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82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연중 제2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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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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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40BE3Lk614 (김상엽 야고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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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 ‘여인들의 복음서’인 루카복음서!>
돌아보니 25년 세월 부끄럽고 보잘것없는 글들을 줄기차게 쓰며 살아왔습니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신문이나 잡지에, 주보나 방송에..쓰기도 참 많이도 썼습니다.
때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글들, 너무나 부끄러워 지우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한때 비장한 각오로 목숨 걸고 썼던 글들, 때로 지나치게 날이 선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를 드리기도 했겠구나, 하는 후회도 만만치 않습니다.
더욱 심사숙고한 글, 그래서 균형 잡힌 글, 보다 사랑이 담길 글, 그래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더 복음적인 글,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글, 결국 생명과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는 글을 썼어야 했었는데...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루카복음사가의 저작들은 오늘 제게 참으로 큰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사가가 이방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은 더 보편적입니다. 참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연하고 개방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역사관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루카복음사가는 당시 유다인들의 시각에서 절대로 구원의 대상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태생적 죄인들, 이방인들, 세리들, 창녀들, 양치는 사람들, 고리대금업자들, 개똥 수거인들 까지도 모두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방황하던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얼마나 각별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 ‘여인들의 복음서’라고까지 칭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쳐 죽일 놈’ ‘민족의 배신자’로 생각하며 침까지 뱉던 세리들, 죄인의 대명사들이었던 이방인들, 악령 들린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친히 그들과 눈을 맞추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을 상세히 우리에게 전해주신 루카복음사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루카복음사가를 본받아 부족하고 나약한 이웃을 매몰찬 시선이 아니라 따뜻하고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냉혹한 관찰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더없이 자상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위로자 예수님으로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복음, 구절구절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복음, 힘들 때 마다 손에 들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루카 복음서를 좀 더 자주 읽고 묵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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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파파게노 이펙트>
유명 연예인이 죽으면 그 영향이 주위에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여인을 잃고 고뇌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주인공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 ‘베르테르 효과’라고도 합니다. 당시 젊음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유럽의 많은 젊은이가 따라 죽었기 때문입니다.
또는 ‘모방 자살’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최진실 씨가 자살하고 한 달 사이 우리나라에서 평균보다 600명가량이나 더 그 수가 늘었다고 합니다. 마를린 먼로가 죽었을 때는 313명이 그녀의 뒤를 따랐습니다.
학자들은 유명 연예인, 특별이 배우일 경우 그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커지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대신 충족시켜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화면에 비치는 그 사람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배우의 역할과 그 배우의 사생활은 아주 다를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꾸며진 모습의 배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세상의 힘듦을 위로받고 있는데 그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그 사람에게서 힘을 얻던 사람들은 “저런 사람도 자살하는데, 나는?”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거의 33분당 한 명꼴이라고 합니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젊은 베르테르도 아마 자신이 사랑했던 로테라는 여자로부터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하자 절대 살아갈 힘을 찾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갈 수 있는 작은 자리는 내가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내가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발 디딜 자리가 하나도 없음을 느끼고는 허공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고통 속에 버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와의 고통은 자녀를 낳는 것에서 시작하고 남편으로부터도 지배받는 것입니다. 지배받는다는 것은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살아갈 힘을 이제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얻으려고 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하고 자녀로부터도 만족감을 얻고 싶어 합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우울증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들로부터 힘을 얻으려고 하므로 사람들에게 지배당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 누구로부터 힘을 얻어서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 이유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남편과 자녀의 사랑을 희망하게 되는 것이 곧 죄에 대한 벌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을 통해 행복해지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상대를 이용하는 것인데, 아무리 이용해도 나를 채워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자가 땅을 일구어도 소출을 제대로 내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사랑해서, 내가 행복해서 그 행복을 나누어주고 싶어 사람을 만나야지 상대를 통해 내가 만족하려고 만나면 반드시 그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게 되고 그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면 커다란 절망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한탄합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이는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언젠가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를 모른다고 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믿어왔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자신에 대해 주먹을 들 때 우리가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모든 이들로부터 버려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아버지가 계시니 혼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발판이 아버지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아버지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이라야 모두가 나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리면 매우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버틸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이 이젠 떠나지 않는 내 가족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배신을 당해도 버틸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란 바로 홀로 주님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기도로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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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운동을 마치고 미국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입니다. 한 형제님이 다음에는 본인이 밥을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밥을 사시겠다고요?’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미국인이 우리의 테이블로 왔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밥’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아들 이름도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한국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반갑다고 우리에게 맥주를 사주었습니다. 그 형제님이 밥을 산 것은 아니지만 밥 덕분에 맥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있습니다. 배는 운송수단인 배가 있습니다. 맛있게 먹는 배도 있습니다. 우리 몸의 중심에 있는 배도 있습니다. 신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는 신도 있습니다. 