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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정장을 입은 모습이 다소 생소하기도 했지만 김인식 감독의 50년 넘는 야구 인생 이야기에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
김인식(63)이라는 인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은 역시 감독입니다. 작년 시즌을 끝으로 한화 이글스의 지휘봉을 놓고 이제는 이글스의 고문이자 KBO 기술위원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생겼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을 ‘김 감독’이라고 칭합니다.
현장을 떠났기 때문에 모처럼 한가한 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현역 감독 때보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할 일도 더욱 많아졌습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날도 계속된 약속이 이어졌고, 일본 NHK의 인터뷰까지 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6년 전 악몽처럼 덮쳤던 뇌경색의 후유증을 완전히 떨어버리기 위해 요즘도 하루도 빼놓지 않은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녹색 다이아몬드를 잠시 떠났지만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는 ‘국민 감독’ 김인식의 50년 넘는 야구 인생을 들어봤습니다.
-일단 현역을 떠나셨는데 요즘 더 바쁘신 것 같습니다.
▶글쎄요, 어찌 하다 보니까 하는 일이 많이 생기네요. 건강은 계속 좋아지는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팀을 맡았을 때보다는 병원이나 한의원 같은데 침 맞으러 다니는 것이 자유롭고 운동 아닌 운동도 하게 되고 그럽니다.
-말씀이 나왔으니 좀 들려주세요. 2004년 12월에 뇌경색이 왔었죠.
▶2003년까지 두산을 맡았고 2004년 1년을 쉬는 도중에 9월 20일에 한화에 결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나가사키에서 11월 말까지 마무리 훈련을 끝내고 돌아왔지요. 그리고 12월 5일에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한 달 이상 병원 생활을 했습니다.
-의학계에서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회복이 잘 되셨다는데.
▶2006년 WBC 가기 전에 1월에 경미하지만 대전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요. 자동차 바퀴가 다리를 넘어간 거지요.
-그 정도면 경미한 것이 아닌데요.
▶하여튼 넘어갔어요. 그래서 아스팔트에 떨어졌는데 그러면서도 머리는 다치지 말아야겠다 해가지고 어깨로 부딪혔어요. 넘어가는 순간에도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서 머리도 찍고 정밀 검사를 했는데 그 당시까지도 뇌경색 흔적이 나왔어요. 그런데 2008년에 다시 찍었는데 흔적이 없어졌다는 거에요. 3달마다 한 번에 20방씩 찍는데 전혀 흔적이 없어졌데요. 그래서 병원에서도 정말 의아하다는 이야기들을 했습니다.(웃음) 몸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흔적은 죽을 때까지 남는다고 하는데 없어졌다며 담당 과정도 놀라시더라고요.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극복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특히 스트레스가 극심한 야구 감독직을 하면서도 이렇게 회복이 되셨는데요.
▶병원에서는 한 달 만에 나왔어요. 그 한 달 동안에는 하루 6시간씩 재활을 했어요. 남이 보면 운동도 아니죠. 오른쪽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으니까요. 팔도 뭘 잡으려면 떨어지니까 줄로 묶고 있었어요. 그래도 계속 했어요. 매일 한 시간씩 걷고, 또 조대현 트레이너가 한 시간씩 마사지를 해준 것도 컸어요. 간간이 침도 맞았죠.
그리고 퇴원 후에도 계속 걷고 마사지 받고 치료를 계속하니까 5년 정도 지나니 이 정도로 좋아졌어요. 아직 걷는 것이 아주 완전하지는 않으니까 그것도 바로 잡아야죠. 지난주에도 정상인과 같은 수치를 회복하기 위한 재활 프로그램을 받았어요.
-그게 보통 의지로는 정말 쉽지 않겠습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런 것은 분명히 있어요. 정말 의지를 가지고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요즘 일과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일단 아침에 한 시간씩 걷습니다. 정장을 입어야하는 날은 차에다 구두를 놔주고 운동화를 신고 나오죠. 그러면 한 시간 후에 집사람이 나를 태우러 옵니다. 그래서 나를 침 맞는데 내려줘요. 30개 이상을 꽂고 1시간을 있어요. 집사람이 고생이죠. 내가 누워있는 동안에 기다리다가 다시 나를 태우고 잠실이나 내가 그날 일이 있는 곳에 내려줍니다. 그러면 볼일 보고 저녁엔 택시를 타고 들어갑니다.
-2005년 시즌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겠습니다.
▶그렇죠. 갈등이 심했습니다.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랬는데 한화 김승연 회장이 지시를 하신 것 같아요. 계약한 지 한 달 조금 넘어 그렇게 됐으니까요. 몸이 안 좋은데도 맡아서 했고, 요행히 준플레이오프에 가고 그 이듬해 한국시리즈 올라가고 그 해에 WBC도 나가고. 오히려 지금은 그때보다 몸이 훨씬 나아졌지요. (웃음)
2004년 12월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김인식 감독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운동과 재활로 이제 정상인과 별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얘기 좀 들려주세요. 서울토박이시죠? 저도 서울토박이지만 동소문동이면 조금 생소한데요.
▶그게 어디냐 하면 내가 돈암초등학교를 나왔어요. 돈암동과 삼선교 중간이 동소문동입니다. 거기가 고향이죠.
