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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你杀那条鱼,并非仅仅为了养活自己,或者因为要靠卖鱼换取食物,他想。你杀那条鱼,还为了自己的骄傲,因为你是个渔夫。当它活着的时,你爱它:它死了之后,你也爱它。如果你是爱它的,那么杀死它就不是罪。又或者,是更大的罪?
(너는 그 고기를 죽였구나. 단지 나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또는 그걸 팔아서 먹을 것으로 바꾸기 위함만도 아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너는 그 고기를 죽였는데, 너 자신의 자부심을 위해서였나, 네가 어부기 때문에. 고기가 살아있을 때, 너는 그걸 사랑했고, 죽은 이후에도 그걸 사랑한다. 네가 그 고기를 사랑했다면, 그러면 그걸 죽인 것은 죄가 아니다. 아니, 더 큰 죄일까?)
노인은 끝내 대어大鱼를 잡았다. 그것을 굴복시켰다. 지금껏 잡은 물고기들 중에 월등하게 컸고, 자태와 면모가 무엇보다 두드러진 물고기였다. 잡은 물고기를 자신의 배에 단단히 묶고 노인은 생각한다. 그가 물고기를 죽인 것은 죄인가? 망망대해를 홀로 떠다니며 겨우 포획한 대어大鱼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대어에게 달라붙을 때, 즉 원치 않는 위기와 고통의 순간이 밀려올 때 노인은 죄의식을 느낀다. 인간이 본래 그렇다. 고통의 순간에 가장 먼저 찾아드는 감정이 죄의식이다. 혹시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은 아닌가라는. 그러나 그저 물고기일 뿐인 그것에게 죄의식까지는 지나친 감정 아닌가. 대어라도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당연한 건데 말이다. 노인의 태도가 낯설다.
대어를 상대하는 내내 노인의 대어大鱼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어부들과 사뭇 달랐다.
接着他开始同情他钓到的这条大鱼。它既美妙又奇怪,谁知道它有多大年纪呢。我还从来没有钓到过如此强壮的鱼,也没见过行为如此奇怪的鱼。也许它太聪明了,所以不愿意跳出海面。它只要跳出海面,或者往前猛冲,就会让我无法招架。也许它以前很多次被鱼钓困住过,它知道该用怎样的方式来战斗。
(이어서 노인은 낚시에 걸린 대어大鱼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미묘하고 이상한 녀석, 누가 알겠는가, 그 녀석이 몇 살이나 되었는지. 내가 지금껏 낚시한 녀석들 중에 이처럼 건장한 놈은 없었고, 이처럼 이상하게 행동하는 녀석도 없었다. 아마 아주 영리한 녀석이야. 그래서 바다위로 튀어 오르려 하지 않는 거야. 녀석이 해수면에서 튀어 오르거나, 앞쪽으로 맹렬하게 돌진한다면, 나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아마도 녀석은 이전에 여러 번 낚시에 걸려서 옴짝하지 못한 적이 있어서, 어떤 식으로 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런 문장들에서 나는 노인의 특별함을 엿본다. 수월秀越성의 특별함이 아니다. 그가 大鱼를 바라보는 방식 말이다. 낯선 시선이다. 낯선 태도다. 노인은 대어大鱼를 다루며 그것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역지사지 하고, 그것의 생을 예측하고, 동병상련한다. 노인에게 대어大鱼는 자신을 투영한 존재다.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존재 말이다. 보통의 어부들에게 물고기란 그저 수량화 하고 계량화 하여 벌어들일 돈벌이의 수단, 어부는 잡는 사람, 물고기는 잡히는 물건일 뿐이다.
낯선 시선이 낯선 삶을 만든다. 보통의 어부는 노인처럼 홀로 그 먼 곳, 망망대해로 나오지 않는다. 많이 잡을 수 있다면 그 뿐, 잡은 물고기를 돈으로 넉넉하게 환산할 수 있다면 오케이, 만족이다. 최소한의 모험의 값으로 만선을 해낼 수 있다면 된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어장은 달랐다. 홀로 망망대해를 향해 닻을 올린다. 여느 어부들의 익숙한 삶으로부터, 즉 "떼로 사는 삶"으로부터 노인은 기꺼이 탈출한다. 자신만의 길을 꾸리는 것이다. 타인과 구별되는 삶,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는 삶을 택함이다.
2.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의 주인공, 호랑애벌레가 노인의 삶과 오버랩 된다. 호랑애벌레는 수많은 애벌레들이 서로 엉겨 탑을 이룬 장면을 목격한다. 호기심에 그 '떼'에 합류한다. 한없이 올라가는 것, 자신이 먼저 올라가기 위해 동료를 제치고 밟는 일은 다반사다. 끝없는 분투다. 그들에게 목적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하는 애벌레, 알고 있는 애벌레는 없다. 그저 밟고 디디고 애쓸 뿐이다. 호랑애벌레는 이런 생존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기둥에서 내려온다. 무리로부터, '떼'로부터 탈출한 것이다.
