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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주일설교 고린도전서3:1-9
본문: 고린도전서3:1-9
제목: 성숙한 성도로서 삶
오늘은 고린도전서3:1-9의 말씀을 가지고
“성숙한 성도로서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성숙한 성도로서의 삶”
지난 목요일에 하준이 가족들과 함께
안성에 있는 팜랜드에 갔습니다.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져 볼 수 있었고,
동물이 보여주는 쇼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준이와 함께 다니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준이는 태어나면서
한쪽 다리가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걱정이 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12개월 정도면 걷는데
하준이는 14개월이 지나도 걷지를 않아서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걸을 때가 되었는데 걷지 않으니 걱정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말자고는 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뛰어다니는데
일어서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을 볼 때
맘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5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잘 걷습니다.
특별히 팜랜드에서 이리저리 잘 돌아다니는 것을 볼 때
참 보기가 좋았고 기뻤습니다.
이처럼 자녀나 손자가 때에 맞게
먹고 자라고 행동하는 것은
부모나 조부모에게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걷고 뛰고 무엇이나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장성한 자는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신앙인의 책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살피며
말씀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1.성숙하지 못한 사람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자신에 대해서
대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를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그들은 전혀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대단한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모습과
그 너머 주님이 생각하는 모습이 어떠할까요?
그렇게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는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육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육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가 복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 믿음이 없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하기가 힘들다고 목회자들이 말합니다.
구원받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만 있다면
참으로 목회는 행복하고 좋은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으로 가진 것처럼
놀라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지금 바울은 독설을 날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교제가 성장하는가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만나지만 만날수록 깊은 관계로
변화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을 가도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습니다.
여전히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의
어린이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혼자서 먹고 혼자서 지내고
더 나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는 평생 남의 도움으로 신앙 생활하며
남이 어떻게 해 주어야 움직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났다면
그는 예수의 생명이 그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생명은 가만히 있고
육신의 생명이 그를 주관하고 있다면
신자이지만 신자답지 않은 모습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면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예수 안에서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새로운 능력과 지혜에 기대어 살아가야 합니다.
아이는 먹고 자고 잘 싸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 어린아이가 공부하기를 바랄 수 없고
부모의 심부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0살이 되었다면 공부해야 하고
20살이 되었다면 스스로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해야 하고
30살이 되어 결혼을 했다면 가족을 책임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도 공경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법칙은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40살이 된 어른에게 어린아이 같다고 한다면
그건 참으로 슬픈 일이 됩니다.
엄청난 책망이고 조롱이 됩니다.
어릴 때는 엄마 젖을 먹어야 하고 장성하면 밥도 먹고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먹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소화도 잘 해내야 합니다.
젖과 제대로 된 음식의 구분이
선포된 복음 자체의 차이는 아닙니다.
복음의 메시지 자체는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복음 속에 담긴 도덕적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복음이 급진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요구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구하는
죄의 회개와 용서 및 삶의 변화에 관한 메시지는
처음부터 선명하게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충격이 없을 정도로만 하는 완만한 우회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180도 돌아서는 날카로운 변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일은
매우 다른 현실입니다.
우리가 배운 복음을 일상에서 새로 깨우치는 일은
생애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학습과 성숙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살펴 생각하고
그에 어울리는 순종의 모습으로 만들어 갑니다.
결혼을 한 신앙 좋은 청년은 복음적인 남편으로서
모습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를 낳아 부모가 되면 복음적 부모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배운 말씀을 이식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상황 자체가 새롭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을 때는 잘 모르지만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어울리는 복음의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이 말씀 자체에 대한 신실한 이해 못지않게
내가 사는 일상에 대한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훈련을 통해
말씀을 경험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숙련된 감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정도 신앙생활 했으면 꽤 성숙한 신자들이 되어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실제 상황은 실망 그 자체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닙니까?
2.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이유
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육적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들을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그들 중에 드러나는 경쟁과 분쟁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쟁과 분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육적인 상태라는 사실이고,
은혜의 복음 대신 사람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육적이며 어린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풍성한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물론 그것을 바울도 어느 정도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영적으로 살고 있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의 표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그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기에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어떻게 행하고 있는 것이 있어야 성숙한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서로 경쟁하며
분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삶 속에서 돈만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삶 속에서 사람들의 칭찬만을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자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사람을 자랑하려 하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을 위해서 경쟁하고
아부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복음과는 모순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십자가를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태껏 의존하던
세상의 가치관을 폐기 처분하셨습니다.
