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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6월16일(일요일) 남양주시 [홍유릉&백봉산&묘적사] 산행일정
산 : 남양주시 [홍유릉&백봉산&묘적사]
산행코스: [금곡역 1번 출구~(1.0km)~홍유릉 매표소~홍유릉 탐방(탐방 이동거리 3.5km)~금곡고등학교~(5.3km)~백봉산 정상~(4.1km)~묘적사~(1.8km)~묘적사 입구 정류장] (15.7km)
산행일 : 2024년06월16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남양주시 금곡동 최저기온 18도C, 최고기온 30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6시간10분 소요)
06:00~07:10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회기역으로 간 후 경춘선으로 2차 환승하여 금곡역으로 이동 [1시간10분 소요]
07:10~07:25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404-278 번지에 있는 금곡역 1번 출구에서 산행출발하여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번지에 있는 홍유릉 매표소로 이동
07:25~09:20 홍유릉(洪裕陵)을 [리멤버1910~홍릉.유릉 역사문화관~유릉~연지~홍릉~홍릉 옆 쪽문~영원~회인원~덕혜옹주 묘~의친왕 묘~후궁 묘역(수인당 묘&수관당 묘&귀인 장씨 묘&광화당 묘&삼축당 묘)~금곡고등학교]의 동선으로 탐방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남양주 리멤버 1910'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9.22. 16:43, 수정 2022.09.22. 17:43
김규원 남양주시청 학예연구사
널리 알려져 있듯이 박물관을 의미하는 영어의 뮤지엄(museum), 프랑스어의 뮤제(musee), 독일어의 뮤제움(Museum) 등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뮤즈(Muse)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 창고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박물관은 서기전 3세기경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무세이온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 최초의 박물관 형태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박물관이 등장한 것은 1909년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을 개관하면서부터이다. 100년 넘게 우리와 함께 한 박물관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곳일까? 한때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의무적(?)으로 방문하거나 방학 때 숙제를 하기 위해서 찾던 박물관은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박물관의 체험·교육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박물관은 시민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들려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문화공간으로 변하였다.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박물관은 학예사를 비롯한 전공자들의 리그에서 시민들이 재능기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자 제2의 삶을 보내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수도권 지역의 새로운 문화도시로 떠오르고 있는 남양주시는 지난 2021년 3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잠들어 계신 홍·유릉 앞에 복합문화공간인 ‘리멤버(REMEMBER) 1910’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REMEMBER 1910은 시민들이 우리 민족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인 경술국치가 일어난 해이자, 이석영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광복을 다짐하며 중국 만주로 망명을 떠난 1910년을 기억하고자 하는 남양주시의 다짐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명의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 정신을 이어받아 지난 날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는 역사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남양주 독립운동가 102분의 명단을 새긴 ‘독립의 계단’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REMEMBER 1910은 역사법정, 역사감옥, 독립의 계단, 미디어 홀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역사법정 ; 반민족행위처벌 특별법정’은 청소년들이 직접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인이 되어 을사오적 등 친일파를 심판하며 올바른 역사관을 수립할 수 있는 곳으로 학교와 청소년 단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대표적인 공간이다.
REMEMBER 1910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정년 퇴임한 중·고등학교 선생님, 지역 문화활동가 등 모두 10여 명으로 구성된 ‘시민도슨트(Docent)’선생님들이다. 시민도슨트는 약 3개월에 걸친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도슨트처럼 단순히 전시 관람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시 및 교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등 학예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8월부터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양주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특별기획전 '대한독립만세를 잇다'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시민도슨트는 활동비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남양주를 사랑하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재능을 지역에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활동이다.
근래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공간을 조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크고 웅장하게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저절로 멋진 문화공간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의식 있는 지자체와 열정 넘치는 학예사, 그리고 그 누구보다 지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민들이 서로 만났을 때 시민들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진정한 랜드마크로서의 문화공간이 탄생한다. REMEMBER 1910이 개관한 지 1년 만에 남양주의 ‘마인드마크’로 자리잡는 데에는 그 누구보다 남양주를 사랑하는 시민도슨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앞으로도 더욱 멋진 활동을 기대해 본다.]
