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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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문 석
“준하 씨, 딱 한 번만이라도 영은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면 안 되겠소?” 같은 방 하숙생 이영수는 오늘도 잠자리에 이불을 깔면서 김영은 얘길 이렇게 꺼냈다. 준하는 같은 말을 벌써 일주일 넘게 계속 듣자니 짜증이 났지만 참고 삭이지 않을 수 없었다. 준하가 늘 공사장 일이 끝나고도 사무실에 들러 밤늦게 귀가하는데도 그런 준하를 이영수는 일찍 자지 않고 기다린 걸 알기 때문이다.
이때 갓 스물에 이른 준하보다 이영수는 다섯 살이나 위여서 세상을 보는 눈도 그만큼 달랐을 터인데도 자신의 마음속에 두고 있는 여자에 빠져 이처럼 분별력을 잃은 듯 준하에게 매달렸었다.
“형, 이번 주까진 현장이 서대전 쪽이라 중간에 사무실 들르긴 어려워요. 다음 주 목요일에 끝나니까 그때 한번 알아볼게요.” 옹색하면서도 희미한 준하의 대답에 영수는 끙, 한숨을 토하며 자리를 돌아누웠다.
하숙집은 준하의 직장인 전력회사 바로 앞이었다. 인동시장 초입이기도 한 이곳 하숙에서 준하가 이영수를 만난 그때가 초여름이었고 당시 준하는 배전선로 승압공사를 맡고 있어 늘 시간에 쫓기는 처지였다. 회사에서 거리가 2킬로나 떨어진 효동 쪽에서 하숙이라도 회사 가까이 옮겨 시간을 벌고자 했다가 만난 이영수였다. 효동 하숙집이 유럽풍 양옥이었다면 이곳은 재래식 시장의 허름한 연립상가에 붙은 판잣집 스타일이었다.
이때 이영수는 군에서 막 제대하여 대전 시민관 옥상에다 삼학소주 광고용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었다. 애드벌룬은 그 전 해에 경복궁 산업박람회장에 첫선을 보인 후 상업용 광고로 전국의 주요 도시에 퍼진 관계로 생긴 신종 일자리였다.
하지만 일 같지도 않은 이 일로 이영수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인 이른 아침에 애드벌룬을 서둘러 띄워야 했고, 밤에 누가 걷어가지도 않을 터인데도 해가 지고 나면 꼭 다시 내렸다. 비가 내리거나 강풍 예보라도 발령되면 중간에 다시 내려야 하니 그 일이 얼마나 힘들는지 준하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지가 굳은 때문인지 이영수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선 한마디 불평이 없었다. 그는 준하와 비슷한 중키에다 체형도 보통이라 준하는 이영수에게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고향이 경북 성주란 말을 듣고 준하의 김천과는 서로 붙어 있다는 동향 의식이 발동해 그가 고향 선배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가끔 준하가 맡고 있는 공사장 일로 밤중에 하숙을 찾아온 시공업체 직원이 준하와 대화하는 말을 듣고 이영수도 처음엔 준하를 ‘송 감독’이라 불렀다. 준하는 그 호칭은 공사장에서나 통하는 용어이니 하숙생끼리 그렇게 부른다면 얼마나 웃기는 말이 되겠느냐며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이영수가 매일 이른 아침이면 하숙을 출발하여 대전의 중심에 자리한 목척교를 건너 시민관까지 가려면 40분은 족히 걸렸을 터이다. 목척교까지가 2킬로미터였고 목척교에서 시민관까지는 그 절반인 1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목척교 자체도 길이가 500미터나 되었다.
