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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일척(乾坤一擲)
하늘이냐 땅이냐를 한번 던져서 결정한다는 뜻으로, 승패와 흥망을 걸고 마지막으로 결행하는 단판 승부를 비유한 말이다.
乾 : 하늘 건(乙/10)
坤 : 땅 곤(土/5)
一 : 한 일(一/0)
擲 : 던질 척(扌/15)
(유의어)
일척건곤(一擲乾坤)
재차일거(在此一擧)
권토중래(捲土重來)
龍疲虎困割川原
億萬蒼生性命存
용도 지치고 범도 피곤하여 강과 들을 나누니 억만창생의 목숨이 보전되었네
誰勸君王回馬首
眞成一擲賭乾坤
누가 왕에게 권해 말머리 돌려 실로 일척에 건곤을 걸게 했는가
- 한유(韓愈) 과홍구(過鴻溝)
당(唐)나라의 문인이자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가 옛날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천하를 놓고 싸우면서 경계선으로 삼았던 홍구(鴻溝)를 지나다가 이 시를 지었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건곤일척이 유래했다.
홍구는 전국시대 위혜왕(魏惠王)이 도읍을 대량으로 옮긴 후 수리 공정을 위해 팠던,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연결하는 운하로, 지금은 하남성 중모(中牟)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위나라는 홍구의 물을 이용한 수공을 받고 진(秦)나라에 멸망을 당했다. 홍구는 또한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쟁패하면서 국경선으로 삼았던 곳이다. 후에 쌍방이 휴전을 했지만 유방은 휴전 협약을 깨고 홍구를 건너 결국은 항우를 멸망시켰다.
한국 장기에는 없지만 중국 장기판에 있는 한(漢)나라와 초(楚)나라의 경계선인 가운데의 강이 바로 홍구이다. 그리고 중국 속담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킨 강을 건넌 졸때기(過了河的卒子)란 말이 있는데, 여기의 강도 바로 홍구이다.
한유는 지난날 유방을 보필하여 유방으로 하여금 천하를 차지하게 만든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공적을 생각하며 이 시를 지었는데, 한유는 이 당시의 상황이 실로 천하를 건 일대 도박이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를 통일했던 진시황이 사망한 후, 초나라를 재건하고 진나라 멸망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항우 등 항진(抗秦) 세력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했다.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 된 항우는 팽성(彭城)을 수도로 삼고,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했다. 그리고 진나라를 타도하는 데 공이 큰 사람들을 제후로 봉했다.
항우는 특히 위험인물인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해 오지인 파촉(巴蜀) 땅으로 몰아냈다. 천하는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항우가 천하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의제가 항우의 사주를 받은 영포(英布)에게 시해를 당하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제후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다.
항우가 각지의 반군들을 평정하는 사이 유방은 관중 땅을 공략하고 이어 56만 대군을 몰아 단숨에 팽성을 점령했다.
(▶ 암도진창(暗渡陳倉) 참조)
그러나 급보를 받고 말머리를 돌려 달려온 항우의 3만 기병에게 대패한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를 적진에 남겨 둔 채,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형양(滎陽)으로 달아나 군사를 정비하고 항우와 대치했다.
그 후 쌍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다.
(▶ 홍구위계(鴻溝爲界) 참조)
항우는 약속을 지켜 유방의 아버지와 부인을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하지만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계책에 따라,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 양호유환(養虎遺患) 참조)
이듬해 유방은 한신과 팽월 등의 군사와 연합하여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초나라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벌여 초나라 군대를 섬멸했다.
(▶ 사면초가(四面楚歌) 참조)
항우는 달아나다가 오강(烏江)에 이르러 자결했고, 유방은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온다.
[참조]
▶ 암도진창(暗渡陳倉)
은밀히 뒤로 돌아가 공격하라
暗渡陳倉 示之以動,
利其靜而有主,益動而巽.
몰래 진창을 건넌다는 뜻으로 정면에서 공격하는 척하다 우회한 뒤 적의 배후를 치는 계책이다.
짐짓 아군의 의도를 모르는 척 내보이며 적으로 하여금 엉뚱한 곳을 지키게 만든 뒤 그 틈을 노려 은밀히 적의 배후로 다가가 습격한다.
이는 밑에서 활발히 움직이자 마치 바람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날마다 커지듯이 크게 진척된다는 뜻을 지닌 익괘(益卦)의 익동이손(益動而巽) 단사와 취지를 같이한다.
시지이동(示之以動)은 고의로 아군의 움직임을 적의 눈앞에 노출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병을 활용하려는 속셈이다. 관건은 정면에서 공격하는 척하며 우회한 뒤 적의 배후를 치는 데 있다.
암도진창은 사기 고조본기의 일화에서 나왔다. 해당 대목이다.
