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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참으로 “의로움”은 무엇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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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의로움”은 무엇인가?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 에제키엘의 가르침-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중 “참행복”, “세상의 소금과 빛”에 이어 당신과 율법 관계에 대해 밝히기 시작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순시기를 맞이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신한 가르침이 됩니다. 다음 서두 말씀으로 시작되는 6개 대당명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결코’입니다. 평범해선 안되고 뭔가 특별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주님은 구체적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결국은 한결같이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이에 앞서 현대의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최근 인터뷰중 인상적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자적인 진보적 교황님이기에 내적으로 반대파들에게 겪는 고통도 참으로 크겠다 싶었습니다.
1.“바티칸 공의회는 단지 교회쇄신의 표지만은 아니다. 그것은 쇄신의 문제일뿐 아니라, 교회를 더욱더 살리게 하라는 부르심이다. 공의회는 쇄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새롭게 한다. 교회는 언제나 앞으로 향해 가고 있는 어머니이시다. 공의회는 더 큰 성숙에로, 더욱 시대의 표징과 일치되도록 교회의 문을 연 것이다.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가장 전통적이며서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문헌이다. 전통적이며 언제나 현대적이다. 전통은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금요강론 사회교리 공부시 독일의 세계적 신학자 칼 라너의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교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입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나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도 자기 어머니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정말 연민의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노모와 같은 어머니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 얼굴 사진을 보면 예전과 달리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교회 어머니의 자글자글한 얼굴에 위로를 받습니다.
2.교황님의 전쟁에 대한 견해입니다. 강대국 들의 전쟁의 이면에는 얼마나 사악한 악이 도사리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는 현대의 예언자 교황님입니다.
“내 양친은 ‘전쟁은 미친짓이다” 자주 말씀하시곤 하셨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안마, 시리아(무려 13년 동안이다!), 예멘 등, 거기서 아이들은 교육도 빵도 없고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아이들을 부모와 함께 많이 만났다. 나는 거기서 웃는 아이들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왜 이들은 웃지 않는가? 이들을 무엇을 보았는가? 그것은 공포스러운, 정말 공포스러운 장면일 것이다.
세계는 사실상 전쟁상태에 있다. 이에 관하여 비난받아져야 할 것이 거대한 무기공장들이다. 부자 나라가 약해질 때, 그것은 수행해야할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말들이 있으니 다시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기들이 이를 마련해 준다.”
3.“전례를 거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또 교회는 성전안에 숨지 않는다. 성전안에 정착하는 것은 올바른 예배방식이 아니다. 미사거행은 결과를 갖는다. 빵을 떼어 주는 것, 이것은 사회적 의무를, 다른이들을 돌봐야함을 뜻한다. 기도와 실천은 함께 간다. 하느님 경배와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한 섬김은 함께 간다. 우리는 각 형제자매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이다.”
4.“경제는 사회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시장경제에 하나 덧붙여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적’ 시장 경제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적’이라는 말마디를 명심해야한다. 지금 경제 위기는 정말 심각하여 전율할 정도다. 세계 대다수 사람들이 충분히 먹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다. 부(富)는 거대한 사업을 하는, 때로 착취하는 소수의 손안에 있다. 경제는 언제나 사회적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바로 현대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88세 노교황님의 예언자적 말씀이요, 이를 실천함이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의로움임일 것입니다. 교회헌장은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이 염원한다”로 시작합니다. 바로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대당명제 첫째 화내지 말라 하십니다.
살인에 앞서 간접적 살인과도 같은 형제에게 성내는 일이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 비방하는 일체의 무시하는 말마디를 엄금하라 하십니다. 정말 대죄는 이런 형제들에 대한 무시나 멸시이니 애당초 마음의 순결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정말 대죄는 둘이니 절망과 무시입니다. 자기에 절망하면 자살에 이르고 타인을 무시하면 타살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 예물을 바치기전 형제와 우선 화해해야 하며, 고소한 자와도 재판정에 가기전 타협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비상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즉시 관계를 원상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즉각적인 회개의 실천이야말로 사랑의 지혜요, 진짜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1독서 예언자 에제키엘의 가르침이 참 신선합니다. 예수님께서 결정권자로서 말씀하셨다면, 에제키엘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주님의 대리자로 말씀하십니다. 결론하여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선물입니다. 지난 일에 아파하거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다 헛일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나를 보십니다.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구원은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참으로 비상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과거의 죄악을 단칼에 단(斷)!, 끊어 버리는 단호하고도 비상한 회개의 선택을 결단하는 이들이 참으로 의로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이사야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해 가는 날로 세속화에 안주함으로 부패 분열되어가는 현대교회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 에제키엘, 프란치스코 교황, 모두가 온갖 고난중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했던 분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모두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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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만이 예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제자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얘기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하느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사는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에게 가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은 회개하고 형제와는 화해하는 것,
이것이 자기가 살뿐 아니라 공생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비유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러 가는 사람 얘깁니다.
