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 13,31-35)
Jerusalem, Jerusalem, you who kill the prophets and stone those sent to you, how many times I yearned to gather your children together as a hen gathers her brood under her wings, but you were unwilling!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기꺼이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다(제1독서).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도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죽여 왔다. 예수님께서는 참예언자로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죽임을 당하시기로 다짐하신다. 이로써 참평화를 실현하시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철없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이야기하였습니다. “얘야, 너는 왜 이렇게 나쁜 짓만 골라서 하니? 네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 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으려무나.” 그는 재미있을 것으로 여기고 일부러 나쁜 짓을 저지르며 기둥에 못을 박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기력조차 없게 된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네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기둥에 못을 박았지만, 사실 그것은 내 가슴에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단다. 이제 네가 지난날을 반성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한다면 어미로서 여한이 없겠구나. 이제부터는 착한 일을 할 때마다 그 못을 하나씩 빼내 주려무나.” 그제야 철이 든 자식은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을 뉘우치고 착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기둥에 박혀 있던 못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둥에 남아 있는 못 자국,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이곳은 주님의 가슴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그곳에 박힌 못을 빼내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마저도 죽이는 죄를 저지르지만, 바로 그곳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십니다. 곧 무엇보다도 큰 죄까지 용서하시는 그 사랑으로 예루살렘 곳곳에 박힌 죄의 못을 빼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못 자국의 상처까지도 모두 아물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예루살렘에 참된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하시며 상처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교도소 수감자들과 함께 미사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미사 중 강론 시간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네요.
“여러분! 저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들킨 죄인이고, 저는 안 들킨 죄인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안 들킨 죄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단순히 들키지 않은 것을 가지고 죄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예전에 여성을 공에 비유하는 유머를 본 적이 있습니다. 10대에는 축구공처럼 많은 남자들이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20대에는 농구공처럼 따라다니는 남자가 축구공에 비해 조금 줄어든다고 합니다. 30~40대에는 골프공처럼 이제 따라 다니는 남자가 한 명 정도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50대에는 피구공처럼 서로 피하려 하며, 60대 이상은 탁구공처럼 서로 남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유머였지요.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항상 축구공, 농구공이 될 수 없지요. 나이가 들면서 내 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많아져도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 판단하고 단죄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을 간직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가치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세속적인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와 몸의 가치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나는 아닐까요? 아니면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 인해 높은 가치 평가를 받는 나인가요?
예수님께는 많은 반대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오늘 복음에서 보이듯이 헤로데를 비롯한 헤로데 당원들도 예수님의 반대자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가치가 더욱 더 높아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도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요? 예수님을 반대함으로 인해 그들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습은 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깎아 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나의 가치는 주님을 통해서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할 것, 초라하고 불쌍한 인간도 사랑할 것,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지 말 것.(생텍쥐페리)
복음과 현실
-최대환신부-
복음서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진리가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어떤 관점을 갖고 복음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은 복음이 우리를 이끄는 길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험되는 것이어야지 이것이 우리가 가진 주관적인 선호나 목적에 따라 말씀을 미리 재단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이 나의 삶의 척도가 되어야지, 나의 개인적 종교관이나 주관적 경험이 복음의 신빙성에 대한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동시대인이 겪는 시련들에 얼마나 깊은 연민을 가지고 다가가셨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이 신앙을 마음의 평안이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처방전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복음은 예수님께서 한 시대 안에 참으로 육화되어 들어오셨음을 증언합니다.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관하여 예수님이 어떤 입장이셨을지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선입견이나 이익을 위한 논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덮어씌우는 잘못을 범합니다. 하지만 복음과 현실의 연결을 미리 차단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의 다양한 관점들에 나를 개방하고 주관적 틀에서 해방되려는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조금씩 영원한 구원의 복음이 우리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비추어 주는 빛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기철신부-
