하면서도, 재리를 계산하는 데는 세밀한 것까지도 다 따졌다. 항상 재산 경영을 일삼아, 남의 토지와 인민을 빼앗아서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는데, 여러 소인배들이 거기에 붙어서 다투어 계책을 진언해서 간계를 실현하니,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소란했다.
○ 5도의 직세를 폐지하고,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이때에 동계존무사(東界存撫使) 최창의(崔昌義)가 돌아와서, 영부금(寗夫金)이 침탈해 들이는 것과 직세의 폐해를 왕에게 아뢰어 그것을 폐지하게 한 것이다.
○ (4월) 폐신 최원(崔遠)을 죽였다.
원(遠)이 일찍이 왕에게 아뢰기를, “진사정동(進士井洞)에 예쁘고 아름다운 처녀가 있습니다." 하여, 왕이 함께 그 집에 이르렀는데, 주인 노파가 본시 자기 집에는 여자가 없다 하므로, 왕은 노파가 그 처녀를 감추었다고 의심하고, 원이 속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린 것이다.
○ (5월) 왕이 신궁의 건축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노하여 감독관 김선장(金善莊) 등을 책하기를, “만일 10월 안으로 완성되지 않으면, 반드시 중형을 받을 것이다." 하고, 또한 상으로 줄 물품과 건축의 비용을 징수하게 하였다.
선장(善莊) 등은 밤낮으로 역사를 감독하였다. 또 방을 붙여 이르기를, “재상으로부터 권무(權務)에 이르기까지 목재를 운반하는데, 제 기일 안에 대지 못하는 자에게는 베[布]5백 필을 추징하고, 해도(海島)에 나누어 귀양보내겠다." 하니, 마침내 재목을 실어나르는 수레가 끊일 사이 없이 잇달았다.
신궁의 전우(殿宇)와 문호는 모두 놋쇠와 동으로 장식하였다. 곧 명을 내리어 백관에서 아래로는 서리까지 두 사람 앞에 오종포(五綜布) 한 필씩을 주고 놋쇠와 구리 2근씩을 징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고통으로 여겼다.
그리고 전국 각 도(道)의 동철(銅鐵)을 거두어서 솥ㆍ가마 등을 주조하여 신궁에 들여놓게 하니, 이 때문에 민간의 농기구를 모두 긁어들여 남는 것이 없었다.
○ (6월) 기인법(其人法)을 복구하였다.
○ 8월에 다시 직세(職稅)를 징수하였다.
○ 이운(李芸), 조익청(曹益淸), 기철(奇轍) 등이 원 나라에서 중서성에 글을 올려 왕이 탐음하고 부도함을 극언하고, 우리나라에 성(省)을 세워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 이운, 조익청, 기철 등의 매국 행위)
○ 원 나라에서 태감(太監) 박첨목아불화(朴帖木兒不花)를 보내어 처녀를 구하였다.
○ 9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 강윤충(康允忠)을 양광ㆍ전라ㆍ경상 3도 문민질고사(楊廣全羅慶尙三道問民疾苦使)로, 찬성사 윤환(尹桓)을 강릉교주도 도순문사(江陵交州道都巡問使)로, 우상시(右常侍) 전윤장(全允藏)을 서해평양도 순위사(西海平壤道巡慰使)로 삼았다.
이때 민환(閔渙)은 불량배를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해서 역마를 타고서 가혹하게 거두어들였는데, 혹은 산해세(山海稅)를 징수하며, 혹 무당과 장인에게서 공포(貢布)를 징수하기도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다. ……
○ 왕이 신궁의 건축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또 다시 노하여, 감독 박양연(朴良衍)ㆍ김선장(金善莊)ㆍ민환 등을 친히 곤장으로 때렸다. 이에 일반 백성들의 민가와 사원의 목재와 기와와 주춧돌과 섬돌까지 헐어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궁실(宮室)의 제도가 왕궁과 같지 않아, 곳간 1백 칸(間)에는 곡물과 비단이 꽉 차 있고, 행랑에는 채색옷 입은 여자를 세워 두었다. 두 여자가 뽑혀 들어오는데 눈물을 흘리니, 왕이 노하여 철퇴로 때려 죽였다. 또 디딜방아와 맷돌을 많이 두었는데, 이것은 모두 은천옹주가 지시한 바이다.
