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을 펼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저출산이다. 한때 우리나라 출산율이 0.7까지 떨어져 세계
최저라는 소식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0.9가 되었다고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결혼을 미루는
젊은이들이 많고, 어렵게 결혼을 해도 아이 낳기를 두려워한다. 집값이며 교육비며,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출산을 한다 해도 대부분 병원과 산후조리원의 도움을 받는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출산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병원은 커녕 산파를 부르는 집도 드물었다. 대개는
집안 어른들이 산실을 지켰다. 우리 어머니 역시 그렇게 사내아이 여섯을 낳으셨다. 밤중에 진통이 와도 호들갑
떠는 법이 없었다. 뜨거운 물을 데우고, 흰 천을 삶고, 방 안 아랫목을 덥히는 것으로 출산 준비는 끝이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식구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하던 일이 금줄을 치는 일이었다. 대문도 아닌 사립문 양쪽에 대나무를 세우고 새끼줄
을 걸었다. 아들을 낳으면 붉은 고추를 끼우고, 딸을 낳으면 검정 숯을 매달았다. 어떤 집은 솔가지나 부적 같은 것
도 함께 꽂아 두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금줄은 신기하고도 엄숙한 경계선처럼 보였다. 함부로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집, 갓 태어난 생명을 지키는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때 어른들은 “삼칠까지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삼칠, 곧 스물하루 동안은 산모도 아이도 세상
바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미신만은 아니었다. 의술이 부족하던 시절, 산모는
산후풍과 하혈로 목숨을 잃기 쉬웠고, 갓난아이는 작은 감염에도 위험했다. 배꼽이 마르고 몸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누구보다 연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금줄이 걸린 집에는 아무나 드나들지 못했다. 특히 상가집에 다녀온 사람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부정을 탄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 말을 무섭게 들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죽음의 기운보다 병균과 감염을
두려워한 삶의 지혜였는지도 모른다. 최근 읽은 기사에는 무당들조차 세이레 동안은 장례식장에 가지 말라고 경고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갓난아이는 가장 약한 존재이기에 죽음의 기운이 옮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이를 ‘상문살’이라 불렀다 한다. 하지만 그 믿음의 밑바닥에는 결국 생명을 지키려는 간절함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도 아이가 태어나면 집안 식구들조차 몸가짐을 조심했다. 상가에는 가지 않았고, 먼 길도 삼갔다. 혹여
상가에 다녀온 사람이 실수로 금줄 안으로 들어오면 어른들은 소금을 뿌리며 액을 막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공연히 겁을 먹곤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행동은 새 생명을 향한 공동체의 조심스러운 배려였다.
삼칠이 지나면 새벽부터 집안이 분주해졌다. 어머니는 삼신상에 흰쌀밥과 미역국을 올리고 두 손 모아 아이의 무탈함
을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금줄을 걷어냈다. 그날은 아이가 비로소 세상과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 이웃들이 찾아와
강보를 들춰보며 “복덩이네, 복덩이야” 하고 덕담을 건넸다. 누군가는 실타래를 가져오고, 누군가는 엿이나 쌀을 보태
며 아이의 긴 수명과 복을 빌어주었다. 마을 전체가 함께 아이를 키우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금줄도 보기 어렵고 삼칠이라는 말도 점점 사라져 간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삼칠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가장 연약한 생명을 위해
모두가 함께 조심하고 배려하던 시간이었다. 아이 하나의 울음소리를 온 마을이 기쁨으로 받아들이던 따뜻한 풍속
이었다.
출산율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한 집안만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기쁨
이었던 기억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마음인지 모른다. 금줄은 사라졌어도 새 생명을 귀하게
여기던 사람들의 정성만은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