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그들은 어떻게 활동했을까?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그들은 어떻게 활동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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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는 역사상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억압적인 비밀경찰 조직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소련의 KGB 전신인 NKVD를 모델로 삼은
슈타지는 1950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의
국가보위부 역할을 수행했다.
공산주의 붕괴 전까지 슈타지의 감시와
첩보 활동 방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수십만 건의 회수된 파일과 문서가 동독
시민들에 대한 공포와 협박의 실체를 드러냈다.
사진을 통해 슈타지의 끔찍한 역사와 이를
운영한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슈타지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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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는 국가보위부(Staatssicherheit)의
약칭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소련 점령지에서 1950년에 창설됐다.
초기 조직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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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정치인이자 국가원수였던 빌헬름 차이서(사진)는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첫 국가보안부 장관을 지냈다.
이 부처는 일반적으로 슈타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독일사회주의통일당 당원이기도 했다.
차이서의 부관이었던 에리히 밀케는
소련 비밀경찰인 NKVD 요원이었다.
권력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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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권력 다툼으로 차이서는 결국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사회주의통일당에서 제명됐다.
그의 뒤를 이어 에른스트 볼베버가 임명됐으며,
그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슈타지 수장을 맡았다.
에리히 밀케
(190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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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밀케는 이 사진에서 독일민주공화국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와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와 함께 왼쪽에 서 있다.
그는 볼베버가 신임을 잃은 뒤 1957년
슈타지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공포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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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언론으로부터 ‘공포의 제왕’이라는 별칭을 얻은
밀케는 베를린 장벽 붕괴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동독에서 가장 강력하고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최고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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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마르쿠스 볼프(1923~2006)가 슈타지의
대외 정보 부서인 정찰총국 국장에 올랐다.
그는 34년 동안 슈타지의 넘버 투로 활동하며
동독 최고의 스파이 책임자로서
악명 높은 명성을 얻었다
공포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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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본부는 동베를린 프랑크푸르터 알레 인근
루셰슈트라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주소는
밀케의 공포 정치와 동일시됐다
동독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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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권위에 대한 초기 도전은 1953년 6월,
동베를린 시민 수만 명이 공산 정권과
소련 점령군에 맞서 벌인 시위였다.
경찰이 분노한 군중을 해산하지 못하자
소련군 전차가 투입됐다
은밀한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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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케 체제 하에서 슈타지는 매우 효율적인
비밀경찰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동독에서 가장 억압적인 기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슈타지는 사회의 모든 기관과 일상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려 하며, 고문과 협박을 통해
반대 의견을 억누르는 데 주력했다
슈타지 내
블라디미르 푸틴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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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가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지만,
KGB는 막강한 작전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덟 개 주요 슈타지 국마다 연락 장교를 두었다.
이들 장교 중 한 명이 블라디미르 푸틴으로,
그는 드레스덴에 있는 조직 본부에서 근무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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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고조되면서 베를린은 음모와
스파이 활동의 중심지가 됐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와 짐머슈트라세 교차로의
소련 구역 경계에 설치된 검문소는
동베를린 진입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임박한 것이다.
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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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건설은 1961년 8월 13일 시작됐다.
장벽은 주로 동독 시민이 서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장벽은 단순한 물리적
장벽이 아니라, 이념의 분단을 상징하기도 했다.
정보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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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의 비율은 동독 시민
166명당 비밀경찰 1명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영은
방대한 민간 정보원과 비공식 협력자
네트워크에 의존했으며, 이들은
동료, 친구, 이웃, 심지어 가족까지
감시하고 신고했다
체포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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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로 인해 약 25만 명이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베를린에서 구금된 이들은 예외 없이 슈타지의
악명 높은 루셰슈트라세 시설로 보내졌다.
일부는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1961년부터 1988년 사이 장벽을 넘다
희생된 사람은 약 140명으로 추정된다.
공포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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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까지 동독 전역에는
공포의 분위기가 퍼졌다. 슈타지는
경찰, 세관, 고용 사무소, 기타
독일민주공화국 기관과 긴밀히
협력하며 전방위 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심리적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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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당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칼과 방패’로서
슈타지는 적을 심리적으로 괴롭히는 기술인
체어제퓌룽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슈타지는
은밀한 방법을 통해 학대적 통제와 심리적 조작을
활용하며 반정부 활동을 차단했다.
