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水滸傳•제 244편
다음 날, 송선봉의 군마는 고정산을 지나 동신교 부근에 하채하였다. 송강은 본부 군병을 세 갈래로 나누어 항주를 협공하라고 명을 내렸다. 한 갈래는 주동·사진·노지심·무송·왕영·호삼랑이 탕진로를 따라 동문을 취하기로 하고, 또 한 갈래는 수군두령 이준·장순·완소이·완소오·맹강이 북신교를 따라 고당을 취해 서쪽 길을 끊고 호성문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가운데 갈래는 마군·보군·수군이 세 부대로 나누어 북관문과 간산문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제1대는 관승·화영·진명·서녕·학사문·능진이 이끌었다. 제2대는 주장 송선봉과 군사 오용이 본부 인마를 이끌었는데, 대종·이규·석수·황신·손립·번서·포욱·항충·이곤·마린·배선·장경·연순·송청·채복·채경·욱보사가 따랐다. 제3대는 수로와 육로에서 접응하기로 하였는데, 이응·공명·두흥·양림·동위·동맹이 맡았다.
한편, 가운데 갈래 제1대가 동신교에 당도하여 정탐해 보니, 남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관승은 의심이 들어 다리에서 후퇴하여 사람을 보내 송선봉에게 알렸다. 송선봉은 대종을 보내 명을 전했다.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매일 두령을 두 명씩 내보내 정탐하라.”
첫날에는 화영과 진명이, 둘째 날에는 서녕과 학사문이 나가 정탐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남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녕과 학사문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북관문으로 갔는데,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두 장수가 조교 근처까지 가자, 성 위에서 북소리가 울리면서 성 안에서 한 떼의 군마가 뛰쳐나왔다. 서녕과 학사문이 급히 말을 돌리는데, 성의 서쪽 길에서 또 함성이 울리면서 1백여 기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서녕이 사력을 다해 싸워 마군을 뚫고 나왔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학사문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성문 쪽으로 돌아가 보니, 적장 몇 명이 학사문을 사로잡아 성 안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서녕이 급히 구하러 가려고 할 때 화살이 날아와 목에 꽂혔다. 서녕을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났는데, 적장 여섯 명이 추격해 왔다. 서녕은 마침 관승을 만나 구원되었으나,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관승은 여섯 명의 남군 장수들을 쫓아 버리고, 황급히 송선봉에게 알렸다.
송강이 급히 달려와 서녕을 보니, 눈·코·귀·입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송강은 눈물을 흘리며, 급히 진중의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 의원은 화살을 뽑고 금창약을 상처에 발랐다. 송강은 서녕을 배 안으로 옮겨 쉬게 하고, 친히 보살폈다. 그날 밤 서녕은 서너 차례 정신을 잃었다. 송강은 비로소 독화살에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송강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신의 안도전이 경성으로 불려갔으니, 여기는 서녕을 살릴 의원이 없구나! 내 팔다리를 또 잃고야 마는가!”
송강은 상심하여 마지않았다. 오용은 형제의 정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를 그르치지 말라고 송강을 위로하면서, 영채로 돌아가 군사 일을 상의하자고 하였다. 송강은 서녕을 수주로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지만, 화살에 발린 약이 독해 쉽게 낫지 않았다.
한편, 송강은 군사를 보내 학사문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다. 다음 날, 군사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항주성 북관문 위의 대나무 장대에 학사문의 머리가 걸려 있습니다.”
학사문은 방천정에게 사형을 당했던 것이다. 송강은 보고를 받고, 슬퍼해 마지않았다. 보름이 지나 서녕이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송강은 두 장수를 잃고,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큰 길만 지키고 있었다.
한편, 이준 등은 병력을 이끌고 북신교에 당도하여 주둔하고, 군사들을 보내 고당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길을 찾게 하였다. 그런데 학사문이 적에게 사로잡혀 죽고 서녕도 독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준은 장순과 상의하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있는 이곳이 독송관·호주·덕청현 세 곳을 드나드는 긴요한 길목인 것 같네. 적병들이 모두 이곳으로 드나들고 있는데, 우리가 목구멍 같은 이 길을 지키고 있다가 양면으로 협공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병력이 적어 대적하기 어렵네. 차라리 서산(西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주둔하는 것이 좋겠네. 그러면 서호(西湖) 물 위에서 싸워도 좋고, 산 서쪽 후면이 계곡으로 통하기 때문에 후퇴하기도 좋네.”
