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
쌀
경상도 지방에선 '쌀'을
'살'로 발음
그래서 뜻의 혼동 주는 경우
무척 많아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추수를 마쳤다고 하시면서 햅쌀을 가지고 오셨다. 쌀은 두 가마니나 되었는데,
삼촌이 작은 짐차에 싣고 경상도에서 함께 모시고 오셨다.
은솔이네는 해마다 가을이면 이렇게 시골에서 할머니가 꼭 햅쌀을 가져다 주신다. 그래서, 두어 달 가량은
쌀가게에서 쌀을 사다 먹지 않아도 되었다.
할머니가 햅쌀을 가져오던 날, 은솔이 어머니는 해마다 하시던 대로 이 햅쌀로 밥을 지어 내고, 밥상에
국이나 반찬도 다른 날보다는 좀 푸짐하게 해서 저녁상을 차려 내셨다.
햅쌀로 지은 밥이라 그런지 벌써 밥 냄새부터가 달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속에서 냄새를 구수하게
풍기는 햅쌀밥의 빛깔이 유난히도 하얗고 기름져 보였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서 그런지 농촌에선 가을걷이가 모두 늦었지. 그래서, 지난 한가위 때는 새로 거둔
살로 만든 떡이나 밥을 차린 사람이 없었다지 않니?"
은솔이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 중에 '살로 만든 떡'의 그 '살'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서,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다.
"할머니, '살로 만든 떡'이라고 하셨잖아요? '살'이 '쌀'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아, 내가 '쌀'을 '살'이라고 했나? 맞다. 우리 고향에선 '쌀'을 대개 '살'이라고 해서 자꾸
그렇게 소리가 나오는구나."
쌀? 살?
재미있게 느껴진 은솔이는 이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쌀'을 경상도 지방에서는 대개 '살'이라 한다. 이 말은 '쌀'의 옛말이기도 하니, 그 지방에서는
이름이나마 우리의 옛 '쌀'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쌀'의 옛말은 '살'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쌀'의 뜻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알맹이' 또는 '(딱딱한 부분에서의) 부드러운 물질' 등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고기에 살이 많이 붙어 있다.'
이 경우는 딱딱한 부분(뼈) 사이의 부드러운 부분을 뜻하고 있다.
'보리 두 말을 대꼈더니(껍질을 깎았더니) 보리쌀이 한 말밖에 안 된다.'
단순히 '보리'라고 하면 껍질이 있는 낟알이 되지만, '보리쌀'이라고 하면 보리의 껍질을 벗겨 낸
알갱이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단순히 '쌀'이라고 하면 '벼의 껍질을 벗겨 낸 알갱이'의 뜻으로 두루 통하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의 식생활에서 이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쌀'은 달리 '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쌀로 지은 밥을 '이밥'이라 하고, 쌀로 지은 죽을 '이죽'이라고 한다. 이밥의 낟알은
'이알'이라고 한다. 그리고, 찹쌀로 지은 밥을 '이찰밥'이라고 한다. 황해도나 평안도, 함경도 일부 지방에서는 '이밥(쌀밥)'을
'이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수벌(수+벌)'을 '수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거친소리되기(ㅎ첨가) 현상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쌀'의 뜻인 '이'는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가 별로 없고, '이밥'이나 '이죽'과 같이
복합어(합해진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쌀'을 '살'로 발음하는 지방은 경상도 외엔 별로 없다. 전라도나 충청도에서는 그대로 '쌀'이다.
그런데, 경상도 지방에서는 다른 말들은 도리어 된소리로 발음하고 있다.
"날 쏙일려구(속이려고)?"
"돼지가 쌔끼(새끼)를 뱄네."
"너무 쌍스런(상스러운) 말을 쓴다.."
"남의 쑹(숭=흉)을 그렇게 보문 못 써."
"썽깔(성질)도 꽤 사납네."
물론, 그 지방이라고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대체로 다른 지방보다 된소리 현상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쌀'만은 이상하게도 반대 현상이 나타나 '살'로 굳어져 있다.
그래서, '살'을 발음하는 사람을 보면 금방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정도가 됐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도 요즘에 와선 '쌀'로 제대로 발음을 익힌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웃으며 배워
볼까요
살 빛깔
쌀 빛깔
시장의 쌀장수 아줌마는 늘 자기 살갗(피부)이 남들보다 거칠고 거무틱틱한 것이
고민이었다.
햅쌀을 처음 받아다 팔던 날, 어느 할머니가 지나가다 이 집의 쌀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살 빛깔이 참 좋기도 하다."
그런데, 쌀장수 아줌마는 이 소리를 자기의 살(피부) 빛깔이 좋다는 줄 알고 얼른 아저씨를 불러
댔다.
"여보여보. 들었수? 내 살 빛깔이 좋다는 소리……. 당신은 늘 내 살 빛깔이 안 좋다고 하지만,
좋다는 사람두 저렇게 있잖우?"
* 살과 쌀;
'살'은 '살'대로의 뜻이 있고, '쌀'은 '쌀'대로의 뜻이 있는데, 발음을 잘못하거나 사투리 배인
억양으로 말을 하다 보면 '쌀'을 '살'이라 하기 쉽고, '살'을 '쌀'이라 하기 쉽다.
위에서 햅쌀을 본 할머니는 아마도 경상도 사투리가 짙게 밴 말씨를 쓰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쌀을 '살'이라 한 것인데, 이것을 들은 쌀장수 아줌마는 자기의 살(살갗)을 보고 한 말인 줄
알고 좋아서 아저씨를 불렀던 것이다.
"살 빛깔이 좋기도 하다."
이 소리를
"살(피부) 빛깔이 좋기도 하다."
로 알아 들은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 중에는 '쌀'을 '살'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