작년 12월 초에 아버지께서 급작스럽게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께서, 바로 연이어 여동생과 매제도 함께 병이 났습니다. 더욱이 둘째 이모님도 암이 재발되어 같은 병원에 계신 터라 친척들이 다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거의 두 달을 화성시에 있는 수도회 분원, 서울에 있는 아버지 병원, 다른 병원에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동생네를 돌봐야 했습니다. 3주 정도가 지나자 하느님이 무척 원망스러웠습니다. ‘제가 뭐 그렇게 당신께 잘못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죽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정말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분은 아무 대답도 없으셨습니다.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보던 주위의 몇몇 분이 조심스럽게 수도자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말씀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밤, 수도회에 들어가기 위해 차를 교량 밑에 세워두고 눈길을 걸어가는데 저에게 건네진 그 말들이 점점 깊게 다가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한참 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걸어온 발자국은 어느새 사라지고 걸어갈 길만 눈앞에 펼쳐 있었습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수도생활을 했다고 자부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금세 무너지고 마니… 이제 다시 걸어가야겠다.’ 저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양한 죽음에 직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그러셨죠. 하지만 그분은 꿋꿋하게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걸으십니다. 좋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행복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길은 오직 앞으로 걸어가야 할 한 길 뿐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아 모시고 예루살렘에 모여 지내면서도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 세상 모든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서 그리고 아직도 그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그분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걸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상관없는 나의 길과 흔들림없는 나의 길,
-김찬선신부-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하고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My Way!”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도 내 길, 즉 My Way를 계속 가겠다고 하십니다. 남을 상관치 않고 자기만을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사실 주님의 나의 길과 똥고집을 부리는 사람의 나의 길은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의 “나의 길”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며 진리에 입각한 길이며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나의 길”인데 비해 똥고집을 부리는 사람의 “나의 길”은 하느님과 상관없고, 진리와도 상관없으며, 모두를 죽게 할 뿐인 “나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똥고집을 부리는 사람의 “나의 길”은 아무 상관없이 가는 길이라면 주님께서 가시는 “나의 길”은 흔들림 없이 가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께로 가는 진리와 생명의 길 말입니다.
어제 서울에 사시는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전 갑곶성지에 있을 때 알게 된 자매님이었지요. 그런데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그럼요. 저 잘 살고 있지요.”
“신부님, 정말 아무 일 없으세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아무 일 없어요.”
“신부님, 사실 우리 성당에서 신부님에 관한 소문이 들려서요.”
“무슨 소문인데요?”
“신부님께서 옷을 벗었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옷이야 매일 벗고 입고를 반복하지만, 이 자매님께서 말씀하시는 옷은 그 옷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즉, 사제직을 그만 두었다는 소문이 들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별의별 소문도 다 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이 자매님께서도 ‘설마’라는 생각을 하셨으면서도, ‘혹시’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도 있으니까요.
저에 대한 관심이 있으니까 이런 소문도 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그리 유쾌한 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했던 그 많은 소문을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이러한 소문들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불안했던 헤로데가 죽이려 했고, 후에는 유다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사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협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늘 의연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보를 멈추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불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 이러한 삶이야말로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불의에 굴복하여 절망하고 주님 뜻과 반대의 삶을 살면서 불안해하고 힘들게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를 향한 불의가 자행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괴 소문들,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 그러나 이러한 불의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스스로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적극적이고 의연한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오늘 독서를 통해 말씀하셨던 이 믿음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잔혹한 사람일수록 약한 법이다. 그러므로 너그러움은 강한 자에게서만 볼 수 있다.(리오 로스텐)
어머니 같은 주님
- 신한열 수사-
여기 나오는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다. 자기가 다스리던 영지의 안정을 해친다고 생각해 요한을 제거한 그의 눈에는 군중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도 불온인사로 보였을 법하다.
정치적 망명 비슷한 권유를 받은 예수님의 응답에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다. 구마와 치유로 사람을 살리고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시기에 거리낄 것이 없는 분이셨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생명을 충만하고 넘치도록 받아 누리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더 큰 일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눈앞에 보이는 고통당하는 필부필부, 장삼이사를 모른 척하실 수 없었다. 애간장을 태우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종교 엘리트?·?기득권자들은 그분을 쉽게 맞이하지 않았다. 예수님으로서는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법도 했을 것이다. 더 배우고 더 많이 알고 하느님께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다니?!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을 한탄하시는 장면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이미지(은유)?가 보인다.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는 암탉’?에다 자신을 빗대신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것이다. 자식을 보듬고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어머니 같은 주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구원을 이룩하시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발현과 승천이 일어났고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름이 뜻하는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찢기고 고통 받는 도시로 남아 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의 도시를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을까?? 회교도?·?유다인?·?그리스도인을 모두 당신의 품에 모으시려 하지 않을까?? 어머니다운 당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 흘리시지 않을까??