하숙을 나서서 이영수가 전력회사 앞을 지나는 그 시각에 여고생 복장의 김영은도 그곳에 당도하여 둘은 자주 마주쳤다. 학생복은 그것을 걸친 사람의 나이도 말해줄 터인데, 이때 이미 결혼 적령기에 닿은 이영수는 어쩌자고 열일곱 살 여고생 영은에게 그토록 홀딱 빠졌는지 준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준하가 보기에 영은이 남자를 끌 수 있는 강점이라면 자색도 빠지는 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이성을 마주 스칠 때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깔고 잠시 기다려주는 조신함이 마치 조선시대 여인처럼 느껴져 이영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싶었다. 준하는 말로만 들어오던 상사병 증상을 이영수에게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준하가 대놓고 이영수를 말릴 순 없어 영은을 만나게 해달라는 재촉을 기회를 보자는 말로 뭉그적거리면서도 마음은 늘 가볍지 않았다. 영은으로 인해 눈에 낀 콩깍지 때문인지 이영수는 그러한 준하의 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는 영은에게 전해달라며 몇 차례나 쪽지를 준하에게 내밀었고, 준하는 사무실 책상 서랍에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준하가 속한 공무과 사무실과 영은이 일하는 서무과는 같은 2층이지만 서로 떨어져 만날 수 없는 구조였다. 서무과가 지점장실에 붙은 본관이라면 공무과는 본관에 붙어 T자형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그때 마침 공무과 사무실에 함께 있던 공무계가 본사 지시로 갑자기 서무과 사무실로 옮겨 간 때문에, 준하는 공무계에 용무가 있을 때마다 서무과 사무실을 찾아가야 했다.
사환으로서 사무실 청소와 부서 간에 오가는 서류를 심부름하는 것이 영은의 맡은 일이지만, 일손이 모자라서인지 여직원과 똑같은 근무복 상의를 걸치게 해서 단순반복적인 서류 작성을 영은에게 맡긴 걸 준하는 볼 수 있었다. 준하가 서무과에서 영은을 만나더라도 그에게 건넬 말은 없었다. 만약 이영수의 사랑 고백 같은 얘길 섣불리 꺼냈다가 사내에 악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엔 낭패한 일을 당할 게 너무나 뻔했다.
준하가 보기에 이영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 일보다 제대로 된 직장을 찾는 게 급선무일 것 같았다. 반듯한 직장만 구한다면 반려자야 얼마든지 생길 터인데도 고학하는 영은을 두고 애를 태우는 그가 준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주제넘게 준하가 나서서 이영수에게 대놓고 직장을 바꾸라고 권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국가적으로 취업의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10년 세월이 지났건만 동란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고, 보릿고개에다 높은 실업률까지 겹쳐 군사정부는 단기간에 숙련공을 길러내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실업자에게 기술을 가르쳐 산업인력으로 육성한다는 목표를 국가 정책으로 삼은 것이었다. 훈련기간은 대개 3개월에서 1년 정도였고 교육비는 국가가 부담했다. 생활이 어려운 훈련생에게는 숙식이나 훈련 수당까지 제공하니 준하가 보기엔 이영수에게 딱 들어맞을 것 같았다.
이영수가 영은에게 빠진 건 어쩌면 결핍과 동경이 만나 생긴 강렬한 끌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준하는 하고 있었다. 이영수는 무직이나 다름없었고, 영은도 힘겹게 공부하는 고학생이었으니.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거나, 자신과 닮은 아픔을 가진 존재에게 강렬하게 끌린다’는 말에 딱 들어맞았다. 이영수의 눈에 비친 영은은 단순한 이성을 넘어 지켜주고 싶은 존재이자, 자신의 고단한 삶에 유일한 구원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실이 그만큼 팍팍했기에 오히려 이영수가 느낀 사랑의 감정은 그만큼 순수했을는지 모른다고 준하는 생각했다.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뇌는 거대한 화학 공장이 된다는 말이 준하는 떠올랐다. 이때 도파민은 중독을 일으키는 호르몬으로 상대방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온 신경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어 자신이 처한 현실적 불안조차 잊을 만큼 강력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페닐에틸아민은 이른바 천연 각성제로 이 물질이 분비되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이 극대화되어 국경도 없다며 목숨을 걸 만큼 지독한 정열에 빠져들게 된다니 종종 사람의 목숨도 앗아가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고 준하는 생각했다.
