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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책
필자 김진섭은 동국대 사학과 학사, 인문 콘텐츠 박사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홍보. 교육 간사다. 호남 출신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우리 집, 족보보다 더 자세하게 알고, 호남 삼걸이라 치켜세우니 아마 동향의 인연이 있는가 보다. 묵재일기, 성주 이문 이문건의 이야기와 미암일기, 유희춘의 내용은 이미 잘 알고 있는 터라 생략한다. 이문건과 유희춘 모두 20년의 귀양 생활을 한 공통점이 있고, 이문건의 처가는 괴산이라 자손이 괴산에서 한 뿌리가 사는 데, 이문건의 딸 ‘아지’를 청주 명문가 동래부사 송상헌 선생과 혼인을 시켰다. 유희춘 선생의 5대조는 우리 중시조의 동생인데 형제가 본관을 달리하여 6대조부터, 우리는 문화류문이고, 미암 선생은 선산류문이라 우리와 족보 내용이 공유되어 미암 선생의 위대와 손자까지 우리 족보보다 자세하게 필자는 기록했다. 여기서 특이점은 율곡 이이 선생의 일기가 석담일기인데 이 내용을 알아보자.
석담일기는 오는 날의 업무일지 성격을 띤 공적 일기와 일상의 신변잡사, 기행, 전란이나 사건, 문학과 학문, 개인의 행적 등을 기록한 사적 일기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이이 선생은 1564년 과거에 급제하여 다음 해인 명종 20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46세인 선조 14년 1581년까지 17년의 석담일기를 남겼다. 빠진 것도 몇 달 있지만, 157개월분이다. 석담일기는 경연일기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경연일기는 율곡 외에도 여러분이 기록으로 남겼다. 이식의 택당집, 정경세의 우복집, 유희춘의 미암집 등이다. 율곡은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에게 석담일기가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여 공론화되기 전까지는 비밀을 당부했다. 율곡 사후 문집을 간행하면서 ‘용재총화’의 저자인 제자 ‘성현’은 일기를 간행하면 반드시 세상에 유전하여 큰 화를 일으킬지, 모르니 그냥 수십 본 필사하여 친구들이 수장하다가, 수십 년 후 정사에서 간행하자고 했다. 석담일기는 인물평이 60%가 넘는데 여기는 (이조판서로 인물의 지금의 고과 내용을 나름대로 기록한 것) 동 시대인의 정치적 민감한 사건과 사고와 임금에 관한 내용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석담일기의 율곡의 인물평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일기의 평가는 공론화되기 전에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니 전국 방방곡곡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제자 김장생이 보관하다 아들 김집이 비밀리에 보관하여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김집의 제자 송준길(문묘 배향 동국 18현이 있다. 조선 14인 중에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이 기호 출신이다) 처음으로 빌려 보기를 청해 마지못해 빌려준 것을 송준길은 젊은 유생들과 열심히 필사한 것이 율곡 사후 50년 경이다. 공사를 분명하게 구분한 율곡은 예를 들면 “이항복과 이덕형 병조참판 이정립은 경진년에 급제하여 ‘경진 3인’이라 별칭 했고, 좌상 심희수와 좌상 정창연, 대사헌 홍이상, 참찬 오억령”은 이이가 추천한 7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름이다.
현대인에 많이 알려진 인물의 평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효원; 재주는 약간 있음, 도량이 작고 그릇이 얕음
류성룡; 재주와 식견이 있음. 설득에 능함. 초지일관 봉공 자세를 지니고 있음. 이해관계를 살피는 버릇이 있음.
이언적; 박학하고 문장에 능함. 효도와 장중한 몸가짐과 많은 저술을 남 김. 경세제민의 재질이 없음. 입조시 절개가 부족하고 여 색을 가까이함. 을사사화에 간관의 협박에 추관이 되어 공신이 됨.
정 철; 청렴하고 충성함. 굳고 개결함. 나쁜 술버릇이 있음.
여기서 실록과 일치하는 내용은 김효원과 류성룡이지만, 이언적과 정철은 내용이 일부 또는 전적으로 다르다. 기대승 내용은 “기대승은 박문강기하고 기개가 장하며, 담론이 도도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청렴한 명망이 드러나 선비들의 신망을 받았고, 스스로도 일세에 경륜할 것을 자부했다. 그러나 마음을 닦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고,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여 지조 있는 선비와 화합하지 못하였으며, 常例에 따르기를 힘쓰고 개혁을 싫어했다”.
동고 이준경은 명종 10년 1555년 형조판서 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출정해 왜군을 격파하고 우상 좌상을 거쳐 명종 20년에 영상에 오른다.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파의 숙청에 앞장서,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정착함에 나섰다. 이준경은 하성군 이균이 선조로 즉위함에 원상에 올라 국사를 총괄한다. 그리고 노수신과 유희춘을 석방하여 등용한다. 이준경의 평가를 보자. 네 임금을 모신 원로대신으로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고, 일하는 데 굳세며, 권세를 가진 간신을 쫓아내고 성군을 섬겼으니, 누가 어진 재상이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가 거만하여 혼자만 똑똑하다 하고 선비들과의 사이에서 말썽이 쌓이며 끝내는 나라를 망치는 말로 임금을 그르쳐 놓아서 명예를 잃었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여기서 선비들과 말썽이 쌓였다는 것은 기대승 등 신진 서류와 갈등을 빚을 것을 말한다. 기대승은 이준경과 불화로 해직을 당한다.
