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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의미와 목표를 이루는 삶
출 6: 10 - 7: 7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을 받아 애굽으로 보내졌습니다. 먼저 모세는 이
스라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고 백성들은 이를 듣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
배하였습니다. 그 후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한 삼
일 길의 광야의 길을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바로는 이 요구를 거부
하고 더욱 혹독한 노역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모세의 일로 노역의 정도가 심해지
자 백성들을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모세는 답답함을 하나님께 토로하였습니다. 이
에 대해 그 약속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고 백성에게 그 언약을 전하게 하시는 내용이 6장
전반부의 내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였으나 백성들은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모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10절로 12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 13절로
7장 7절까지는 전체적인 한 단락을 정리하는 부분입니다. 곧 모세와 아론이 누구인가, 그
들이 어떻게 바로에게 말하게 되었는가, 그 때 그들의 나이가 어떠하였는가를 문단을 정
리하는 형식으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장 13절로 7장 7절에 이르
는 내용은 괄호로 처리하여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여기까지 해서 연극
으로 하면 1막이 끝나고 13절로 27절까지 족보 기록과 마무리 설명을 통해 한 단락을 정
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족보가 나오는 단락은 한 단락의 마무리요,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곧 제 2막이 시작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제 1막이 하나님께서 구원자 모세를 세우고 그 뜻을 증거하는 서막이었다면,
7장 8절 이하의 내용은 심판이 주제가 된 제 2막이 될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이 족보
의 기록을 통해서 앞으로 전개될 구원의 목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10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10-11"-------"
여기 여호와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는 것은 두 번째의 보냄이 되겠지요. 이미 하나
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알렸으나 모세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
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며 거절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를 보내고 계
십니다.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다시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 보내
게 하라" 모세가 대답하였습니다. 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
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함께 가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그들로 이스라엘 자
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
도하여 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취적 관점에서,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가 누구인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14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 내용은 27절에 이르는 것처럼 모세와 아론이 누군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모세와 아론을 말하기 위함이고 레위의
형들이 등장하는 것은 레위를 말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조상을 따라 집안의 어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큰집부터 말하는 것이
지요. 가장 큰집은 물론 르우벤의 집안이 되겠지요. 물론 르우벤은 장자의 몫을 잃었지만
명목상 가장 큰 어른은 르우벤입니다. 그래서 14절에 르우벤의 집안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14"----------" 다음은 시므온이 될 것입니다. 15"-------" 그 다음으로가
레위가 되겠지요?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으니 그 다음으로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16"--------"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가 레위의 아들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
서를 따라 게르손의 후손이 17절에, 고핫의 아들들이 18절에 그리고 19절에 므라리의 아
들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게르손의 아들로는 립니와 시므이가, 고핫의 아들들로는 아므람
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므라리의 아들들로는 마홀리와
무시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누가 나옵니까? 이제 고핫의 후손들만 따로 언
급이 되겠지요? 모세와 아론을 중심으로 볼 때, 게르손과 므라리는 이제 한 다리 건너 뛴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핫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다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위가 점점 좁혀지고 있
는 셈입니다. 고핫의 아들들로는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
시엘, 네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므람이 오게벳을 취하여 아론과 모세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작은아버지 격인 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입니다. 그리고
헤브론은 빠지고 웃시엘의 아들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가 나오
고 있습니다. 헤브론이 빠진 것은 아마 그가 후손 없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3절 이하에서 아론과 고라의 후손이 특별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
론의 후손으로는 누가 있습니까? 23"--------"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라의 아들로는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아론의 아들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25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리를 해 주는데, 이들이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집안 어른들이라고 정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대수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비느하스 같은 이가 언급
되는 것은 그가 그 지파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일 것입니다. 곧 모세 당대에 함께 살았
던 주요 집안의 어른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족보를 언급하는 이유를 26절과 27절
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26-27"-------" 곧 누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바로에게 말
했는가를 말하기 위해 이 족보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입니다. 한
마디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단 용기 있는 두 사람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족보의 강조
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에게 있지요. 그러나 모세보다는 아론에