기원전 206년 4월, 한왕(漢王) 유방이 떠나자 항우가 병사 3만 명을 풀어 그 뒤를 따르게 했다. 한왕이 관중(關中)을 떠나 한중(漢中)으로 들어갈 때 장량의 권고를 따라 잔도(棧道)를 불태웠다.
제후들이 은밀히 군사를 움직여 습격하는 것에 대비하고, 또 항우로 하여금 유방이 동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해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좇아 옛날 초나라로 가는 길을 통해 옹왕(雍王) 장함(章邯)을 급습했다. 장함은 진창(陳倉)에서 한나라 군사를 맞이해 공격했으나 패주했다. 호치(好畤)에서 재차 싸웠지만 다시 패해 도주했다.
여기에는 암도진창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고 진창에서 한나라 군사와 장함의 군사가 싸웠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암도진창은 원나라 무명씨의 잡극인 '암도진창'이 출전이다. 여기에는 이같이 묘사되어 있다.
번쾌로 하여금 대낮에 잔도를 수리하도록 하고, 나는 몰래 옛길을 따라 건너갈 것이다. 초나라 병사들은 이런 지략을 알지 못하고 분명 잔도 위에서 수비할 것이다. 나는 진창의 옛 길을 통해 초나라로 돌아가 공략하면 그들은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당할 것이다.
암도진창의 제2절 제목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이다.
明(명)은 적을 속이기 위해 짐짓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잔도는 험한 벼랑에 나무로 가설해놓은 다리를 지칭한다.
한중에서 세력을 형성한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동쪽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한신은 군사들을 시켜 불타버린 잔도를 수리하는 척했다. 관중을 지키던 옹왕 장함은 군사들을 잔도로 집결시켰다.
장함이 잔도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여 진창을 점령하고 관중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할 것처럼 행동을 취하여 적의 주의를 끈 뒤에 방비가 허술해진 후방을 공격하는 계책을 비유하는 암도진창 성어가 나왔다.
적에게 거짓된 정보를 흘려 역으로 이용하거나, 남녀 간의 부정한 행위를 비유할 때도 사용한다. 여러 면에서 성동격서와 닮았다. 적을 미혹시켜 은밀히 공격하는 것이 그렇다.
다만 성동격서는 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공격지점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인데 반해 암도진창은 공격 방향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삼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을 몰래 빠져나가 촉한(蜀漢)을 제압할 때도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사천으로 들어가는 검각(劍閣)을 촉한의 장수 강유(姜維)가 굳게 지켰다.
등애가 아들 등충(鄧忠)에게 정병 5,000명을 준 뒤 각기 도끼와 정 등의 연장을 가지고 높고 위험한 곳을 만나면 산을 뚫어 길을 내도록 했다.
또 군사 3만 명을 뽑아 각기 마른 양식과 새끼 따위를 들고 진군하면서 100여 리마다 영채를 세우고 3,000명씩 주둔하게 했다.
음평을 출발한 지 20여 일 만에 깊은 산속을 뚫고 700여 리를 전진했다. 마지막으로 단 2,000명만이 남았을 때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등애가 높은 곳에 올라가보니 길을 내기 위해 먼저 출발한 등충의 병사들이 모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등애가 다가가 곡절을 묻자 등충이 대답했다. '이 영마루의 서쪽은 모두 험한 절벽이어서 더 이상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된 듯하여 우는 것입니다.'
등애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우리 군사는 여기까지 이미 700리를 왔고 이제 여기만 지나면 곧 강유(江油)인데 어찌 도로 물러간단 말인가!'
그러고는 모든 군사를 불러놓고 이같이 호령했다.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범의 새끼를 잡겠는가?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곳에 왔으므로 만약 공을 이루기만 하면 함께 부귀를 누릴 것이다.”
“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등애는 먼저 병기들을 절벽 밑으로 굴려 내리게 하고 다음에는 담요로 자기의 몸을 싸고 솔선해서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부장 가운데 담요가 있는 자는 그것으로 몸을 싸서 굴러 내려가고 담요가 없는 장병은 서로 밧줄로 허리를 매어 연결한 후 나무 위로 올라가 절벽을 넘어가는 방법을 썼다.
등애는 이런 방법을 통해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강유성을 향해 진격할 수 있었다.
당시 강유성을 지키고 있던 촉한의 장수 마막(馬邈)은 한중이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는 있었으나 큰길만 방비했다. 내심 강유가 주력군을 이끌고 검각을 지키고 있으리라 믿었다.
이때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위나라 장수 등애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군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성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마막이 크게 놀라 항복했다. 등애가 곧 마막을 안내자로 삼아 음평의 소로에 주둔시켜놓았던 모든 군사를 강유성으로 불러 모았다. 이 사실을 접한 성도의 유선이 황급히 백관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결국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대장으로 선출했다. 제갈첨은 제갈량이 47세 되던 촉한의 건흥 5년(227)에 출생했다.