영어나 한국어는 표음문자이기에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적지만 중국어는 표의 문자이기에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의 의미를 몇 가지로 해석하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두려움과 걱정 속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풍랑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듣지 못하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 주셨고,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큰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에 이르는 형벌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는 디딤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3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카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 성모님의 신앙, 성모님의 삶을 루카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지셨고, 성모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마리아의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나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닮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 자캐오의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루카가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도 다 좋지만, 오늘은 ‘엠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년 부활이 지나면 본당에서 ‘엠마오’ 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순과 부활을 준비하면서 힘들었을 본당 식구를 위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엠마오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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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하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리라고 하신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신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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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듣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리는 루카 복음사가는 특이하게도, 내용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개의 제자 파견 사화를 전합니다. 하나는 ‘열두 제자’의 파견과 관련이 있고(9,1-6 참조),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일흔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입니다.(10,1-12 참조) 후자는 루카 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루카는 왜 열두 제자의 파견 외에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또 이야기하였을까요? 그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는 데에, 열두 명의 파견만으로는 그 수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더 많은 이의 파견으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미 믿음을 가지게 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 널리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 선포에 헌신할 일꾼들이 어느 시대든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소자들이 크게 감소하는 위기에 맞닥뜨려 있습니다. 물론 학령 인구 자체가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큰 폭으로 줄어드는 실정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이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련히 아시고 일꾼들을 부르시겠지.’ 하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됩니다. 그 일꾼들을 주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할 이들을 지속적으로 키워 내는 일에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성소자 육성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을 많이 보내 주십사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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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성 루카 복음사가를 “사랑하는 의사”(콜로새서 4장 14절)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서 감옥살이할 때, 사도의 첫 변론에서 그의 곁을 지킨 협력자입니다.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설교와 가르침에 감동하여 안티오키아에서 개종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추측됩니다. 그의 지성과 글 재능은 성령의 인도로 복음의 신비를 이방인에게 알리는 도구로 꽃을 피웁니다.
복음사가는 가난한 이들, 여인들, 어린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며, 이방인들을 구원의 교회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시야를 열어 줍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일흔두 제자가 모든 고을로 파견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일꾼들은 언제나 모자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함께할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선포할 일꾼들을 언제나 부르십니다. 많은 위험과 난관이 있어도 주님의 복음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복음사가는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 모습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일치하여 교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사제성소와 수도 성소가 늘어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가정 안에서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며 이웃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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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교회는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아름다우면서도 신학적인 복음서를 저술한 루카 복음사가는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 출신 의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그 바쁜 공생활 가운데에서도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공들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 선교였습니다. 자신도 이방인이었던 그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저술함으로써,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당시 세상의 중심이자 끝이라고 여긴 로마에까지 전달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도 공관 복음서로서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선교에 관한 관심 때문에 조금 다른 방향을 취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셨다고 전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면서 여러 가르침, 특히 그 복음서의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을 들려주신 것으로 전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을 듣습니다. 선교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긴박하기만 합니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청하면서, 파견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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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복음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전후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와 탄생,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유년 시절 이야기, 특히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루카 복음서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루카의 시선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 곁에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들은 이름 없는 목자들이었습니다.(루카 2,15-20 참조)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이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보는 루카의 마음은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루카 1,51-53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 일흔두 명의 파견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루카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를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그가 전해 준 예수님을 다시 떠올리고,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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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길>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길>
주님보다 앞서
주님의 벗과 더불어
주님만을 모시고
주님의 평화를 나누러
주님의 벗에게 가서
주님의 벗의 곁이 되어
주님의 나라를 살라고
주님께서 보내시며
주님께서 함께 걸으시는
주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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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주님을 기록한다면>
축일을 맞아 루카 복음사가의 삶을 묵상하다 보니 나라면 주님의 복음을 어떻게 쓸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마태오 사도처럼 복음을 쓰지는 않을 것이고, 루카 복음사가처럼 복음을 쓰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것은 죄인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신 주님을 다른 어떤 복음사가보다 따듯한 시선으로 전하기 때문이지요.
한때 저는 곡을 썼고, 소설도 쓰려고 끄적거렸는데, 곡은 성가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고, 소설은 성서의 인물을 제 시각으로 그리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예를 들면,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이나 키레네의 시몬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 것인데, 당연히 주님과의 만남이랄까 인연을 중심으로 소설을 엮어나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서의 인물을 소설화하는 것은 생각해봤지만 주님의 생애를 루카 복음사가처럼 기록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전한다는 것은, 사실 예술적 호기심이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영적인 사랑에서 비롯되고, 영적인 사랑으로만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베드로 사도나 사도들이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쓸 수도 있었고, 그들이 쓰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들이 쓰지 않을 것을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심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얘기했잖습니까?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아무튼,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생애를 기록할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추종자들인 사도들의 활약인 사도행전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제자들의 활약을 자기가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은 자기 안에서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이어지는 것이지만, 기록은 세상에 남기는 것이요, 자기 사후에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잊혀서도 안 되겠지만 사람들에게 잊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을 기록한 것은 주님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만 아니라 사람들도 자기가 알고 있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직접 들은 사람들 뿐 아니라 먼 곳에서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려는 거였으니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도 사랑한 것이고, 지금의 우리까지 사랑한 셈입니다.