이준은 소교를 송선봉에게 보내 명령을 받아오게 하였다. 송강의 명을 받은 이준은 병력을 이끌고 도원령을 넘어 서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는데, 지금 영은사(靈隱寺)가 있는 곳이다. 산의 북쪽 서계산에 작은 영채를 세웠는데, 지금 고당 깊은 곳이다. 정탐병을 당가와(唐家瓦)까지 보내 정찰하게 하였다.
어느 날 장순이 이준에게 말했다.
“남군은 이미 항주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 주둔한 지 보름이 넘었지만, 적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산속에만 있다가 언제 공을 세우겠습니까? 제가 오늘 호수를 헤엄쳐 건너 수문을 통해 몰래 성으로 들어가, 불을 질러 신호를 하겠습니다. 형님은 병력을 이끌고 와서 수문을 점거한 뒤 송공명 형님께 알려 세 길로 일제히 성을 공격하게 하십시오.”
이준이 말했다.
“그 계책이 좋기는 하지만, 아우 혼자 해내기는 어려울 것 같네.”
“송공명 형님과의 오랜 정분에 보답할 수 있다면, 그까짓 목숨쯤이야 두렵지 않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게. 내가 먼저 송공명 형님께 보고한 다음 인마를 점검하여 접응하도록 하겠네.”
“저는 저대로 일을 행할 테니, 형님은 형님대로 사람을 보내 보고하십시오. 제가 성 안에 들어갔을 때에는 송공명 형님도 아시게 되겠죠.”
그날 저녁 장순은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몸에 감추고,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서호로 갔다. 서호에 당도해 보니, 삼면은 푸른 산이고 한쪽은 푸른 호수였다. 멀리 성곽과 호수에 면한 전당문·용금문·청파문·전호문의 네 성문이 보였다.
원래 항주는 송나라 이전에는 청하진(清河鎮)이라 불렸는데, 전왕(錢王) 때에 항주 영해군으로 이름을 고치고 10개의 성문을 세웠다. 동쪽에는 채시문·천교문, 남쪽에는 후조문·가회문, 서쪽에는 전호문·청파문·용금문·전당문, 북쪽에는 북관문·간산문이 있었다. 고종(高宗)의 어가가 남쪽으로 내려간 후 이곳에 도읍을 세우고 화화(花花) 임안부(臨安府)로 부르고 성문을 3개 더 세웠다.
지금 방랍이 점거하고 있을 때는 전왕의 옛 도읍이었는데, 성의 둘레가 80리였다. 비록 고종이 도읍을 옮긴 이후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아주 부귀하고 강산이 수려하였으며 사람과 물자가 풍부하였다. 그래서 ‘위로는 천당이 있지만, 아래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장순은 서릉교(西陵橋)에 당도하여 한동안 경치를 바라보았다. 때는 따뜻한 봄날이라 서호의 물빛은 남색이고 사면의 산빛은 비취색이었다. 장순이 혼자 말했다.
“내가 심양강에서 태어나 살면서 큰 풍랑을 수없이 겪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는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행복한 귀신이 되겠구나!”
장순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웃옷을 벗어 다리 아래 내려놓고, 머리는 상투를 틀어 묶었다. 아랫도리는 허리띠를 단단히 묶고 비수를 찼다. 맨발로 호수에 뛰어들어 물밑으로 헤엄쳐 호수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때는 저녁 8시경으로 달빛이 흐릿했는데, 장순은 용금문 부근에 당도하였다.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귀를 기울여 보니, 성 위에서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성 밖은 조용하여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성 위에는 서너 명이 망을 보고 있었다. 장순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한동안 기다리다가,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보니 성 위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장순이 수문으로 다가가 보니,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안쪽을 더듬어 보니, 발이 쳐져 있고 발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 쇠창살은 견고하여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손을 안으로 밀어 넣어 발에 묶인 줄을 당겨 보았더니, 방울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성 위에 군사들이 나타나 떠들어댔다. 장순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군사들이 수문 쪽으로 내려와 발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다시 성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큰 물고기가 흐름을 따라 왔다가 발을 건드린 모양이다.”
군사들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