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연구초
1926년 봄에 벽초 홍명희선생이 친구인 신채호선생의 사론을 신문에 발표한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은 없다.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우리 조선의 사학계는 백사장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 무슨 서적으로 고사를 말한 것인가? 자연히 중국 사학자들이 쓴 서적에서 몇 줄씩 찾아서 유추하는 것이다. 그나마 중국의 많은 사서 중에서 사마천의 사기가 첫손가락에 뽑힌다. 그러나 그도 공자의 춘추필법을 따르는 완고한 유자이기 때문에 다음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썼다. 즉 尊華攘夷(중국은 높이고 이족은 내침), 詳內略外(중국사는 상세하게 외국사는 간략하게 기록),爲國諱恥(나라에 치욕 되는 일은 숨김) 주의를 고수하였다. 그리고 진수의 삼국지가 있다. 삼국지는 부여, 고구려 등의 관제와 풍속, 三韓70여국의 국명과 기타 모든 것을 간략하게나마 서술해 가장 칭찬할 만하다.
삼국지에 초록된 조선에 관한 사실은 조선인의 기록으로, 부여 고구려 삼한 등 傳에 쓰인 使者는 <사리>이고, 沛者는<부리>이고, 對盧는 <마리>이고, 樂浪은<펴라>아고, 狗邪는 <가야>이다. 이는 다 한자의 초성이나 뜻의 초성을 가져다 뜬 삼국시대의 이두문자이고, 중국인이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 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丸都城을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의 기록이나 전설을 가져다 전한 것으로서, 이것을 근거로 <삼국지> <위서> <위략> 등의 자료를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중화인 이기에 병적 자존 심리를 가져서 사실이 아닌 거짓 기록도 남겼다. 예로 <위략>에서는 大秦(로마)의 秦자를 꿰맞추어 대진인, 즉 로마인을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고, 辰韓의 辰자 음에 맞추어 辰韓을 秦人이라 하여 만리장성 부역을 피하여 동으로 옮긴 자라 하였다. 이와 같은 망설이 적지 않으니 기들의 기망하고 조롱하는 붓에 속아 넘어 갈 뿐이다,
예로 이두의 기록을 보면 <忽홀>은 골, 미추홀 술이홀 비열홀 동비홀 등이 있다. <波衣파의>는 바위로 조파의 구사파의 별사파의 등이다. <忽次홀차>는 고지 즉 곶으로 갑비홀차 요은홀차 고사야홀차 등이 있다. <彌知미지>는 미지, 만으로 송미지 고마미지 무동미지 등이 있다. 대는 산의 뜻으로 것대산은 청주상당산의 이름이다. 아사달은 非西岬<비서갑; 우스산>이니, 지금의 하얼빈의 完達山이 구 유지다. 이상은 아비나 조상으로 성씨를 알듯이 본 명사가 발생한 지방이 모호할 때는 옛 이름으로 진짜와 가짜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臣은 크다의 뜻이며 智의 음은 치다. 신치는 집정의 수상이고 신운견지는 신크지로 읽는다. 이는 고구려의 태대형이고 신라의 상대등이며 김유신의 태대각각은 신크쇠뿔한으로 읽어야 한다. 太大의 이름을 가진 역사상의 인물은 김유신, 연개소문, 成吉思汗(성길사한: 징키스칸) 세 명인데 당시 정치사의 동양의 대괴물이다.
조선 고어에 길다 長은 <아리>라 하고, 鴨 <오리>도 아리라 하였으니 압록강을 아리수라고도 한다. 부여족이 하얼빈에 조선을 건설하고 松花江을 아리가람이라 하고, 남하하여 遼河에 살 때는 요하를 아리가람이라 하였다. 다시 동진하여 지금의 압록강을 보고 아리가람이라 하고, 서쪽으로가 나가 영평의 灤河를 보고 아리가람이라 하였다. 다시 남하하여 지금의 한강을 아리가람이라 하였다. 더 남하여여 지금의 낙동강을 보고 아리가람이란 한 것이 일본서기 아례진이 낙동강의 옛 이름이라 나온다. 우리민족은 그냥 긴 강, 큰 강을 보고 아리가람 아리수라 전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부른 습성이 있다는 증거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의 沛水가 곧 浿水이다. 삼국지 낙랑전에 있던 낙랑 속국 20여 개국 이름이 개재된 것을 지워버리고 한서지리에 넣어서 낙랑군 25현을 만들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번한의 浿水를 沛水로 고치고 각 사서의 낙랑 관련 기사를 삭제하거나 고쳐 중국 영토를 넓힌 것이다. 우리의 中古시대의 平壤과 浿水는 남북으로 나뉘고, 남쪽에는 樂浪國이 있었는데 平壤城이라고도 불렸다. 북쪽에는 樂浪郡이라 불렸으며 그 군의 치소는 요동에서 요서로 요서에서 上谷으로 이동한 것이다. 조선인은 지금의 조선8도 이외에 압록강 넘어 開原이북의 奉天 吉林 대부분을 근거로 지금의 만리장성 이북으로 나아가 熱河와 興和 등을 진취의 지방으로 삼고 남하하여 지금의 북경 부근을 차지하였다. 중국인은 영평부부터 산해관까지를 진취지방으로 삼았다.