당시 제갈량은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온갖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제갈첨을 돌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전투 현장에 있으면서 늘 바쁜 와중에도 계자서(戒子書) 등의 책을 써 보냈다. 자식이 훌륭히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제갈첨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민했으며 특히 기억력이 좋았다. 커서는 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출정하기에 앞서 형 제갈근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제갈첨은 벌써 8세가 되었고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가 조숙하여 중요한 인재가 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제갈량은 불행히도 제갈첨이 겨우 8세일 때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더구나 그의 모친 황씨도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그를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사람이 없었다. 이로 인해 제갈첨은 학식이 부족했다. 정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군사를 통솔해 전쟁을 수행해본 경험도 전혀 없었던 까닭에 부친의 뒤를 잇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살아생전 황씨는 제갈첨이 어렸을 때부터 그의 총명을 오히려 크게 우려했다. 체계적인 학식을 익히지 못한 총명은 오히려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임종 때 오직 충효에 힘쓰라는 말만 유언으로 남겼다.
제갈첨은 부친 덕에 양친을 모두 여의었음에도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17세 때 유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부마도위가 되고, 뒤에 무향후(武鄕侯)의 작위까지 이어받게 되었다.
우림중랑장에 임명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사성교위, 시중, 상서복야가 되었고 마침내는 군사장군(軍師將軍)의 직함을 더하게 되었다. 촉한의 백성은 모두 제갈량을 사모한 까닭에 그에게 특별히 호감을 갖고 있었다.
조정에서 좋은 법규와 정책이 나오게 되면 설령 제갈첨이 주도해 만든 것이 아닐지라도 백성은 서로 입을 모아 이같이 말하곤 했다. “이번 일도 갈후(葛侯)가 만든 것이라고 하네!”
그에게는 늘 아름다운 명성이 넘쳐났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었다. 유선이 성도와 후방에 있는 모든 군사를 그러모아 제갈첨에게 주고 곧바로 등애의 진공을 저지하게 했다. 패배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제갈첨이 패사하자 유선은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해 백관들과 함께 성을 나와 항복했다. 촉한은 이로써 패망하고 말았다. 등애의 암도진창 결단이 촉한 정벌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셈이다.
▶ 홍구위계(鴻溝爲界)
홍구로 경계를 삼다라는 뜻으로, 대치 상태에 있는 쌍방이 경계선을 나누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홍구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있던 전국시대의 운하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말기에 군웅이 할거하여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는데, 그 가운데 초(楚)나라 항우와 한(漢)나라 유방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다. 초기에는항우가 우세하였으나, 나중에는 유방의 세력이 더 커져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한나라의 종리매가 형양(滎陽)의 동쪽을 방어하고 있을 때, 초나라 군대가 당도하였다. 한나라 군대는 초나라를 두려워하여 지세가 험한 곳으로 피하여 대치하였는데, 한나라는 식량이 넉넉한 반면에 초나라 병사들은 식량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 항우는 유방의 부모를 볼모로 잡고 있었다. 유방은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 부모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고, 항우는 이를 들어 주는 대신 홍구를 경계선으로 삼아 서쪽은 한나라가 차지하고 동쪽은 초나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項王乃與漢約,
中分天下,
割鴻溝以西者爲漢,
鴻溝而東者爲楚.
이를 홍구지약(鴻溝之約)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방의 부하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이 기회를 놓쳐 초나라를 섬멸하지 못한다면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우환을 남기는 격이라고 하면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파견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니,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는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홍구위계는 대치 상태에 있는 쌍방이 경계를 정하여 구역을 나누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 양호유환(養虎遺患)
호랑이를 길러 근심을 남긴다, 남의 사정을 봐주었다가 후에 화를 입게 된다는 말이다.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진(秦)나라 말기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둘로 나누어 서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차츰 유방쪽이 유리한 형세로 되어 가고 있었다.
유방은 이때가 적당하다고 보고 전에 사로잡힌 부친 태공과 부인 여씨를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자 항우는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로부터 서쪽을 한(漢)의 영토로, 동쪽을 초(楚)의 영토로 한다는 조약을 맺고 태공과 영씨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군대를 철수시켜 동쪽으로 돌아갔다.
유방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만류했다. “한나라는 이제 천하의 반을 차지했고, 제후들과 인심도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는 지쳤고 식량도 모자라니 이는 초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천하를 탈취해야 합니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이는 호랑이를 길러 화근을 남겨두는 것이 됩니다.”
유방은 이 말에 수긍하고 즉시 항우를 공격했다. 남을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화근을 남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 楚나라 노랫소리, 궁지에 빠진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와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천하를 다투면서 5년 동안 싸움을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쌍방은 싸운 지 4년째 되던 해의 가을, 홍구(鴻溝)의 동쪽을 초나라, 서쪽을 한나라 영토로 하며, 항우가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돌려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휴전협정을 맺었다.
