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여름 내설악의 계곡에 들어 찬 물에 발을 담그고
한잔씩 기울이면서 거나해 지자 요새 아이들 버르장머리 없다는
얘기로부터 시작하여 제 스승들 자랑을 했다
우리 조지훈(趙芝薰) 선생은 말일세, 한 학기에 세 번쯤 강의를
하는데 두 번은 개강과 종강을 알리는 강의고, 학기 중간의
한 번은 어쩌다 월급지급일과 겹치는 날이었네. 그분은 아예
학교 출근을 잘 안 하셨는데 지금처럼 온라인 통장이 있었더라면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그 준수한 모습도 못 뵐 뻔 했지...
한 시인의 자랑이다.
우리 스승 장욱진(張旭珍) 선생은 말일세, 강의실이 아예
대폿집인데 제자놈들에게 술만 가르쳤지. 흥이 나면 당신의
고무신짝을 벗어 그것으로 술잔을 했는데 거기다 막걸리를 따라
당신이 먼저 자시고 차례로 돌렸단 말이시. 그런 학교생활도
귀찮다고 일찍 그만 두고 말았지만... 한 화가의 자랑이다.
우리 스승 구자균(具滋均) 교수는 말일세, 학생들에게는
교재를 읽으라고 지정을 해 주고 당신은 교탁 뒤에 쪼그리고
앉아 책가방에서 소주병을 꺼내 혼자 홀짝이며 술을 즐겼는데,
강의시간이 끝날 무렵쯤엔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러면 제자들이 업어다가 연구실에 누여 놓곤 했지...
한 국문학자의 대꾸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끼어든다
내 스승은 내게 10년 동안 한 말씀도 안 해주셨는데 하도
답답해서 어느 날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주전자로
내 골통을 내리치더란 말일세. 경봉(鏡峰) 선사 얘기다.
도대체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나간 스승들은 그렇게 가르쳐서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스승도 제자도 없는 오늘 참 답답도 하다.
2
새 학기를 맞게 되어
학생들에게 다시 시(詩)를 강의하면서
시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내가
시에 대한 얘기를 지껄이면서
무엇이 진짜 가르치는 일인가를 곰곰 생각해 본다.
시인 지훈(芝薰)이
화가 욱진(旭珍)이
학자 자균(滋均)이
선사 경봉(鏡峰)이
다 그렇게 하며 지냈던 것은
그랬으리, 그러했으리
그들도 나처럼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회의했으리
학문(學問)― 그 불확정(不確定)의 덧없음
허황한 지식들
차마 이것들을 진리(眞理)처럼 가르칠 수는 없었으리
그들은 거짓을 거부할 수 있었던 용기로운 선비
양심을 지키는 스승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가르치지 않고도
일만(一萬) 제자들의 스승으로 길이 남았다
○ 글 : 임보
○ 음악 : 사랑이여 외 15곡
○ 편집 : 송 운(松韻)
그런 세상 / 임보
청소부의 월급봉투가 구청장의 것보다 더 두둑하고,
근로자의 승용차가 사장의 것보다 더 고급일 수도 있는 그런 세상.
국회의원 입후보자가 없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입후보자 모집 가두 캠페인을 벌이는 그런 세상.
아침마다 신문이나 방송의 톱뉴스는
예술인들의 신작 발표 행사로 장식되는 그런 세상.
노인이 되어도 서럽지 않은, 아니 노인이 빨리 되고 싶어
머리를 허옇게 탈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어른들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
대통령의 연두교서, 법원의 판결문, 국회에서의 질의응답,
모든 법전들이 시로 이루어진 그런 세상.(시를 모르는 자들은 참 괴롭기도 하리)
은행원들이 대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보너스를 걸고 선전하는 그런 세상.
하루에 2시간 수업, 나머지는 여행으로 학점을 따는 그런 학교만 있는 세상.
전철의 선반에 두고 내린 물건이 한 달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세상.
울타리가 없는 세상.
경찰관들은 할 일이 없어 매일 낮잠이나 자고,
교도소는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국영호텔로 개조되어 가고 있는 그런 세상.
그리고 참,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세상.
학림다방에서 / 임보
대학병원에 들렀다가
모처럼 대학로를 어정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 <학림다방>이 보이기에
들어가 보았네
목조 마루에 목조 탁자
옛 배우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고
턴테이블에선 LP음반이 돌며
‘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흘리고 있네
창밖을 내다보니
도서관이 있던 옛 캠퍼스 자리에는
낯선 상전(商殿)들만 점령군들처럼
위풍당당 들어서 있고
40여 년 전
세느 개천가에서 놀던 그 시절이
아슴아슴 다가오려 하는데
옆 테이블의 세 여자가 떠드는 소리
자꾸만 내 기억을 가로 막고 있네
검정색 작업복에 워커를 신고
쌍과부집에서 김치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며
기고만장했던 그 친구들,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누비며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4.19의 주역들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튀는 놈은 국회의원도 되고
소심한 놈은 교수도 되고
아니, 건달도 되고 놈팽이도 되고
그렇게 저렇게들 지내다가
성급한 놈은 서둘러 이미 떠나가고
이젠 다 늙다리들이 되어
병원이나 드나들고 있는 신세로세
첫댓글 공유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나날 되세요
감사한 마음으로 옮겨갑니다.
이현실 시인님 고맙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스크랩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