○ 비목(批目)을 내려, 내탕금을 가지고 원 나라에 들어가서 행상을 시키거나 점포를 차려서 장사를 시키며, 그들에게 장군 직을 주었다.
○ (11월) 임오일에 원 나라에서 내주(乃住) 등 8명을 보내어 왔는데, 이들은 거짓말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갑신일에) ……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을 입고 교외에 마중나가 조서를 정동성(征東省)에서 듣고 있는데, 타적ㆍ내주 등이 왕을 걷어차면서 포박하였다.
왕이 급히 고원사(高院使)를 부르니 (고)용보가 그를 꾸짖었다.
사신으로 온 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고서 왕의 시종들을 붙잡으니, 여러 불량배와 백관들은 모두 달아나 숨었다.
좌우사 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 만호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軍)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맞고, 지평 노준경(盧俊卿) 및 용사 2명이 피살되고, 칼이나 창에 맞은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복병을 두고 밖을 방어하여 그들을 도왔다
사신 원송수(元松壽)가 말하기를, “왕이 비록 흉학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왕이다. 용보(龍普)는 소인이니 논평할 것도 없지만, 신예는 유자(儒者)로서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는가." 하였다.
타적 등이 왕을 끼고 한 필의 말에 태워 달려갔다.
왕이 조금 머물러 주기를 청하였으나 타적 등은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다.
왕이 매우 괴로워하면서 술을 찾으니, 한 노파가 술을 바쳤다.
타적 등은 용보에게 명하여 국사를 정리하여 다스리게 하고,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 기철(奇轍), 이문(理問) 홍빈(洪彬)에게 정동성의 사무를 임시로 맡게 하였다. ……
○ 전민추쇄도감(田民推刷都監)을 설치하고 정당문학 정을보(鄭乙輔), 밀직제학 장항(張沆)을 제조(提調)에 임명하였다.
○ 고용보가 (왕을 붙잡아) 돌아갔다.
○ 왕의 일행이 숙주(肅州 평남 숙주(平南 肅州)에 이르러, 왕이 주수(州守) 안균(安鈞)에게 이불을 요구하였다. 안균이 바치지 않고 타적 등에게 고하기를, “왕이 탐욕스럽고 음란하여 죄를 얻고도 나의 이불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였다.
타적이 말하기를, “네가 이 주(州)를 다스리는데 그것은 누가 시킨 것이냐. 너의 왕이 추위를 못 견디어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다니, 그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에 비추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쇠자로 그를 때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 12월에 한양군(漢陽君) 한종유(韓宗愈), 판밀직사 손수경(孫守卿)을 원 나라에 보내어 토산물을 올리게 하였다.
○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이 …… 조정에 진정하자고 채하중에게 말하여, 재상과 국가의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였다.
예천군(醴泉君) 권한공(權漢功)이 말하기를, “ …… 이제 왕이 무도하여 천자가 주벌(誅罰)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정승(政丞) 강장(康莊)은, “황제의 뜻을 측량할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전 정승 이능간(李凌幹)은, “이제 천자가 왕의 무도함을 듣고서 죄를 준 것인데, 만일 글을 올려서 논하여 아뢴다면 이것은 천자의 명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暾)은 말하기를, “왕이 욕을 당하였을 때, 신하가 죽음으로써 그것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김륜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신하는 왕에 대해서, 자식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마땅히 그 은정과 의리를 다할 뿐이다. 그 아버지가 벌을 받는데, 그 자식된 자가 차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황제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모든 재상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
김륜은 또 말하기를, “이제 행성(行省)에 글을 올리어, 비록 허락을 얻지 못할지라도, 왕을 구원하다가 죄를 얻는다는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하였더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해서 드디어 상서할 것을 결의하고,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에게 그 글을 초하도록 하였다.
○ 계축일에 원 나라에서 왕을 함거(檻車)에 태워 게양현(揭陽縣 광동성(廣東省))에 귀양보냈다.
황제가 왕에게 이르기를, “너는 백성들의 왕이 되어 백성을 너무 심하게 약탈하였으니, 너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너를 게양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니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고 가라." 하였다.
게양현은 연경(燕京)에서 2만여 리나 되는 곳이다.
원자가 배전(裴佺)을 시켜 옷 한 벌을 바치게 하였을 뿐, 한 사람도 따라가는 이가 없었다.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충목왕 즉위년)
○ (봄 정월) 재상이 백관들과 국가 원로를 민천사에 모으고 도성(都省)에 올릴 글에 서명하려 하였는데, 원로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일이 마침내 성취되지 못하였다.
