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전의원이 의원이었을 때도 한인타운에선 그가 한인들은 안 챙기고 흰둥이만 챙긴다 이렇게 좋지 않은 말들이 많았고, 그가 몰락하려 할 때 한인타운의 유지라는 자들이 투서질도 많이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몰락하자 고소해한 인간들도 꽤 많았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자제하고 이에 대한 기사 몇개 더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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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2.09
제목 [로스앤젤레스검찰] 김창준의원 징역 구형
[로스앤젤레스검찰] 김창준의원 징역 구형
▶ 로스엔젤레스 관할 미 연방검찰은 6일 불법 선거자금 모금으로 기소돼 유
죄를 시인한 김창준 연방하원의원에게 징역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또 같은
혐의로 유죄를 시인한 김의원의 부인 김정옥씨에 대해서 가택연금이나 거
액의 벌금형을 내리고 김의원의 회계를 담당한 선거운동위원회에 대해서도
25만달러 이상의 벌금형을 구형했다. 선고 공판은 오는 3월9일이다.
▶ 검찰은 김의원에게 징역형을 요청하면서 기간은 명시하지 않았으나 비공식
적으로는 약 6개월 정도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 김의원은 지난해 8월 선거자금법과 관련, 3건의 경범죄에 유죄를 시인함으
로써 최고 3년의 징역형과 43만5천달러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으며, 부인
김씨는 2건의 경범죄에 유죄를 시인, 최고 2년의 징역형과 20만달러의 벌금
형을 받을 수 있다.
▶ 김의원 부부는 모두 18차례에 걸쳐 불법임을 알면서 기업 및 외국인의 기
부금을받고 이같은 사실을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에 신고하지 않은 사실
을 인정했다.
▶ 한편 중범죄에 대해 유죄를 시인한 김창준 선거위원회는 최고 250만달러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김의원은 경범죄로 선고를 받게 됨에 따라 의원직
을 사퇴할 필요는 없으나 하원윤리위원회는 김의원 사건을 조사중이며 올
여름 예비선거를 앞두고 당내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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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김창준이 재혼할 때 여성지에 난 기사입니다. 김창준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그의 전처입니다.)
인터뷰를 위해 취재진을 자신이 머무는 호텔의 객실로 초대한 김 전 의원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많은 일들이 정리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동지에서 인생의 반려자로 역할이 바뀐 제니퍼 안이 하루 종일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를 즐겁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글쎄 올시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사람 아주 재미있고 생각이 긍정적이고, 밝아요. 그런 사람들이 드문 편인데… 거기에 활발하고 예쁘잖아요? 아무튼 저는 이런 사람 처음 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저보고 ‘개그맨’이래요. 제가 그렇게 웃기나봐요… 별 조크 하지도 않았는데, 배를 잡고 웃어요. 그래서 서로 웃다가 일도 못할 지경이에요”
김의원에게 지난 두 해는 최악의 연속이었다. ‘4선 고지 좌절’과 ‘이혼’‘한국현지법인 정치자금사건’‘국내 정치 진출’ 등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11월 중순이면 이혼 절차가 모두 끝납니다. 그래서 12월9일경에 가까운 친지만 모아놓고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생각입니다. 조촐하게요. 하지만 이 사람 식구들이 워낙 대가족이어서, 생각대로 될는지 모르겠어요”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와중이어서 두 사람 관계를 내놓고 말할 수 없었음을 얘기한 김 전 의원은 처음으로 결혼 날짜를 발표한다고 말했다. 이런 김 전 의원을 곁에서 지켜보던 제니퍼는 미국 정치 사회에 있어서 김 전 의원이 가진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동양인이, 그것도 한국인이 미연방하원의원이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죠. 1억이 넘는 인구 중에 4백35명뿐인 하원의원이 될 수 있다는 건 말이죠. 조그만 소도시나 주하원도 무척 힘든 일인데, 연방하원의원을 3선이나 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죠. 그리고 보좌관으로 의원님과 함께 일해보니까, 아주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굳어졌어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모함’에 빠지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셨죠.”
1939년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난 김창준씨는 해방과 한국전쟁 중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남가주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후 엔지니어가 된다. 이후 자신의 회사를 미국내 500대 설계회사에 들만큼 키워,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그는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1990년 4월 자신이 살던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 바 시의 시의원, 시장을 거쳐 1992년 드디어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이후 내리 3선을 기록하며 미국 한인 교포사회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불행은 다가왔다. 지난 98년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한국의 현지법인들로부터 자금을 받아 워싱턴에서 로비를 했다’는 내용이 포함이 됐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평생을 함께 해왔던 전 부인 김정옥씨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다.
