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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박지원, 정약용의 ‘이용후생’
글쓴이 이경구 / 등록일 2024-09-20
정덕·이용·후생 : 조화의 문제인가? 선후 조건인가?
실학의 지향 혹은 정신을 나타내는 대표적 표어 중의 하나가 ‘이용후생(利用厚生)’이다. 이 용어는 《서경(書經)》에서 나왔는데, 원래는 ‘정덕(正德)’과 짝을 이루었다.
우(禹)가 말하였다. “아!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소서. 덕(德)은 오로지 선정(善政)일 뿐이고, 정치는 양민(養民)에 있습니다. 수ㆍ화ㆍ금ㆍ목ㆍ토ㆍ곡(水火金木土穀)이 잘 닦이고 정덕ㆍ이용ㆍ후생이 조화하여 구공(九功)이 펴지게 됩니다.”
어진 신하인 우가 성군(聖君)인 순(舜)에게 아뢴 글이다. 군주의 덕은 정치를 잘하는 데 있고, 정치는 민생을 잘 챙기는 데 있다고 했다. 수ㆍ화ㆍ금ㆍ목ㆍ토ㆍ곡은 육부(六府)이고 재용(財用)의 근원이다. 정덕, 이용, 후생은 삼사(三事)이고, 바르고 안정된 삶의 조건이다. 대체로 군주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 선정과 양민인데, 그 핵심은 재용을 원활히 하고 사람들의 도덕이 높아지고 물질적으로 만족해지는 것이다.
《서경》에서는 이 모두가 조화가 되어야 구공(九功)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조화라는 점에서 보면 정덕ㆍ이용ㆍ후생은 선후나 가치의 경중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 정덕, 이용, 후생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도 나온다. 그런데 「성공(成公) 16년」에는 뉘앙스가 조금 다른 말이 나온다.
민생이 후해지고[民生厚] 덕이 바르게 되고[德正] 쓰임이 이로워지고[用利] 일이 절도에 맞는다[事節].
후생, 정덕, 이용 등을 나열로 볼 수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후생하여 정덕하고, 이용하여 절사(節事)한다’ 식의 선후 조건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소동파의 분석 : 일의 선후에선 이용후생이, 명분에선 정덕이
송나라의 소동파는 《춘추좌전》의 용법을 숙고하였다. 그는 정덕, 이용, 후생을 선후의 조건으로 해설하였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민생이 후해지고 덕이 바르게 되고 쓰임이 이로워지고 일이 절도에 맞는다’ 하였다. 정덕이란 것은 《관자(管子)》에서 말한 ‘창고가 충실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만족스러워야 영욕을 안다’는 것이다. … 이용후생한 이후라야 백성의 덕이 바르게 된다. 정덕을 먼저 말한 것은 덕이 바르지 않으면 (《논어》의) ‘곡식이 쌓여있다 한들 먹을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정덕이용후생유화(正德利用厚生惟和)」)
‘배가 불러야 예의를 차린다’는 내용의 말은 자고로 많다. 위에 인용된《관자》의 글도 그 중 하나다. 소동파는 《춘추전》의 정덕, 이용, 후생을 《관자》에 대응시켰다. 이용ㆍ후생이 갖추어져야 정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서경》에서 정덕을 첫머리에 쓴 이유는 무엇인가? 소동파는 ‘곡식이 쌓여있다 한들 먹을 수 없다’는 《논어》의 말과 의미가 같다고 했다. 이것은 공자가 정명(正名)을 말하자, 제나라의 경공이 그에 호응하며 한 말이다. 정덕을 이용후생 앞에 놓은 것도 같은 의미라는 것이니, 명분으로 따지면 정덕이 으뜸이라는 풀이이다.
결론적으로 소동파는 일의 선후에서는 이용후생이 정덕에 앞서고, 명분에서는 정덕이 이용후생보다 우위라고 분석하였다.
박지원의 전복 : 이용후생이 앞서기도
정덕, 이용, 후생은 애초 선후 혹은 명분이 분명하지 않았고 삼사로 통칭되었다. 그러나 정덕은 도덕의 영역이고, 이용과 후생은 물질의 영역이므로, 선후와 명분을 따질 여지가 없지 않았다.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은 정덕은 체(體)이고 이용후생은 용(用)이라며 이용후생을 정덕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소동파처럼,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고 이용후생이 정덕에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했다.
조선에서 이용후생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사람은 박지원이었다. 박지원은 때론 이용과 후생은 정덕에 기초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성리학자들의 용법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정덕ㆍ이용ㆍ후생의 도구’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이용후생과 도구의 구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용례는 《열하일기》에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이용 후에 후생하고, 후생 후에 정덕한다’고 순서를 바꿔버렸다.
박지원의 정덕ㆍ이용ㆍ후생은 변화무쌍했다. 위의 첫째 용법과 셋째 용법은 모순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박지원은, 성리학을 말하면서 성리학을 위배하는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본말이 거꾸로 되버린 성리학자들을 질타하기 위해, 그 또한 거꾸로 대응했다. 성리학의 통념적 사용을 전복시켜 성리학의 본래 정신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허생전》의 결말이 그렇다. 그는 허생의 입을 빌려 말로만 떠드는 북벌을 꾸짖고, 차라리 청나라를 배우라는 북학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때의 북학은 북벌에 대한 반대가 아니었다. 모욕을 참고 북학해야만 진정으로 북벌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강조였다. 정덕을 입에 올리며 현실 개선을 도외시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는 호소하였다. ‘하찮게 보이는 이용후생을 제대로 해야 정덕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정약용의 독립화 : 이용후생 용어를 별개로 사용
정약용의 이용후생 사용은 박지원과 또 달랐다. 그도 정덕ㆍ이용ㆍ후생을 함께 사용한 경우가 두어 차례 있었는데 주로 《서경》을 고증할 때였다. 경학(經學)의 대가였던 그는 일차적으로 고증에 충실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정덕과 상관없이 이용후생을 따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박지원이 이용후생을 따로 사용한 적은 2번 정도였는데, 정약용은 10여 차례였다. 이용후생을 주로 독자적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박지원 이후 세대부터는 이용후생을 따로 사용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흥미로운 변화였다. 이용후생이 물질 개선을 위한 보통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덕과 상관 없어진 이용후생은 경세, 실용, 기술, 문물 등의 용어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 흐름을 잘 보여준 경우였다. 그는 문물 수용과 도구의 개선을 관장하는 이용감(利用監)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또 제기(制器), 백공(百工), 기물(器物), 재물(財物), 기예(技藝), 기능(技能) 등 물질ㆍ기술과 관련한 용어를, 조선 학자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정약용이 성리학의 전형적 용례를 탈피한 것은 박지원과 같았지만, 그는 실용을 위한 새로운 용어들의 장(場)을 펼쳤다. 경학을 통해 물질 개선을 용인하는 토대를 형성하고, 그를 바탕으로 전문 영역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학문의 구체성과 공리를 강조하는 새로운 유학 패러다임의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글쓴이 : 이 경 구(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
[주요 저서]
『조선후기 안동김문 연구』(2007),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2009),
『조선 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2013),
『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20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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