주님의 'My Way"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것이 오늘은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바리사이 몇이 예수님을 찾아와 헤로데를 피하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피하라고 얘기해 준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요즘 와서 그러지 않으려 노력을 하지만 저는 가끔 비겁하고 가증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사람을 빌어서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얘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 핑계를 대어 내가 하고 싶은 얘기, 그러나 하기 곤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도 저처럼 비겁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말씀하시고 또 사람들이 환호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그러실까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반대하나 대 놓고 얘기하기는 부담스러우니 헤로데 핑계를 대는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위선자, 헤로데는 여우입니다. 그런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잔꾀를 부리는 면에서 위선자와 여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니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우, 헤로데에게 가서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실 바리사이에게도 대 놓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의를 가장하고 위선하는 바리사이에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실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잔꾀를 부리어 나를 위협해도 나는 끝까지 나의 길을 가겠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겠다고 하십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공안(경찰)이 우리 형제들에게 와서는 위하는 척 하며 우리 형제들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음을 슬쩍 흘린답니다. 다 감시하고 있으니 알아서 그만 두라는 뜻이고 그런 얘기를 듣고 나면 알아서 그만 둬야 한답니다.
예수님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이렇게 활개를 쳐도 무사할지 모르지만 중앙 무대인 예루살렘에서도 이러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를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바로 중앙에서 예언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수 없이 예언자를 죽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는 예루살렘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포기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가며는 죽는 길, 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당신의 “My Way"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갈 수 없는 길, 그래서 당신만이 가야 할 길이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 없는 길,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따른 당신의 “My Way"라고 못 박으십니다.
두려움을 넘어라
-전삼용신부-
인도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 한 사람이 쥐 한 마리를 관찰합니다. 그런데 이 쥐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벌벌 뜁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고양이입니다. 한참동안 쥐를 관찰하던 이 마술사에게 이 쥐가 불쌍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술을 부려서 이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신한 고양이는 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개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더 불쌍하게 느낀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이 고양이는 개가 되자마자 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합니다.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또 한 번 마술사는 마술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자마자 호랑이는 또 무서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사냥꾼의 엽총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마술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언합니다. “내가 아무리 해보았자 이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그래서 다시 쥐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두려움을 없앤다고 두려움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두려워하며 살아야겠습니까?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겁을 주어 당신의 예언 사명을 다 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이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헤로데의 아들이고 바로 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인물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좋은 꾀를 생각해 냈으리라 믿었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의 예상을 빗나갑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두렵게 하여 도망치게 만들려고 했던 바리사이들의 계략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예수님의 담대함에 창피를 당합니다.
이사야서 12장 2절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니,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십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얼마나 작은 일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것에도 두려움 없는 당당함을 보여주며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당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일어날 일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걱정해봐야 소용없고 담대히 수용할 자세만 있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요즘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내적 평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남과 부딪히려하지 않고, 적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마음 상하는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미리 빠져버립니다.
마치 베드로가 타볼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그 곳에 머무르려고 했던 모습과 같습니다. 기도의 고요 안에 머무르고 싶고 그 내적 고요를 깨뜨리기를 원치 않는 것을 넘어서서 그 고요가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로부터 깨질 수 있는 평화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평화도 아닌 것을 깨뜨리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으니 세상 앞에서 당당해집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이 나의 평화를 깬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에 참 믿음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더 증가시켜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이에게 참으로 비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딱한 느낌, "짠한"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가 있겠느냐?"
예언자로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한 예수님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길이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얼마나 팍팍했겠는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도 인간이셨습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가족, 친지,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적인 정을 주고받으며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살아오셨지요.
예수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정겨운 가족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평범하지만 아기자기한 삶을 살아가고픈 유혹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목숨까지 내어바칠 정도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으며 충만한 기쁨 속에 한 평생을 살아가고픈 유혹이 예수님이라고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매일 자신을 통제하십니다. 집요하게 다가오는 안주본능과 매일 결별하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시하신 그 길만을 따라가십니다.