○ 왕이 역의 수레로 달리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게양현까지 이르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薨)하였다.
독살당하였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운명하였다고도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소민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는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보겠다." 고까지 하였다. 백성들에게 덕택이 미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사신이 말하기를,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에 사용하였고, 나쁜 불량배들을 가까이하면서 음란하고 방종한 행동을 멋대로 자행해서, 안으로는 부왕에게 꾸지람을 받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어, 죄수의 몸이 되어 길에서 죽었으니, 마땅하도다. 비록 늙은 신하 이조년(李兆年)의 간절한 간언이 있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 2월에, 원 나라에서 있던 원자 흔(昕)의 나이 겨우 8살이었다. 고용보가 안고 들어가 황제에게 뵈오니, 황제가 묻기를, “너는 아비를 배우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미를 배우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머니를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의 천성이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함을 칭찬하고, 드디어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 감찰사(監察司)에서 선왕 때의 불량배들의 직첩을 모두 몰수하였다.
○ (3월)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모시를 구하였다.
○ (4월) 을유일에 왕이 원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이르렀다.
다음날, 원 나라의 사신 상가(桑哥)가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 ……근자에 고려국왕 보탑실리(寶塔實理)는 방자하게 무도한 짓을 자행해서 나라 안에 해독을 끼쳐, 백성들은 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서울에 나와서 호소하였다. 이제 그를 정죄(定罪)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 그 아들 팔독마타아지(八禿麻朶兒只)에게 명하여 정동행성 좌승상 고려국왕(征東行省左丞相高麗國王)을 그대로 이어 받들게 하고, 나의 덕택을 널리 펴서 나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
보탑실리가 행한 학정은 모두 개혁하고, 산림으로 도피한 백성들은 급히 유사에게 영을 내려 하루 빨리 불러내어 위무하여 주고, 농사를 힘쓰며 학문을 일으키게 하라.
모든 정치를 바로잡는 일은 모두 법전에 따르게 하여 백성들에게 각자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 5월에 환자 고용보에게 공신호를 주었다.
○ 원 나라에서 보낸 이휴(李庥)ㆍ진근(秦瑾) 등이 와서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이라 하였다.
○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기를,
“ ……지금 좨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지명되어 왕의 스승이 되어 있으니, 다시 어진 학자 두 사람을 더 선택하여 숙몽(淑蒙)과 함께 《효경》ㆍ《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을 강의하여서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道)를 배우시도록 하고, 사대부가의 자제 가운데서 정직ㆍ근후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 10명을 선발해서 시학(侍學)으로 삼아 좌우에서 보좌ㆍ인도하게 하고, 사서(四書)의 공부가 익숙하여지면 육경(六經)을 차례대로 공부하여 교만ㆍ사치ㆍ음란ㆍ방탕과 노랫가락이나 여색이나 사냥질과 같은 쾌락을 이목에 접하지 않도록 하여 습관이 성격을 이루게 되면, 모르는 중에 덕(德)이 이루어질 것脄오니, 이것이 당면한 가장 급한 일입니다.