▶ 홍구위계(鴻溝爲界)
항우는 약속대로 동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유방은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계책에 따라 협정을 위반하고 항우를 공격했다.
항우는 해하(垓下)에 진을 치고 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항우의 군사는 10만, 한나라 군사는 명장 한신(韓信)이 이끄는 30만 대군, 유방의 20만 대군, 그리고 팽월(彭越)의 3만 군사, 그리고 경포(黥布)와 유가(劉賈)의 군사를 합쳐 약 60만 대군이었는데, 주력은 한신의 군대였다.
천하를 놓고 진검 승부를 펼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나라 군대는 항우의 군대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항우의 군대는 한군에게 물샐틈없이 포위된 데다 군량마저 떨어져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한나라 군사들이 펼친 심리전이었다. 항우는 초나라 군사들이 한군에게 모두 항복한 줄 알고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항왕의 군대는 해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병력은 부족했고 식량도 떨어진 상황에서 한나라 군대와 제후의 군사들에게 여러 겹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밤에 한나라 군대가 있는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왔다. 항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이리 많단 말인가?
項王軍壁垓下, 兵少食盡,
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
夜聞漢軍四面皆楚歌,
項王乃大驚曰, 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
항우는 이 싸움에서 대패했고, 계속 쫓기다가 오강(烏江)에 이르러 자살하고 말았다.
▶ 건곤일척(乾坤一擲)
▶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 권토중래(捲土重來)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데,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는 역사 기록에서 사면초가가 유래했다.
그런데 이런 심리전을 사용했던 유방이나 한신이나 이에 당한 초패왕 항우와 그의 부하들은 모두 남방의 초나라 출신이다.
이 초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의 노래를 초가(楚歌)라고 하는데, 감상적이고 애잔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구슬프기 짝이 없다.
부모처자를 두고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전쟁과 향수에 시달려 온 항우의 병사들 중 구슬프고 애잔한 고향의 가락을 듣고 탈영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이 초가는 후에 한나라의 조정을 중심으로 유행하다가 나중에 부(賦)라는 문학 장르로 발전하는데, 이를 한부(漢賦)라고 한다.
건곤일척(乾坤一擲)과 한유(韓愈)
건(乾)은 태극기의 좌상에 위치한 모양으로 주역(周易) 8괘의 하나다. 한편, 곤(坤)은 태극기의 우하에 위치한 모양으로 역시 주역 8괘의 하나다.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콜 수상과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꼽히는 덩샤오핑, 이 두 인물은 한유가 최초로 꺼내 든 '건곤일척(乾坤一擲)' 이 네 글자의 비장미를 직접 느껴보는 그런 순간들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필자는 막연히 추측해 본다.
어느 가을 오후로 약속을 하고 테헤란로에서 반갑게 그를 만났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몇 분 후에 필자가 그에게 불쑥 건넨 질문이 하나 있었다. "네가 직접 경험한 독일 사람들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해 줄 수 있겠니?" 독일에 10년 이상 머물다가 귀국한 지인의 답변이었다. "독일 사람들 합리적이야."
'합리적이다'는 이 말도 때론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행히 그의 온화한 표정과 함께 전달받은 이 말의 뉘앙스는 긍정적인 쪽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1990년 독일 통일까지 일사천리로 가능케 했던 마법의 키워드 하나를 엿들은 기분이었다. 이 들뜬 기분 덕분에 그와 주고받은 독일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 통일을 주도한 것은 드러난 소수 정치인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아니었다. 동서독 국민의 몸에 밴 합리적 기질이었다. 이 저력이 마침 유리하게 전개되던 천시(天時)와 결합해 지극히 당연한 열매인 통일을 거의 빛의 속도로 이뤘구나, 이런 지점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이라, 우선 글자부터 살펴보자. 건(乾)은 태극기의 좌상에 위치한 모양으로 주역(周易) 8괘의 하나다. 음양으론 양(陽), 사상(四象)으론 태양(太陽)에 속한다. 대략 하늘을 뜻한다. 한편, 곤(坤)은 태극기의 우하에 위치한 모양으로 역시 주역 8괘의 하나다. 음양으론 음(陰), 사상으론 태음(太陰)에 속한다. 대략 땅을 뜻한다.
'주사위를 한 번 던지다', 이 동작이 일척(一擲)이다. 따라서 '마치 하늘과 땅처럼 큰 뭔가를 남김없이 걸고, 오직 한 번으로 최후 승부를 겨루다', 이게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의미다. 중국에서는 '고주일척(孤注一擲)'이 훨씬 자주 쓰인다. 비록 앞 두 글자가 바뀌었지만, 뜻은 별반 차이가 없다.