오늘 하루만 "빠짝"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어제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따라 매일 쉼 없이 떠나는 삶, 그 삶이 바로 예수님의 한 평생이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비록 죽어도 가기 싫은 길, 고통과 번민의 길, 외롭고 고달픈 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가라하시니 기꺼이 길을 나서는 오늘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표현처럼 "굽이 돌아가는 길", "고통스런 돌밭 길"이 비록 멀고 쓰라린 길이지만 의미 있는 길이며, 아름다운 길이며, 결국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임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
올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아름답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외아들까지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의 사랑 (로마 8,31-39) -경규봉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우리를 죄와 악에서 지켜주시고 건져주신다. 그 확실한 표가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로 하여금 온갖 수난과 십자가상의 처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다.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실 정도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셨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표시는 없다. 그러므로 누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다고 맞서서 시비를 걸거나 고발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십자가상의 처참한 죽으심이란 더없이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어떤 불행,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이나 헐벗음, 위험이나 칼도 우리를 그 크신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어떤 환난이나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하늘과 땅에 있는 피조물을 구별할 것 없이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당신 외아들의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 43,4)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 사랑은 끝없이 영원하다.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짓고, 죄와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매고 있을지라도, 당신께 손가락질하며 원망하거나 저주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언제나 사람 편에 서 계시며 사람의 손을 들어주신다. 사람은 하느님을 배반하지만 하느님은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며,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큰 힘과 위로가 된다. 그럴진대 온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믿어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면 어떤 역경이나 환난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 온 우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편이시고 내 후원자이시니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설령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을지라도 두렵지 않다.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믿어주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외아들까지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넘치는 아버지이시다. 오늘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힘과 용기를 얻고, 하느님께 나아가자.
탄원서
-노우진신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몇 일전에는 이곳을 나갔던 아이가 자동차 털이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혔으며, 지금은 구치소로 송치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아이는 이곳에 있을 때에도 같은 문제로
다른 수사님들과 신부님들을 많이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나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해왔다.
아이에게 가벼운 처벌을 위해 탄원서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와 우리 수사님은
아이의 석방과 선처를 부탁하는 탄원서를 썼다.
이전에도 몇 번 써본 경험있는 탄원서를 쓰면서
이번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과연 이것이 아이를 위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럴 때에는 인간적인 한계와 서글픔이 함께 밀려온다.
아직 그 아이의 재판 결과를 듣지 못했으나
아이를 위해 좋은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도해본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해보며
예수님께서 당시의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탄식하셨던
그 마음이 너무도 가깝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루살렘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시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에게 탄식과 서글픔을 주었던 그 아이를 위해
난 과연 무엇을 해야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청 앞의 예언자들
- 김인옥 수녀-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폭력진압과 만나게 되어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가 시작된 지난 유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참여를 마다하지 않던 친구 수녀님은 연일 시국미사에 참석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나가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제의에 선뜻 응하기가 두려웠다. 광주민주화항쟁이 있던 해에 학생들의 시위를 저지하는 최루탄 때문에 퇴근길에 도망을 다녔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시국미사가 시작되면서 촛불을 들고 무리지어 가는 수녀님들의 모습은 사회정의에 힘을 모으지 못하는 나에게 부끄러움과 부담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저녁에 집회에 참석하고 나면 그 다음날 평소처럼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건강염려증도 나의 궁색한 변명에 한몫을 했다. 그러다가 토요일이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냈다. 다음날은 주일이니 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날은 오후에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시국미사를 하고 시청 앞으로 모이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교회 안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을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다. 그날은 4개 종단이 모이는 날이었다. 수녀님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앉으니 카메라를 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 차례차례 무대 위로 올라와서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막상 자리에 앉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앞에서 이끄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마음이 무덤덤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아주 편안했다. 꼭 있어야 할 곳에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집회를 마치고 행렬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나온 꼬마들도 많았다. 이렇게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많은 사람의 목숨이 바쳐져 정의를 향한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오는구나 싶었다. 새삼 목숨을 바쳐 정의를 수호한 이들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에서 함께 걷고 계시며 말씀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새벽을 열며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나 더럽고 또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강아지들을 많이 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은 우연히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표가 있는 것을 보니 ‘주인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서 강아지를 붙들고 이름표에 적힌 글들을 보았습니다. 강아지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합니다.’
사람들은 놀랐지요. 이렇게 길을 잃고 굶주림에 죽어가는 이 강아지가 바로 이 나라 왕의 강아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경찰에 보고가 되었고, 잘 보호되어 왕에게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왕의 부처가 휴가를 왔다가 강아지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네요. 강아지는 결국 왕궁으로 돌아갔고, 무서운 숲 속에서의 경험을 그치고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강아지를 주인과 만나게 했었나요?
강아지가 훌륭하게 숲 속에서 여러 날을 생존했기 때문일까요? 강아지가 왕에게 어떤 좋은 일을 했었기 때문일까요? 강아지가 왕의 경호를 잘 하기 때문일까요?