…… 오늘날 재상들이 연회가 아니면 접촉할 수 없으며, 특히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바라옵건대, 날마다 편전(便殿)에 앉으시어 항상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시고, 혹은 날짜를 정해서라도 나아가 뵈옵게 하여, 비록 아무 일이 없더라도 이 예는 폐하지 않게 하옵소서. ……
……마땅히 정방제도를 혁신하여 이것을 전리(典理)와 군부(軍簿)에 귀속시키고,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그 공과를 평정하며, 그 재능의 유무를 의논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는 도목(都目)을 받아서 정안(政案)을 조사하여 파면 또는 승진시켜서 이것을 항규로 한다면, 청알(請謁)하는 무리를 근절시키고, 요행으로 벼슬을 바라는 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응방(鷹坊)과 내승(內乘)은 백성에게 해독을 끼침이 더욱 심한 것이라, 전에 이미 영을 내려 폐지하게 하였으나, 뒤에 다시 폐지하는 것이 지연되어 …… 덕녕(德寧 江原 襄陽)ㆍ보흥(普興) 등의 고(庫)와 같이, 무릇 옛 제도에 없는 것은 일절 없애버리면, 아마도 애쓰시고 딱하게 여기는 황제의 뜻을 영구히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옛 제도와 같이 조사(朝士)로서 아직 입참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반드시 감무(監務)ㆍ현령(縣令)을 거쳐서 4품(四品)에 이르게 하고, 그 다음에 으레 수령이 되게 하는데, 감찰사(監察司)ㆍ안렴사(按廉使)가 반드시 성적을 고사하여 상벌을 주도록 하고, 만일 부득이하여 이른바 벼슬이 품계보다 높은 자, 나이 많은자, 청탁을 통하여 시골에서 기용되는 자가 있으면, 차라리 경관(京官)을 줄지언정 백성들과 가까이하는 임무는 주지 아니하기를 20년 동안 실시한다면, 흩어져 나간 백성이 돌아오지 않거나 공부(貢賦)가 부족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근래에 사치한 풍속이 극심하게 되었는데, 민생이 곤궁하고 나라의 경비가 부족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재상들이 비단 옷을 입거나 금이나 옥으로 그릇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또한 성장을 하고 말탄 자는 그 뒤를 옹위하지 못하게 하여, 각자가 검약하기를 힘쓰며 위로는 왕에게 풍간(諷諫)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감화시키면, 풍속이 순후하게 될 것입니다.……
…… 양궁(兩宮)에 알리어 (세 곳의) 식읍을 폐지하고 광흥창(廣興倉)에 환속시켜 그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옵소서.
경기(京畿)지방의 토전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구분전(口分田)을 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떼어 주어 녹과전(祿科田)으로 만든 지 거의 50년인데, 근자에는 권력 있는 집안에서 거의 모두 빼앗아 가졌기 때문에, 중간에 여러 번 혁파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마침내 실시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 무엇을 꺼려서 실시하지 못하십니까.
주 ㆍ군에서 여러 해 동안 포흠(逋欠)된 공부(貢賦)는 관계관들이 모든 계책을 다하여 강력히 징수하여도 10분의 1도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만 원망을 살 뿐이오니, 바라건대 영을 내리시어 지정(至正) 3년 이전에 포흠한 공부(貢賦)는 일체 면제하도록 하옵소서.…… " 하였다.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곡(李穀)이 원 나라에서 재상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 ……오늘날의 우리나라 풍속은 재물이 있는 것을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세력이 있으면 지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 때문에 조관(朝官)이나 유신(儒臣)의 복장까지 하고, 바른 말과 정당한 언론도 시골 사람의 미친 소리로 생각하게 되었으니,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곡(穀)이 친척들과 헤어져 고국을 떠나 오래도록 황제의 서울에 나그네로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근자에 들으니, 여러 분들이 정사를 보좌하고, 교화를 고쳐나가는 것이 전일보다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명목상으로는 비록 늙은이를 높인다 하나 실제로는 젊은이가 권력을 잡고 있으며, 명목상으로는 비록 청렴을 숭상한다 하나 실제로는 탐관이 실권을 맡고 있으며, 불량배를 내쫓았다 하나 세력이 큰 자가 그 악을 고치지 않고 있으며, 옛 신하를 갈았으나 새 사람들이 도리어 구신들에게 붙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알아보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사람 쓰는 것을 매우 쉽게 여기는 것이니, 이것은 국왕께서 위임하신 뜻이 아닐진대, 원 나라 조정에서 이를 들으면 옳지 않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감히 어리석은 말씀을 올리오니 반드시 제공들은 살펴주십시오." 하였다.
○ 보흥고(寶興庫)ㆍ덕녕고(德寧庫)ㆍ내승(內乘)ㆍ응방(鷹坊)을 폐지하고 그곳에서 차지했던 토지와 노비를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피물(皮物)을 요구하였다.
○ 6월에, 신궁(新宮)에 저장한, 세 식읍에서 들여온 포 4천여 필을 내어 광흥창(廣興倉)에 귀속시켰다.
○ 서연관(書筵官)을 두어 4번(番)으로 나누어 격일마다 왕을 모시고 공부하게 하였다. ……
○ 경신일에 충혜왕을 영릉(永陵)에 장사지냈다.
○ 왕이 신궁을 헐어버리고 숭문관(崇文館)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 (12월) 심왕(瀋王) 호(暠)가 원 나라에서 왔다.