저도 같은 지향으로 복음 나눔이란 형식으로 많은 글을 쓰고 있고, 그래서 지구 저편에서도 제 글을 읽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책으로 내면 좋지 않겠냐는 말도 종종 듣는데 그때마다 저는 계면쩍은 일이라 그럴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길이 남을 만큼 훌륭한 기록과 글이라면 내가 남기지 않아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지녀야 할 것은 루카 복음사가처럼 주님을 진정 사랑하여 주님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과, 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여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겠습니다.
내일모레부터 사흘 간 저희 <여기선교협동조합>이 바자회를 합니다. 이번 바자회는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마련이 목적입니다.
이 장학회는 한 분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야학을 했는데 그때 제자 가운데 하나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며 제가 하는 좋은 일에 써 달라고 성금을 하였습니다.
저는 제자의 이런 사랑을 한번에 써버리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의 좋은 뜻이 씨앗이 되어 더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희 <여기 선교 협동조합>에서 돈을 보태고, 이번 바자회에서 이 사업을 더 알리고 기금도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바자회에 많이 들러주시고, 멀리 계셔서 오시지 못하더라도 기도로 함께해주시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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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 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불평불만이 늘어 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성체조배도 하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 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 15,9-10)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분심잠념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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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어느 자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자매님은 눈물을 흘리며 남편이 자신에게 “넌 창녀야!”라고 했다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여쭈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당신에게 ‘넌 창녀야!’라는 말 대신 ‘넌 의자야!’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화가 나고 슬펐을까요?” “물론 아니죠.”라고 자매님께서 대답하자, “왜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나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저는 의자가 아니니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창녀가 아닌데, 왜 남편 앞에서 힘들어하죠?”
진실이 아닌 말에 흔들리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나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말은 거짓이 담긴 말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에 굳이 힘들어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진실이 아닌 말과 행동에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진실과 늘 함께하는, 그래서 주님의 뜻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둘씩 짝지어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풍족하게 해서 보내지 않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힘든 곳에 보낸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서 보낼까요?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해서 보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한없이 부족하게 해서 보내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크게 흔들릴 것 같습니다. 불평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주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불편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말과 행동에 계속해서 흔들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 흔들림 앞에서 주님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뜻에 무조건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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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신자의 삶>
-제자답게, 선교사답게-
오늘 루카 복음 사가 축일, 아침 아름다운 찬미가중 마지막 두연입니다.
“언제나 바오로를 동행하시고, 사도의 깊은 마음 새겨 보시며,
열절히 본받으려 애쓴 루카여, 불붙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
의사인 당신인술 우릴 낫우며, 신앙의 기쁜위로 내려주시어,
언제나 하느님을 찬미함으로, 우리주 하느님께 가게하소서.”
참신자의 삶이 아름다운 순교적 삶입니다. 신자로서 누구나 신원위기,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 시대에 성인들의 삶이나 성인답게 사는 아름다운 분들의 삶을 대하면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평범한 일상생활에 한결같이 충실함이 참으로 위대한 일이며 성인다운 삶임을, 구체적으로 제자답게, 선교사답게 살 때 참신자의 참사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45년전, 1977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지금은 50대 후반의 제자들 아홉명으로부터 쌀 90kg(10kg 9부대)을 선물받고 감동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란 메시지와 더불어 아홉명 제자들 이름이 있었고 제자들에게 감사의 답신 메시지를 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아홉명 제자들 너희가 보내준 선물, 쌀 90kg 잘 받았다.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니 참 고맙다. 예수님 감사와 축복인사 받고,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내일 너희 아홉 제자들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미사 봉헌한다.”
제자들의 아름다운 선물을 받으며 제 자신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다운 삶인가 반성했습니다. 더욱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한결같이 제자답게, 선교사답게 잘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수도원 게시판에는 가끔 오틸리엔 연합회 수도승들의 부고가 붙습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정주하는 뮌스터슈바르짝 오도 수사의 부고에 적힌 약력도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주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를 영원한 영광에로 부르셨도다.”