[홍유릉(洪裕陵)
목차
1. 개요
2. 홍릉(洪陵)
3. 유릉(裕陵)
4. 홍릉과 유릉 명칭 비화
5. 원(園)과 묘(墓)
5.1. 영원(英園)
5.2. 회인원(懷仁園)
5.3. 의친왕묘(義親王墓)
5.4.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5.5. 귀인장씨묘(貴人張氏墓)
5.6. 광화당묘(光華堂墓)
5.7. 삼축당묘(三祝堂墓)
5.8. 수관당묘(修觀堂墓)
5.9. 수인당묘(修仁堂墓)
6. 홍유릉 연혁
7. 교통편
8. 기타
1. 개요
홍유릉(洪裕陵)
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능원은 따로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소재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이름을 따서, 때론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각 왕릉은 아래 목록 참조.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이방자의 묘로서 조선 왕릉[1]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회은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묘와 덕혜옹주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묘, 삼축당 김씨묘, 귀인 장씨묘, 의친왕의 첩인 수관당 정씨묘, 수인당 김씨묘를 포함한 후궁의 묘 5기가 홍유릉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 묘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대한제국이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남북한 모두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다.[2]
조선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에 비해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홍유릉 근처에 광해군묘가 있는데 이쪽은 폐위된 까닭에 왕릉이 아니다. 또 광해군묘보다는 멀지만 같은 남양주 안에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묘소도 화도읍에 있는데 원래 서울 공덕동에 있던 것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비록 부자관계지만 실제로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불참하였을 정도였는데 을미사변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왕조 이후의 시대(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이다.
2. 홍릉(洪陵)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합장릉 형식의 황제릉.
명성황후 사망시엔 서울시 청량리에 안장했으나 고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전하여 같이 안장했다.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그렇다고 중국 황제릉 형태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고 기존 한국 왕릉 특유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명나라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孝陵)의 묘제를 참고했다.
3. 유릉(裕陵)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효황제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 고종의 홍릉옆에 있다. 홍릉과 더불어 홍유릉으로 많이 불리는 편이며 드물게 한 봉분에 세 사람을 같이 모신 것이 특징.
홍릉과 마찬가지로 순명효황후 민씨 사망시엔 양주 용마산(현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안장해 유강원(裕康園)이라 했으나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비였던 민씨를 황후로 추존해 유릉(裕陵)으로 높여졌다. 순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 근처로 이전하여 함께 안장했으며,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사망하자 3명의 부부가 함께 안장됐다.
4. 홍릉과 유릉 명칭 비화
왕실의 예법에 따르면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면 일단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며, 국왕이 승하한 후 왕비와 함께 합장할 때 새로이 올린 국왕의 능호를 따르게끔 되어있었다. 가령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경우 1600년 승하한 의인왕후에게 유릉(裕陵), 1608년 승하한 선조에게 목릉(穆陵), 1632년 승하한 인목왕후에게 혜릉(惠陵)이라 능호를 올렸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조의 능호인 목릉을 따랐다.
그런데 고종의 경우 명성황후는 이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먼저 비명에 갔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더군다나 일제는 한일합방 조약을 맺을 때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왕공가궤범 200조의 규정을 만들어서 대한제국 황족이 이후에 죽더라도 새로운 능(陵) 또는 원(園)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둔 상태였다. 따라서 이 규정을 따른다면 고종의 무덤은 일반 백성과 같은 '묘'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에 조성된 능들은 이 규정의 해당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을 옮겨서 합장하는 방식을 취하면 이를 피할 수가 있었다. 즉 고종의 경우는 명성황후의 무덤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던 '홍릉'에 고종이 안치되는 식이다. 이는 왕이 뒤늦게 사망하면 새로운 능호를 올리던 원래 예법과 약간은 어긋나더라도 일단은 새로 능을 만든 게 아닌지라 규정(왕공가궤범 200조)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이왕가(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를 일본 천황가 보다 아래지만 화족보다 높은 지위로서 우대할 것을 경술국치 때 보장했다. 그래서 이왕가 내부적인 방침에 일제가 세세하게 간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고종과 순종의 능이 예법에 맞게 조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1897년 청량리에 조성된 명성황후의 홍릉을 남양주 금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고종황제와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홍릉이 완성됐다. 마찬가지로 1926년 승하한 순종 또한 1905년 용마산에 먼저 조성돼 있던 순명효황후의 유릉을 남양주 금곡 홍릉 옆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유릉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장된 후 비어진 홍릉 자리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그녀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장남인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이 조성되었다. 현재도 '구 홍릉' 지역으로 흔히 '홍릉로'란 도로명이 있으며, 홍릉 수목원이 위치하고 있다.