아니지요. 강아지가 주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름표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름표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인 왕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표 덕분에 주인과 강아지가 서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디를 헤매든지 이름표만 확실하게 간직한다면 우리들의 주인이신 주님께 인도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소유라는 이름표를 떼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신 이 세상의 이름표를 달려고 하지요. 나를 드러내는 이름표, 내가 이 세상의 것에 속해 있다는 이름표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두 개의 이름표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서 달 것인가를 묻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름표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경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께 속해 있다는 이름표를 선택해서 달라고 권하십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계속해서 찾아서 달고 있는 이름표는 어떤 이름표일까요?
이 세상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이름표만 확실하다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지켜 주시니까요…….
주님의 자녀라는 이름표를 갖게 된 것을 자랑합시다.
빠다킹 신부
下覽閑江
-강영구 신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그대에게
저는 몇 년 전 낙동강변에 있는 ‘가르멜의 모후 수녀원’에서 살았습니다. 사제관은 낙동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너무나 고요해서 전율할 지경이었습니다. 그토록 큰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3급수도 안 되는 혼탁하고 더러운 강물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 갖가지 부유물과 죽은 것들을 안고 강물은 소리 없이 바다로 향해 흐릅니다. 그래도 그 강물은 살아있을 뿐 아니라 낙동강변에 살고 있는 2천만 시민들의 생명의 물입니다. 저는 사제관의 옥호(屋號)를 하람한강(下覽閑江), ‘도도하게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는 집’이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저 강을 닮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여우같은 헤로데가 큰 강 같은 예수님의 길을 어찌 막을 수 있습니까? 권모술수와 온갖 책략,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헤로데가 시끄럽게 흐르는 작은 시궁창 물이라면, 예수님은 바다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는 큰 강물입니다. 예수님은 큰 품 안에 썩은 것, 병든 것, 죽은 것들을 품고 바다로 흘러가 그것들을 정화하고 다시 살려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행복한 날 되십시오.(一明)
증거자의 용기
-최영균 신부 -
하느님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죽을 자리로 자청해서 들어간다는 것은 엄청난 신앙심이 요구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신앙의 결의를 보여준 사례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정약종의 순교 장면이 오늘 읽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약종은 자진해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포졸들에게 밝히고 포도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국청에 가서도 정약종은 하나도 기죽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해 죽음은 당연한 일이오. 공심판 때 우리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나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여러분은 웃지 마시오.” 형장에 도착해서 형집행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그는 위축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 형리들이 그의 말을 중단시키며 머리를 대라고 하자 정약종은 거꾸로 하늘을 보며 말했습니다. “땅을 내려다 보며 죽는 것보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죽는 것이 더 낫지.” 생사를 초월한 이 신념에 찬 확신 앞에서 망나니는 두려워 어쩔줄 몰랐다고 합니다. 신앙 생활이 어렵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우리 삶의 찬란한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 아니라 비루하기만 한 우리네 삶의 질곡입니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고병수 신부-
◆지난 2월, 대구대교구에서 손님 신부가 와서 구역반장을 위한 강의를 해주었다. ‘생명의 신비 및 이에 따른 교회의 가르침’이 주 내용이었다. 주님께서 창조한 생명의 고귀함에 대해 알아듣기 쉽고 재밌게 잘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반생명 과학기술과 문화의 실상을 소개해 줄 때는 말이 떨릴 정도의 강한 어조로 반박해 나갔다. 참석한 이들은 그 강의를 듣고 반생명적 문화와 신흥종교가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 과연 어떤 자세로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지켜 나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우연찮게 몇몇 교구 신부들과 생명경시 풍조가 짙어가는 세태에 관해 걱정과 우려를 나눈 적이 있다. 이에 덧붙여 너무 안일하고 무신경하게 대처해 온 데 대한 반성도 곁들였다. 하지만 ‘이제부터 사목일선에서 제대로 대처해 나가자’는 데 이르자 너나 할 것 없이 나서는 이가 없었다. 솔직히 나부터 자신이 없었다. 신자들에게 지나친 죄의식이나 영적 부담감을 지워주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현실을 너무 모르고 외면한다는 질타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그 옛날 성경 속 예언자들이 못내 그립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과 방식을 우선하는, 탐욕에 젖어 제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일말의 타협도 없이 그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었고 목숨까지 잃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많은 지도자보다는 한 명의 참된 예언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여 거칠 것 없이 무한질주하는 반생명적 작태에 대해, 또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조직과 체계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만 몰두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질타를 서슴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드리워져 있는 세상적 장막을 벗고 참된 주님의 성전으로 거듭날 것이요, 일그러진 세상에 희망과 기쁨을 주는 영혼의 터전이 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한다.”
