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태복음 4장
Ⅰ.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심 4:1-11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결투 즉 천사장 미가엘과 용,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자신과의 백병전의 사건을 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당하며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며 그의 머리가 깨뜨려진다.
1. 시험받으신 시기(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 때에는 하늘이 그리스도께 열리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한 직후이다. 이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험 받으셨다는 소식을 우리는 듣게 되는데 그 때에야 말로 주께서 시험을 가장 잘 싸워 이기실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할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큰 특권들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징표들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시험받는 것으로부터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그보다는 오히려 큰 영광을 받은 후에 우리는 우리를 겸손케 만드는 어떤 것이 오리라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보통 그의 백성들을 시험으로 부르시기 전에 시험에 대비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넷째,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시험을 대비하는 최상의 준비이다.
그 때에, 즉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그 때에 그는 시험을 받으셨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은 후에 우리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부요해진 영혼은 자신의 경호를 갑절이나 주의해야 한다. 사탄은 유용한 사람들 즉 선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선을 베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들이 처음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 특별한 악의를 드러낸다. 따라서 젊은 목회자들은 앞으로 닥쳐올 것과 이에 따른 무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2. 시험을 받으신 장소(1절)
광야로 가사. 하나님과 교제를 가진 후에 우리가 받은 것을 군중과 번잡한 세상일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잠시 혼자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광야로 물러가셨다. 그것은 첫째로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은거는 묵상을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장 활동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을 위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지내는 시간을 찾아야 한다. 먼저 혼자서 은밀하게 하나님의 일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지않은 사람들은 공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기에 부적당하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물러가신 행위는 시험자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고독이 훌륭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지만 사탄은 그 고독을 이용해서 우리를 대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 결과 헌신을 핑계삼아 토굴과 광야로 가서 은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그들의 영적인 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과 거기에서 성도들과의 교제의 유익을 바라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이 제멋대로 일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 물러가셨다.
승리를 더욱더 빛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해와 바람을 제공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원수를 그렇게 유리하게 만들어 주시고서도 그의 공격을 좌절시키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 광야로 물러가셨다. 예수께서는 한시도 지체치 않고 시합장에 들어가셨다.
3. 마귀의 시험에 대한 준비(1,2절)
(1) 그는 전투하도록 인도받았다. 그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위에 비둘기같이 내려온 성령은 그를 온유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담대하게 만들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우리를 시험받는 환경 가운데 처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갑절이나 조심해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주 안에서 강하라 믿음 안에서 굳세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가실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도록 하시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마귀에게 시험받도록 인도되었다.
그리스도는 오직 마귀에게서만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으로'(약 1:14)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순전히 마귀에 의하여 시험받으시기 위해 마치 전사처럼 싸움터로 끌려가셨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심은 그 자신의 겸손과 비하의 실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그의 형제와 같이 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자 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일에 복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은 사탄을 당황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 전투 없이는 승리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시험자를 정복하시기 위해서 시험받으셨다.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은 모든 성도들에게 위안을 준다. 우리의 원수가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시험 받으심에서 나타난다. 비록 그 원수가 무장한 용사일지라도 우리의 관원의 대장께서는 그보다 더 강하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그것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죄가 아니라 단지 고통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사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시험받을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여 가엾게 여기시고 더욱 부드럽게 대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
(2) 그는 '모든 일에 절제하는'(고전 9:25) 경기 선수처럼 전투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신 것은 그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금욕을 위해 금식하실 필요가 없으셨다(그는 다스려져야 할 타락한 욕망을 갖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식하셨다. 선한 사람이 낮아지거나 친구나 구원자가 없어졌을 때 그들의 주께서도 친히 그와 같이 연단받으셨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떡이 없을지라도 하늘의 은총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아래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그는 결코 주리지 않으셨다. 그에게는 하늘과의 대화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식 후에는 실로 그가 참된 사람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주리셨다. 사람은 먹는 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우리도 종종 그 문제로 죄를 범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주리셨다.