그렇게 은혜로 선택된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 경쟁하고 분쟁하고 자기 자랑만 한다면
아직 복음 안에서 살지 못하는 세속적 무가치한 것에
휘둘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것을 쫓느라 그런 새로운 존재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처음 예수를 믿게 되면 아직 세상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더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믿기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자로서 살아갈 삶의 방향이 심하게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전혀 듣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지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행동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을 또한 그렇게 행하는 지금의 신자들을 육신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대신 인간적 가치와 조건들에
경쟁적으로 집착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람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진작 벗었어야 할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하는 사람을 세속적 인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령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채 주변 사회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꾸중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바울은 직설적으로 고린도 교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바울편이다 말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 편이다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1장에서부터 지적했던
분열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파벌로 갈라지는 이런 형태는 한 분 그리스도께
속하고, 한 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면
분탕질을 일삼는 이들을 풍자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보다 바울을 더 앞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별것 아닌 이런 인간적 유대를 근거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처럼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구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볼로 이름을 내세우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서로 구별하고 차별하면서
한쪽은 높이 평가하고 다른 쪽은 낮게 평가하였습니다.
각자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이런저런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갈라짐이 자기로부터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하게 만드는 명분으로
특정 지도자를 앞세웠습니다.
그런 방식은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보여주는
자기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생각의 틀과 흡사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가 세상방식으로 사는 것은
당시 주변 사회의 관행에
쉽게 휘둘렸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3.그렇다면 사역자의 위상은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사역자들의 위상이나 역할을
세상적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치판에서는 저 파가 죽어야 내 파가 살게 됩니다.
저 당이 죽어야 내 당이 살게 됩니다.
그런 일을 지금 고린도 교회를
바울과 아볼로를 내세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바울은 무엇이고, 아볼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무슨 답을 바라고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울이 무엇인데, 아볼로가 무엇인데 그런 존재들을
가지고 자랑하고 내세우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세상의 조건과 상관없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려과 지혜의 원천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기에 우리가 할 일은 그 주님을 자랑하고 내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개 인간을 마치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양 자랑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성도들이 그 이름을 앞세워
서로 편을 가를 만큼 무게 있는 인물이 못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몸으로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몸으로 함께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몸으로 계시지 않는 주님과 관계는 막연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마음 속
벅찬 느낌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인간 지도자에게 행동을 하면
확실한 것이 보여지고 응답되어 집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에게 충성을 하고
추종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추종이나 충성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이나
경멸로 쉽게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의 실제 한계와 역할을 무엇일까요?
바울과 아볼로는 모두 섬김이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복음을 선포하며 신자들을 돌보았던 하나님의 종입니다.
식탁에서 식사를 잘하도록 돕는 그런 섬김이입니다.
다른 말로 종이란 말입니다.
종이란 의사 결정권을 갖지 못한 사람,
오로지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 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따라 곧 하나님이 지시한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아볼로는 아볼로대로
각자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이런 종들에게는 서로 통제하거나
견제할 하등의 권리가 없습니다.
바울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그러나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곧 복음을 전한 자로서
심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아볼로는 교회가 자라도록
정성껏 물을 준 사람입니다.
심은 바울이나 물을 준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부여하고 자라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일 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바울과 아볼로는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심는 사람도
물을 주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 중요합니다.
심는 행위나 물 주는 행위는 중요합니다 .
그러나 그것이 식물을 자라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아닙니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 자체는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라게 하는 하나님만이
중요하다는 사실, 그래서 그분의 지시를 받는 인간
섬김이들은 어떤 독자적인 권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심고 물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식물이 자라는 근본 동력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같은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종속적이고 부수적인 역할의 수행자로 머물 뿐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자랑거리가 있다면
하나님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의 주인공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랑하려 들라면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심는 자나 물 주는 사람은 같다고 말합니다.
물론 각자 수고한 대로 자신의 품삯을 받을 것입니다.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누가 잘나고
못나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키 재는 일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도토리일 뿐입니다.
여기서 8절에서 상이라고 번역된 말은
품삯이나 보상을 의미합니다.
품삯이나 보상은 종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해야만 하는 의무를 다하고
그 수고에 따라 은혜로운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들은
보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하는 책망과 처벌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충성스럽게 행하면
보상을 받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책망과 쫓겨남이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종들인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도토리 기재기를 하면서 자신들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숙한 성도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성도님은
예수 믿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책임을 맡은 자입니다.
책임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여야 합니다.
이제 어른으로서 말씀을 차별하지 않고 어떤 말씀이나
듣고 묵상하고 순종하여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오는 생명이 우리를 움직여
영적인 자로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충성스럽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불렀고
섬기는 자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생명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의무를 가진
영적인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