"살인자는 너희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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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제퓌룽 방법은 정상적 사회의 겉모습 뒤에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약화시키며, 마비시키도록
설계된 은밀한 억압 수단이었다. 이 겉모습 뒤에는
살인자로 낙인찍힌 에리히 밀케가 있었다.
해외 첩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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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는 국내 감시뿐 아니라
해외 감시와 정보 수집도 담당했다.
서방을 대상으로 한
첩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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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동은 주로 정찰총국의 책임이었으며,
대부분 서독 정부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대상으로 수행됐다.
기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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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슈타지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측근에 침투한 사실이 드러났다.
브란트의 주요 고문 중 한 명인 귄터 기욤
(사진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브란트 근처에 앉아 있음)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졌다
빌리 브란트의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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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이 공개되자 서독 정치권에는
큰 충격이 몰아쳤고,
정부 붕괴 위기까지 초래됐다.
기욤이 정체를 드러낸 지 2주 만에
빌리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테러 조직과의 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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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는 또한 적군파로 알려진
바더-마인호프 그룹을 비롯한
여러 테러 조직과 연계돼 있었다.
슈타지는 악명 높은
‘저칼 카를로스’와 협력했으며,
리비아 요원들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삼아
서베를린에서 테러를 실행하도록 허용했다.
슈타지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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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 독일민주공화국의 붕괴로
슈타지는 1990년 공식 해체됐다.
그제야 슈타지의 실제 활동과
감시 범위가 드러났다.
슈타지 기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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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통일 독일 의회는
슈타지 기록법을 통과시켜
독일인과 외국인이 슈타지 기록을
열람할 권리를 부여했다.
슈타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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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박물관의 슈타지 기록 보관소에는
약 111km(69마일)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이
보관돼 있다. 베를린 루셰슈트라세에 있던
슈타지 부지 일부를 활용한 상설 전시관
‘독일사회주의통일당 독재 하의
국가보안부’는 국가보안부의 구조,
발전 과정, 운영 방식을 보여주고 설명한다
경고의 의미로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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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수장 에리히 밀케(사진)의 집무실을
비롯해 여러 방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첩보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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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완하는 형태로 슈타지 요원들이 사용한
다양한 첩보 장비가 흥미롭게 전시돼 있으며,
이 중에는 테이프 레코더와 연결된 마이크 기능
손목시계도 포함돼 있다.
베를린 호헨쇤하우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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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북동부에는 베를린 호헨쇤하우젠 기념관이 있다.
이 건물은 1946년 소련 감옥으로 사용됐으며,
1951년부터 1989년까지 슈타지 구금 시설로 활용됐다
슈타지 박물관과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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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다른 도시들에도 기념관과 박물관이 있으며,
라이프치히, 로스토크, 드레스덴(사진) 등이 있다.
드레스덴은 블라디미르 푸틴이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호네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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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슈타지의 주된 설계자들인 에리히 호네커,
마르쿠스 볼프, 에리히 밀케의 운명은 어땠을까?
호네커는 동서 경계와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다
희생된 사람들의 살해를 승인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 중 그는 암 치료를 받았으며, 사망이 임박하자
마지막 몇 년을 자유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는 1994년 5월 칠레에서 사망했다.
볼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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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마르쿠스 볼프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후 독일 최고법원에서
이 판결은 무효로 결정됐다.
1997년, 볼프는 불법 구금, 강제,
신체적 상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년 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볼프는 2006년 11월 9일 자택에서
평화롭게 잠든 채 세상을 떠났다
밀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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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밀케는 1931년 경찰관 두 명 살해 혐의로
처음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한 동독 시민을 총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혐의로
두 번째 재판을 받았다. 밀케는 2000년 5월 21일,
92세의 나이로 베를린 요양원에서 불명예 속에 사망했다.
출처
(Bundersarchiv) (History Hit) (Stasi Museum)
(NATO) (Historycentral) (The Independ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