이탈하고서야 호랑애벌레는 자신이 날 수 있는 나비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은 기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날아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호랑애벌레는 비로소 자기 존재에 가장 충실한 모습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자기의 본 모습을 찾고서야 나는 내가 아닌 존재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온전히 '내'가 되지 않고서는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결핍의 존재가 있을 뿐이다. 작가인 트리나 폴러스는 이를 알았던지, 애벌레의 성장을 얘기하면서 그들의 성장이 꽃들을 위한 희망이라 했다.
성경에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은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선다. 이어령의 해석을 들어보자.
"아흔아홉 마리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 먹었지. 그런데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지 멋대로 놀다가 길을 잃은 거잖아.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뜯었지. 목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야. 존재했어?"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네. 목자의 엉덩이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목자를 바라본 거지. 그러다 길을 잃어버린 거야.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는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길 잃은 양은 그런 존재라네"(<마지막 수업> 9장 바보의 쓸모 중에서)
"(타인과 다른 나만의 삶)을 살지 못하면 그건 '떼'로 사는 거라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 그게 어떻게 인간인가? 그냥 무리지어 사는 거지. (중략) only one이야. 무리 중에 그 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어?"(<마지막 수업> 6장 중에서)
남들이 규정해준 대로 살지 않는 것, 방황 하더라도 자기만의 삶을 살아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타성과 관습이라는 집단성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고유한 삶, 독립적인 존재가 됨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자신만을 위한 것 같지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나의 고유성을 깨달았을 때 타자의 고유함도 인정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타인을 나의 일부가 아닌 나와 더불어 절대성(고유함)을 가진 존재로 바라볼 수 있음이다. 내가 너일 수도, 네가 나일 수 없으나, 나와 네가 서로의 고유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너와 나에게 사이라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너와 내가 비로소 만날 수 있음이다. 진정한 관계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하여 나는 이어령의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는 성토에 쌍수 들어 동의하고 싶다.
3.
너와 나의 고유함이 있는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는 비교하지 않을 게다. 비교의 말들 속에서 일종의 '집단성'을 느낀다. 군중이라는 무리 속에 존재하고 있는 나, 이런 식의 자의식 말이다. 비교는 '떼'로 존재하는 집단적 삶에서 야기되는 불협화음이다. 개인의 고유함이 매몰되었음을 방증한다. 그런 곳엔 경쟁만이 도사리고 있다. 아수라장이다. 두 아이가 어느덧 독립을 눈앞에 둔 청년이 되어가고 있다. 아들들과 함께 하는 동안 가장 노력한 것은 비교의 언어 사용하지 않기였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내게 준 선물 중 하나는 명작 그림책을 만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디자이너로 일하다 손주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주면서 그림책 작가로의 길을 늦게 시작했던 레오 리오니의 작품들은 내게 양육의 지표요, 잠언이 되어 주었 <프레드릭>이란 작품은 특히 그러했다.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깃발 같은 꽃송이 하나 들고 수줍게 서 있는 프레드릭.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거든 두 눈 부릅 뜨고 살아라는, 내가 부모 세대로부터 줄곧 들어왔던 불문율이었는데, 프레드릭에게는 철지난 구차한 경구에 불과할 것 같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하여 친구들이 낟알을 모으고 지푸라기를 모으는 동안 프레드릭은 줄곧 게스츠레한 눈을 뜨고 있다. 다른 생쥐들과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 졸음에 겨운 듯하다. 노인이 익숙한 어장에서 떨어져 나와 망망대해로 나아갔던 것처럼, 호랑애벌레가 기둥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처럼, 프레드릭은 친구'떼'로부터 멀직하다. 친구들은 불평한다. 너는 왜 일하지 않는거니? 프레드릭의 대답을 들어보시라.
"나는 춥고 어두운 겨울을 위해 빛을 모으고 색깔을 모으고 있어. 그리고 이야기를 모으고 있지."
생쥐들에게 급기야 겨울은 오고 말았다. 얼마간 모아놓은 낟알과 지푸라기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울은 생각보다 길었다. 생쥐들은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드디어 프레드릭이 등장한다. 프레드릭이 낟알과 지푸라기 대신 모았던 빛과 색깔과 이야기가 힘을 발휘한다. 긴 겨울은 프레드릭으로 인하여 빛이 났다. 내 아이들을 경쟁의 소용돌이로 내몰지 않을 이유, 비교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이유를 프레드릭에게서 발견했다. "다른 곳을 바라보기", 이것은 모두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매진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매우 낯선 태도다. 모험이다. 위기에 직면할 수 있는.
4.
노인의 모험은 결국 위기를 맞이했다. 사투를 벌이며 포획한 대어는 급기야 상어 떼에 의해 뼈만 추리게 되었다. 노인의 사투는 얼핏 보기엔 실패다. 그러나 역설이다. 어촌을 찾은 여행객이 노인의 뼈만 남은 대어를 보고 감탄한다. “哦,我还从来都不知道鲨鱼会有这么气派造型这么优美的尾巴呢”(오, 나는 이제껏 이렇게 기품 있고 이렇게 우아한 상어의 꼬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존재로움이란 이런 것이다. 뼈만 앙상해도 그것의 고유함을 알아볼 수 있는 것. 그래서 희망이다. 사람들은 재화가 풍요로울 때에 희망적이라 한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란 살아있는 정신으로 존재로울 때 피어난다.
