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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다음 날 아우들 부부와 선운사로, (2016. 09. 04) 아름답게 피어있는 백일홍(배롱나무)이 천년고찰과 어우러져 부처님의 화엄세계가 이 아닌가 하는 찬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陳成子 弑簡公(진성자 시간공)이어늘, 陳成子(진성자)가 簡公(간공)을 시해하자,
孔子 沐浴而朝(공자 목욕이조)하사 告於哀公曰(고어애공왈). “陳恒(진항)이 弑其君(시기군)하니, 請討之(청토지)하소서.” 孔子(공자)께서 목욕하시고 조회하시어 哀公(애공)에게 아뢰셨다. “陳恒(진항)이 君主(군주)를 시해하였으니, 토벌하소서”
公曰(공왈).“告夫三子(고부삼자)하라.” 哀公(애공)이 말하였다.“저 三子(삼자)에게 말하라.”
孔子曰(공자왈).“以吾從大夫之後(이오종대부지후)라, 不敢不告也 (불감불고야)호니, 君曰(군일)‘告夫三子(고부삼자)’者(자)온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내가 大夫(대부)의 뒤(末席)를 따랐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는데, 군주께서“저 三子에게 말하라고 하시는구나.”
之三子(지삼자)하여 告(고)하신대 不可(불가)라 하여늘, 孔子曰(공자왈).“以吾從大夫之後(이오종대부지후)라 不敢不告也(불감불고야)니라.” 三子에게 가서 말씀하셨는데 불가하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내가 大夫(대부)의 뒤를 따랐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 헌문 22장-
今釋(茶山의 해석) 제나라의 대부 진성자가 자신의 군주 齊(제) 간공을 죽였다. 공자가 이 인륜의 큰 변고를 당하자 특별히 목욕재계한 후, 조회에 나아가 노나라 애공에게 “진항이 그 군주를 죽였으니, 출병하여 그를 토벌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보고하자, 애공이 “季孫(계손), 叔孫 (숙손), 孟孫(맹손)이 세 대신에게 가서 말하시오”라고 했다. 공자가 조정에서 물러난 후 다른 사람에게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을 적이 있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도리어 나보고 ‘세 대신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시더라”라고 하고, 세 대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 일에 대해 말했으나, 그들은 제나라를 토벌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자는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은 적이 있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하여,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것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〇다산은 주자와 다르게 “《좌전》의 기록이 공자의 말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삼가는 것이 재계·전쟁·질병이었고, ‘맨손으로 범을 사로잡으러 달려들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려는 자와는 함께하지 않겠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무모하게 승산이 없는 싸움을 걸어 ‘죽어도 후회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는 《좌전》의 말과 같이 진항에게 동조하지 않는 제나라의 무리와 노나라의 군대가 합세하면 반드시 제나라를 이기리라는 계획이 섰기 때문에 임금에게 청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朱註(朱子의 집주) ①朱子(朱熹) 成子는 齊大夫니 名은 恒이오 簡公은 齊君이니 名은 壬이라 事在春秋哀公十四年이라. 是時에 孔子 致仕居魯라 沐浴齊戒以告君은 重其事而不敢忽也라 臣弑其君은 人倫之大變이라 天理所不容이니 人人得而誅之온 況鄰國乎아 故로 夫子 雖已告老나 而猶請哀公討之하시니라. 