4. 시험들(3-10절)
사단이 예수께 던진 모든 시험들 가운데서 목적한 바는 주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짓도록 함으로써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튼 마귀가 노린 바는 첫째,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을 느끼도록 하고, 둘째, 아버지의 능력을 이용하도록 만들며, 셋째, 영광을 사탄에게 줌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딴 데로 돌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전자의 두 가지는 그 의도를 분별하기 위해서 깊은 지혜를 가지는 그 의도를 분별하기 위해서 깊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아주 교묘한 시험들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의 시험은 그것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을 요구하는 강한 유혹이었다.
(1)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보호를 불신하도록 시험하였다. 여기서 마귀의 시험 방법과 그리스도의 대항과 정복을 살펴보자.
1) 이 시험이 어떻게 진척되었는가(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시험하는 자는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스도께 왔다. 일찍이 사탄이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였다면 바로 지금 그렇게 가장하여 선한 수호신인 천사인 체하였다. 이 첫번째 시험을 그때 것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시험을 더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험하는 자의 간교함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막 굶주림을 느끼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필수적인 생명 유지를 위하여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제안은 타당한 것처럼 보였다. 궁핍과 가난은 불만족과 불신앙에 이르게 하는 큰 시험거리이며,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할 사람 없다는 핑계 아래 자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도록 유혹하는 시험거리이다.
그러므로 궁핍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은 배나 자신을 조심해야 한다. 죄를 지음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고 번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낫다. 그리스도께서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되셨다. 그래서 마귀는 여기서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의심하도록 시험한다.이 시험에서 마귀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첫째, "이제야말로 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의심해 볼 때를 만났다. 왜냐하면 만일 네가 만물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그와 같이 궁핍한 처지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이 네 아버지가 아니든가 아니면 그는 매우 몰인정한 존재이다." 선한 백성들을 시험하는 마귀의 중대한 목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외부적인 고통과 궁핍 그리고 무거운 짐들은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양자됨을 의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들이다.
거룩한 욥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굶주리게 하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며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험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네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이냐?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혹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귀는 마치 하나님께서 몰인정하시고 불신실하신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완고한 생각을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써 대부분의 자신의 계획들을 수행해 나간다.
둘째, "지금이 바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때이다. 만일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아마도 지금 그 앞에 놓여 있는 돌무더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명하여 떡이 되게' 함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라(3절)."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이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 수 있도록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떡덩이가 되도록 명령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네 아버지는 너를 버렸으니 이제는 자립하고 그의 신세를 지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는 겸손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위하지 않고, 하는 일마다 주제 넘게 구는 것이다.
2) 이 시험이 어떻게 격퇴되고 극복되었는가를 보자. 먼저 그리스도는 마귀의 그 제안을 승낙하기를 거절하셨다. 그는 그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자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고자 하지 않으셨는가? 얼핏 보기에 그 제안은 아주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시험이 그럴듯 하면 할수록 그리고 겉모양이 훌륭해 보일수록 더 위험하다. 이 문제는 논쟁을 일으킬만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재빨리 풀 속에 숨어있는 뱀을 알아차리고서 아무것도 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사탄의 말이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들은 목소리의 진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말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보호를 불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 말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독립해서 자기 자신을 주장하도록 이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 말이 그의 제안대로 행할 때 마귀를 기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그 제안에 즉시 답변할 준비를 갖추고 계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절).
그리스도께서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사탄의 모든 시험들에 답변하시고 그것들을 좌절시키신 사실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존중하시고 율법에 기록된 바에 호소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병기고에 있는 모든 무기들 중에 유일하게 공격적인 무기이다(엡 4:17). 이 시험에 대한 답변은 다른 나머지 답변과 마찬가지로 제2의 율법을 의미하는 신명기에서 인용되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의식적인 것은 거의 없다. 레위기의 제사와 정결 예식들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들일지라도 사단을 내어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앙으로 혼합된 도덕적 교훈들과 복음적 약속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무기들이다.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기르셨는가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신다.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궁핍한 처지에 빠졌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그의 아들됨을 의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알라'(신 8:5)는 말씀이 따라다녔다.