준하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직장을 대전으로 발령받았을 때, 어머니는 못난 아들에게 따뜻한 아침밥이라도 해 먹여서 일터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증기기관차와 디젤기관차가 혼재돼 운행되던 그 시절, 김천~대전 간 열차 통근은 매일 8개 시골 역을 지나야만 했고 목적지에 당도하는데는 1시간 40분이나 걸렸다. 김천에서 첫 역은 초등학교 때 소풍으로 자주 찾은 직지사역이었고 추풍령을 넘으면 중학 때 가을소풍으로 월류봉을 찾아가느라 당도했던 황간역도 나왔다. 준하의 열차 통근이 두 달로 막을 내린 것은 느닷없는 승압 공사를 맡으면서 통근열차론 도저히 공사 현장의 시간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사 승인 ‘대전 전역 배전선로 승압공사’가 1963년 6월 착공되었다. 대전시가 생긴 이래 단위 토목공사로선 최대의 예산이 투입된 프로젝트라고 지역 신문과 방송은 연일 보도했다. 대전도 배전전압이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3천3백 볼트로 낮은 데다가 동란 때 도시가 침략군의 수중에 떨어져 훼손된 전선이나 전주가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전발 0시 50분 열차가 떠나는 대전역도 밤이면 어두침침하여 이별하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러한 대전의 밤을 환하게 밝히는 공사란 보도에 시민들은 제발 우리도 서울 명동처럼 밝은 밤거리를 좀 거닐어보고 싶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6천6백 볼트로 전압만 두 배 높여선 신문이 보도한 만큼 밝아지긴 어렵다는 걸 준하는 모르지 않았다. 예산상의 문제로 전선을 용량에 맞는 굵기로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력 3사 통합 2년 차인 이때 전력회사는 자금 압박이 심했다. 그 여파로 6천6백 볼트 승압공사도 최소 비용을 들이도록 방침이 시달되었다. 전주와 전선을 전량 교체하고 변압기도 신규로 구매해야 하는 공사는 그림의 떡이었고, 기존 설비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지시였다. 주상변압기는 탭만 조정하면 끝나니 차라리 편했다.
공사는 대전 시내 전역과 서대전 그리고 유성 온천지구까지였다. 풍한방적 등 산업시설이 많은 서대전에서 유성 사이엔 공군 기술교육단과 육군통신학교만 들어 있고 나머진 들판이었다. 들판을 지나는 선로지만 애자는 절연 등급이 달라 전량 교체했고 전주나 전선에도 문제가 있으면 바꿔나갔다.
승압공사 감독으로 임명된 배전계 조종섭은 입사 3개월째인 준하를 보조 감독으로 지명하였다. 조 감독은 준하가 혹시 거부할까 봐 ‘보조 감독 임명’을 과장까지 내부 결재를 득했다. 그러고 나서 “미스터 송, 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배전 분야의 베테랑 기술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간부도 빨라질 수 있고 퇴직 후에도 써먹게 될 것이오”라고 덧붙였다.
조 감독이 준하를 점찍은 것은 꼼꼼한 그의 성격과 고집을 본 것 같았다. 공무과엔 배전계를 비롯하여 변전계, 송전계, 통신계 등이 있었다. 준하는 계장을 포함한 배전계 5명 중에선 가장 어렸고, 나머진 40~50대였다. 조 감독은 대전 출신으로 준하에겐 거의 아버지뻘이나 되지만, 그는 준하를 호칭할 때 꼭 ‘미스터’를 앞에 붙이면서 살갑게 대해주었다.
승압공사 시공업체는 ‘한공’이었다. 한국전력공업주식회사를 줄여서 그렇게 불렀다. 한공은 한전의 자회사였다. 한공 사옥도 한전 울타리 안에 들어 있어 공사 시공에 관한 협의가 수월했다.
당시 대전과 같은 중소도시엔 전주에 올라 작업할 숙련된 기능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소식을 듣고 서울과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몰린 전공 30여 명과 합치니 당초 목표했던 50명 인력이 채워졌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