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김대황 표해일록
김대황, 1687년 베트남 표류해 외교·해양 문화사적 중요 기록
서귀포항과 새섬, 문섬 풍경. 제주목 관리로 제주진무였던 김대황은 1687년 9월 화북진에서 출발해 표류, 베트남과 중국을 거쳐 16개월 만인 1688년 12월 17일 서귀포항으로 돌아왔다. 김대황 일행의 표류기인 김대황 표해일록은 당시의 외교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다.
1687년 화북진을 출발한 후 표류해 베트남과 중국을 거쳐 극적으로 제주도로 돌아온 김대황 일행의 표류기 ‘김대황 표해일록’은 당시의 외교 관계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극적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온 김대황 일행의 표류 과정을 살펴보고 빼어난 경관들을 지역적 특색과 자연의 생성이치를 반영해 선정한 영주10경을 읊으며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떠올려본다.
▲표류 16개월 후 서귀포항으로 귀향한 김대황 일행
1687년 9월 초 화북진을 출발한 후 표류한 김대황 일행은 안남국인 베트남과 중국을 거쳐 16개월 만에 극적으로 1688년 12월 17일에 서귀포항으로 돌아왔다.
제주목 관리로 당시 제주진무(濟州鎭撫)였던 김대황은 한양 조정에 말을 진상하러 가는 책임자였다. 이상전 목사의 명을 받은 김대황은 키잡이 이덕인과 격군 등 모두 24명과 진상할 말 3마리와 함께 제주 바다를 건너던 중 추자도 부근에서 집채만 한 거센 파도를 만났다.
돛대가 가울고 키가 부러져 침몰 직전에서 키잡이 이덕인의 슬기로운 대처로 침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는 일행은 어디론가 가는 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덕인이 바닷물을 끓고 수증기를 바가지에 받아 마실 물을 만들고 생쌀을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말들이 죽어 나가고 보름 동안 표류하던 일행들은 구사일생으로 베트남(안남국)에 상륙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안남국 관부로 끌려갔다.
해적으로 오인받던 일행은 안남국 역시 한자 문화권의 나라였기에 의사소통이 되어 왜구가 아닌 조선인임을 인정받았다.
그들은 물소로 밭을 갈고 코끼리를 타고 다니고 목동이 물가에 가서 휘파람으로 부르면 물소는 물속에서 스스로 나와 다시 그 등에 타고 달려 자기 집에 도착하는 것도 보았다.
5개월이 지나 김대황은 자신들의 사정을 글로 적어 안남국왕에게 올렸다. 김대황 일행의 사연을 접한 안남국왕은 중국 상선에 돈과 쌀을 주어 김대황 일행의 송환을 도왔다.
안남을 출발하여 3개월 만에 중국 절강성 온주부 해상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해적을 만났다. 다행히 중국 온주부에서 해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호위선을 붙여주었다.
김대황 일행이 물기로 했던 상환료인 쌀 600포를 대신해 조선 조정에서 은자 2556냥을 내주어 결국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주목사를 지낸 야계 이익태가 지은 지영록에 소개된 ‘김대황 표해일록(漂海日錄)’의 주요 내용이다.
당시의 외교 관계와 표류, 항해에 관한 정보, 베트남과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 문화이자 외교와 해양 문화사적으로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숙종 정묘년 1687년 제주진무(濟州鎭撫) 김대황 외23인은 제주 목사를 교대할때 진상할 말 세필을 싣고 배를 띄웠으나
추자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1달이 넘는 기간동안 표류했다
바닷물을 끓여 수증기를 바가지에 받아 목을 축이고 생쌀을 씹으며 버틴 그들은 극적으로 하나의 섬을 발견했고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의 특징을 "머리는 풀어헤치고 신발은 신지 않고 말은 마치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같았다" 라고 했다.
말이 통하지 않던 그들은 결국 그곳의 관청에 잡혀갔고 해적 등으로 오인 받았으나 필담으로 서로의 정체를 파악했고 그곳이 안남국(베트남)임을 알게되었다
현지 관리가 "조선인들은 일찍이 우리 태자를 죽였으니, 우리도 마땅히 너희를 죽여 원수를 갚겠노라" ("탐라문견록"에는 이 구절이 있으나 같은 이야기를 담은 다른 사서 "지영록" 의 "김대황표해일록"에는 이 대사가 없다
그리고 태자 살해는 무얼 뜻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 이의민 선조가 베트남 왕이라 그랬다는 썰까지 있음) 라고 하자 제주도민들은 대성통곡 하였고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그들을 살려주고 한 섬에 보내 생활하도록 하였다.
현지의 생활상은 코끼리를 타고 다니기도 하며 물소가 밭을 갈고 밤에는 집안에 물소를 매어 놓으며 풀 사료를 먹이고 목동이 올라타 눕기도 하고 앉기도 했으며 저녁무렵엔 목동이 물가에 가서 휘파람을 부르면 물소가 물에서 나와 목동을 태워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고도 하고 원숭이는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어 심부름도 시킬 정도였고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으며, 항상 날씨가 따뜻했고 일년에 삼모작을 하고 누에를 다섯번쳤다 한다.
그렇게 베트남에 체류하던중 세 사람은 병을 얻어 죽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들은 안남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달라 부탁하였다
그들의 사연을 접한 안남국왕은 중국 상인에게 돈과 쌀을 주며 그들의 귀환을 부탁했고 조선과의 교류가 목적이라고 추정되는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조서도 첨부 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베트남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귀향하던중 해적을 만나 고생하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어 마침내 1년10개월 만에 귀향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김대황 일행의 상환료로 쌀600포를 요구 했고 조선조정에서 은자 2550냥으로 대신내주었고 안남국왕의 국서를 읽은 조선 조정은 당시 안남국엔 국새가 없다는걸 몰랐기에 왕의 국새가 찍혀 있지 않은 국서를 인정하지 않아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한다.
만약 답신을 보내고 베트남과 교류를 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