이와 같이 아들로서 그리스도께서도 순종을 배우신다.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불신하게 만들려고 한다. 마귀는 그로 하여금 굶주림을 느끼기 시작하자마자 곧 양식의 공급을 찾게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이 궁핍할 때조차도 그를 시중들며 그를 기대하게 하실 것이다. 마귀는 그로 하여금 스스로 떡을 준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로 살았던 것처럼 사람이 떡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4절).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명하시고 지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떡 만큼이나 사람을 위한 좋은 생계 수단이 될 것이며 또한 사람을 부양해 줄 것이다. 우리가 떡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축복을 거절하시면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떡이 생명을 지탱해 줄지라도 떡의 양분을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떡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살찌우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부요할 때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가장 빈곤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우리 자신의 습득물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준비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의 소산들로 풍족하게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을 의지하여 적절하게 사는 것이 낫다.
(2)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이용하도록 시험하였다. 마귀란 얼마나 끈덕지고 지칠줄 모르는 적인가 보라. 이제 이 두번째 시험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보자. 대체로 마귀는 예수께서 그를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를 아주 굳게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로 하여금 안전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를 이용하도록 꼬이려고 애쓴다. 우리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실망이나 추측보다 더 위험한 극단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으며 기꺼이 구원하시려고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또한 그들을 죄 가운데서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도록 유혹받는다.
이제 이 시험에서 마귀의 행동을 살펴보자.
①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을 진행시켰는가? 마귀는 그리스도를 강압적으로나 억지로 데려가지 않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가도록 만들고서 그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전 꼭대기에 서셨다(5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을지라도 결국은 그를 반드시 정복하시기 위해 이같이 서둘러 시험을 받으심에 있어서 참으로 순종적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적하는 사탄의 이같은 능력을 풀어 놓으셨지만 그와 같이 우리를 대적하도록 그 능력을 풀어 놓으시지 않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묶어 두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는가!
둘째로 사탄은 이 시험을 위한 장소의 선택에 있어서 매우 간교하였다. 마귀는 그를 인구가 많고 온 땅의 즐거움인 예루살렘에 있는 한 공공 장소에 세웠다. 즉 세상의 경이들 중의 하나로써 끊임없이 뭇 사람들의 찬탄과 존경을 받는 성전에 그를 세운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며, 광야의 궁벽한 곳이 아니라 대중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실 수 있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신앙 고백에서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마귀와 그의 시험들을 면하여 주고 그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만큼 그렇게 거룩한 성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거룩한 성에서 마귀는 최대의 장점과 성공을 누리면서 사람들을 오만과 자랑에 빠지도록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에는 불결한 것은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영원히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마귀는 그를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성전의 꼭대기들은 시험하는 장소이다. 높은 장소는 다 그와 같다. 그런 곳은 미끄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떨어뜨리시지만 마귀는 떨어뜨리기 위하여 끌어올린다. 교회에서의 높은 자리는 특별히 위험하다. 탁월한 은사와 높은 지위를 맡고 있으며 큰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견고히 서 있는 일에 유이해야 한다.
②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을 일으켰는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6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6절).
이제 네 자신을 세상에 알려라. 그리고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
뛰어내리라 그러면 먼저 너는 하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자로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너는 하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고 온 자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고 네가 보통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사자 즉 '홀연히 그 전에 임할'(말 3:1) 언약의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마귀가 예수께 "네 자신이 뛰어내리라"고 말한 사실이다. 마귀는 그를 내어던질 수 없었다. 사단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네가 여기까지는 오고 더 이상은 오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를 내어던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다치지 말자. 그러면 감사하게도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잠 9:12).
③ 마귀가 어떻게 그의 제안을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 했는가를 보자.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6절).
그러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는가?" 마귀가 그 말씀을 그렇게 재빠르게 인용할 수 있을 만큼 성경에 그처럼 정통한가? 그런 것 같다. 마음이 하나님과 모든 선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찬 사람이라도 그 머리 속에는 성경의 개념들로 가득차고 그 입에는 성경적인 표현들이 흘러 넘칠 수 있다.
첫째, 마귀의 이 시험에는 옳은 것이 있다.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천사들의 활동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탄은 그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천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을 보호한다(계 7:5,11).