5. 원(園)과 묘(墓)
5.1. 영원(英園) :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 이곳은 영친왕이 생전에 황제에 오른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고종 이전 다른 역대 조선왕릉들처럼 제후국의 왕릉 양식으로 능원을 조성했다. 홍유릉과 영원을 비교해보면 황제릉과 제후왕릉의 차이점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5.2. 회인원(懷仁園)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가 안장된 무덤. 한동안 위 사진처럼 봉분만 남아 있었으나, 문화재청의 심의(2021년)를 거쳐 지금은 원(園)의 격에 맞게 주변에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5.3. 의친왕묘(義親王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그의 부인 의친왕비 김씨(이름 김수덕)가 안장된 무덤.
5.4.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막내(고명)딸인 덕혜옹주의 무덤.
5.5. 귀인장씨묘(貴人張氏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의친왕 이강의 생모인 귀인 장씨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1911년 고양군 둑도면 모진2리로 이장하였고, 1965년에 서삼릉 능역 내로 이장하였으며, 다시 2009년에 홍유릉능역 내로 이장하였다.
2009년 귀인장씨묘의 이장과 관련하여 의친왕의 8남이자 귀인장씨의 친손자인 황손 이갑 씨가 가족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묘가 이장되었다며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으며, 의친왕 9남 "덕수장씨 묘 이장 몰랐다" 기사, 이에 대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의친왕의 딸인 이해원씨의 이장 신청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장을 결정한 것이라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낸 경과가 있다. 문화재청 입장
5.6. 광화당묘(光華堂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이육의 생모인 광화당의 묘이다.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7. 삼축당묘(三祝堂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의 묘이다.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8. 수관당묘(修觀堂墓)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건의 생모인 수관당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9. 수인당묘(修仁堂墓)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우, 이주, 이곤의 생모인 수인당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6. 홍유릉 연혁
1897년(광무 1) : 고종 황후 명성황후의 홍릉 조성(현 서울 청량리 홍릉수목원 경내)
1900년(광무 4) : 황제릉의 형식으로 현재의 자리에 홍릉 공사
1905년(광무 9) : 순종 첫 번째 황태자비 순명비의 유강원 조성(현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
1907년(융희 1) : 유강원을 유릉으로 높임
1919년 :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고종과 합장함
1926년 : 유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순종과 합장함
1964년 :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부인 의친왕비묘 조성
1966년 : 순종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를 유릉에 합장함
1967년 : 고종 후궁 광화당 귀인 이씨의 묘 조성
1970년 :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영원 조성, 고종 후궁 삼축당 김씨의 묘 조성
1971년 : 영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김
1989년 : 고종 딸 덕혜옹주의 묘 조성, 의민황태자비 이씨를 영원에 합장함
1996년 : 의친왕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의친왕비와 합장함
2005년 :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 조성
2009년 : 귀인 장씨묘와 수관당 정씨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7. 교통편
경춘선 금곡역에서 올 때: 23번 버스 환승 / 도보(15분 소요)
중앙선 도농역이나 청량리역 쪽에서 올 때 버스: 1-4, 23, 30, 65, 330-1(좌석버스), 1330-2, 1330-3, 1330-4, 1330-44(직행좌석버스)
경춘선의 배차간격이 상당히 길고 서울 동북부 지역 외에서 상봉역까지 접근하기 어려우니 가급적 경의중앙선을 이용하기 바람.
기타 버스노선: 168(시내버스), 땡큐61, 땡큐88-1, 땡큐99(마을버스), 1000, 1100, 1200(직행좌석버스)
8. 기타
홍유릉 권역의 입장료는 2020년 기준 1,000원이다. 그 외 영원 이하 다른 황실 일원들의 무덤은 무료입장이다. 그리고 남양주시민에 한해 50% 할인이 적용된다.
홍유릉 주변 산책로는 금곡동 주민들이 자주 찾는 운동코스이다. 매년 8월 15일에는 정기적으로 걷기 대회도 열리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천일은행(우리은행 전신)의 설립을 지시했고, 고종의 7남인 영친왕이 천일은행 2대 은행장을 맡았다는 인연 때문에 매년 1월 1일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우리은행 은행장 등 우리금융그룹 고위 임직원들이 이 묘원을 참배한다. 우연인지 아닌지 홍유릉이 위치한 금곡동은 거주/유동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우리은행 지점이 계속 영업중이었다.(2022년 철수 및 무인화기기만 남음)
홍유릉 앞 경춘로와 면한 땅에 한때 '목화웨딩홀'이라는 예식장 건물이 있었다. 인근 평내호평 및 다산(도농.지금) 일대의 개발 전에 잠시나마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몰락 이후로는 영업만 종료되고 흉물로 방치되다 철거되고 '이석영광장'과 'REMEMBER 1910'이라는 기념관 겸 카페가 조성되어 있다. 건축 당시부터 문화재 구역에 예식장이 건설되었다는 자체가 논란이 생겨 웨딩홀 폐업 이후 매입하여 리모델링하거나 철거하자는 주장이 주민들과 시민단체 등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9년에 시 주도로 해결해서 나온 결과물이 우당 이회영의 형이자 출생지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인 독립운동가 영석 이석영 선생 및 독립운동을 기리면서 시민 휴식공간도 겸한 광장인 것.]