노인은 실패하지 않았다. 대어大鱼의 육질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기개와 정신은 남았다. 소설의 서두와 말미에 등장하는 소년이 그 증거고 희망이다. 노인의 이야기는 그대로 소년에게 전해져 또 다른 존재적 삶을 유전할 것이다. 헤밍웨이는 다 사라져버린 폐허 같은 대어의 면모에서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음이다. 장식품이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본질은 돋보이는 법이니까. 하여 다 사라져도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것은 기어코 빛이 나고야 마는 법이니까.
그러니 우리, 낯선 삶을 동경해보는 건 어떠한가? 무척 두려운 일일지라도 말이다. 방랑의 끝에 우리를 버선발로 맞이할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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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의 시간
그 때 우리의 교실은 참 추웠다. 교실 한가운데 난로 하나에 의지해 겨울나기를 했으니 말이다.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어느덧 난로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곤 했다. 목적없는 대화를 하릴없이 나누다 간혹은 꿈 얘기를 하곤 했다. 미래를 예언할 수 없듯 불분명한 장래에 대하여 몇 마디를 주고 받으며 불안스러워 했다.
"나는 현모양처가 꿈이야" 우리들 대부분의 불확실을 가르고 한 친구가 말한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그런 것이 꿈이 될 수 있을까? 80년대 사회의 직업세계에서 남녀 성평등이 이루어지긴 요원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대학을 가는 일에 있어 남녀가 불평등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남녀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정부의 계몽(?)이 한 몫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
대학을 나와 전문직업인이 되는 것, 당시는 이것을 꿈이라 말하는 게 떳떳했고, 대세였다. "현모양처"란 말의 의미는 전업주부와 다르지 않았다. 대학을 꿈 꾸면서 겨우 전업주부나 하겠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나는 내심 그 친구를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전업주부다. 그 때 비웃었던 것, 그 자리에 내가 정확히 들어가 셋팅되어 있다. 학창 시절 나는 왜 전업주부란 말이 그다지도 쓸모없게 느껴졌던가. 교육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자리, 전문성이 없어도 채울 수 있는 자리, 노력없이 앉을 수 있는 자리, 특별함이라곤 호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자리라 여겼던 탓이다.
그렇다. 학교 졸업장이나 무슨 기관의 수료증이 필요한 자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니 객관적인 인정을 받거나 이력서에 쓸 커리어랄 게 없다. 당연히 경제적 보상을 받는 자리도 아니다. 도리어 집안의 붙박이장처럼 매양 있던 자리에 박혀서 태고 적부터 이렇게 살아가는 게 당연했던 듯 매일 반복적인 헤드레 일 속에 묶여 있는 자리, 이 곳이 바로 전업주부의 자리다.
이번 주는 두 차례의 손님 대접을 했다. 주부 세계의 일설 중 하나는 남의 손 들어간 밥은 무조건 맛있다는 것. 남이 해준 밥에 주부들은 진정 진심이다. 목요일은 이런 주부들을 위한 힐링 밥상. 그리고 토요일은 남자들을 위한 밥상. 남편의 회사 동료 몇 분을 초대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절에, 이별하게 될 인연이 많아서였다. 이별밥상이라고나 할까.
내가 전업주부가 아니었다면 밥상 초대는 엄두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 끼 밥상을 차리기 위한 노동의 시간이 만만치 않다. 특히 이곳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알타리무라든가, 조선무라든가, 미나리나 깻잎이나 갓 등은 한국인이 모여사는 곳까지 나가야 구입할 수 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다.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완성하기까지의 노동시간은 먹는 시간의 50배는 더 소요될 것이다.
알타리무로 총각김치, 파김치, 포기배추김치와 간장게장을 이틀 걸쳐 만들었다.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고, 게를 손질하는 반복적이고 단순한 노동의 맛이 있다. 집중 삼매경이 선사하는 평온함이랄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이 고요하다. 오직 몰입.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그 행위에 침잠하여 순간을 누린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낀다.
준비가 먹는 데 드는 시간 보다 50배나 된다고 해서 허무하지 않을 이유다. 시간을 이용한다기 보다 머물러 누리는 일, 전업주부의 특권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시간은 숫자로만 매겨지는 산술이 아님을 새삼 환기한다. 젊어서는 그랬다. 하찮은 일이라는 것에 소용되는 시간들이 아까왔다. 나의 시간이 타인에 의해 소용될 때 조급했다. 무의미하다 여기는 것들에게 나의 시간은 인색했다. 그러나 의미는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다.
전업주부의 시간은 지루할 것 같지만 머물러 만끽하는 시간이고, 무용할 것 같지만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유용의 시간, 타인의 기준으로 측정되지 않는 존재로운 시간이다. 진정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시간을 배경 삼아 이웃의 인심과 만족을, 행복한 미소와 추억을 누렸으니, 시간은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머물러 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자주 하기는 힘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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