둘째, 마귀의 이 시험에는 많은 잘못이 있다. 필시 마귀는, 이 약속이 자주 그를 방해하며 성도들을 대적하여 해를 끼치려는 그의 계획들을 좌절시켰기 때문에 이 약속에 대해 특별한 악심을 품고 그것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먼저 마귀는 그 말씀을 잘못 인용하였다. 그 행위는 사악한 것이었다. 그 약속은 그들이 너를 지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지키는가? 네 모든 길에서 지키며 그외는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벗어나면 즉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이 약속을 잃어 버리며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경우에 성경을 참고하며, 무턱대고 아무 일이나 믿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태도이다.
셋째, 마귀는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하였다. 그 행위는 더 사악하였다. 이 약속은 확실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마귀는 이 약속을 악용하였다. 그는 그 약속을 하나님의 보호를 확인해 보기 위한 격려로써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는가? 천사들이 우리를 떠받들도록 하기 위해 뛰어내리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를 금하고 계신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는가를 보자(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의 시험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처럼 이 시험도 그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이기셨다. 마귀가 성경을 악용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사용하시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명기 6:16절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이 말씀이 인용된 신명기에서는 주어가 복수로써 '너희는 시험하지 말라'고 인용되었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약속들을 특별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고 받아들일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뛰어 내리셨다면, 그 행위는 이미 아주 잘 확인된 것에 대해 더 이상의 확증을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며 그를 돌보셨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계셨다.
또 한편 그리스도께서 뛰어 내리셨다면 그것은 그가 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특별한 보호를 요청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또 하나님이 우리의 궁핍을 채우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비위를 맞추시며 우리의 변덕을 만족시키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망상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공경해야 할 분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이상의 다른 어떤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3)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제공하면서 가장 사악하고 끔찍한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하였다(8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1) 최악의 시험은 맨 나중을 위해서 보류되었다. 우리가 이미 어떤 시험을 치루었든지 간에 여전히 우리는 더 악한 시험이 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 이 시험에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①마귀는 그리스도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마귀는 그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성전 꼭대기 정도의 높이로는 충분치가 못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는 그리스도를 자기 영토로 더 높이 데리고 가야 했다. 복되신 예수께서 좀 더 잘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마치 마귀는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게 그가 이미 알고 계신 것보다 더 상세히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그곳으로 그리스도를 데려갔다. 마귀가 그리스도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단지 시험을 잘 꾸미며 속임수에 착색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속지 않으셨고 그 속임수를 꿰뚫어 보셨다.
여기서 사탄의 시험들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첫째, 사탄의 시험들은 종종 눈을 통해서 온다. 최초의 범죄도 눈에서 시작되었다(창 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과 언약을 맺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돌려 허영을 바라보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시험들은 일반적으로 세상과 세상의 일들로부터 발생한다.
셋째, 이 시험은 마귀가 빈약한 영혼들을 속일 때 사용하는 큰 속임수이다. 마귀는 속이고 파괴한다. 그는 환영과 거짓 색채로 세상과 그 영광을 보여주지만 이 모든 영광의 자랑을 얼룩지게 하는 죄와 슬픔과 죽음은 사람들의 눈에서 숨긴다.
넷째, 세상의 영광은 생각이 깊지 못하고 경솔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매혹적인 시험거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간다. 이생의 자랑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② 마귀는 그리스도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절)고 말하였다. 이 시험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마귀의 이 약속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앞절의 시험에서 자기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네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너를 버리고 굶겨 죽이려고 하는 것 같지 않으냐? 그것이 바로 그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는 표시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나의 통치를 받는다면 나는 네게 그보다 더 잘 해 줄 것이다. 나를 네 아버지로 인정하고 나의 축복을 구해라. 그러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 그들을 쉽게 먹이로 만들어 버린다. 이 약속의 기만성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데 있다. 마귀의 미끼는 전부가 속임수이다. 그 미끼들은 겉치레와 허상들로써 마귀는 그것들을 가지고 속인다. 땅의 모든 민족들은 오래 전에 메시야에게 약속되었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 모든 민족들은 그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일지라도 마귀의 손에서 받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 마귀가 내건 그 조건은 얼마나 천한 것인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마귀는 경배받기를 좋아 한다. 이보다 더 가증하고 음흉한 시험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장 훌륭한 성도가 가장 사악한 죄로 시험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험이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시험에 동의하거나 시인하지 않는다면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경배하도록 시험받으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공격을 어떻게 방어하셨는가를 보자.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셨다.