-양승국신부-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고>
오늘 선포되는 예수님 말씀의 어조나 톤은 꽤나 슬픕니다. 비장합니다. 언제나 외롭고, 쓸쓸하고, 때로 가혹한 예언자로서의 고된 삶이 엿보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슬픈 운명을 지닌 예언자, 결국 죽어야 완성되는,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사형대 위로 올라서야 하는 고독한 예언자 예수님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오늘 선포된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약 3개월 전에 하신 말씀으로 추정됩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계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날짜뿐만 아니라, 처형장소, 처형방법까지 다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이었겠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시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피하기를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이었습니다. 시간이 아직 넉넉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 혹독한 십자가형을 피해 배를 타고 멀리 해외로 피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끔찍한 사형수로서의 처형절차를 피하기 위해 유대인들과의 정면 대결구도를 접고 조용히 산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정면 돌파를 단행하십니다.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수님은 처절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 유대 전통의 본산이자 갖은 악과 음모, 위선이 판을 치는 최후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늘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지만 예수님의 그런 깊은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함께 고통을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던질 수 없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영육간의 괴로움’은 오로지 예수님 홀로 견디고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길, 예수님께서는 결코 피하지 않으시고 용감하게 굳세게 걸어가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시하신 그 길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대로 걸어가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고, 목숨 바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한 예언자로서의 완성된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이압돈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곤합니다. 핑계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방패막이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미사에 빠진 이유에 대해 주위에 성당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웁니다. 실제로 성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찾아 봤는데 자기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핑계는 대부분 잘못된 일에 대해 다른 것의 탓으로 둘러대는 변명입니다. 우리는 이런 핑계를 찾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핑계 꺼리를 찾고 핑계를 대는 걸까요?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럴 때 든든한 방패막이가 하나쯤 있으면 훨씬 수월합니다. 그러나 변명, 핑계라는 방패막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어려움을 정당하게 헤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도 핑계만 대고 있다면, 어린아이가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때 쓰고 있는 장면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일을 해야 되는데 핑계 꺼리가 있어 피해 갈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게 우리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이 잔을 제게서 거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실 만큼 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핑계를 대고 안했으면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좋은 핑계 꺼리를 제공해 줍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나는 내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핑계를 댈만한 꺼리를 주지만 그 모든 것을 마다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 일이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돌로 치는 그곳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그 심장부에서 바로 하느님의 뜻을 보여 주시려 모든 것을 헤쳐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두려움이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서 하느님 뜻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핑계라는 방패막이를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나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핑계를 대며 어떻게 좀 빠져나가 보고자 하여도 예수님께는 그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핑계를 대는 모습이 통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다면 핑계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면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또 그분은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하나 되어갈 때 우리도 그분처럼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여러 일에서 핑계를 찾으며 망설이고 있다면 주님을 닮도록 합시다.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가 13, 31-35)
-유 광수신부 -
바로 그 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 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한테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이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그 때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 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 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리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 내셨다."(마르 1,38-39)고 하셨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고 또 당신의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했고 그 일에 전력 투구하셨다. 그러면서도 누가 뭐라고 해도 또 어떤 유혹을 받으셨어도 당신이 하셔야 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으셨고 다른 길로 빠지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과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번도 가셔야 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가셨다. 즉 정도를 걸으셨다. 따라서 복음 전반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셨다면 복음 후반부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 것도 중요하다. 잘 사는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길은 목적지가 아니고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이다. 어느 길을 가야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곳 즉 하느님의 나라라는 그 목적지에 이르는 것인지를 잘 알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모른다. 그래서 그 길을 가르쳐 주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배우고 또 예수님이 어떻게 죽어야하는 가를 가르쳐 주신 그 길을 가면서 우리도 죽음에 이르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를 배우고 또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길인 가를 예수님한테 배워서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러야 한다. 예수님이 한 분이시듯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은 오직 한가지 길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길이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는 길이요, 죽음에 이르지만 부활하는 길이요, 아버지께 가는 길이다.
