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죽음은 공생공존할 수 없는 천적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게 하신 근본 이유는, 선과 악이 함께 공생공존할 수 없는 천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에 속한 생명과 악에 속한 죽음도 결코 공생공존할 수 없는 천적입니다. 모든 존재들은 함께 공존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결코 공존하여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극성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흔히들 "전생에 무슨 웬수진 일이 있느냐?" 하며 불쾌함을 나타내고 적대하거나 멀리하려 합니다. 이와 같이 살아가는 도중에 원한관계를 맺은 일도 없는 데, 웬지 그 사람과 가깝게 되는 것이 싫고 또 만나면 서로 적대하여 미워하는 것은 전생이란 것이 따로 있어서 그 때 맺혀진 원한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태어난 속성의 원천지에서 비롯된 적대관계의 대물림 때문입니다.
이런 대물림 현상 때문에 생명과 죽음은 속성상(屬性上) 함께 공존할 수 없어서 만나면 서로 삼키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의 속성(하나님의 자녀)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삶 자체가 죽음과의 투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사망(사단)에게 삼킨바 되어, 지금의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사단)과 싸우는 생명의 용사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로움)과 온 세상의 모든 생명(의로운 자)들을 도리어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즉 죽음의 병기가(적병이) 되어 생명의 아군(의인)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영생하여야 할 생명이 죽음의 장막(지배체제) 안에 갇혀 모든 생명에게 총검을 휘두르는 것, 그것은 마치 인민군의 포로가 된 국군이 적군이 되어 자기의 조국 대한민국의 부모형제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적군(죽음)의 지휘체제에 사로잡혀 가 적을 위해 조국의 부모형제들과 싸우는 것만큼 비통한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적의 지휘체제, 곧 적의 장막 안에서의 삶은 탄식의 연속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5:4) 하심 같이, 적군(사망)의 포로가 된 자가 적군에게서 풀려나와 아군으로 생환하려면, 아군의 공격(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지휘통제하고 있는 적의 군졸(죄악사상)들이 완패 당하는 일, 곧 아군(생명)에게 죽음(죄악사상)이 삼켜야 합니다.
생명과 죽음사이 같이 원천적으로 상극이 되어 싸우는 이런 일들을 사람들은 대개 천적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천적은 생명과 죽음이며 이들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또 하나님과 마귀입니다. 공존하지만 상생의 뜻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삼켜 없에려고 만나는 일, 곧 전쟁하기 위한 공존(만남)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천적이 생태계에 허다 합니다. 그 중에 여자와 뱀도 엄밀히 말해 천적 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3:15) 라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렇듯 윗대(하늘)에서 결정된 전쟁이 후손들에게 승계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세기3:14) 하심 같이, 무릇 발이 없고 배의 기능으로 땅에 기어다니거나 눈도 없어서 피부의 촉감으로만 사물을 인지하는 모든 벌레들에 대해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껴 전율하거나 적대감을 갖고 멀리하는 것도 모두다 하나님께 대물림된 심성 때문입니다. 태생적으로 공생공존할 수 없는 천적들의 후예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배로 기어다니는 뱀의 형태를 지닌 지렁이과 미물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보기만 하여도 얼굴을 찌프리고 구토증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기25:5~6) 하셨고, 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이사야14:11) 라고 사람을 하대하는 까닭도 사람이 저속한 흙 속에서 나뒹구는 삶 때문만이 아니라, 오직 이목구비를 뚜렷이 갖춘 하나님의 형태를 갖고 그들 벌레처럼 머리도 눈도 손발도 없이 몸에 부딪히는 감촉으로만 인지하고 움직이려는 무지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벌레로서 벌레짓 하면 욕이 될 수 없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서 벌레 짓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욕되게 하는 짓임과 동시에 벌레보다 더 추악합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가장 욕되게 하는 건, 부모의 모습을 빼닮고 개.돼지처럼 처신하는 짓입니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대통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라도 할 수 있지만, 대통령의 아들로서 개.돼지 짓 하며 다니는 건 온 국민 앞에 자기 아버지가 사람이 아니라 원래 개.돼지라고 욕하는 짓이기 때문에 이런 자식들은 사람의 정감으로 대할 수 없고 오직 독충을 대하듯 혐오하여 짓밟아 죽일 뿐입니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이사야66:24) 하심 같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조성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에게 멀리, 깊게, 높게 바라보며 처신하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였건만, 인간들은 그 뜻에서 나온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삶, 곧 멀리, 깊게, 높게 살려하지 않고 오히려 벌레들처럼 육감에 부딪히는 감촉대로 인지하고 판단하며 처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배로 기어다니도록 명령한 것은, 그가 멀리, 깊게, 높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섭리보다 다만 흙에 속한 육신의 촉각을 위주로 하여 처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벌레나 지렁이는 몸에 부딪히는 것만 실체로 인정하여 반응합니다. 