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은 1504년(연산 10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명화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외조부와 어머니에게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고 효성이 지극했다.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리는 등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시문·경전·서예·자수 등에도 탁월했다.
19살 때인 1522년 덕수 이씨 원수와 결혼해 모두 4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아들이 율곡 이이다.
신사임당은 48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이른바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그림에 뛰어나 채색화·수묵화 등 약 40점의 작품이 전해져온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숙종대왕, 소세양, 송시열, 권상하, 오세창, 이석 등
많은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쓴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숙종 때 사람 송상기는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내게 일가 한 분이 있어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집에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여름에 마당 가운데로 내다가 볕을 쬐는데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것이다.”
사임당은 글씨 역시 뛰어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시와 문장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사친’(어머니 그리워)이라는 시를 보자.
思親(사친)
千里家山萬里峰 歸心長在夢魂中 (천리가산만리봉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前一陣風 한송정반고륜월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任西東 사상백구항취산 해문어정임서동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하시중답임영로 갱착반의슬하봉)
어머니 그리워
산첩첩 내 고향 천리연마는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이처럼 신사임당은 여러 방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후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왜곡하고
부당하게 평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신사임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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