○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그 일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귀속시켰다.
○ 경기(京畿) 지방의 녹과전(祿科田) 중에서 권귀(權貴)한 자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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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의 이름은 왕정(王禎), 몽고 이름은 부다시리[寶塔失里]이며 충숙왕(忠肅王)의 맏아들로 그 모친은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충숙왕(忠肅王) 2년 을묘년 정월(正月) 정묘일에 태어났으며 15년 2월에 세자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했다.
16년 10월에 충숙왕이 전위를 요청하자 17년 2월 초하루 임오일에 황제가 전서원사(典瑞院使) 아로위(阿魯委)·두만대(頭曼台) 및 객성태사(客省太史) 구주(九住)를 시켜 세자를 왕으로 책봉했는데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돈독한 충성과 절조는 백성들을 맡아 다스리기에 충분하며, 어질고 겸손한 가풍은 작위와 봉토를 계승함이 마땅하니 진실로 적합한 사람이라야 능히 나라를 이어 나갈 수 있는 법이다.
아아! 그대 고려 세자 왕정은 일찍이 우리 황실의 인척으로 명성을 얻었다. 큰 왕업을 이어오면서 우리의 큰 가르침을 성심껏 받들어 왔으며 오랫동안 대대로 아무런 잘못 없이 신하로서의 절의를 지켜왔다.
마침 그대의 부친이 왕위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고자 하므로 이에 그대로 하여금 왕통을 계승하게 하노라.
아아! 우리 황실의 번방으로서 선대가 바친 충성을 잊지 말 것이며, 산과 강이 마르고 닮도록 우리나라의 경사를 공고히 만들도록 하라. 또한 아름다운 덕을 부지런히 닦아 큰 복록을 누리도록 하라.
이에 특별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정동행중서성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丞相)·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高麗國王)을 제수하노라.”
이어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을 보내 국왕인(國王印)을 회수했다.
충혜왕 2년(1332) 임신년 2월
갑자일. 원나라에서 유수(留守) 보수(寶守)와 전 이문낭중(理問郞中) 장백상(蔣伯祥) 등을 보내오자 왕이 도성 교외까지 나가 맞이했다.
장백상이, 이미 정월 3일에 상왕에게 복위를 명령했다는 황제의 지시를 전달하자 왕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넋을 잃었다.
이어 장백상이 국새(國璽)를 회수하고 모든 창고를 봉인했으며 왕은 원나라로 떠났다.
애초 왕이 세자 신분으로 입조했을 때 승상 엘테무르[燕帖木兒]가 만나보고 크게 좋아하며 마치 제 아들처럼 환대했으며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하자 황제에게 건의해 그를 왕자리에 앉히게 했다.
그러나 이때 와서 태보(太保) 바얀[伯顔]이 엘테무르가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꺼린 나머지 왕에게도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다. 충숙왕이 복위하게 되었을 때 엘테무르는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바얀이 더욱 왕에게 박절하게 대했다.
왕이 엘테무르[燕帖木兒]의 자제들 및 회골(回骨)족 젊은이들과 술을 들이키고 희학질이나 하고 지내다가 어떤 회골여자와 사랑에 빠져 간혹 숙위를 빠트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바얀이 왕을 더욱 미워하여 그를 두고 발피(撥皮 : 망나니)라고 손가락질했으며 황제에게는,
“왕정(王禎)은 평소 행실이 나쁜지라 숙위에 누를 끼칠까 우려되니 그 아비가 있는 곳으로 보내 올바르게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그 결과 충숙왕 후5년에 황제는 왕을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후8년 3월 계미일에 충숙왕이 죽었는데 충숙왕은 늘 왕을 발피라고 부르면서 박절하게 대했으나 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라고 유언했다.
행성(行省)의 좌우사(左右司)가 그 뜻을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전달하고 왕도 또한 전 평리(評理) 이규(李揆) 등을 보내어 왕위 계승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태사(太師)였던 바얀이 그 건의를 깔아뭉개고 황제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며,
“왕도(王燾 : 충숙왕)는 본래 좋은 사람이 아닌데다 병까지 들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저 망나니는 비록 맏아들이긴 하나 꼭 왕으로 복위시킬 필요는 없으며 왕이 될 만한 이는 왕호(王暠) 뿐이다.”