승패 예측이 어려운 일에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는 상황이다. 심장이 멎을 듯한 비장미가 두 사자성어 해석의 핵심이다. 결사전의 용기에 방점이 찍힌 파부침주(破釜沉舟) 와는 쓰임에서 결이 조금 다르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은 당송팔대가에 속하는 한유(韓愈)가 지은 과홍구(過鴻溝)라는 제목의 시에서 유래한다. 그는 유방과 항우의 최후 대결이 펼쳐졌던 홍구 지역을 지나다가 문득 웅장한 시상에 사로잡힌다. 호방했던 유방의 한나라 진영과 천하장사 항우의 초나라 진영의 최후 결전, 당시 중국 영토 거의 전부가 걸린 이 운명의 한 판에서 유방이 우여곡절 끝에 승리한다.
이 건곤일척(乾坤一擲)으로 중국사의 긴 난세에 종지부가 찍혔다. 끝내 겹겹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항우는 생을 마감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바로 이 포위망에서 유래한 사자성어다.
그러면 건곤일척(乾坤一擲)과 함께 누가 떠오르는가. 필자에게 이번 숙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자엔 눈을 씻어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력이 약해진 탓일까. 시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20세기 후반의 정계로만 우리 시야를 좁혀보면 어떠한가. 자연스럽게 당대 지구촌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두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콜 수상과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꼽히는 덩샤오핑, 이 두 인물은 한유가 최초로 꺼내 든 '건곤일척(乾坤一擲)' 이 네 글자의 비장미를 직접 느껴보는 그런 순간들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필자는 막연히 추측해본다. 그 긴장된 순간 그들의 손에 숨겨진 마법의 패들이 이제 AI까지 포함한 우리 눈에도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시 독일과 중국 각각 그들 공동체 대다수의 몸에 밴 '합리성'과 '경제하려는 의지'였다.
건곤일척(乾坤一擲)
천하를 건 운명의 승부를 겨루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천하를 건 운명의 승부를 겨룬 영웅들이 많았다. 그래서 흔히 ‘이기면 천하를 얻고 지면 목이 달아난다’고 하였다. 그런 일은 정치적이거나 권력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운명을 건 투자’로 어떤 이는 일확천금을 손에 쥐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쪽박을 차기도 한다. 그래서 운명을 건 한판 승부는 매우 신중하여야 하며 대세를 잘 살펴야 하고 전략과 지략 그리고 용맹이 겸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하늘이 도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운명을 건 한판의 승부를 일컬어 사람들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이라 해 왔다. 여기서 건(乾)은 하늘을 일컫고 곤(坤)은 땅을 말한다. 일척(一擲)은 ‘한번 내던지다 한 번으로 승부를 겨루다’ 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건곤일척은 하늘과 땅을 건 싸움 즉 운명을 건 싸움을 의미한다.
진나라는 시황제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하였다. 시황제는 자신이 통일한 나라를 튼튼히 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 천하를 두루 돌며 철권통치를 했다. 그러나 시황제의 이러한 철권통치는 백성들을 핍박하였으며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런 와중에 시황제는 5번째의 순행 중 죽고 말았다. 이때 이른바 최대의 국정농단 사건이 일어났다. 시황제를 수행하던 환관조고(宦官趙高)는 시황제의 죽음을 은폐하고 맏아들 부소(扶蘇)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라는 시황제의 유언을 조작하여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등 사기극을 벌였다. 그리고 끝까지 국정을 농단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으나 이미 나라는 기울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반란이 기원전 209년에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이었다.