-어려서부터 야구를 하셨나요. 그 당시는 한국전쟁 끝나고 정말 힘든 때였을 텐데요.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어요. 집 근처의 경동고등학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경동고 야구가 유명했으니까. 그러다보니 동네끼리 야구 시합을 많이 했어요. 동도극장이라는 곳 뒤편에 개천이 있었어요, 그 개천가에서 동네별로 야구를 많이 했어요.
-상당히 어렸을 때였고, 환경도 열악했겠습니다.
▶선수가 9명이면 글러브를 끼고 하는 애는 서너 명 될까? 나머지는 맨손으로 했지요. 그래도 나는 모두 나보다 형들 사이에 끼어서 했어요. 우리 또래에서는 내가 시합에 낄 정도로 꽤 했던 것 같아요. (웃음)
-정식으로 팀에서 야구를 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배문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팀에서 운동을 했어요. 그리고 3학년 때 대한체육회에서 각 종목에서 하나씩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어요. 1961년도 연식 야구 부문 올해의 선수가 됐어요. 축구면 축구, 야구면 야구를 중학생과 일반으로 나눠 한 명씩 주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 군사정권이었고, 체육회장이 이주일 씨인가 그랬어요.
-중학교는 연식 야구라고 불렀나 봅니다.
▶고무공에 안에 코르크를 넣은 준경식 공이라고 있지요. 그것으로 경기를 했던 중학교는 연식야구, 고등학교와 실업은 경식야구라고 불렀어요.
-그럼 중학생 중에 MVP네요.
▶그렇죠. (웃음) 그 당시 경식 야구 그러니까 고등학교 이상 일반까지 다 합쳐서는 백인천씨가 받았어요. 당시 백인천씨는 농업은행 1년차였어요. 상 받으러 가서 우리 우상이던 백인천씨를 처음 직접 봤어요. 그 상을 받고 일본으로 갔을 겁니다. 시상식이 62년 1월 소공동의 상공회의소에서 했어요.
-그 당시도 투수였나요.
▶그렇죠. 당시 내 생각에는 전국적으로 좋은 선수가 많았는데 박지완 감독님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웃음) (그리고 WBC 펫코파크 경기 때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박지완 감독 자제분과의 재회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박지완 감독은 미국으로 이주해 어린이들을 지도하다가 80년대 중반에 작고했습니다.)
-배문고에서 계속 야구를 하다가 실업팀에 가셨죠.
▶고등학교 때도 이름은 좀 날렸어요. 그리고 1965년에 한일은행 산하 관리기업체인 크라운맥주 팀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해에 신인왕이 됐지요. 9승2패에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또래에서는 대표 선수가 가장 먼저 됐어요. 1967년 7회 아시안 게임에 뽑혀서 갔어요.
-그때는 일본하고 실력 차이가 좀 났겠습니다.
▶많이 났죠. 내 기억으로는 김영덕 감독이 아주 잘 던졌는데 2-0으로 졌어요. 그 양반 공을 일본 애들도 잘 못 치더라고요. 지금 니혼햄 감독 다카다, 나중에 한신 타이거스 4번 치던 다카다 등 유명 선수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래서 결국 준우승했어요.
나야 후보 선수였지만 역시 투수가 좋으면 상대방이 아무리 강해도 맘대로 못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우리가 공격만 조금 했으면 이겼죠.
-그런데 일찍 은퇴를 하셨어요.
▶다쳤어요. 어깨를 다쳐서. 지금 같으면 수술을 하고 계속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스포츠 의학이라는 것이 훨씬 떨어질 때니까요. 그래서 실업야구 잠깐하고 그만 둔거죠. 인대 파손인 것 같았는데 조금 쉬면 괜찮다가도 날이 추우면 또 아프고 무리하면 아프고 그랬어요. 일상생활은 문제가 없는데 힘을 줘서 공을 던지면 아팠어요.
-많이 아쉬웠겠습니다.
▶물론 아쉽기도 했지만 그 땐 그랬어요. 아프면 은퇴하는 거니까. 이제 그만 두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죠. (웃음)
-은퇴 후에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셨나요.
▶아니에요. 한일은행에서 근무를 했지요. 잘 다니고 있는데 73년에 배문고 감독을 맡으라고 해서 은행 다니면서 하다가 은행 그만두고 감독을 했습니다. 고생 시작이죠. 운동도 운동이지만 학생들 대학 보내는 것, 취직시키는 것 그것이 정말 어려웠어요.
-은행이 훨씬 안정적이지 않았나요.
▶물론 그런 점도 있었지요. 그러나 감독을 해도 다른 직장에 겸직을 하곤 해서 경제적으로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어린 나이에 팀을 맡아 경기 외적인 것들이 몹시 어려웠어요. 배문고 3년, 상문고 4년 그렇게 7년을 하고는 동국대 감독으로 갔어요.
-당시가 동국대 전성기였죠.
▶82년에 갔는데 괜찮은 때였죠.(너털웃음) 내가 갔을 때 운 좋게 27년 만에 처음 우승을 했어요. 선수들이 좋았어요. 한대화. 이문한, 김봉근, 민홍식, 이광열, 김평호, 강경남, 김민호, 백인호 등 쟁쟁한 멤버들이 많았어요. 송진우, 이강철도 나중에 들어왔지요. 동대 감독을 만 4년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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