멀리서 자기 몸 쪽으로 달려오는 자동차에 대해 사람과 짐승들은 눈과 귀로 먼저 발견하여 미리 피할 수 있지만, 눈과 귀가 없는 지렁이와 구더기들은 자동차 바퀴가 자기 몸에 부딪혀 몸이 으깨져야만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벌레와 지렁이로 하대한 근본 이유가 바로 자신들의 천적 죽음이 접근해 오는 것을 영적 눈과 귀로 충분히 발견하여 능히 대적해 이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 데도 불구하고 오직 벌레들처럼 차 바퀴가 몸을 으깨고 지나가야만 비로소 죽음에 처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영적 이목구비를 갖춘 머리란, 일례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라는 말씀의 정보를 통해 자신의 마음 속에 찾아든 돈에 대한 탐심을 악의 실체로 인정하여 그를 제거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몸 쪽으로 무한질주해 달려오는 자동차를 먼저 시청각을 통해 발견하여 실제적인 악, 곧 죽음의 대형사고가 이르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반면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라는 말씀의 정보를 보고 듣기는 하였어도 그 정보를 중대하게 심각하게 취급하는 영적인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그냥 자기 마음 속에 찾아든 죽음의 특공대(탐심)에 이끌려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부정부패로 남의 돈이나 공금을 강탈하거나 횡령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몸 쪽으로 무한질주해 오는 차를 보고 들었으면서 그것을 죽음의 충돌로 여기지 않는 짓입니다. 즉 사건 사고에 의해 수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이런 불상사의 근본원인이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라는 말씀의 귀중성을 무시하고 다만 죄악된 탐심에 이끌린 것이 바로 이런 대형사고를 유발한 근본원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각종 정보(성경말씀)들을 가장 귀중히 취급할 수 있는 영적인 이목구비가 없다는 것, 그것은 천적인 죽음의 특공대가 침입한 것을 전혀 감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잠시 후에 전개될 상황을 앞 서 예견할 수 있는 머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김대중.노무현과 같은 이적 정권이 들이닥칠 일들은 이미 박정희 정권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이하 전체 국민들이 당대의 경제성장에만 취하여 흥청거렸을 뿐, 신앙인들조차 그런 흥청거림의 종점이 바로 소돔 땅을 선택한 롯의 운명임을 예고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정권 때 대다수 지성인들이 그를 민주인사로 지목하여 큰 기대를 하였고, 또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김정일을 방문한 일들에 대해서는 전 세계 평화주의자가 갈채를 보내었고, 또 노무현이 등장할 땐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 곳으로 대부분의 청.장년들이 희망에 들떳습니다. 이 모든 착각은 영적 두뇌가 없는 지렁이들의 피부접촉에 의한 판단력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대형사고를 당한데 대한 원인을 오직 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들 탓으로만 돌릴 뿐, 자신들이 멀리, 깊게, 높게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는 것을 결코 시인하지 않습니다. 비열한 벌레들 같으니라고... 그런 때늦은 후회회(後悔會) 회원들에게 또다시 본인이 두뇌를 갖춘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일러 주건만, 여전히 그들 지렁이들은 두뇌적인 지식을 무시하고 또다시 촉각 위주의 감각으로 진로를 결정하려고 진흙과 오물 구덩이 속에서 뒤엉켜 자신들의 촉각들을 뽑내고 있습니다.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이사야14:11) 하심 같이, 도무지 자신들의 지금 위치가 구더기를 요로 깔고 지렁이(벌레)를 이불로 덮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멀리(장래성 있는), 깊게(사단의 궤계를 꿰뚫을 수 있는), 높게(하나님의 뜻)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영적 두뇌가 없이, 오직 부딪히는 감촉으로만 진로를 택하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모두다 뱀과에 속한 구더기들로서의 식자일 뿐입니다. 이런 지식으로 뛰어났다고 떠드는 자마다 그들의 현주소는 다만 지옥의 아랫목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이사야14:15)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9:48) 하신 성경 말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의 뜨거운 유황불 구덩이 속에서 어찌 구더기가 타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라는 의혹만 제기합니다. 지렁이들은 원래 생명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죽음에 속한 사단과의 만남, 곧 하나님이 지적한 모든 죄악들과 부딪혔을 때, 그것은 곧 생명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생명(자기자신)과, 죽음의 속성을 지닌 사단의 졸개들과 한바탕 싸워야 할 전쟁인 줄을 즉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깨닫고 대처하여 모든 음란방탕하고 거짓된 죄악들을 안방구석에서부터 적군 대하듯 대항해 물리치는 것이 바로 영적인 두뇌를 갖춘 사람(생명)으로서의 삶(전투행위)입니다. 이런 전투원들은 세계대전을 치루어도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적한 죄악들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고 아담과 하와처럼 사단이 제시하는 범죄행위에 대해 호기심만 발동시켜 촉각을 곤두세우고 접근하게 되면, 무조건 죽음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생명부터 시작하여 타인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온 세상의 선한 생명들과 질서들을 완전히 무너뜨려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좌.우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죄악들과의 전쟁에서 패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되어 자신들의 조국과 그 조국에 속한 모든 부모형제 처.자들에게 총뿌리를 겨누는 이적행위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런 이적행위자들의 노리개 감이 되어 울먹이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들에 포로가 되면 어떤 전쟁에도 승리할 수 없거니와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게 됩니다.
영적인 두뇌, 곧 성경지식을 제대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은 생명의 안목으로 멀리, 깊게, 높게 바라보며 적들의 준동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게 되지만, 이런 성경지식을 무시하는 자들은 적(급박한 상황)들이 눈 앞까지 와 총을 발사하여야만 비로소 과거에 자신들의 음란방탕한 죄악들이 바로 이런 무서운 적들로 돌변하는 적의 특공대임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의 깨달음은 이미 때늦은 후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우파들이여! 이제라도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하나님의 지적사항, 곧 모든 죄악들을 골방 깊숙히 부모와 처.자식도 모르게 숨겨두고 즐기는 그 악행들이 바로 자기 몸 쪽으로 무한질주해 달려오는 자동차임을 깨닫고 즉시 그 장소(악행)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천적(좌익사상)들이 얼마 못가 진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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