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블로그에서 옮김.
출처:《국립문화유산연구원》
『금석문 탁본 조사보고서(2019)』
전면:
大明忠臣朝鮮林將
軍慶業妻貞夫人
完山李氏貞烈碑
前縣監韓德一書
후면:
夫人鎮安大君七世孫潛之女 萬曆乙未生乙卯入公門奉舅姑孝承君子順所性焉歲丁丑公自
灣尹再掌平閫(平閫은 평안도 감영이란 뜻이다.《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도 平閫으로 나온다. ) 益奮大義送僧 天朝爲國通信虜人知之必欲縛致公因入上國朝議迫於虜責代
送家屬虜人繫之獄夫人曰丈夫爲大明忠臣吾獨不爲忠臣婦乎 遂引刀自決即癸未九月二十六
日也 胡虜服其節護櫬以還至 肅廟丁丑其子重蕃訟寃 特命復爵賜諡褒夫人死旌其閭後失
火爇其門孱孫未能改竪乙丑韓候德弼聞其狀出付百
斛扵忠烈祠任相斯役樹貞珉要記顚末以
此復焉
崇禎紀元後再丁卯月日資憲大夫知中樞府事 李世瑍
謹識
榦事 儒生 潘文宇
進士 李挺河書
판독자: 유동옥
「大明忠臣朝鮮林將
軍慶業妻貞夫人
完山李氏貞烈碑
前縣監韓德一書」
夫人鎮安大君七世孫潛之女 萬曆乙未生乙卯入公門奉舅姑孝承君子順所性焉歲丁丑公自
灣尹再掌平▨益奮大義送僧 天朝爲國通信虜人知之必欲縛致公因入上國朝議迫於虜責代
送家屬虜人▨之獄夫人曰丈夫爲大明忠臣吾獨不爲忠臣婦乎遂引刀自決即癸未九月二十六
日也胡虜服其節護櫬以還至 肅廟丁丑其子重蕃訟寃 特命復爵賜諡褒夫人死旌其閭後失
火爇其門孱孫未能改竪乙丑韓候德弼聞其狀出付百
斛扵忠烈祠任相斯役樹貞珉要記顚末以
此復焉」
崇禎紀元後再丁卯月日資憲大夫知中樞府事 李世瑍謹識」
榦事 儒生 潘文宗(宇자가 맞다)」
進士 李挺河 書」
해석자: 전혜경
《임경업처이씨정렬비》
대명충신(大明忠臣) 조선임장군경업처(朝鮮林將軍慶業妻)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
전 현감 한덕일(韓德一)이 씀
부인은 진안대군(鎭安大君 : 태조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李芳雨))의 칠세손인 잠(潛)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을미년(선조 28, 1595년)에 출생하였다. 을묘년(광해군 7, 1615년)에 공의 가문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효도로 받들고 남편에게 순종하였으니 이는 타고난 성품이었다. 정축년(인조 15, 1637년)에 공이 의주부윤에서 다시 평안도의 병권을 장악하자 더욱 대의(大義)를 떨쳐 명나라의 조정에 중을 보내 나라를 위해 통신을 하였다. 오랑캐가 이것을 알고는 반드시 공을 붙잡아서 상국에 데려가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이 오랑캐의 힐책에 핍박되어 대신 공의 가족을 보냈다. 오랑캐가 옥에 가두어두자 부인은 “대장부가 대명(大明)의 충신이 되었는데 내가 홀로 충신의 부인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칼을 들어 자결하였으니 바로 계미년(인조 21, 1643년) 9월 26일이다. 오랑캐가 그 절개에 탄복하고 관을 호송하여 돌려보냈다. 숙종대왕 정축년(숙종 23, 1697년)에 이르러 그 아들 중번(重蕃)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특별히 관직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렸으며 부인의 죽음을 기려서 정려를 내렸다. 후에 화재로 정려가 소실되었으나 후손이 미약하여 고쳐 세울 수가 없었다. 을축년(영조 21, 1745년)에 수령 한덕필(韓德弼)이 그 실상을 듣고 곡식 백곡(百斛)을 충렬사(忠烈祠 : 임경업장군의 사당)에 내놓고 담당자에게 이 일을 맡겨 비석을 세우고 그 전말을 기록하기를 요청하기에 이로써 답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묘년(영조 23, 1747년) 월 일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세환(李世瑍)은 삼가 기록한다.