인생이란 이 세상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와서 적당히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체 아무런 준비 없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맹목적인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하찮은 풀 한 포기도 다 목적이 있고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지는 때가 있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그럭저럭 살다가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으며 이치에도 안 맞는다. 사람은 반드시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있고 해야할 사명이 있고 죽어야할 할 장소와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걸어가야 할 길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데도 나는 죽지 않고 오직 살기만 하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산에 오르는 길이 있고 산에 올라간만큼 내려와야 하는 길도 그만큼 되고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산에 올라갔다가 한 두 걸음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숨넘어가는 것이 순간이기 때문에 죽음은 잠깐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숨이 넘어가기 위해서는 살아온 시간만큼 걸리는 법이다. 인간이 그렇게 하루 아침에 죽는 법이 아니다. 서서히 성장하듯이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냥 죽지 않고 사는 줄만 알고 있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사는 것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도 죽음은 반복이 없으니까.
연어는 부하장에서 어느 정도 자라면 바다로 나간다. 한 3-4년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 거슬러 올라와서 죽는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고 한다. 연어는 자기가 살 곳이 어느 길인지를 알고 그 길을 따라서 바다로 나갔다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죽어야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길을 따라서 계곡 물을 거슬러 올라온다. 죽을 장소를 찾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보면 사는 길을 가는 것보다 죽을 곳을 찾아 거슬러 올라 오는 길이 더욱 험난하고 많은 희생을 치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나이 사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링컨은 말했다. 우리는 얼굴을 선택하는 자유는 없다. 얼굴은 하나의 운명이다. 때어날 때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은 살아가면서 많이 달라진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자연히 얼굴이 아름다워진다. 추잡한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얼굴이 추잡해진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면 얼굴 표정에 성실의 향기가 스스로 풍긴다. 인생을 곱게 살아가면 얼굴도 곱게 늙는다. 인생을 거칠게 살아가면 얼굴도 자연히 거칠어질 것이다. 내가 내 얼굴을 만드는 것이요, 나의 마음과 행동이 내 얼굴의 표정을 변화시킨다.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의 이력서요, 행동의 성적표요, 과거의 생활사이며 신앙의 척도이다. 우리는 얼굴에서 개성의 이력서를 발견한다. 개성이란 무엇인가? 남과 대응하거나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딴 생명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좋은 얼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사는 길과 죽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길만이 하느님을 닮은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인간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축복과 저주의 예루살렘
-박상대신부-
회개촉구의 설교가 효력이 있었던 것인가? 바리사이파 사람 몇몇이 예수의 말씀에 크게 뉘우쳤던 모양인지 예수께 호감을 가지고 "가까이 와서"(31절) 비밀을 폭로한다. 헤로데가 예수를 죽이려 하니 어서 피하라는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B.C 4년부터 A.D 39년까지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였다. 일찍이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 헤로데가 예수 때문에 불안해하고 밤잠을 설친지가 벌써 오래되었다.(마르 6,17-29; 루가 9,7-9) 갖가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예수는 헤로데에게 있어서 가히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헤로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결탁하여 이제는 예수를 제거하려고 심증을 굳혔던 것이다.
그러나 헤로데는 당당하게 예수와 맞서지 못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다루었던 것처럼 예수를 잡다가 가두거나 추방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했고 군중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여우"라는 말을 듣게 된다. 여우라는 동물은 간교함과 해로움의 상징이다. 여우가 직접 사냥을 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먹이를 구하듯이 헤로데도 힘들이지 않고 그 날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오늘이나 내일은 아니다. 길지 않은 날들이겠지만 그 날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은 예루살렘에서 맞이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의 상징이며,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과 맺은 구약(舊約)의 상징이다. 여기서 예수님도 당신을 마지막을 맞이하실 것이다. 그 때까지는 어느 무엇도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에 의해, 예루살렘을 통해서 죽어야 하는 예언자들 대열에 세우셨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로 말이다. 예루살렘은 마지막 예언자인 예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다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성전에서 당신의 말씀과 현존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현존을 거두어 가시는 그 날은 예루살렘이 파괴를 맞이해야 하는 날이다.(35절)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8월 29일 티투스가 지휘한 로마군단에 의해 실제로 성전이 짓밟히고 모두 불타버렸다. 이는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는 것처럼, 수없이 시도했던 하느님의 갖은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예수와 함께 다가온 구원의 날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예수님도 이 날을 기대하고 계신다. 다만 그 날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날이 되기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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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