남명 조식의 후세인들이 한, 평가를 보자.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사회와 정치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한 자세를 견지했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정신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며, 그와 제자들은 안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로 이루었다.” 실록에서는 “조식은 젊은 시절 다소 고답적이며 세상 사람에게 오만하였다.”“중년 이후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결의를 지키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해서 행실이 뛰어났다.”“사람됨이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났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을 정도로 높고 빼어나다.” 그러나, 이이의 평가는 관점이 달랐다. 평가를 보자.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일대의 일민이다. 다만 그의 논저를 보면 학문에 실제로 체득한 주견이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경세제민의 방책은 못 되었다. 이로 보아 그가 세상에 나왔더라도 능히 치도를 성취하였을 것이라고 기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며 도학군자라고까지 하는 것은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근래의 처사라고 하는 이들로서 시공 절개를 보전하면, 천 길 벼랑 같은 기상을 가진 이는 조식에 비할 만한 이가 없었다. 주식은 시세에 응한 비상한 선비라 하겠다.”
토정 이지함은 한곳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했던 기인이다. 이이는 김계휘가 이지함을 묻자,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다. “답하였다. 이지함의 이이의 평가다. 어릴 적부터 욕심이 적었다. 추위와 더위 그리고 주림과 갈증을 잘 참는 특이한 기질을 타고났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도왔다.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고, 구속 없는 자유를 좋아하며 성리학에 종사할 것을 권하자, 거절했다. 형, 이 지번을 스승으로 여겼고, 아산 현감에 부임하여, 고을의 민폐였던 물고기 기르는 연못을 없애버려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지함이 포천 현감에 부임하자, 양민은 수백에 지나지 않고 公私賤 노비는 만여 명에 이르며, 토지도 척박하여 풍년이 들어도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 실정을 파악한 이지함은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기 위해 산야에 묻힌 은을 제련하거나, 옥을 캐내고 물고기를 잡거나 소금을 구워 많은 양곡을 마련하게 했다. 일반 백성들의 각자 힘과 능력에 맞는 생산 활동을 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민생 구제책을 갖추고자 했다.
”정인홍은 조식의 수제자로 사헌부 장령으로 출사하여 매사 공정처리 해, 반대파였던 서인들도 그의 공정성에 탄복할 정도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임에도 의병을 모집하여 많은 전과를 세웠다. 강력한 지조와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대인관계가 좌충우돌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이는 평가했다. 북인의 영수가 되어 이산해, 이이첨 등과 대북파를 주도했다. 류성룡이 임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홍여순, 남이공, 김신국 등과 정권을 잡았다. 스승 남명 조식의 문묘 배향을 위해 이황과 이언적을 비판한, 정인홍은 8도의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청금록에 삭제되는 등 파문을 당한다. 광해군 때 1품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머물며 ‘요집조건’을 한다는 비판을 받다, 88세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가산을 적몰 당하고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윤원형의 평가를 보자.” 성질이 음독하고 재리를 탐하여 한양에만 집이 10여 채가 있고, 대궐 같은 집안에 재물이 가득하다. 본처를 내쫓고 첩 ‘정난정’을 처로 삼았다.”라고 하는 등 관직 생활에 부정적인 평가를 한 인물에게도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면서 비판했다. 정치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눈치나 보면서 시류에 편승하였는가?’, ‘파벌주의나 붕당과 같은 당리 당색을 따라 움직였는가?’ 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이이가 개혁을 중시한 것은 급진적이거나 궁극적으로 변혁을 꿈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좋은 밥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백성에게 불편을 줄 수 있으니 이를 경계하고 개혁에 나서야 하며, 이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준경을 이이가 평가하면서 특별한 저서도 없다.라고 지적한 것도 학자로서 ‘책 한 권 정도는 남겨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가라면 자신의 사상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이이가 선조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이유는 ”선조가 술이나 음악, 여색에 빠지지 않았고, 말타기나 사냥을 즐기지 않았으며, 폭력적으로 권력을 독점하거나 향유하지 않는 등, 군주로서 빠지기 쉬운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다는 점을 선조의 가능성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이이가 올린,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6개 항의 폐정 개혁안’을 올리나 ‘선조로부터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라는 전교’를 듣고 파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이이는 서울 탑골공원 근처인 대사동에서 세상을 떠난다. 금강산에서 불경을 연구하다 자경문을 짓고 “필이성인자기;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 스스로 다짐하였던 그가 관직에 나아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뜻을 펼치다가 사망한 것이다.
2024.07.18.
조선의 책
김진섭 지음
지성사 간행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젠
고문서 관련 자료까지 섭렵.
인물 소개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