09:20~11:10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산 97-1 번지에 있는 백봉산(590m) 정상으로 이동
[백봉산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평내동, 와부읍, 화도읍
백봉산은 남양주에 있는 산으로 천마산과 이어져 있다. 백봉산(590m)은 잣봉산, 묘적산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1910년 이후 평내동 일대에 잣나무가 많아 잣나무 백자를 써서 백봉산으로 이름 붙였다. 백봉산은 도심과 인접하여 접근성이 뛰어나며, 높이는 낮으나 산세가 아름답고 동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전망이 뛰어나며 일출·일몰로도 유명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또, 2020년 남양주시에서는 백봉산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인생 사진을 남기기 위한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백봉산 전망대는 길이 25m의 목재 데크 보행로를 따라 6.5m 높이에 오르면 천마산을 시작으로 희야산, 운길산, 예봉산, 검단산, 그리고 서울 외곽을 형성하는 관악산에서 북한산~도봉산과 불암산~수락산 등 서울과 남양주 일원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백봉산의 남쪽에는 신라시대 때 세워진, 오래된 사찰인 묘적사가 있어 장년층과 가족 단위 산행객에게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왔다. 백봉산을 오르는 등산코스는 7개가 있으며 이 중에서 3코스에서는 7층 석탑과 300년 수령의 보리수나무가 있는 천년고찰 묘적사를 방문할 수 있으며, 1코스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인 홍유릉도 만나볼 수 있다.]
11:10~11:20 백봉산 정상 전망대에서 파노라마 풍경을 사진촬영 후 휴식
[2020년 11월 27일 준공한 새로운 백봉산 정상 전망대는 총 높이 6.5m로 나무보다 높은 위치에서 조망이 가능해 남양주 전 지역과 하남, 잠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손바닥 모양으로, 일출과 일몰 모두 조망이 가능해 지역 명소로 떠오를 듯하다.]
11:20~12:40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수레로661번길 174 번지에 있는 묘적사(妙寂寺)로 이동
[남양주시 와부읍 묘적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661∼681)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 하나, 그 뒤 조선 초기까지 거의 폐허 상태로 방치되던 것을 세종 때 학열스님이 180여 칸을 지으며 중창하여 남북 군영을 세우고 무과 시험장으로 쓰기 시작했고, 세종실록, 연산국일기, 신증동여지승람 등의 문헌 기록에도 등장한다. 묘적사는 이처럼 국난을 지키기 위해 대비하던 사찰로서, 승병 양성 도량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승군을 훈련하는 훈련도감으로 사용하였으나 왜군들의 집중 공격을 여러 차례 받으며 결국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김교헌이 쓴 [묘적사 산신각창건기]에 의하면, 수백 년 동안 소규모의 사찰로 명맥만 이어오던 것을 1895년 봄 규오가 이 절에 와서 시주를 얻어 산신각을 짓고, 오랫동안 이 절에 있었던 산왕신상을 봉안하였다 한다. 1969년 주지 인구의 실화로 산신각, 큰방 등이 전소되었고, 1971년 주지 자신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였으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묘적사 인근의 묘적사계곡은 남양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시원한 물줄기와 아름드리 나무들이 무성해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12:40~12:55 남양주 묘적사(妙寂寺)를 탐방
[마음 쉼터 묘적사] 서울에서 가까운 보석 같은 사찰
한국화가 박진순
월간산 10월호 기사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묘적산 자락에 아담하고 아름다운 묘적사가 있다. 주로 풍경 그림을 그리는 나는 종종 사찰을 찾아 참배도 하고 스케치도 해서 작품 발표를 하곤 한다. 묘적사는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위안을 얻는 사찰이다. 이 사찰은 사계절 어느 때 찾아와도 아름다운 풍경과 편안한 자연으로 반겨준다. 작지만 숨겨진 보석 같은 사찰이다.