①혐오와 증오심으로써 그 제안을 물리치셨다(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탄아 물러가라(10절). 그 제안은 첫 눈에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즉시 거절되었다. 이전 시험에서 사탄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뛰어내리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해를 입도록 시험하였을 때 그리스도는 비록 그 시험에 굴복하시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듣기는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험이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도전해 온 이상 그는 그 공격을 그대로 참고 계실 수 없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사단의 주문에 귀를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
② 성경에서 끌어낸 논증으로써 그 제안을 물리치셨다. 신명기 6:13절과 10:20절에서 끌어낸,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은 마귀의 제안을 물리치는 데 아주 적절하고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 우리 구주께서는 필수적이며 보편적인 의무로써 이행해야 하는 기본법에 호소하신다. 종교적인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종교적인 경배에 관하여 이 법을 인용하시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그 법을 적용하며 인용하신다.
첫째, 그는 사람의 신분으로까지 낮아지신 때에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공적으로 사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의를 이루신다.
둘째, 그는 그 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써 종교적인 경배의 법은 영원한 의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5. 이 싸움의 결말(11절)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 마귀는 싸움에 실패하여 싸움터를 물러 갔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마귀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의 말씀에 따르는 그 권세에 의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부끄럽고 불명예스런 퇴각을 하였다. 창피스럽게 떠난 것이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움직이기를 단념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더 이상 그를 시험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마귀를 대항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도망할 것이며, 우리의 입장을 지킨다면 그는 우리에게 굴복할 것이다. 마귀가 우리 구주를 떠났을 때 그는 스스로 완전히 패배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마귀는 비록 모든 성도들의 적일지라도 정복된 적이다. 우리 구원의 대장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무장을 해제시키셨다.
(2) 천사들이 와서 승리를 거두신 우리의 구속자를 시중들었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한 천사라도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리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천사들이 그를 시중들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그의 명령을 받들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보라. 그것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첫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그리고 특별한 모든 성도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악한 영들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그 모든 이들을 위해 고용되어 종사하는 거룩하고 복된 영들의 세계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리는 천사들의 기쁨이다.
셋째, 주 예수께 봉사하는 천사들은 단지 음식 뿐만 아니라 이 극심한 피곤에 따라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께 가져다 드렸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궁핍과 곤궁에 처하도록 하실지라도 그들이 멸망하도록 버려두시지 않고 그들의 필요에 대해 효과적인 배려를 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험들 후에 이와 같이 도움을 받으신 것은, 첫째로 계속해서 그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그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그를 신뢰하도록 우리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시험받는 백성들을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시기적절한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점을 기대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의 전도 근거지와 전도의 주제 4:12-17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회당에서 전파하신 사실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마태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서들 특히 요한복음에 있는 몇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 순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과 갈릴리에서의 복음 전파 사이에 삽입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 거주하신 사실과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갈릴리에서의 복음 전파와 함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 그의 시기(12절)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성도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이 주 예수의 귀에 들렸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신의 길 따라 나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투옥 소식을 들으실 때까지는 나라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주님 자신이 나타나기 전에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세례 요한에게 시간을 주셔야 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이지 결코 그의 경쟁자는 아니다. 달과 별은 해가 뜨면 사라진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곧 나라 안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자신의 안전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례 요한의 부족함을 보충하며 요한이 닦아 놓은 좋은 기초 위에 자신의 사역을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증인없이 자신을 내버려두거나 인도자 없이 그의 교회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2. 그가 전파하신 장소(13-16절)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사람들로부터 야만적이고 촌스러운 지방이라고 멸시받던 갈릴리에서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파하셨다. 갈릴리 사람들은 억세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학자로서는 적합하지 않고 군인으로나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그의 거처로써 그가 자라난 나사렛 성읍을 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나사렛을 떠나셨다. 그 사실이 특히 13절에서 주목된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신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곳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냈기(눅 4:29)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환영받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 머무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사렛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방의 한 성읍으로써 규모가 크고 번화한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 여기서 가버나움은 큰 바닷가가 아니라 디베랴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고 언급된다.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와서 사셨다. 그러나 그는 선행을 하면서 돌아다니셨기 때문에 이곳에 계속 정착하지는 않으셨다. 그럴지라도 이곳은 얼마 동안은 그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그는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셨다. 가버나움에서는 그가 환영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며 환영할 것이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이 버린 자를 환영하였다.