천하는 다시 대혼란에 빠졌다. 이때 각지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선 영웅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귀족 출신의 젊은 패기의 장수 항우였다. 항우는 젊은 패기와 기백으로 천하를 평정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3년에 걸친 대격전 끝에 승승장구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기원전 206년에 9개의 성을 차지하여 팽성(彭城-지금의 서주徐州)을 수도로 삼고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이라 칭하며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유방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제후에 봉하는 등 천하는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항우의 이러한 패업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패권을 장악한 이듬해에 명목상이지만, 초의 왕의 자리에 있는 의제(義帝)를 시해하였다. 그리고 논공행상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그의 정치는 사려 깊지 못했으며 매우 즉흥적이었다. 항우는 덕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제(齊)의 전영(田榮), 조(趙) 진여(陣餘), 양(梁) 팽월(彭越) 등 많은 장수가 각지에서 항우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나라는 다시 대혼란에 빠졌다. 이에 항우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항우와 유방의 관계를 보면, 원래 항우는 유방을 가장 두려워하였으며 유방 또 항우가 가장 두려운 상대였다. 누구든지 관중 땅을 차지한 사람이 관중의 주인이 되며 나아가 천하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것은 항우에 의해 죽은 의제가 생존 시에 내린 조서였다. 그런데 유방은 가장 먼저 항우를 도와 관중을 평정하였으나, 천하를 거머쥔 항우는 유방에게 멀고 먼 불모지인 파촉(巴蜀) 지방의 땅을 주었다. 유방은 불만이 컸지만, 그 불만을 숨기고 옛 한나라의 적통을 내세우며 백성들을 보살피고 부하들을 덕으로 다스리며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뒷날 항우가 정벌에 나선 사이 관중 땅을 차지해 버렸다. 그리고 한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봄이었다. 항우는 제나라를 몇 차례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했다. 유방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항우가 제나라와의 전투에 몰입하는 사이에 항우가 의제를 시해한 사건에 의해 백성과 각 고을의 호족들이 불만을 품고 항우의 명분 없는 등극에 대한 악행을 규탄하는 틈을 이용하였다. 유방은 각 고을에 의제를 시행한 명분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각 제후에게 항우를 규탄하는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의제를 정중하게 장사 지내 주었다. 이에 각 지역 제후들과 민심은 유방에게 쏠렸다. 그 덕택으로 유방의 군사는 56만에 이르고 이에 힘을 얻은 유방은 그 56만을 이끌고 팽성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전장에 있던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군사를 돌이켜 유방을 향해 돌진해 왔다, 유방의 군대도 항우의 군대를 맞이하여 싸웠으나 팽성 부근에서 대패하여 유방의 군대는 거의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형양(滎陽)까지 도망쳤으나, 경황이 없었던 지라 부친과 부인은 적군에 남기고 오는 등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유방의 부친과 부인은 항우의 포로가 되었다. 형량에서 유방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추격해 오는 항우의 군사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간신히 몸만 빠져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유방은 명장 한신이 제나라를 수습하게 되고 옛 세력들이 다시 규합되는 등 기력을 회복하였으며 관중에서 병력의 보급을 받아 전력을 회복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유방은 항우의 군대와 여러 차례 전투하여 초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팽월도 양나라 땅에서 항우의 초군을 격파하여 승기를 잡았다. 몇 차례 유방의 군대에 패배한 항우의 초군은 전열의 혼란이 닥쳤으며, 각지에서 공격해 오는 유방의 군대를 맞이하여 싸우느라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팽월 등이 유방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는 바람에 군량의 보급까지 차단되고 말았다.
항우의 군대는 군량이 바닥나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탈자가 생겨났다. 여러 차례 전투에서 사망한 군사들과 도망간 군사들이 많아 군사의 숫자도 현저하게 줄었다. 항우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항우는 하는 수 없이 유방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홍구(鴻溝)를 중심으로 천하를 둘로 나누어, 서쪽은 유방의 한나라가 동쪽은 항우의 초나라가 차지하는 것이었다. 유방이 이에 수락하는 조건으로 항우는 유방의 부친과 부인을 돌려주었다.
그때가 한나라 건국 4년, 기원전 203년이었다. 이 조약으로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팽성으로 돌아갔다. 유방도 부친과 부인 등 식솔들을 이끌고 군대를 돌이켜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등이 간곡하게 아뢰었다. “지금 우리 한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였으며 제후들도 우리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나라의 군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며 식량도 떨어졌습니다. 이런 징조야말로 하늘이 저 무도한 항우의 초나라를 없애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입니다. 지금 바로 초나라를 정복하여 천하를 평정하여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를 키워서 뒤에 화를 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간곡한 재촉에 유방은 결심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이듬해 출정했다. 한나라 군대는 한신, 팽월 등 명장들과 함께 초군을 추격하여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 싸움은 항우와 유방이 최후를 건 싸움이었다. 그리고 유방은 승리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한나라의 시대를 열었다. 항우는 패배하여 스스로 자결하였다. 한때 강성한 군대와 용맹으로 승승장구하던 귀족 출신 항우는 자신만큼 용맹하지도 군사적으로 강성하지도 못했던 촌부 유방에게 대패한 사연을 두고 뒷날 사람들의 해석은 분분하다.
그 해석의 대략을 보면, 항우는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용맹함과 재주를 가졌으나 잔인하였고 도량이 좁아 자주 흥분하였기에 천하를 잃었다. 유방은 항우만큼 용맹하지도 지략이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귀를 열어 부하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았으며 덕이 있었으며 명장들을 부릴 줄 알았기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뒷날 당나라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이고 당송 8 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 768~824, 퇴지, 退之, 창려, 昌黎, 문공, 文公)가 이 이야기를 소제로 과홍구(過鴻溝)라는 시를 지었다.