간사 유생(榦事儒生) 반문우(潘文宇)
진사 이정하(李挺河)는 글을 씀.
<표점>
夫人,鎮安大君七世孫潛之女。萬曆乙未生,乙卯入公門。奉舅姑孝,承君子順,所性焉。
歲丁丑,公自灣尹再掌平閫,益奮大義,送僧天朝,爲國通信。虜人知之,必欲縛致公。因入上國,朝議迫於虜責,代送家屬,虜人繫之獄。
夫人曰:「丈夫爲大明忠臣,吾獨不爲忠臣婦乎?」遂引刀自決,即癸未九月二十六日也。
胡虜服其節,護櫬以還。至肅廟丁丑,其子重蕃訟寃,特命復爵賜諡,褒夫人死,旌其閭。
後失火爇其門,孱孫未能改竪。乙丑,韓候德弼聞其狀,出付百斛扵忠烈祠,任相斯役,樹貞珉,要記顚末,以此復焉。
崇禎紀元後再丁卯月日,資憲大夫知中樞府事李世瑍謹識。
榦事 儒生 潘文宇。
進士 李挺河書。
<번역문>
부인은 진안대군(鎭安大君)의 7세손인 이 잠(李 潛)의 딸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년)에 태어나, 을묘년(1615년)에 남편의 가문으로 시집왔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순종함으로 따르니,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정축년(1637년)에 공(公)께서 의주부윤의 자리로부터 다시 평안도 방어사(平閫) 직임을 맡아 대의를 더욱 떨치셨으니 (灣尹,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53권 평안도 의주목 建致沿革에 [本高麗龍灣縣 又名和義. 鎭官: 郡二, 鐵山 龍川. 郡名: 龍灣,和義,保州,抱州,把州,咸新,松山。] 라고 나온다. 灣尹은 龍灣府尹의 줄임말로 義州府尹을 말한다.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 곧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까지 겸한 史實을 말한 듯하다), 스님을 명나라 조정(天朝)에 보내어 나라를 위해 소식을 통하게 하였다(爲國通信).
청나라 사람(虜人)들이 이를 알고 반드시 공을 포박해 가려 하였다. 이에 公이 상국(明)으로 들어갔는데, 조정의 논의가 청나라의 책망에 핍박되어 대신 가속(家屬)을 보내게 되니, 청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대명의 충신인데 내가 어찌 홀로 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칼을 당겨 자결하니, 바로 계미년(1643년) 9월 26일이었다.
오랑캐들마저 그 절개에 복종하여 상여(櫬)를 호위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숙종 정축년(1697년)에 이르러 그 아들 중번(重蕃)이 억울함을 호소하니, 특별히 명하여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부인의 죽음을 포상하여 그 집안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후에 불이 나서 그 정문(旌門)이 탔으나, 힘없는 후손들이 능히 다시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을축년(1745년 정조21)에 수령 한후 덕필(韓候 德弼)이 그 사정을 듣고 곡식 백 곡(百斛)을 내어 충렬사로 보내어 이 비석 건립 공사를 맡아 진행하게 하였다. 이에 비석을 세워 그간의 전말을 기록함으로써, 마침내 (훼손되었던 정려를) 다시 제 모습을 찾게 하였다.
숭정 기원 후 두 번째 정묘년(1747년, 영조 23년) 월 일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세환(李世瑍) 삼가 지음
간사 유생 반문우(潘文宇)
진사 이정하(李挺河)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