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광화문 연가⑤
극장 안은 〈독수리 요새 〉의 불타는 현장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1호(2017. 12. 9)

최성철(26회, 62세) 시인
〈벤허〉, 〈십계〉……다시 봐도 좋은 명화 중 명화다. 그밖에 〈콰이강의다리〉, 〈쿼바디스〉,
〈롱쉽〉 등 관객을 많이 끌어 모은 유명영화가 많다. 그 시절엔 국산영화보다 외국영화가 더 유행했다. 외국에서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사람들은 매표소 앞에 줄을 섰고, 기다렸다가 영화를 보곤 했다. 물론 국산영화도 볼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유명 외국영화가 들어오면 벌써 포스터가 여기저기 나붙기 시작하고, 사람들 입 소문을 통해 금세 그 소식이 번져갔다. 우리 같은 학생들이 시내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건 요즘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복을 입는다 해도 외모를 보면 학생임이 표가 났다. 특히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는 입장을 안 시켜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들어가볼 용기가 없었다. (몰래 들어갔다 걸리면 정학을 맞았다).
당시엔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곤 했다. 학교가 주관하는 학생단체행사 중 하나였다. 단체로 본 영화는 주로 반공영화나 청소년영화였다. 가끔 스파르타가 나오는 로마나 그리스의 고전 외국영화도 볼 기회가 있었다. 이렇게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는 경우,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학교수업의 연장이라고 강조하는 선생님의 독려에 꼭 참석해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장 하고 싶은 건 여학생친구와 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문학서클 친구들이면 더욱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여학생들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건, 학생관람가 영화라 하더라도 마음에 부담이 있었다. 야외생활지도 선생님들의 미행에라도 걸리면 학교에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 학생이 사복을 입고 여학생들과 같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불량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꺼려지기도 했다.
당시 유명영화관으로는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을 비롯해 스카라, 명보, 광화문에 있는 국제극장, 종로1가 우미관, 종로3가 피카디리, 단성사, 을지로 있던 국도극장, 파라마운트 등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단성사 옆 한 구석에서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시내극장에 영화 보러 나선 길이라 나름대로는 신경 써서 입은 바지와 잠바였다. 그런데 왠지 계속 불편하게 느껴졌다.
시계는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친구들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1,2분 간격으로 나타났다. 병진이, 성옥이, 상우, 정태 .모두 사복을 입고 있었다. 시간은 2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우리들은 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갔다. 〈독수리요새〉라는 외국전쟁영화였다. 줄을 선지 30분만에 입장권을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적당한 분식집에 들어가 허기를 채웠고 시간 맞춰 단성사로 향했다. 〈독수리요새〉포스터엔 학생대환영이라는 선전문구가 붙어있었다. 〈독수리요새〉의 내용은 잊었지만, 남자주인공의 얼굴은 지금도 대략 떠오른다. 유난히 파란색 눈동자였던 주인공은 정말 사나이답고 늠름했다.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미군의 활약상을 그린 전쟁영화는 화면이 큰데다 전투장면의 폭발음과 총소리가 너무도 실감이 났다. 마치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 넘는 긴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둑어둑했다. 맞은편 극장에서도 영화가 끝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무리에서 빠져 나와 광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사복을 입고 돌아다닐 때 우리들 머릿 속엔 항상 학교생활 지도부 선생님 모습이 떠다녔다.
우리들은 부지런히 걸으면서 〈독수리요새〉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그런데 영화에 나온 주인공이 어떻게 됐는지, 그 사람은 왜 죽었는지, 그 여자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영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저마다 궁금증이 달랐다. 서로 생각이 달랐고 의견도 분분했다. 영화에서 연결이 잘 안 되는 대목도 여러 곳 있었다. 한글자막을 열심히 읽다 보면 화면을 놓치는 경우가 잦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중간중간 잘 연결이 안 되는 대목이 많이 있었다.
우리들은 부지런히 걸었다. 종로1가 쯤에서 서로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치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들떠있었다. 항상 그랬다. 영화를 한편 보고 나면 그 영화의 감동이 거의 한달 지속됐다. 학교에 가는 길에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종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허공에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용돈을 모아 학생관람가, 미성년자 관람가 등이 붙어있는 영화들을 봤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무협소설이 한참 인기였다. 이런 주제의 무술영화도 꽤 많았다. 〈돌아온 외팔이〉, 〈비호〉 등 중국 무술영화도 유행했다. 그 유명한 왕우도 그때 알게 됐다. 제임스본드가 나오는 007영화는 그때엔 보지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 어떻게 해서 보게 됐다. 시내극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남정임, 윤정희, 문희 등 당시 우리나라의 유명여자배우들의 얼굴을 포스터나 극장간판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런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대부분 학생관람불가였다. 우리들은 볼 기회가 없었다. 당시엔 극장마다 출입구 위에 영화의 주요장면을 대형화폭에 페인트로 그려 걸어놓았다. 배우들의 얼굴을 실물과 거의 똑같이 그려놓았다.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 우리들이 진짜 보고 싶었던 영화는 미성년자 입장불가, 또는 미성년자 입장 절대부당이라고 되어있는 것이었다. 그런 영화는 매표소에서 표구입부터 거부당했다. 어떻게 나이를 속이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선생님한테 걸리면 여지없이 정학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보고 싶었던 미성년자 입장불가영화.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영화들이 동네 이류극장으로 넘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단속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이 느슨해졌다. 이때 볼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노려봤다.
저녁 즈음 사복을 입고 매표소로 가 표를샀다. 운이 나빠 거부당해도 그만이었다. 운이 좋아 보게 되면 행운이었다. 물론 극장 안에서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몇몇 친구들과 같이 본 영화가 〈인체의 신비〉, 〈석녀〉등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엔 이런 영화를 보다 걸렸다 하면 여지없이 무기정학이었다.

도서관 수영장 용비천
★최성철(26회)
- 서울출생, 홍익대 졸업
- 1975년 『시문학』에 「자정의 도시」, 「바람」, 「새의 죽음」 등이 추천되어 등단
- 시집: 『간이역에 머무는 아픔』(‘02), 『도시의 북쪽』(‘11), 『어느 경주氏의 낯선 귀가』(‘16)
- 에세이 집: 『놀이의 천국』(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