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상남도 마산의 옛 이름 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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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5:11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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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옛 이름 합포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편 「형승」조에 “합포(合浦)는 큰 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구덕의 시에는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하다”라고 했던 합포는 마산의 옛 이름이다. 신라시대에는 골포(骨浦)라는 작은 어촌이었으며, 1274년에는 원나라가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만든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마산포가 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숙종 때 조창이 들어섰으며, 1898년 개항을 하면서 남해안의 중심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푸른 물 눈에 보이네”라고 노래한 시인 노산(鷺山) 이은상의 고향이고,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아귀찜 하면 바로 떠오르는 마산은 1970년 3월 마산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무학산
마산항
문신미술관
마산은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푸른 물 눈에 보이네”라고 노래한 시인 노산(鷺山) 이은상의 고향이다. 1970년 3월 마산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마산의 북쪽은 함안군이다. 원래 아시랑국(阿尸郞國) 또는 아라가야(阿羅加耶)의 터였으나, 신라 법흥왕에 의하여 멸망한 뒤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관풍안』에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산이 오히려 낮아 배를 쉬어갈 수 있다’는 뜻을 지녔다는 여황산이 진산이며, 봉화산ㆍ서북산ㆍ오봉산 등이 솟아 있는 이 군을 남강과 낙동강이 적시며 흐른다. 함안군의 가야읍에는 아라가야의 옛 무덤 70여 기가 남아 있는데, 함안 지역의 형승은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낙동강과 풍탄진(楓灘津)이 고을의 북쪽을 가로지르고, 여항산과 파산(巴山)이 고을의 남쪽에 버티고 있다. 동쪽은 합포로 이어지며, 서쪽은 의춘(경상북도 의령의 옛 이름)의 봉우리와 언덕에 닿아 서로 잇따르며, 낮고 습한 들녘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함안 땅에 있던 인비원(仁庇院) 부근을 준마를 타고 지나던 퇴계 이황이 남긴 시 한 편이 전해진다.
인비원 앞에서 준마를 타고
정암나루에서 배를 불러 돌아가네.
사람에게 헤어질 곳 물어보니
모곡 앞 냇가가 가장 좋다고 하네.
함안에 있는 칠원은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의 현으로, 본래 신라의 칠토현(漆吐縣)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안 땅이 “예로부터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고 실려 있다. 이는 우리나라 지형이 대체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데에 비해 함안 땅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물줄기가 모두 남강이 있는 서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때 함안 땅은 임금이 거주하는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배역의 땅이라 하여 홀대를 받았다.
칠원 낙동강변에 있는 이름난 정자가 경양대(景釀臺)다. 경양대는 우질포 서쪽 벼랑에 우뚝 솟은 바위로, 위쪽은 손바닥처럼 평탄하여 10여 명이 앉을 만하였다. 고려 때 문장가인 이인로가 이곳에 와서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첨은 경양대를 두고 “강 위에 가을빛이 맑고 그윽한데, 원융(元戎, 우두머리)이 한가한 날에 배를 띄웠다. 물은 쪽빛이고 모래는 눈 같으며 산은 병풍이며 술은 기름 같다. 석벽은 아침저녁 물결에 깎이고, 피리 소리는 고금의 시름을 깨뜨린다. 이 중에 네 가지 일이 모두 다 흠 없으니 흠뻑 취하여 촛불 잡고 논들 어떠리” 하고 노래하였다.
칠원면 무기리에는 조선 후기의 연당인 함안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08호로 지정된 이 연당을 지은 사람은 주재성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호남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을 때 이에 분연히 맞서 함안 일대의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倡義)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가 의병을 이끌고 분치령(分峙嶺)을 넘어가니 김해진(金海鎭)의 관병이 합세하였고, 이인좌의 군은 감히 진출하지 못하고 물러섰다가 자멸하여 난이 평정되었다. 주재성은 의병을 처음부터 도모한 사람은 물론이지만 관군에게도 사재를 털어 나누어주었으므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양무원종훈일등공신(揚武原從勳一等功臣)에 서(敍)하였고 출사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관계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조 때에도 높은 벼슬이 추서되었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관군들이 원대 복귀하는 길에 주씨의 향리에 모여 마을 입구에 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당을 파고 당주(塘洲)를 만든 뒤 연당의 이름을 국담(菊潭)이라 부르고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고 하였다. 또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그 문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고마움에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마음이었다. 그 후 주재성은 호를 국담이라고 지은 후 서당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무기리에 솟을삼문이 붉디붉은 정려(旌閭)로 장식되어 있는 옛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이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주씨(周氏) 고가’다. 주씨 고가는 국담 조재성의 생가이며 주씨의 종가임을 일컫는 말이다. 정면이 5칸인 이 집은 사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집을 개수하는 바람에 그 원형을 상실하고 말았다.
방형에 가까운 국담의 연당은 산석(山石)을 써서 봉래산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았다. 연당 주변에 정자와 누각을 지었고, 충효사를 지었다. 하환정(何換亭)은 동쪽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연당 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다. 풍욕루(風浴樓)는 댓돌을 높이 쌓은 3칸 규모인데,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이들은 모두 후대에 지은 것들이다. 이 연당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한 조선 후기 연못의 실례로, 한국 정원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 때의 정치가인 윤환과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주세붕 그리고 무기연당을 만든 주재성이 살다 간 함안군과 인접한 곳이 창원시다.
마산 가포 야경
마산은 조선시대에 마산포가 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숙종 때 조창이 들어섰으며, 1898년 개항을 하면서 남해안의 중심 도시로 거듭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산의 옛 이름 합포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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