겨울에는 흰 눈이 포근하게 덮인 풍경, 봄에는 연둣빛 새싹의 싱그러운 기운이 따뜻하다.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시원한 풍경을, 가을에는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이 아쉬움과 설렘을 느끼게 해준다. 묘적사로 가는 길옆에는 사계절 계곡물이 넘쳐흐르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와 구불구불 한적한 풍경들이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하다. 넓은 마당을 지나면 작고 아담한 대웅전이 정면에 있다. 대웅전 앞에는 경기유형문화재 제279호 팔각다층석탑이 단아하고 기품 있게 서있다. 미려하고 여성미가 느껴지는 석탑이다.
탑 양옆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는데 오른쪽은 수나무, 왼쪽은 암나무다. 특히 가을철 오른쪽 나무는 노란 은행잎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왼쪽 나무는 은행 열매를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고 있다. 대웅전 옆에는 300년 된 보리수나무가 비스듬히 서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나도 소원을 종종 빌어 보는 나무다. 대웅전 뒤로는 돌계단이 산죽나무 사이로 정겹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 삼성각과 석굴암이 기다린다. 소박하고 단정하다, 이 석굴암에서 기도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석굴암에서 돌계단을 내려오며 보이는 풍경도 일품이다. 사찰 앞마당 옆으로는 시냇물처럼 도랑에 맑은 물이 재잘재잘 소리를 내며 흐른다. 절 옆에는 연못이 있는데 항상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거울처럼 맑고 시원하다. 연못 뒤로 올려다 보이는 풍경 또한 너무나 아름답다.
묘적사는 신라의 승려인 원효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서 국왕 직속의 비밀요원들을 승려로 출가시켜 군사 훈련을 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는 승려 유정이 승군을 훈련시키던 장소였다고 한다. 가을이 저무는 묘적사에서 바람에 날리는 짙은 노란색 은행나무잎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이제 작은 붓에 먹을 적셔 깊어가는 가을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 스케치해 본다.
한국화가 박진순
인천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인천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서 교수 활동.
1994 대한민국미술대전특선(국립현대미술관).
2006 서울미술대상전특선(서울시립미술관).
2006 겸재진경공모대전특선(세종문화회관).
한국미술협회. 서울미술협회. 동방예술연구회 회원.]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南楊州 妙寂寺 八角多層石塔)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수레로661번길 174 묘적사 경내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묘적사에 있는 조선 전기 팔각다층석탑.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南楊州 妙寂寺 八角多層石塔)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묘적사에 있는 조선 전기 팔각다층석탑이다. 2013년 11월 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223번지 묘적사 내 대웅전 앞에 건립되어 있다.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은 높이가 4.3m이다. 지대석은 2장의 판석으로 팔각형이다. 지대석 위 하층 기단의 옆을 보면, 하단에는 상각(象脚) 문양을 조각하였고, 상단에는 각 면에 사각형 액(額)으로 공간을 나눈 다음 2조의 안상(眼象) 문양을 조각하였다. 상층 기단은 아래서부터 하대, 중대석, 상대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하대에는 상각, 안상 문양, 복연 연판 문양 순서로 표현하였다. 중대석은 둥근 기둥 형태의 겹우주를 모각한 후 8면에 안상 문양을 표현하였다. 상대는 앙연 연판 문양 위로 각 면 2조의 사각형 구획 내부에 안상을 조각하였다.
팔각형 탑신에는 각 면 모서리마다 목구조 건축물의 측면 기둥인 우주(隅柱)를 모각하였고, 면에는 사각형 구획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1매 석으로 만들었는데, 옥개받침은 3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목조 건축의 주두(柱頭)까지 모각하였다. 지붕돌의 추녀는 각 모서리가 위로 반전되었고 끝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도 남아 있다. 각 층의 지붕돌 윗면에는 탑신을 받는 2단의 괴임이 표현되었다. 상륜부는 반구형으로 둘레에 삼각형 모양의 기하학 무늬를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현황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은 현재 묘적사 대웅전 앞에 있는데 1971년 옮겨진 것이다. 원래 있던 위치는 사원으로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명칭과 위치는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과 양식이 비슷하여 조선 전기의 탑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팔각다층석탑이다.]
12:55~13:20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있는 묘적사 입구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3:20~13:40 묘적사 입구 정류장에서 덕소역으로 가는 60번 버스 승차 대기
[60번 버스 주말 배차간격 : 30분]
13:40~14:04 60번 버스를 타고 묘적사 입구 정류장에서 덕소역으로 이동 [24분, 26개 정류장 이동]
14:04~14:20 덕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열차 승차 대기
14:20~15:40 경의중앙선을 타고 덕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1시간20분 소요]
[백봉산&묘적사]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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