라고 대놓고 말했다. 이규(李揆) 등이 백방으로 청을 넣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충혜왕 후4년(1343) 계미년
11월 갑신일. 원나라에서 교사(郊社)를 지낼 것과 대사면령의 반포를 구실로 대경(大卿) 도치[朶赤]와 낭중(郞中) 베시케[別失哥] 등 여섯 명을 보내왔다.
왕이 병을 핑계로 출영하지 않으려 하자 고용보가,
“황제께서 늘 국왕이 불경(不敬)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출영하지 않으면 더욱 의심이 커질 것입니다.”
고 충고하므로 어쩔 수 없이 왕이 조복차림으로 백관들을 거느리고 도성 바깥에서 영접했다.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를 듣는 도중 도치[朶赤]와 나이주[乃住] 등이 왕을 발로 차고 포박하자 왕이 급히 원사 고용보를 불렀으나 고용보는 도리어 왕에게 욕을 퍼부었다.
원나라 사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 들고 왕을 시종하는 군소배들을 체포했으며, 백관들은 다 도망쳐 숨었는데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 만호(萬戶)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君)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찔리고, 지평(持平) 노준경(盧俊卿) 및 용사(勇士) 두 명은 살해되었으며 그 외에도 칼과 창을 맞아 다친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군사를 매복시켜 밖을 방어하며 돕는 사이에 도치[朶赤] 등은 재빨리 말 하나에 왕을 싣고 양쪽에서 붙잡은 채 달렸다.
왕이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간청했으나 도치 등은 칼을 들고 협박했으며, 왕이 괴로운 나머지 술을 찾자 한 노파가 술을 바쳤다.
○ 만호(萬戶) 권겸(權謙)·나영걸(羅英傑)이 압령관(押領官)으로 임명되고 고용보는 박테무르부카 및 제군만호(諸軍萬戶) 이중민(李中敏)·김주경(金珠慶)·김상기(金上琦) 등과 함께 무기를 소지하고 권세가들의 집을 수색했다.
도치 등은 고용보에게 국사(國事)를 바로잡도록 지시했으며,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 기철(奇轍)과 이문(理問) 홍빈(洪彬)을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로 임명했다.
고용보가 사람을 보내 왕을 따르며 모시던 군소배인 박양연(朴良衍)·임신(林信)·최안의(崔安義)·김선장(金善莊)·승신(承信) 등 십여 명을 수감했으나, 송명리(宋明理)·조성주(趙成柱)·윤원우(尹元佑)·한휘(韓暉)·강찬(康贊) 등은 본래 고용보와 잘 지냈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고용보는 기철(奇轍)·홍빈(洪彬)·채하중(蔡河中) 등과 함께 내탕(內帑)을 봉인했다.
12월 계축일. 황제가 함거(檻車)로 왕을 게양현(揭陽縣 : 지금 광뚱성[廣東省] 조주(潮州))에 유배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렸다.
“너 왕정(王禎)은 백성의 윗사람이면서 백성을 심하게 착취했으니 네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좋아하지 않기에 너를 게양(揭陽)으로 유배보내니 나를 원망치 말고 가도록 하라.”
게양(揭陽)은 연경(燕京)에서 2만여 리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
왕의 맏아들이 배전(裴佺)을 시켜 옷 한 벌을 올리게 했는데, 배전이 옷을 전달하자마자 가버리는 바람에 왕이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게 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수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어 왕이 자기 손으로 옷 보따리를 가지고 갔다.
충혜왕 후5년(1344) 갑신년
봄 정월
○ 왕이 원나라에 머물렀다.
무진일. 재상들이 백관과 국가원로들을 모아 원나라 중서성에 올릴 국서(國書)에 함께 서명하려 했으나 원로들의 참여가 저조해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유배지로 데려가는 함거(檻車)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게양(揭陽)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는 참요가 유행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이 노래의 앞구절을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으로 풀이해 “악양에서 죽을 재난을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왕은 전후 합해 6년간 재위했고 향년은 30세였다.
6월 계유일. 왕의 영구(靈柩)가 도착했다.
8월 경신일. 왕을 영릉(永陵)에 장사지냈다.
○ 공민왕(恭愍王) 6년 윤 9월 계해일에 왕에게 헌효대왕(獻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16년 정월 정해일에는 원나라에서 충혜(忠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 왕은 성품(性品)이 호협하고 주색(酒色)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백 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죽여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사신의 논평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