(2) 그리스도의 갈릴리에서의 복음 전파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14-16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 예언의 말씀은 이사야 9:1,2절의 말씀이 약간 변형되어 인용된 것이다. 여기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 중 단지 2절만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구절은 자유케 하는 빛이 돌아올 것과 흑암에 사로잡힌 나라들이 번성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태는 그 예언의 말씀을 사람들 가운데에서의 복음의 출현에 적용시킨다. 복음 전파의 장소가 15절에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오심으로 복음이 그 근방 모든 곳에 미쳤다. 의의 태양이 그처럼 확산되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 사람들이 흑암에 있었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아니 그들이 곧 어둠 자체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 속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자세이다. 우리는 앉는 곳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그것은 아주 편안한 자세이다.
그처럼 사람들은 흑암에 앉아 있었고 어둠을 사랑하였다. 현재 밤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 있는 자는 곧 해가 뜨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장님이기 때문에 어둠 가운데 있는 자는 그처럼 빨리 자신의 눈이 열리리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빛을 가졌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빛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2) 복음이 오자 빛이 비쳤다. 복음이 어느 장소, 어떤 영혼에게든지 임하는 때는 그곳을 낮과 같이 만든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길을 가리킨다. 복음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복음은 큰 빛이다. 복음의 빛은 이제 사라져 없어지게 된 그 그림자인 율법의 빛과 비교해 볼 때 더 크다. 복음은 큰 빛이다. 이는 복음이 큰 일들과 매우 중요한 일들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복음의 빛은 오래 지속할 것이며 멀리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그 단어에서 암시된대로 점점 커지는 빛이다. 이제 그 빛이 솟아 올랐다. 사람들이 그 빛을 받았을 때 그것은 단지 날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제 날이 밝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더욱더 밝아질 것이다. 겨자씨와 같고 새벽 빛과 같은 천국 복음은 그 시작이 미미하고 성장이 더디지만 마침내 그 완성에 가서는 놀랍게 커진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빛이 사람들에게 솟아 올랐으나 그들은 그 빛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빛이 사람들에게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3.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내용(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가르침 속에서 강조하신 주제는(실로 그것은 그의 모든 가르침의 총체이며 골자였다) 요한이 전한 것(3:2)과 똑같은 것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왜냐하면 복음은 각기 다른 시대 아래에도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영원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회개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6,7). 그리스도는 그에 앞서서 요한이 전했던 동일한 취지를 전하심으로써 요한의 사역을 크게 존중하셨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의 말을 확고히 하셨다(사 44:26). 그리스도는 이같이 오래되고 평범한 주제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전파하셨다. 이 회개의 주제에 대해 다음 몇가지 점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제일 먼저 이 주제를 전하셨고 이 주제와 함께 사역을 시작하셨다. 우리는 우리 설교의 제재나 술어를 구하기 위하여 하늘에까지 오르거나 음부에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길을 준비하셨고 회개의 교리와 함께 그 이상의 진리들을 밝혀 나아가셨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 주제를 자주 전하셨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 주제를 전하셨는데, 그나 그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주제를 진부하고 케케묵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전에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들려진 것일지라도 다시 전파되어 들려지는 것이 매우 유익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전것보다 더 잘 전파되고 들려져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는 이 주제를 복음으로써 전하셨다. 침울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인 엄격한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그 입술이 벌꿀처럼 달콤하고 은혜로운 예수께서는 회개를 전하셨다.