三子는 三家也니 時에 政在三家하여 哀公이 不得自專이라 故로 使孔子告之라. 成子(성자)는 제나라 대부이니 이름은 恒(항)이고, 簡公(간공)은 제나라 군주이니 이름은 壬(임)이다. 사건이 춘추 애공 14年.條에 나와 있다. 이때에 공자께서 벼슬을 물러나 노나라에 계셨다. 목욕재계하고 군주에게 아뢴 것은 이 일을 중히 여겨 감히 소홀히 하지 않으신 것이다.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함은 인륜의 큰 변고이다. 천리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니, 사람마다 나서서 모두 그를 주벌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웃 나라이겠는가. 그러므로 부자께서 비록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기로 청했는데도(告老) 오히려 (현직의 年富力强한 대부처럼) 애공에게 토벌하기를 청하신 것이다. 삼자는 三家(계손, 숙손, 맹손)이니. 이때 정권이 三家(삼가)에 있어 애공이 스스로 오로지 하지 못했으므로 공자로 하여금 (삼환씨에게)고하게 한 것이다. 孔子出而自言如此라 意謂弑君之賊은 法所必討요 大夫謀國하니 義所當告어늘 君乃不能自命三子而使我告之邪아. 以君命往告로되而三子는 魯之强臣으로 素有無君之心하여 實與陳氏聲勢相倚라 故로 沮其謀한대而夫子復以此應之하시니 其所以警之者 深矣로다. 공자께서 밖으로 나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하신 것이다. 공자의 뜻은 군주를 시해한 역적은 법에 따라 반드시 토벌해야 할 것이요, 대부는 국사를 도모하니 의리상 마땅히 고해야 하는 바이거늘, 군주께서 마침내 직접 三家에게 명령하지 못하시고 나로 하여금 고하게 하시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군주의 명령으로 가서 말씀하셨으나 三家는 노나라의 막강한 신하로 본래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서 실로 진씨와 더불어 명성과 위세가 서로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그 계책을 저지한 것인데, 부자께서 다시 말씀으로(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응하시니, 그 경계하심이 깊다. ②程子(伊川) 程子曰 左氏記孔子之言 曰 陳恒이 弑其君에 民之不予者半이니 以魯之衆으로 加齊之半이면 可克也라 하니 此非孔子之言이라 誠若此言이면 是는 以力이요 不以義也라 若孔子之志는 必將正名其罪하사 上告天子하고 下告方伯하여而率與國以討之리니 至於所以勝齊者하여는 孔子之餘事也니 豈計魯人之衆寡哉아當是時하여 天下之亂이 極矣라 因是足以正之면 周室이 其復興乎인저 魯之君臣이 終不從之하니 可勝惜哉아. (予 더불어 여= 與) 정자(이천)가 말씀하셨다.“좌씨가 공자의 말씀을 기록하기를‘진항이 그 군주를 시해함에 제나라 백성들 중에 편들어 주지 않는 자가 반이나 되니, 노나라의 무리에다가 제나라의 반에 더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말씀이 아니다. 만일 이 말과 같다면 이는 힘으로 한 것이요 의리 한 것이 아니다. 만약 공자의 뜻으로 말하면 장차 그 죄를 바로 지칭하여 위로는 천자에게 아뢰고 아래로는 방백에게 말씀해서 동맹국을 거느리고 토벌하셨을 것이니, 제나라를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공자의 나머지 일이다(이기고 지는 일은 별개의 일이라). 어찌 노나라 사람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였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천하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로잡았으면 주나라 왕실이 다시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나라 의 군신들이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③胡氏(胡寅) 胡氏曰 春秋之法에 弑君之賊은 人得而討之하니 仲尼此擧는 先發後聞이 可也니라. 호씨(호인)가 말하였다.“<춘추>의 법에 군주를 시해한 역적은 사람마다 모두 토벌할 수 있으니, 공자의 이 일은 먼저 토벌하고 뒤에 天子에게 아뢰는 것이 可하다.”