龍疲虎困割川原(용피호곤할천원)
용은 지치고 범은 피곤한데 강을 사이에 두고 땅을 나누니
億萬蒼生性命存(억만창생성명존)
억만창생(백성)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구나
誰勸君王回馬首(수권군왕회마수)
그 누가 군왕의 말머리를 돌리게 하여
眞成一擲賭乾坤(진성일척도건곤)
참으로 하늘과 땅을 건 도박을 하게 하였는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이란 고사숙어(古事熟語)는 이 시에서 유래했다. 이 시에서 말하는 홍구(鴻溝)는 지금의 하남성(河南城)에 있는 가로하(賈魯河)라는 강(江)이다. 천원(川原)은 이 강과 주변의 들판이다. 시황제의 진나라가 망하고 다시 분열된 천하를 통일하고자 항우와 유방이 이 강을 경계로 하여 천하를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은 항우와 강화 조약을 맺은 유방의 말머리를 돌리게 하여 이 강을 사이에 두고 항우와 격전을 벌이게 했다. 그 전투는 천하를 건 최후의 싸움이었으며 매우 치열하였다. 위의 시는 단순하게 보면, 영웅들의 천하를 건 도박과 같은 싸움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영웅들의 그 싸움에 죽어나는 것은 죄 없는 백성임을 말하고 있다.
인류의 수많은 전쟁은 군인의 목숨만 앗아간 것은 아니다. 죄 없는 백성들의 목숨과 삶도 함께 앗아갔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죄 없는 백성들은 전장에 징집되어 희생되었고 늙은이와 부녀자들은 전쟁의 참화에 함께 희생되었다. 그래서 손자는 병법에서 ‘모든 전쟁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나라 간의 전쟁이든 나라 안의 전쟁이든 모두 포함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만, 역시 모두 건곤일척(乾坤一擲)이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기습 남침인 6.25는 엄청난 피해를 남긴 채 분단을 해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적대적 감정만 남기게 되었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강력한 병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압박하지만, 러시아의 피해도 막대하다. 그 사이에서 양국의 죄 없는 군인들이 희생되고 우크라이나 국민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유랑민의 신세가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건 전쟁은 막아야 한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은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만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권력투쟁과 이권 쟁탈의 현장에서도 발생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도 일종의 건곤일척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권력을 얻고 이권을 쟁탈하겠지만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투전판이 발생할까?
첫째는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이다. 그 원인은 내부 권력투쟁과 부정부패이다. 그러면 민생이 어려워지고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투기가 성행한다. 가장 큰 투기는 바로 전쟁이지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내분도 포함된다. 그리고 나라의 혼란을 평정하고자 하는 영웅들이 생겨난다. 일반 국민도 정치경제의 질서가 무너지면 투기를 감행하는 경우가 많다. 집값이 치솟았을 때 영끌까지 발생한 일종의 운명을 건 투기일 수 있다.
둘째는 권력이 안정되지 못하였을 때 권력을 향한 투쟁이 발생한다. 권력투쟁은 정권의 불안정을 가져오지만, 정권의 불안정 또한 권력투쟁을 유발한다. 지금의 여당인 국민의 힘 대표였던 이준석과 비상대책위원회의 갈등과 싸움도 국민의 힘의 불안정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는 나라 간의 생존과 패권을 향한 싸움이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의 끝없는 대립이 어쩌면 건곤일척(乾坤一擲)과 같다. 그뿐 아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정복하는 것도 그렇다. 이런 모든 싸움에선 힘이 없으면 패배하고 무너진다.
모든 국제관계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투전판인지 모른다. 그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투전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선은 국내 정치의 안정과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 둘째는 강력한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국력은 크게 정치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민생의 안정과 강력한 군사력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외교력이다.
지금 우린 북핵의 위협과 미․중의 끝없는 대립의 틈에 서 있다. 거기다가 일본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하다. 어쩌면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투전판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린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것은 강한 정치 경제력과 국민이 화합하고 나아가 외교 역량을 잘 발휘하는 일이다. 현 정부는 그것을 잘 발휘할까?
