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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 우리의 사랑 깜냥.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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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의 사랑 깜냥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완전한 자 되려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고,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처럼 되라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이렇게 돼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율법에서 저렇게 얘기하지만,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니 제자 되는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도전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깜냥’이라는 순우리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가늠해, 해낼 만한 능력’이라는 뜻이고,
‘깜냥깜냥’이라는 부사는 자신의 힘을 다한다는 뜻이며,
그래서 보통 ‘너는 그것을 해낼 깜냥이 안 된다.’라는 식으로 쓰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럴 깜냥도 안 되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원수 사랑을 말씀하셨을까요?
바꿔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 깜냥을 가늠할 능력이 없으셔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랑 깜냥을 모르고 하신 말씀일까요?
당장은 안 됩니다.
당장은 깜냥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생각하신 겁니다.
아니, 사랑할 거라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미리 접습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보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인데
우리는 당장의 나를 보고 나를 믿지 못하고 나의 미래까지 접어버립니다.
원수 사랑하는 것은, 지금 어려운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어주시는 주님의 믿음에 배신하지 말고 우리도 자신을 믿고,
한번 도전해보라는 주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사랑의 의지를 세우고,
그러나 시작은 작은 원수부터, 차츰 큰 원수까지 사랑하면 됩니다.
욕심은 이런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욕심을 가진다면 이런 욕심을 가져야지
허접스러운 욕심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욕심내지 말고 사랑을 욕심내야 한다는 말이고,
사랑을 욕심내더라도 만만한 사랑이 아니라 원수 사랑을 욕심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깜냥을 믿어주시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깜냥깜냥 원수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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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으라 는 소명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우리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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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만이 영원하리라
소공동체 모임의 말씀 나누기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한 형제님이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가 너무도 힘들다.”그러나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면 자기도 모르게 치유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분도 그에 공감한다며 “사랑이 중요하다. 사랑을 담아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도 좋아지고 나도 분명히 좋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미운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처방을 내렸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내신 사랑,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분명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이 그를 한순간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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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교에는 전설과 같은 교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신약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의 성함은 ‘박상래’ 신부님입니다. 학생들은 신부님의 별명을 ‘박살래’로 부르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신약성서를 아주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신부님은 성서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론도 가르쳤는데 ‘예수’에 대한 책도 번역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가르침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책은 젊은 신학생들에게는 죽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는 모세와 같았습니다. 광야에서 황금 소를 만들어서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하게 꾸짖었던 모세와 같았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복음’에 대한 신부님의 강의가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나라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표징이었습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신학생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라틴어를 가르쳤던 허창덕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로만 엄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으로 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L’과 ‘R’의 발음을 잘 구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수업시간에 발음을 시키셨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못하면 분필이 날라 오기도 했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하면 잠시 웃기도 하였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들이 발음 구별도 못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북간도에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북한으로 갔다가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신부님께서 1년에 한번 ‘순한 양’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생일에 신학생들은 ‘선구자’를 불러드렸습니다. 그때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일생의 숙원 과제였던 ‘라틴어 사전’을 만드셨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신학생들도 신부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해 보라고 하셨던 ‘랄렐릴롤루’가 문뜩 생각납니다.
군대에서 흔히 듣던 말이 있습니다. “훈련 중에 흘린 땀 한 방울은 전투에서 흘리는 피 한 방울과 같다.” 훈련을 충실하게 받은 군인들은 실전에서 부상당하거나 사망할 확률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상급부대였습니다. 저도 주로 행정업무를 보았습니다. 사격훈련도 거의 하지 않았고, 행군도 거의 없었습니다. 9시에 사무실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해서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일과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1달 전부터 전방에서 군인들이 와서 외곽 경계근무를 하였습니다. 가끔씩 사병식당에서 전방에서 온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발걸음도, 행동도, 눈빛도 행정업무를 하는 저희 동료들과는 달랐습니다. 배식과정에서 약간의 시비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렸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전방에서 온 군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소위 ‘당나라’ 군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타듯 대충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행동이며 실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박해와 순교는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 받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이 신앙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기도 했고, 노비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이 신앙 때문에 만 명이 넘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온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충실하게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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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은 의사만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고귀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노고가 제일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밖에도 우리의 일생을 지켜 준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택배 기사, 버스 운전사, 음식 배달원, 요양 보호사 등등…. 이들도 코로나의 위협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 준 고마운 분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기보다 막 부려 먹는 종으로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갑질의 모습이 들려왔고, 실제로 흔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지켜 주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자기 삶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얻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로 어루만져주듯 하나하나 손을 대 치유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도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있기는 했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을 해야 하지만, 원수는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은 늘 약자였습니다. 주변 국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실려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글귀.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라면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완전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하느님께서 소중한 자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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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과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불행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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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과제