一) 앞 사람들이 이미 증명한 것을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다. 咸昌이 古寜伽倻라는 것은 앞사람들이 말했지만. 이제 耶(야)와 羅(라)가 동음인 줄을 발견하면서 古寜伽倻(고령가야)를 고령가라로 읽는 동시에 함창 공갈못의 공갈이 고링가라의 축음인 것을 알게 되고 고링가라의 위치가 더욱 명백해졌다.
二) 의심스러운 유래에 분명히 답할 수 있다. 고려사에 익산의 武康王陵을 箕準의 능리라 적고는 사람들은 末通 대왕릉이라 부른다와 백제 무왕의 이름이 서동이란 주를 달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공주 선화를 꾀어 아내로 맞이한 일을 기록했고, 여지승람은 무강왕이 선화부인과 미륵 산성을 쌓을 때 진평왕이 공인을 보냈다 하였으니, 薯(서)의 뜻이 마이고 말통은 마동의 음을 취한 것이므로 무장왕은 백제본기 武王 璋이다. 장의 왕후가 선화이고 미륵산성은 장과 선화가 연애하던 유지인데 사가들이 8백년이나 앞선 기준의 궁인으로 잘못 알았다.
三) 이전 사람들이 위증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역옹패설에 신라 진흥대왕이 벽골재를 만들고 후세 사람이 그 은덕으로 벼를 羅祿(라록; 나락)이라 하였는데 어찌 진흥왕이 김제까지 갔으며 백제 지리지의 벽골은 김제의 옛 이름이고 벽골은 베골이므로 백제가 제방을 쌓고 벳골(稻邑;도읍)이무로 벳골이라 부름이 명백하다. 벼는 경상도 사투리 나락이라 한다.
四) 이전 사서(前史)의 오류가 많은 저술을 타파할 수 있다. 석탈해를 금궤에서 탈출하여 탈해라 하고 까지가 울어 석탈해라 한 것과, 동사해통의 고주몽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봐서 성이 고 씨가 되었다는 것과, 문헌비고에 단군이 9부의 군장이 되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붙으므로 한자 衆人변을 더하여 徐氏가 되었다는 괴상한 설명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삼국 중엽 이전에는 인명, 지명, 관명 등 각종 명사를 모두 우리말로 짓고 이두문으로 썼던 것이니, 어디에도 한자의 파자나 괴팍스러운 습속은 없다.
이상이 古史上 이두문으로 기록된 명사의 해석법이다. 앞 사람들이 증명한 것은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의심스러운 유래에 대하여 분명히 답할 수 있다. 이전 사람들이 위증한 것을 바로 잡울 수 있다. 이전 사서의 오류가 많은 저술을 타파할 수 있다. 고려조 중엽에서 성행한 파자 한자의 예로, 黃葵(황규;노란 해바라기)를 皇揆(황규; 황제의 법도)로 고치고, 鷄鳴聲(계명성; 닭의 울음소리)이 高貴位(고귀위; 높고 귀한 자리) 無古支那(무고지나; 별 탈 없이 편히 지냄)가 無古之難이 되고, 身負三椽(신부삼연; 몸에 세 개의 서까래를 짐)이 王자가 된다는 등의 말이 고려사에 허다하다. (동아일보 1924년 10월 20,27,11월 3일에 3회에 걸쳐 연재된 글임)
2020.06.20.
조선상고문화사-3
신채호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간행
첫댓글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읽었으나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