▶️ 乾(하늘 건/마를 건, 마를 간)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새 을(乙=乚; 초목이 자라나는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倝(간)으로 이루어졌다. 음(音)을 빌어 마르다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乾(건)은 (1)동사(動詞)나 또는 명사(名詞)에 붙어서 주로 말린 또는 마른의 뜻을 나타냄 (2)물을 쓰거나 대지 않은 액체(液體)를 쓰지 않은의 뜻을 나타냄 (3)어떤 행동을 뜻하는 말에 붙어서 속뜻 없이 겉으로만의 뜻을 나타냄 (4)건으로, 근거(根據)나 이유(理由) 같은 것이 없이, 의지(依支)할 데 없이의 뜻을 나타냄 (5)건괘(乾卦) (6)건방(乾方) (7)건시(乾時) (8)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늘 ②괘(卦)의 이름 ③임금 ④남자(男子) ⑤아버지, 친족 관계(關係) ⑥마르다, 건조하다 ⑦말리다 ⑧건성(어떤 일을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으로 하다, 형식적이다 ⑨텅 비다 ⑩아무것도 없다 ⑪건성(어떤 일을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 ⑫말린 음식(飮食) ⑬물을 사용하지 않은 ⑭헛되이, 덧없이 그리고 ⓐ마르다, 건조하다(간) ⓑ말리다(간) ⓒ건성(어떤 일을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으로 하다, 형식적이다(간) ⓓ텅 비다(간) ⓔ아무것도 없다(간) ⓕ건성(어떤 일을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간) ⓖ말린 음식(飮食)(간) ⓗ물을 사용하지 않은(간) ⓘ헛되이, 덧없이(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천(天),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 젖을 습(濕)이다. 용례로는 하늘과 땅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을 건곤(乾坤), 습기나 물기가 없음을 건조(乾燥),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짓을 건달(乾達), 서로 잔을 높이 들어 행운을 빌고 마시는 일을 건배(乾杯), 마른 버짐을 건선(乾癬), 마른 철을 건계(乾季), 생물의 물기가 없어짐을 건고(乾枯), 마른 것과 습기를 건습(乾濕), 말린 물고기를 건어(乾魚), 공기 중에서 쉽사리 건조되는 성질을 건성(乾性), 베어서 말린 풀이나 말라 죽은 풀을 건초(乾草), 물이 없거나 말른 골짜기를 건곡(乾谷), 말린 과실을 건과(乾果), 넓은 하늘을 구건(九乾), 따뜻하고 습기가 없음을 온건(溫乾), 볕에 쬐어 말림을 쇄건(曬乾), 마르지 못하게 함을 방건(防乾), 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을 납건(臘乾), 하늘이냐 땅이냐를 한 번 던져서 결정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 마른 나무에서 물을 짜 내려한다는 건목수생(乾木水生), 천지가 탁 트여 아무런 장해도 될 것이 없음을 건곤통연(乾坤洞然), 천지에 가득 찬 맑은 기운을 건곤청기(乾坤淸氣),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으로 처세에는 인내가 필요함을 이르는 말을 타면자건(唾面自乾), 천지를 뒤집는다는 뜻으로 천하의 난을 평정함 또는 나라의 폐풍을 대번에 크게 고침을 선건전곤(旋乾轉坤) 등에 쓰인다.
▶️ 坤(곤)은 회의문자로 흙 토(土; 흙)部와 申(신; 늘리다)의 합자(合字)이다. 만물을 자라게 하는 대지(大地)의 뜻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땅 지(地), 흙덩이 양(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천(天)이다. 용례로는 대지나 지구를 곤여(坤與), 부인의 무덤이나 신주를 곤위(坤位), 대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힘을 곤덕(坤德), 땅의 신령을 곤령(坤靈), 묏자리나 집터가 곤방을 등지고 앉은 좌향을 곤좌(坤坐), 곤방을 등지고 간방을 바라보는 자리를 곤좌간향(坤坐艮向)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擲(던질 척)은 형성문자로 擿(척)과 掷(척)은 통자(通字), 掷(척)은 (간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鄭(정, 척)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擲(척)은 ①던지다 ②내버리다 ③내버려 두다 ④뛰어 오르다 ⑤떨치다 ⑥노름을 하다 ⑦도박(賭博)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던질 투(投), 던질 포(抛)이다. 용례로는 윷놀이를 척사(擲柶), 쌀알을 던져서 점을 치는 일을 척미(擲米), 죄상을 조사하여 들추어 냄을 척발(擲發), 내던지어 죽임을 척살(擲殺), 던져서 내버림을 척거(擲去), 적에게 던지는 폭탄을 척탄(擲彈), 금품을 마땅히 쓸 자리에 시원스럽게 내놓는 것을 쾌척(快擲), 한 번 내어던짐을 일척(一擲), 비교적 무거운 물체를 힘껏 던지는 것을 투척(投擲), 물건을 내던짐을 포척(抛擲), 후려 때림 또는 후려 침을 타척(打擲), 들어서 내던짐을 포척(抱擲), 내던져 버림을 방척(放擲), 어떤 물건을 들어 던짐을 양척(揚擲), 던져 버림이나 던진 채 내버려 둠을 기척(棄擲), 던진 과일이 수레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함을 이르는 말을 척과만거(擲果滿車), 하늘이냐 땅이냐를 한 번 던져서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을 건곤일척(乾坤一擲), 용과 범이 맞붙어 싸운다는 뜻으로 영웅들이 서로 싸움을 이르는 말을 용나호척(龍拏虎擲), 노름꾼이 남은 돈을 한 번에 다 걸고 마지막 승패를 겨룬다는 뜻으로 전력을 기울여 어떤 일에 모험을 거는 것을 비유한 말을 고주일척(孤注一擲)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