게 더 강조가 주어져 있습니다. 모세는 그에게 나이 사십에 가까운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급되지 않고, 도리어 아론은 네 아들 뿐 아니라 그 손자까지 언급되고 있습니
다. 더욱이 비느하스가 언급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점입니다. 이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
니까? 이미 성취적 관점에서 이 글을 쓰면서 어느 정도 비느하스의 위치까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비느하스가 누구입니까? 아론의 손자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패역을
끝냈던 인물이지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 신들에게
절하므로 바알브올에게 브속되어 온 이스라엘이 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창으로 음행
하고 있던 남녀의 배를 꿰뚫어 죽이므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께서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인물이 벌써 여기 족보에
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로 해서 고핫, 아므람, 아론, 엘르아살, 비느
하스, 그리고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약속까지 제사장 계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 생각에는 모세가 주인공이고 아론은 조역 정도 되어야할 것 같은데 여기
족보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세는 간단히 언급되고 아론과 그 후손이 많
은 분량을 차지하며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구원의 의
미와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물론 모세가 출애굽 구원의 주인
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구원은 어디에서 완성될 것입니까?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
장들에게서 완성될 것이지요? 그래서 출애굽의 이야기 시작부터 레위지파가 언급되고 있
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다는
이야기, 그들의 봉사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태어나고 생명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레위지파의 봉사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어디가 될 것입니까? 레위지파의 봉사를 통한 이스라엘이 누리는 언약의 교
제가 되겠지요? 그래서 모세의 구원은 아론에게서 성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
면 레위 지파 그리고 아론과 엘르아살 비느하스를 잇는 제사장 안에서 이스라엘은 구원
의 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로 출애굽기는 그들 가운데
성막이 세워지고 레위의 후손들과 제사장들이 그 영광을 봉사하는 것으로 마쳐지고 있습
니다. 곧 거기에서 구원의 의미가 완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족보의 기록은
장차 전개될 그러한 구원의 전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우리의 구원의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
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모세처럼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의 신이자, 공중의 권세 잡은 자요, 죄와 사망의 통치자인 마귀의 손에서 영원히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 자유와 생명의 통치 아래 두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곧 자기 안에서
아론의 중보적 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영원한 구원의 중보자요 교
제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통치자로서 왕이시요, 중보자로서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물론 그 목표는 우리가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언약의 교제에 있다고 할 것
입니다. 영원한 중보자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그 앞에
살며 언약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 곧 그것이 우리 안에 성취되어 가는 구원 그 자체인 것
입니다. 물론 그 교제는 우리가 하늘의 새것으로 먹으며 그의 상에서 잔을 드는 하늘의
잔치로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 또한 성
령 안에서 그 안에 거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교제에 참여하게 될 것
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이 역사에서 그 성취를 맛보며 구원의 삶을 살 것입
니다.
우리는 이미 주께서 이루신 구원에 들어 왔고 그리고 그 구원의 궁극적 성취를 바라는
가운데 현재적 구원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
원을 지금 우리의 삶에서 성취하고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를 통한 구원이 아
론의 중보적 직임 아래 언약적 삶으로 성취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므로 그 아래에서의 모든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서 나오는 자유함, 온유함과 평강, 담대함과 확
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함에서 오는 위로와 기쁨,
하나님의 언약의 상에 앉는 감사, 찬양의 감격, 그리고 형제들과의 교제에서 얻는 즐거움
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에서 얻는 작은 기쁨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원한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되어지
는 은혜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구원의 성취의 삶 가운데 우리에게 선물되
어지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아론 아래 모든 은혜를 누렸던 것처럼 말
입니다. 바로 이러한 풍성한 구원의 삶을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것
입니다. 구원의 목표를 이루는 이러한 삶을 위해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우리를 건지
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구원의 목표를 우리 안에 이루
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언약 안에서의 동행의 온전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가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의미와 목표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
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출 6: 28 - 7: 7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끝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과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구원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뭔가 열심히 합니다. 불교인이 참선도 하고, 시주도 많이 하고, 선한 행위도 열심히 하는 것은 구원 얻기 위해섭니다. 천리교인들이 막대기를 두드리면서 신발이 닳도록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도 구원받기 위해서지요. 천주교인들이 봉사하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선한 일을 통해 혹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과 삶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은,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섭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삽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명, 혹은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목사면 목사대로, 평신도면 평신도대로 소명이 있습니다.
소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성도들이 방황한다는 것은 이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낙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가장 비참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며 사는 성도의 삶은 너무 귀합니다.