넷째, 회개를 전하신 이유는 요한에게서와 같이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때가 더 가까워졌으므로 그 논증도 훨씬 더 강해졌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가까왔다'(롬 13:11).
Ⅲ. 첫 제자들을 부르심 4:18-2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듣는 자들"이 되고 후에는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셨다. 이제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의 교제 가운데로 부르신 첫 제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먼저 그리스도에게로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한 실례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가르침 속에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우에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특별히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부름을 받았지만 이들만이 불려 나왔다. 다음으로 이 사실은 목회 사역에 대한 명령과 임명의 한 실례였다.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위대한 학교를 세우실 때 그가 하신 첫번째 일들 중의 하나는 선생들 밑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는 보조 교사들을 임명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제자들이 부름 받은 장소(18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그곳은 예수께서 다니시던 갈릴리 해변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셨다. 그는 헤롯의 왕궁으로도 (소수의 권력자나 귀족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도 가시지 않고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처럼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가장자리에 있었고 그곳 주민들은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고 세련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본래 언어는 사투리가 심하고 거칠기 때문에 그들의 말투가 그들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노출시켰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는 그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관들의 위치를 차지할 그의 사도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그곳으로 가신 것이었다. 이는 그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2. 제자들의 신분(1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두 형제들 즉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를 수 있었다. 회개의 훈련을 받은 자들은 신앙의 기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에 관해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은 형제들이었다. 한 가족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 가문에 명예와 위로가 된다.
(2) 그들은 어부였다. 그들이 어부였다는 사실은 첫째, 그들이 가난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들이 재산을 갖고 있었거나 아니면 장사를 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면 그들은 고기잡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지않고 하나의 오락으로써 즐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들은 무식한 자들이었다. 그럴지라도 이 사실이 무지하고 자격없는 자들이 감히 주제넘게 목회 사역에 뛰어드는 일을 정당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노동하도록 길러진 직업인들이었다. 정당한 직업에 근면하게 종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거룩한 생활에도 결코 장애가 되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보다는 사단의 시험에 더 노출되어 있다.
넷째, 그들은 많은 어려움과 위험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어부라는 직업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 힘들고 위험스럽다. 어부들은 자주 물에 젖고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망을 보며 기다려야 하고 종종 바다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고난을 견디고 일의 결과를 하늘에 맡기면서 일해온 사람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며 그의 제자가 되는 데에 가장 잘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은 모름지기 어려움을 견뎌내야 한다.
3. 그들의 직업(18-21절)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부지런하고 규모있는 살림살이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실례였다. 그들은 새 그물을 사기 위하여 돈을 구하러 아버지에게 가지않고 지금까지 쓰던 것을 수선하는 수고를 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될 수 있는대로 오랫동안 사용한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 부친 세베대와 함께 있으면서 언제든지 그를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부모에 대한 본분을 다하는 자녀를 보는 것은 행복하고 희망있는 전조이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고 전혀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가 일하고 있는 채로 발견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둘째, 그들은 서로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고기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목회자들은 언제나 가르치는 일이나 연구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적절한 시기에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 일만큼이나 필요한 일이다.
4. 그들의 소명(19,21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절).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계속해서 더 가까이 따르라는 부름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해 계획하신 바는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들에게 계획된 이 새로운 영광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전히 어부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그들은 그들에게 적격인 이 새로운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동안 고기잡는 일에 익숙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어부들이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로서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다른 영역으로 데려옴으로써 구원하는 일에 종사한다.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드시는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일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자격을 구비시키고 그들을 이 일에 부르시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시고 그 일에 성공하게 하시는 이도 바로 그이시다.
(2) 그들이 이 일을 하기 위하여 해야만 하는 일은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부지런히 그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한 어떤 봉사에든지 쓰시는 사람들은 그 일에 적합해야 하고 할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며 또한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그리고 항상 그를 따라다녀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라다님으로써 배우는 것보다 더 나은 학습 방법은 없다. 사람을 낚는 사람들은 그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며, 부지런함과 성실함 그리고 온유함을 가지고 그가 하신대로 그 일을 행해야 한다.