그런데 형제가 자기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제 생각에 이 생각이 난 것만 해도 이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원망스러운 사람은 생각나도
원망하는 사람은 생각지 못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형제가 자기를 원망할 짓을 한 사람이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면서 형제가 생각이 난 사람이며,
이런 상태에서 하느님께 나아가 제물을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결코 그 예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형제에게 몹쓸 짓을 하고 바치는 예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동생 것을 뺏어서 부모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자기만 잘 보이고 자기만 살겠다고 바치는 뇌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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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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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뿌리를 다스려라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6,6).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용서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은 하나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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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뭇잎이 가을에 노랗게, 빨갛게 물이 들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단풍’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가을도 ‘단풍’이 물들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나무는 이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파란 감도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어갑니다. 빨간 홍시는 맛이 별미입니다. 빨간 감이 떨어지면 감나무도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나무는 단풍이 든다고 하고, 감은 익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늙음’을 아쉬워하고, 멈추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도 이제 ‘환갑’이 되었으니 예전의 기준으로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신체의 기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늙음을 익어감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면 이제 주님께 의탁하며 익어감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원하였듯이 사람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진시황제가 원하였던 ‘불로초’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노화를 방지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혈액’을 젊은 사람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물 실험의 결과 젊은 ‘피’를 수혈했던 동물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의미는 신인 선수를 투입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도 ‘젊은 피’를 공급하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드라큘라의 전설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사람의 대장에 있는 미생물을 나이든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생물은 소화흡수가 잘 되도록 돕고, 원활한 배설이 되도록 돕기에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유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포는 재생되지만 그 재생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유전자의 변환으로 재생의 숫자를 늘리면 건강한 몸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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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0년 심리학자 줄리안 홀트 룬스태드가 동료 학자들과 다음과 같은 조사 연구를 했습니다. 암, 심혈관 질환, 신부전 같은 만성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의 비율과 이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그 결과 힘이 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있으면 사망 위험성이 50%까지 감소한다는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담배를 끊어서 얻는 효과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체질량지수(BMI)를 건강하게 유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효과였습니다.
이렇게 이웃은 나를 지켜주는 지원 체계였습니다. 건강과 행복, 삶의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이웃으로 이루어진 양질의 사회적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 안에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 등의 유용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뇌의 신경화학 물질이 면역계의 효율적인 기능을 촉진하기 때문에 건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건강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운동하고, 또 몸에 좋다는 각종 영양제를 복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영양제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이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금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함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열심한 생활로 그 모습을 통해서도 다른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열심,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령하시지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는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하늘 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인 나의 이웃이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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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해져라.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장 불쾌감을 주지 않는 종류의 자신감이다(쥘 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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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큰일 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바로’라는 말도 ‘멍청이’라는 말도 너무 많이 썼습니다. 이 두 단어보다 더 심한 말도 했습니다. 위의 두 단어만으로도 재판에 넘겨지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는데 그보다 더 심한 말을 사용한 저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러니 어서 화해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미안하다고.’말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와 같으신가요?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다 저와 같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성당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서로를 죄인으로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 자신도 죄인이거늘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거나 보듬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재판도 지옥 벌도 아닌 돌아섬입니다. 다시금 돌아서서 주님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과감하게 돌아서 보십시오. 한번 돌아서 보십시오. 어찌 압니까? 돌아서면 더 아름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해서 돌아서 보세요. 그곳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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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맛집, 신앙 맛집
라면 안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멀리하시는 분들은 계실지 모릅니다만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라면을 왜 좋아할까요? 맛있어서? 물론 맛있습니다. 그러나 라면 만큼 또는 그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많고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라면을 왜 좋아할까요? 그건 아마도 어떤 것을 넣느냐에 따라서 천 가지의 맛이 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누구나 쉽게 조리 할 수 있는 것이 라면이기에 라면을 다른 음식들보다 더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과 모든 사람은 라면 맛집입니다. 그곳과 그 사람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맛난 이유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과 삶이 재료라면 그 재료가 모두 다르기에 각기 다른 신앙의 맛이 납니다. 각각 다른 라면 향기처럼 우리 신앙의 향기도 우리의 경험과 아픔이 다르기에 각각 다른 향기가 납니다. 이 또한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을 맛나게 하는 요소일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이 열정적이지 않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이 감동적이지 않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여러분의 신앙은 각기 다른 맛을 내고 있기에 신앙 맛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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