그러나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많은 장애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출6:30) 라고 자신감 없이 주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입이 둔한자이오니’ 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자신에게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문제였습니다. 그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섰을 때 말을 더듬지 않고, 조리 있게 또박또박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여러 번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모세의 이 기도만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유창한 언어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대신 아론의 도움을 받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고쳐주지 않고 대신 아론의 도움을 받게 하셨을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 후서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질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하지만 바울은 이 질병 때문에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자주 넘어졌던지 이 질병을 사단이 자기 몸에 심어놓은 사신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질병을 없이해달라고 기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그 질병을 치료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어 구사 능력을 부어주지 않았고, 또 사도바울의 질병을 치료해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닙니까? 바로 왕을 간단하게 쳐부술 수 있도록 육백 만 불의 사나이처럼 바꾸어 놓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인간의 삶을 깊은 어두움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말도 잘하게 하고 강한 힘도 주어서 한방에 바로 왕을 날려버리게 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교만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그 치명적인 약점은 모세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질병 때문에 바울은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해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약점, 바울의 질병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완전하게 하지 않고, 그들을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로 내버려두십니다. 약한 부분을 그대로 내 버려두십니다. 그리고 그 약한 부분으로 인해 그들은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게 하십니다.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을 늘 답답하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원망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답답한 문제들,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그 문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제일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말을 잘못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더욱이 바로 앞에 서야 하는 모세에게 있어서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말이 시원찮으니까 바로가 답답해하겠지요. 그래서 아론이 대신 말을 했습니다. 아마 바로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모세를 보면서 속으로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친구 어디 가서 말이나 제대로 배워오지 않고...”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번 출7:1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하나님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세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모세 자신이 신이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바로에게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볼 때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신처럼 우러러 보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를 통하여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말을 잘못해서 바로 앞에 서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말을 잘못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을 잘해서 바로를 설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의 설득으로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 보내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도 유창한 말에 설득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말을 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능력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왕 앞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모세가 말을 잘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모세를 높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삶 8월호에 실린 웨인 라이스의 “화끈한 예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한 어린 소녀가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칠 수 있는 곡은 오직 ‘젓가락 행진곡’ 뿐이었지요. 소녀의 부모는 소녀가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도록 가르칠 훌륭한 피아노의 대가를 찾아주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물론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지요. 드디어 소녀와 소녀의 부모가 피아노의 대가의 저택에 첫 레슨을 위해 도착했습니다. 피아노의 대가의 거실에는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녀는 곧장 피아노로 뛰어가더니 소녀가 아는 유일한 곡인 ‘젓가락행진곡’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부모들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요. 그 때 피아노의 대가가 들어와 소녀가 계속 치도록 그냥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녀 옆에 앉아서 소녀와 함께 연탄을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계속 그 단순한 ‘젓가락행진곡’만 연주하고 있었는데 피아노의 대가가 연탄을 하자 피아노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피아곡이 된 것입니다. 소냐가 치는 그 곡에 피아노의 대가가 손가락 몇을 더 얹어 준 것에 불과했는데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의 능력은 자신,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능력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모자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여러분들을 불신자들 앞에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두 번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역의 장애를 예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사역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일부러 악하게 만들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본래 의미는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강퍅한 마음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두 종류입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신 자기 힘을 믿고, 자기 돈을 믿고, 자기 권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롬1:28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둔 사람입니다. 오늘 바로 왕과 같은 경우입니다. 반면 다른 한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자기 힘, 자기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더 강하고 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 세상적인 지식을 자랑합니다. 바로 왕을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는 한 나라의 왕이요. 권력과 군대의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약한 자,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입니다.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고, 사람의 지식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더 강하고, 세상의 어떤 물질보다 더 부요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사실을 확인 시켜줍니다. 지금 바로 왕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퍅한 바로 왕이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왕이 동의하지 않는 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기 때문에 바로 왕의 강퍅함, 바로 왕의 군사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5절을 보십시다.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데도 일이 잘 안될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막힘이 없고 다 잘되면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고 방종하기 쉬워집니다. 반면 어려운 일, 사역에 장애가 생기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긴장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열린교회 수련회 때 비가 계속 왔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기도를 안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차를 타고 장소를 이동할 때 막 비가 쏟아집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면 비가 그치는 겁니다. 해변에 가서 해수욕을 할 때는 해가 빛나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수련회를 마치고 와야 하는데 풍랑 때문에 배가 뜰 수 없었습니다. 수요일 저녁 배로 와야 하는데 결국 배를 못타고 반석교회에서 수요예배를 그냥 드렸습니다. 이틀 동안 부산으로 올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 몇 명의 청년들만이라도 보내려고 첫 비행기를 알아보기 위해 공항에 나갔는데, 공항에서는 청년들 전부가 다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왔습니다. 그런데 열린교회 지체들이 탄 그 비행기만 부산으로 왔고 그 다음부터는 내리 결항이 되었습니다.