라는 제하題下에 1938년에 출생하여 1955년 17세에 수도원 입회하여 1963년 종신서원후 1964년 아프리카 탄자니아 페라미호 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하다가 44년만이 2008년 본원에 돌아와 지내다 2022년10월12일 84세로 선종한 수도형제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제자답게, 선교사답게 아름답게 살다가 주님 품에 안긴 수도형제입니다.-
오늘 10월18일은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안티오키아 출신의 그리스인 의사로 사도 성 바오로의 협력자이자 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특별히 성 바오로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으며 사도의 2차, 3차 선교 여행도 함께 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바오로 사도가 카이사리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로마에 호송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도 늘 곁에 있었던 참 의리있고 사랑많은 제자였음을 봅니다. 바오로곁에서 사도의 제자다운, 선교사 다운 충실한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루카의 충실한 인품이 잘 드러납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2티모4,10-11ㄱ)
성 바오로의 순교이후 루카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 아카이아 지방과 소아시아 지방에 선교하며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로 순교했다는 전승이 전해옵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가운데 루카는 어떻게 그 아름답고 방대한 복음서와 초대교회사같은 사도행전을 집필했는지 참 놀랍습니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던 루카는 의사와 화가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교회미술에서 성 루카는 성경에 언급된 살아있는 네 생물에서 유래한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데, 이는 성 루카 복음사가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합니다.
우보천리, 호시우행, 그대로 충직했던 루카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신축년辛丑年 소띠인 저에게도 큰 격려와 위로가 되는 루카 복음사가입니다. 어느 평신도 신학자의 제 강론이 ‘루카 스타일’이라는 찬사도 생각이 납니다.
바오로는 물론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제자는 아니지만 참으로 오늘 복음 말씀대로 일편단심, 한결같이 주님을 충실히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흔 두명을 지명하시어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셨다 하는데 바오로와 늘 동반했던 루카였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주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기에 앞서 몸소 주님의 참 좋은 일꾼이 되었던 바오로와 루카입니다. 이리떼 세상 가운데서 무소유의 삶중에 신자들의 환대에 의지하여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면서 병자들을 고쳐주며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본질적 복음선포 사명에 충실했던 두 제자들이였습니다. 전직이 의사였던 루카의 복음선포는 더욱 효과적이었다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루카 복음 사가처럼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로 활약하는 삶자체가 주님의 현존이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특히 제1독서에서 모두가 다 떠난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서도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않고 오히려 이들을 배려하는 바오로 사도의 담담하고 평온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고독중에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만해 있는 바오로입니다.
“나의 첫 변론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때 주님께서도 늘 함께 하셔서 우리를 굳세게 해주심을 믿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제자답고 선교사답게 살면서 복음선포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 곧장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인용함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여러분 자신의 고백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2티모4,17ㄷ-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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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오늘 복음(루카10,1-9)은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당신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는 '파견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10,2)
예수님께서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일꾼이 적다는 것인가? 단순히 양적인 의미의 숫자가 적다고 말씀하시는 건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꾼'은 좁게 생각하면 지금의 '사제'이고,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복음화에 필요한 '모든 신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숫자의 의미가 양적인 의미보다 질적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단순히 양적으로 사제의 숫자를 늘려야 된다는 의미보다, 더욱 더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사목하는 사제들의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10월18일인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은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루카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와 함께 선교 활동도 했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분입니다. 루카는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에 담아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늘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사목은 작은 사목, 낮은 사목, 특수사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3천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교회 앞에 던져진 화두(話頭)입니다.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은 '함께 하기', 그러기 위해서 '더 낮은 곳을 바라보고 그곳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사제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제들, 그런 일꾼들이 많아지게 해달라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시다!
"성 루카 복음사가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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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a4lAkNFAD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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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오늘의 단풍을
놓치지 마십시오.
짧기에 아름다운
가을의 고운
단풍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루카 복음으로
독특하게 그려낸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려지지 않는
사랑의 복음입니다.
루카 복음은
사랑으로
우리를 비추어주는
맑은 거울이 됩니다.
맑은 구원은
사랑과
용서임을
만나게 됩니다.
쓰러져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루카 복음만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아름다운 그림은
성 루카가
아름답게 체험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었습니다.
사랑의 체험은
여러 색깔의
물감이 되어
서로를 만납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마리아와 엘리사벳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를
만난 사람
마르타와 마리아
부자와 라자로
바리사이와 세리
예수님과 자캐오가
만납니다.
루카 복음은
만남이며
체험입니다.
이 이야기들 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을
루카 복음사가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지 못할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나눌 줄
압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느님을
거쳐갑니다.
아주 친근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는 루카복음은
자연스레 우리
내면을 건드립니다.
문자(文字)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이
돌아갈 집을
아는 내면의
기쁜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의 삶에서
참된 사랑
뜨거운 사랑
가슴 뛰는 삶을
만나는 루카
복음의 오늘입니다.
가장 중요한
오늘을 다시
일깨워주는
성 루카
복음사가의
오늘 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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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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