“삼성이나 한진의 현지 직원들이 저에게 후원금을 기탁했죠. 미국은 이런 금액도 정해져 있어요. 5백불에서 1천불로. 그래서 저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죠. 개인자격이었으니까… 그런데 직원들이 본사에 ‘김창준 후원회금’이라고 보고를 한 거예요. 그것을 본 우파들이 공격을 하고… 한동안 어수선했죠.
중산층 백인들이 대다수인 유권자 중에는 동양인이 하원의원이 되는 것을 탐탁치않게도 생각해요. 하지만 대부분 오해였음이 판명되었어요. 물론 조사를 받은 적은 있지만, 재판을 받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조사가 끝나고 나서 황당한 조치가 내려졌죠. 한참 선거가 진행 중인, 저의 지역구에 3달 동안 가지말라는 거였어요. 당연히 예비선거에 떨어지고 본선거도 떨어진 것이죠”
그는 지금도 선거얘기가 시작되면 할 말이 많아진다.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모략’으로 인해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후원회금에 대해서 한국 기업의 고위관계자가 증언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증언이 아주 명쾌하고 속이 시원했어요. ‘우리가 김창준 의원을 매수하려 했다면, 50만불을 쓰면 썼지 5천불을 쓰지는 않는다’라구요. 그래서 깨끗하게 정리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그는 부인 김씨에게 이혼소송을 당한다. ‘워싱턴에 내연의 관계를 가진 여자가 있다’는 주장과 함께.
“미국의 이혼법은 어느 한 쪽이 이혼을 청구하면 진행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혼은 반대였죠. 선거에서 진 것이야 이겨낼 수 있었지만,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니까요. 그래서 전화도 많이 하고 편지도 보냈어요. 제가 지역구에 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사람은 끝내 이혼을 강행하더군요. 저는 지금도 그 사람이 이혼을 요구한 것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어요”
미국의 한국계 신문, 한국내의 신문, 그리고 다시 미국 일반 신문에 번갈아가며 연달아 그에 관한 안 좋은 기사가 터지면서 종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의원직도 잃고 가족도 잃는 상태가 되고 만다. 늘 성공가도 만을 달려온 육십 인생에서 처음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 때 김의원은 ‘총을 사서 자살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천하의 죽일 놈이 된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나빴나?’하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선거8번 출마해서 처음으로 떨어졌고, 이 나이에 이혼소송을 당하고…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그 때 제니퍼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용기를 얻어, 마지막까지 의정활동을 충실하게 끝냈죠. 작년 6월이었죠. 보통 지역구 예비선거에서 떨어지면, 워싱턴을 정리하고 낙향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끝까지 등원해서 ‘우수 의정상’까지 받았죠.”(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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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에서. 주제는 다른 사람이지만 김창준에 대한 내용이 있어 올립니다. 김창준과 관련없는 앞부분은 생략.)
준최’는 엄연한 미국인
하지만 정치인 ‘준최’는 엄연한 미국인이다. 소수계로 험난한 정치판을 헤엄쳐야 할 미국정치인인 것이다. ‘세탁소집 아들‘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론을 접고 “한국인이기 전에 나는 미국인이다“라고 득표전략을 바꾼 것이 들어맞은 것이다. 한국인이 속속 미 정계에 나가는 것은 우리하기에 달렸다. 최 시장이 모델을 보인 것 아닌가. 횃불은 이제 그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이 한국인으로 자랑스러울 뿐 한국인이라 붙들지 말 것이다.
유성처럼 떴다가 사라진 김창준 의원에게서 무엇을 배워야하나. 정치인은 한낱 공직자일 뿐이다. 올려놓고 흔들지 말기다. 그는 시장도 해보고 한인 최초로 연방하원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의원을 정계에서 끌어낸 것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한인 사회의 정치현실은 아직도 본국정치 판을 빼 닮아있다. 쪼개져 만신창이가 되도록 서로 치고 받는다. 새 순처럼 자라 오르는 2세 정치인의 싹이 언제 어느 불길에 휘말릴지 모른다. 인도적인 ‘쓰나미 성금의혹’을 둘러싸고 석 달째 갈라져 싸우는 것을 보면 위기감마저 떨칠 수 없다. 분열은 우리의 몸에 박힌 문화적 ‘유전인자‘ 라고 자조하는 이도 있다. 하기야 민권운동에 앞장선 흑인들도 10년 이상 통합이냐 분리냐, 킹 목사냐, 말콤 x냐로 갈려 박 터지게 싸웠다. 하지만 흑인들이 미 의회에 진출한 것은 피를 보고 통합한 뒤부터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수계는 단결만이 해답을 준다. 안으로 뭉치고 이웃 공동체와 밖으로 연대하여 나아가는 길만이 살길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소인배들이 만나면 사람 헐뜯기요, 보통사람들이 만나면 무슨 일이 났는가를 말하며, 지혜로운 사람들이 만나면 아이디어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