-성인이 되십시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어제 마태복음 5장은 산상설교중 첫째 대당명제에 해당됐다면 오늘은 마지막 여섯째 대당명제로 소주제 역시 “원수를 사랑하여라.” 아주 선명합니다.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절정부분처럼 생각되는 마지막 다음 구절입니다. 예수님 말씀안에 하느님의 소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말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그만큼 당신 자녀들인 우리에 대한 당신의 믿음, 희망, 사랑을 반영합니다. 우리만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또한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기대에 부응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일부 영적 엘리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여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평생과제-성인이 되십시오.”로 정했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참으로 주님을 닮은 고유한 참나의 성인입니다. 말그대로 평생과정이요 평생과제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성인이 되기에 좋은 환경을 구비한 자들이 우리 수도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인이 되려는 경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도원에 들어온 목적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수도자는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서다” 라는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은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요즘 뒤늦게 탐구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옛 한국의 사표가 될 위인들이요 선비들입니다. 천주교식으로 말해 성인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들입니다. 공통적인 점은 참으로 치열히 참사람 성인이 되기 위해 평생 분투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500년 이상된 왕조는 한국밖에 없다고 합니다. 중국도 200년이상 된 왕조가 없다 하는데 한국은 삼국이나 고려나 조선이, 다 500년이상입니다. 바로 정신적 중심 가치인 선비문화가 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계된 책을 주문해도 한참만에 받아보기에 까닭을 수도형제가 알려 줬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주로 보는 책은 자기계발이나 인간관계, 사업상에 관한 대부분 실용적인 것이라, 수사님 주문한 책은 거의 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재고를 찾아 보내다 보니 늦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대략 50년전, 1970년대 제가 초등학교 교사시절,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열변을 토하면 당시 아이들은 통했는데 아마 지금 아이들이나 젊은 부모들은 공감하지도 탐탁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당시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참 정신적으로도 건강했고 순수했고 소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에게는 평생과제는 단 하나 주님을 닮은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나 참행복도 이런 참나의 성인이 되는데 있을 것입니다. 인생 허무나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도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면담성사시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많이 강조합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노력하는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요 실천입니다. 매일 성인이 되려는 선택과 더불어 치열한 훈련을 요구합니다.오늘 제1독서 신명기는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강조되는 말마디 “오늘”이 무려 3회 나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 명령하십니다. 바로 그 구체적 처방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우리 수도자들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 이래서 끊임없이 보고 배워 성인이 되라 우리 천주교회는 무수한 성인들이란 살아 있는 보물을 지니고 있고, 신자마다 성인의 세례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완전한 성인은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온전한 전인적 성인을 뜻합니다. 저절로가 아닌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치열한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하는 사랑입니다. 둥글둥글 둥근 마음, 둥근 사랑, 둥근 삶을 뜻하는 온전한 사랑, 원만圓滿한 사랑, 원숙圓熟한 사랑, 집착이 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 차별이 없는 공평무사한,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다음처럼 묘사되는 하느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싫어하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배려의 아가페 사랑, 참으로 성숙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래야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고 환대하라니 참으로 어려운 숙제이나 주님은 우리에게 치열히, 가열차게 분발하여 노력할 수 있는 열정을 주십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 역시 자발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성인이 되는 평생훈련, 평생과제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2코린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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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말 같습니다.
완전한 구형(동그라미)은 없다. 완전한 구형은 우리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비슷한 말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람의 기준이 될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하는 완전한 구형과 완전한 사람은 모두 우리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일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누구나 잘못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저지릅니다. 그것의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이 세 가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빛 속에서 우리 모습을 바라보자면 더욱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은 실수와 잘못과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사랑으로 돌아선 사람, 주님 쪽으로 돌아선 사람을 다시금 품어주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원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수많은 잘못과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이끄셨는지,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당신께 용서를 구하는 이들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십시오. 그 안에 우리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원수가 있습니다. 어둠이 있습니다.
그 원수를 위해 용서를 청하면 어떨까요? 그 원수를 위해 주님 앞에 겸손함을 보이면 어떨까요?
우리 자신이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한발 더 나아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들려주신 ‘완전한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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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으세요. 생각이 제멋대로 가지 못하게.
‘생각의 부정적 편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한가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화창한 어느 날 친구와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넘어져 상처가 나고 말았습니다. 쓰라린 고통에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공원에 오지 말았어야 해!
아니, 친구가 공원에 가자고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어야 해. 그랬으면 넘어지는 일도 상처가 나서 아픈 일도 없었을 거야. 아니, 그 친구를 친구로 만나지 말았어야 해. 그 친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이곳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그 친구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우리 가족은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거야. 난 정말 화가나. 차라리 내가 우리 가족 사이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어떠세요? 막장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이지요. 조금 과장되게 썼지만, 혹시 이런 생각의 흐름을 경험하신 적은 없으실까요?
이렇게 꼬리의 꼬리를 물로 우리는 괴롭히는 생각의 흐름을 ‘생각의 부정적 편향’이라고 합니다.
느끼셨겠지만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우리 정신 건강에 매우 좋지 않습니다.
생각이 나도 모르게 우리를 끌고 갈 때 끊어 주세요. 더 이상 생각이 노예처럼 끌려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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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그렇게>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늘 그렇게>
늘 그렇게
오로지 사랑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진실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올바르고
늘 그렇게
오로지 따뜻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부드럽고
늘 그렇게
오로지 깨끗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아름답고
늘 그렇게
오로지 어질고
늘 그렇게
오로지 착하고
더디더라도 쉼 없이
완전하게 더욱 완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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