또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번 열린교회가 수련회를 떠날 때 어떤 분들이 많은 후원금을 냈습니다. 너무 풍성해서 도무지 무슨 일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원금이 비행기를 타는 항공료와 어쩌면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마치 하나님이 열린교회 청년들 곁에 서서 ‘염려하지 마 내가 함께 하잖아, 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준비해 놓았어!’라고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 장애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은 드디어 놀라운 일들을 시작하십니다. 보십시오 바로 왕이 거역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을 대적할수록 하나님의 이적이 애굽 온 땅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와 바로 왕의 대결에서 열 가지 재앙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애굽 온 땅에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의 능력도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함께 계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또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 모르는 애굽 땅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이런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모세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살고, 하루 종일 찬송가만 울려 퍼지는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도원을 만들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성도들이 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약한 우리들을 통해 불순종하는 세상과 싸우십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삼으시고 세상의 악을 이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팔십세였고, 아론은 팔십 삼세이었더라
세 번째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의 나이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와 대결하면서 출애굽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들의 나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몇 살에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했습니까? 모세는 팔십 세, 그리고 아론은 팔십 삽 세였을 때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은퇴하고 저 뒤로 물러가 있을 나이입니다. 성경이 굳이 이들의 나이를 밝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나이와 관계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닙니다. 주님께 얼마나 올바른 헌신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편집진들이 모여서 백과사전에 실린 소위 위대한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통계를 낸 적이 있었답니다. 인류역사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34%정도는 오십 세 이하에, 35%는 육십대에, 그리고 23%는 칠십대에, 나머지 8%는 팔십대에 그 위대한 일을 성취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66% 정도는 육십 세 이후에 그 일을 성취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저는 아직 시작도 안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 나이가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자기 고집이 생기고 자기 생각, 자기 아집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듣습니다. 저도 겨우 나이 사십대 중반인데도 다른 사람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제 고집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팔십이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모세와 아론에게서 배워야할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나이 팔십세, 팔십 삼세가 되었는데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할말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인생의 경험이 많고 아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본문 6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했다는 성경의 표현은 참 중요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just a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만 그대로, 다른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른 주석도 달지 않고, 이상스럽게 해석도 하지 않고 그 말씀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인생의 경험이 많으면 대체로 말도 많은 법입니다. 요령만 늘어가고, 자기 고집도 생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 한마디씩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데 그들의 삶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바로왕과 많은 갈등, 하나님의 기적등,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계속됩니다.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아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 내 야망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 교회생활 40년, 50년 했다고 할 말이 많습니까? 혹시 내 나이가 얼만데... 라고 하면서 나이와 경륜을 드러내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와 아론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겐 위대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혹시 나는 부족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저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겐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모세와 바울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나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제부터 나이와 능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출 6: 28 - 7: 7
만약 하나님께서 만인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너 이리와라!"라고 부르신다면, 명예와 부와 권세를 한꺼번에 부여잡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부르신다면 누가 그 부르심을 마다하겠습니까? 아마 서로 빽쓰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개 그렇지 않은 곳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모세에게 파라오 앞에 나가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저는 말이 어눌한 사람입니다"
이사야도 핑계를 대었습니다. " 저는 입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어디 그런 핑계가 하나님 앞에서 통합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화가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언제나 "그러나"를 말합니다. "그러나"로 핑계를 댑니다. 안되는 조건을 앞세우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아내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풍랑을 보내 요나가 탄 배를 뒤흔들어 놓으시고 마침내 요나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졌을 때에야 바다가 잔잔했습니다. 큰 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몸부림치다가 요나를 어느 곳에 밷어 놓았는데 그곳은 바로 그가 도망가 반대로 가려했던 그 장소-니느웨 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러나"는 인간의 "그러나"를 삼켜 버립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인데 처음부터 고분고분 따라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들은 황상 먼저 저항하고 갖은 발버둥을 다치다가 결국은 그 길로 갑니다. 각자의 마음에 격정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관조하여 보면 우리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크건 작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오늘 임명받으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임직하는 분,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당신의 제자로 임직 받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몇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최선을 다하십시오.