家苑 註(가원 이윤숙 선생의 집주) 진성자는 제나라 환공 때 陳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한 陳敬仲(《춘추좌전》장공 22년)의 5대손이다. 제환공의 진경중에 대한 신임을 기반으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대부를 이어 가며 세력을 확장하더니, 진성자에 이르러서는 군주인 간공을 시해했다. 이미 제나라는 崔杼(최저)가 莊公(장공)을 시해하고 景公(경공)을 군주로 세운 바가 있고(《춘추좌전》양공 25년) 대부들이 정사를 전횡하고 있었다. 이때 진씨 가문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민심이 진씨에게 돌아가고 있었다(논어역해 2권, 안연편 제11장 참조). 이후 陳(진)씨 가문은 성씨를 田(전)씨로 바꾸고 제나라 군주가 되었다. 진성자의 제나라 간공 시해사건(애공 14년 여름)은 공자께서 《춘추》집필을 끝내고(애공 14년 봄) 나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일이다. 공자께서 《춘추》를 통해 ‘臣弑其君(신시기군 :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子弑其夫(자시기부 :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각 나라의 사례를 일일이 적시했는데, 공자께서 생전에 일어난 간공 시해 사건이 빠지게 되자 제자들이 논어에 기록하게 된 배경이다. 춘추 집필을 끝내고 난 뒤에 일어난 군주 시해 사건에 공자께서 매우 노하였던 것 같다. 더욱이 간공과 그의 아버지인 悼公(도공)은 군주가 되기 전에 노나라에 한동안 머물기도 했고, 바로 이웃나라인지라 공자는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들어가 애공을 만나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에는 천자나 제후 연합군이 기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제후나 경대부에 대해선 응징[征伐과 討伐]을 가했으며 또한 그로써 경계를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 당시는 수많은 시해사건이 일어나도 방치되는 상황이었다. 공자께서는 토벌을 청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굳이 이 사건을 노나라 군주인 애공에게 보고한 것은 이를 공론화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기력한 애공은 삼환씨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의논하자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공자에게 삼환씨에게 가서 알려주라고 말하였다. 군주의 권력이 이미 삼환씨에게 넘어간 노나라는 전씨가 정사를 농단하는 제나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군주의 명을 차마 어기지 못한 공자께서는 “以吾從大夫之後라 不敢不告也니라”하였다. 첫 번째 나온 이 말의 뜻은 공자가 국가원로인 전직 대부로서 임금의 명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한탄한 것이고, 두 번째의 말 속에는 늙은 전직 대부로 무력한 임금을 대신해 현직 대부인 실세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알려야 하는 현실을 통탄하며 고발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춘추좌전 애공 14년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나라 진항이 그 군주인 壬(임)을 서주에서 시해하였다. 공구가 3일간을 목욕재계하시고 제나라를 칠 것을 세 번 요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노나라는 제나라 때문에 약해진 지 오래거늘 그대가 치자는 것은 장차 어찌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했으니 백성들의 반은 그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고, 노나라의 무리가 제나라의 반에 가세한다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애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계손에게 고하라.’라고 했다. 공자가 말씀드리고 물러 나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대부의 뒤를 따르는 까닭으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하였다.” (齊陳恒弑其君壬于舒州이어늘 孔丘三日齊하사 而請伐齊 三하니 公曰魯爲齊弱久矣라 子之伐之 將若之何오 對曰陳恒弑其君에 民之不與者半이오 以魯之衆으로 加齊之半하면 可克也로이다 公曰子告季孫하라 孔子辭하시고 退而告人曰吾以從大夫之後也라 故로 不敢不言이라) 征討(정토)하고자 했던 공자의 뜻은 무너지고 다만 이런 문제제기를 통해 “난세를 다스려 바름으로 돌이키려 했던(撥亂世反之正: 史記 太史公自序)” 춘추의 대의만이 남게 되었다.
1, 告老(고노) : 몸이 늙어서 벼슬할 수 없다고 군주께 아뢰는 것으로 致仕(치사)와 같은 뜻이다. 2, 左氏記孔子之言(좌씨기공자지언) : 이 내용은 《春秋左傳 》哀公 14年條에 보인다. 3, 民之不予者半(민지불여자반) : 《春秋左傳》에는 予字가 與字로 되어 있는바, 許與(허여 : 인정해 준)의 뜻이다. 4, 先發後聞(선발후문) : 먼저 토벌하는 일을 거행하고 뒤에 天子에게 보고함을 이른다. 象村 申欽은 이것을“공자가 먼저 토벌하고 뒤에 魯나라 哀公에게 보고해도 된다.”고 해석하여 胡寅의 이 말을 비판하였으나 三淵 金昌翕은 象村의 이러한 주장을 일축하고 당시 노나라 상황이 陳恒을 토벌할 수 있었다면 天子에게 보고하는 것은 뒤에 하여도 괜음을 말했을 뿐임을 역설 하였는바, 이 내용이 ⟪三淵集⟫<漫錄>에 보인다. 5, 沐浴而朝(목욕이조) :‘沐(목)’은‘머리를 감는 것’이고,‘浴(욕)’은‘신체를 씻는 것.’옛사람들은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왕왕 먼저 목욕을 하여 깨끗한 몸으로 공경함과 신중함을 표시했다.‘朝 (조)’는‘조회에 나가다.’이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碧 松(智 㒤)- 행복하십시오! |
첫댓글 사루스베리 때문에 여름이 그렇게 더웠는데, 가을이 되니까 사루스베리가 있어도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