5. 이 소명의 성공적인 결과(20,22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야고보와 요한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다.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려는 자들은 그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1) 주 예수의 이같은 능력의 실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은혜의 충족함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훌륭한 격려가 된다. 그의 말씀은 얼마나 강하고 효과적인가!
(2) 제자들의 이같이 유순한 태도의 실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 부름을 받고와서 그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그들의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신실한 종들이 지녀야 할 좋은 품성이다. 부름을 받자 그들은 이에 순종하고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그들이 따르는 이가 누구신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를 따라 나아갔다.
Ⅳ. 그리스도의 전도 개요 4:23-25
1. 부지런한 전도자 그리스도(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천국은 은혜와 영광의 나라이다. 복음은 왕의 대관식 선서를 포함하고 있는 그 왕국의 헌장이며, 그 헌장에 의해서 그는 스스로 은혜를 베풀어 그 왕국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셨다.
(2) 그리스도는 회당에서 전파하셨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주로 거기에서 전파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회당은 '지혜가 그 소리를 높이는'(잠 1:21) 사람들의 집합 장소였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파하시는 데 많은 수고를 하셨다. 그는 온 갈릴리에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셨다. 그는 은혜 베푸시기를 기다리시며 찾아 구원하러 오신다. 그는 두루다니시며 선을 행하셨다. 이제까지 그리스도와 같은 순회전도자가 없었고 그처럼 지칠 중 모르는 전도자도 결코 없었다.
2. 능력있는 의사 그리스도(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그리스도는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병도 고치셨다.
(1) 그리스도는 예외없이 모든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23절). 의사들에게는 고칠 수 없는 난치병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고질적인 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질병들을 다 고치셨다. 여기서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세 단어가 사용되었다. 즉 그는 모든 병과 모든 질병 혹은 약함과 모든 고통들을 고치셨다. 그리스도께서 한 마디 말씀으로 고칠 수 없을만큼 그렇게 악하고 고치기 힘든 병이란 결코 없다. 여기서 특별히 세 가지 질병이 자세히 언급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신체적으로 가장 쇠약한 질병인 중풍과 정신적으로 가장 악한 병인 간질 그리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비참한 재난인 귀신들림이 그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질병을 다 고치셨다.
(2) 그리스도는 수많은 환자들을 다루셨다. 얼마나 많은 무리가 사방에서 그에게로 몰려왔는가! 허다한 사람들의 무리가 갈릴리와 그 근방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몰려왔다. 그 이유는,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그처럼 많은 무리가 그에게로 온 이유로써 제시되고 있다. 그의 소문이 그렇게 퍼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소문이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 것이다. 그 소문이 외치는 소리는 '와 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치시며 병을 고치셨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에게로 오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들에 관해서 살펴보되 그 치유들의 기적과 자비 그리고 신비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그 치유들의 기적 : 그 치유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명백히 말할 수 있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이었다. 자연은 결코 이러한 일들을 일으킬 수 없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임을 증거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그가 하신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 3:2). 그의 치유하심과 가르치심은 대체로 함께 이루어지는데, 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를 확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행 1:1).
2) 그 치유들의 자비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 대부분이 병고치는 것이었으며 그 모두가 축복과 은혜였다(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를 제외하고). 왜냐하면 복음시대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기초를 두고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병고치심으로 백성들을 얻고자 하셨고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사랑의 끈으로 이끌고자 하셨다(호 11:4). 병고침의 기적은 그의 교훈이 신실한 말씀임을 증거하였고 그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판단을 확증해 주었다. 또한 그것은 그의 교훈이 모두 받아들일만한 것임을 증거하고 사람들의 편견에 영향을 미쳤다. 그 기적들은 큰 일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일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주신 선한 일들이기도 하였다.
3) 그 치유들의 신비 : 그리스도는 신체적인 질병들을 고치심으로써 세상에 오신 그의 위대한 목적이 영적인 질병들을 고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하였다. 죄는 병과 약함이며 영혼의 고통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오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질병들을 고치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에 대한 특별한 기사들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는 영광스러우신 구속자의 명예와 찬송을 기리기 위하여 설명되고 언급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