흑인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반체제 운동가이고 미국 시민의 존경을 받는 흑인 운동가 흑인 지도자 이십니다. 늘 그늘에서 사람 취급 받지 못햇던 흑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거리의 청소부 일지라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세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듯 그렇게 여기 한 청소부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켈란 젤로가 그림을 그리고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고 세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는 것은 다 최선을 다하는 삶의 내용을 말합니다. 지금 흑인들이 하는 것은 거리의 청소부나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일지 모르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맡은 일이 큰일 이건 작은 일이건 자기가 처한 위치와 환경이 어떠 하든지 그곳에서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면 결코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청소부가 된 것을 한탄하기 전에 자기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백인을 이기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최고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요구하십니다. 달란트의 비유도 작은 일이라도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 마지막까지 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는 80세에 부름받고, 아론은 83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인을 좋아하십니까? 노인은 이제까지 자기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이제는 아무 전제 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 전적으로 귀의 할 수 있는 시간, 마지막 찬스를 가진 분들입니다. 뭐 모든 것을 다 경험했는데 이제야말로 몸 가볍게 나설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 가느라 앞 뒤를 볼 경황이 없지만 노년은 자기 인생을 크게 되돌아 볼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자리에서 젊어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도 분명히 볼 수 있고 얼마남지 않은 길을 통해 가장 뜻있는 길에 나설 수 있는 기회. 새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분들입니다. 대개 노인은 보수적이고 안주하려하고 젊은 세대와 갈등을 가지고 젊은 세대들이 기피한다는 일반적인 노인에 대한 통념을 성서는 송두리째 깨어버립니다. 이것이 성서의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젊어 한때 운동을 하다가, 학생 때 아주 높은 이상과 꿈을 갖다가도 졸업 후에 무섬게 변신하는 젊은이들을 가슴 아프게 보아왔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 였습니다, 그가 대통령의 집무가 끝나자 그는 다시 그 시골 침례교회의 주일학교 반사로 되돌아가 지금까지도 그 교회에서 교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그가 존경받은 이유입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러면 무엇을 하자는 거냐? 최선을 다하고 최후까지 하는데 무슨 일에 부름을 받는 것이냐? 하나님께 충성하고 맡은 바 직분을 감당하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어떤행위를 뜻하는 것이냐? 성가대는 찬양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집사는 교회 살림하는데 그 기능적인 일 뒤에 있는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도문 시를 방문했을 때 도문 시장이 베푸는 조그만 만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시장이 밖에 나가 우리를 인도해온 기사와 가이드를 찾았습니다. 방문한 목사들이 그들은 따로식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구태어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을 초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아주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 저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대접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하는 좋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모세가 무슨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내 백성, 고통 받는 내 백성을 구원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내 백성이라 하셨고 그들을 제대로 사람 대접하는 세상으로 불러 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사람대접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고 우리 안에서도 그렇고 우리는 서로 대접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뜨거운 경험이 있어야 밖에서도 남을 잘 대접하고 존경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훈련하고 서로 존중하고 대접할 줄 아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집사님들은 장로님들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장로님들은 집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어른들은 젊은 사람, 어린 사람들을 격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이는 어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풍토를 가져야합니다. 만에 하니라도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삐뚤어진 눈을 가지고 매사를 회의적으로 보고 부정적인 말로 상처를 주고, 어떤 일 뒤에 나쁜 의도를 항상 가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변에서 시각을 바로잡아 줘야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끼어 있는 공동체가 판단 능력이 약하다면 그런 부정적인 말에 금방 휩싸이고 무하뇌동하고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 지 모르는 혼란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을 그대로 다 나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말에 책임을 지는 훈련을 하는 것이며, 서로 다른 의견을 토론하고 비판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의 공동의 의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지 방향없이 아무것이나 받아 들이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공동체에 속하든지 우리가 있는 그 곳이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신바람 나는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 아이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다 끝나고 마지막 한 순서가 남았습니다. 거창고 도교장선생님의 말씀 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주춤 주춤 가방을 챙기는데 등단한 교장선생님께서 "뒤에 서계신 학부모님 들을 위해 재학생이 자리를 양보해 드리라"고 하셨고 재학생들이 일어나 나가고 좁은 통로 한편으로는 학부모들이 들어와 앉는 혼란한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자리를 양보 하려면 진작 양보하게 할 것이지 이제 다 끝나가는데 무슨 양보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그로부터 꼭 한시간 동안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되었습니다. 매우 감명깊은 말씀이었는데 그중에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진주교대 졸업식에 휠체어 없이는 한발도 못 움직이는 뇌성마비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졸업을 하는 진 풍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들과 함꼐 학교 다닐 결정을 하였느냐고 했더니 그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내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돕기 위해, 항상 그의 곁에 붙어서 그를 돕기 위해 수능 시험을 함께 치렀고 함께 입학하여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그의 옆에서 함꼐 졸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머머니에게 이 아들은 둘도 없는 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만나게 되는 어떤 사람도 이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사랑받는 사람들이고 이세상 어떤 사람도 이 어머니가 이 아들을 소중히 여기듯 소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맡은 직분은 그것이 교회 안의 직분이든 교회 밖의 직분이든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들이 부르심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