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의 목숨을 노린 자객 형가와 고점리
기원전 228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도읍 한단을 함락시킴으로써, 국가 간의 균형은 진나라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제는 조나라를 평정한 여세를 몰아 역수 남쪽에 있는 중산에 군대를 집결시킨 후 연나라로 총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왕 정과 연나라의 태자 단은, 그들의 아버지가 조나라의 인질로 잡혀있던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과거 그들은 조나라 도읍 한단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으며, 연의 태자 단은 진왕정을 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나 기원전 246년 진왕 정이 왕위에 등극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진왕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은 한 때 효 문왕의 버림을 받아 조나라의 인질로 갔을 뿐이지, 진나라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이미 전국 7웅중 최강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강국의 왕이 된 진왕정은 과거의 불우하였던 기억을 철저하게 지웠으며, 그 때문에 그의 친아버지로 알려진 여불위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태자신분이었던 단은 조나라에 이어 이번에는 진나라의 인질로 보내지게 되었다. 단은 진왕 정이 옛정을 생각해서 잘 대해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진왕 정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지난날의 기억 중 일부였을 뿐이었다.
결국 진왕 정의 냉대를 참다못한 단은, 고국으로 달아나 버렸으며 진왕 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이제 연나라의 국력으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강대한 나라로 변하였기 때문에, 군사작전으로는 복수하기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연나라의 태자 단은 비밀리에 진왕 정을 암살할 수 있는 자객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 일은 개인적인 복수심도 있었지만, 조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한 연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기도 하였다.
태자 단은 여러 자객을 물색하였는데, 그 중에서 위나라 출신인 형가라는 사람이 가장 유명하였다. 그러나 형가는 유명세는 있었지만, 그에 걸맞은 행적은 없었다. 단지 고점리 등 당시 내놓으라 하는 유명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유명세를 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의 태자 단은 형가보다는 지해와 용기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전광이란 사람과 먼저 접촉하였다.
그런데 전광은 오히려 형가를 추천하였으며, 기밀 유지를 위해 형가를 만난 자리에서 왕의 명령을 전달한 후 자살하고 말았다.
전광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형가는 태자 단을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태자 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자신은 그렇게 큰일을 수행할 사람이 못된다며 거절하였지만, 태자 단이 머리를 조아리면서까지 거듭 부탁하자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형가는 진정한 의인이라고 보긴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진왕 정의 암살부탁을 수락한 이상 뒤돌릴 수 없었다. 또한 진나라의 군대는 언제라도 역수를 건너 연나라의 국경으로 침입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문제는 과연 어떻게 진왕 정의 앞까지 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가는 다음과 같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우선 연나라에는 진나라 출신의 장군 번어기가 망명중에 있었으며, 진시황은 그의 목에 황금 1천냥과 1만호의 땅을 현상금으로 걸 정도로 미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번어기의 목과 연나라 남쪽 변경의 지도를 가지고 가면 진왕 정이 만나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태자 단은 자신을 의탁해 온 사람의 목을 칠 수 없다고 반대하였지만, 형가는 비밀리에 번어기가 만나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그러자 번어기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의 목을 베어 자결하고 말았다.
역수를 건너 진시황제 앞으로...
이젠 정말 형가도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로 가야만 했다. 연나라는 암살계획을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맹독이 발라진 비수 한 자루를 형가에게 주었다. 시험 삼아 베어보니 누구든지 피가 조금만 나와도 죽었다고 하니, 계획실현을 위해 꾀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형가는 지도 속에 비수를 감춘 후, 번어기 장군의 목이 든 상자를 들고 역수를 건너갔다. 그의 뒤에는 수많은 연나라 대신과 태자가 흰옷을 입은체 배웅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절친한 친구 고점리가 말없이 연주하는 축의 소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릴 만큼 애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형가는 그 음율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노래를 하나 불렀다.
바람은 스산하고 역수의 물은 차가운데
壯士(장사)는 한번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그리고 형가의 계획대로, 번어기의 목을 확인한 진나라는 의심 없이 진왕 정앞에 까지 그를 안내하였다. 여기에 연나라 국경지대의 지도까지 있으니 진왕 정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도가 펼쳐지는 순간,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비수가 나왔다.
형가는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꼽으려 하였지만, 진왕 정은 소매를 찢으며 피하였다. 단석에 배석한 신하들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하였다. 무장한 경호대역시 왕의 명령이 없었으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더구나 진왕 정의 칼은 너무 길어서 칼집에서 뽑혀 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진왕 정을 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진왕 정은 그리 쉽사리 당하였다. 그는 기둥을 방패삼아 형가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였고, 신하 중 한명이 칼을 등에 메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진왕 정이 칼을 메자, 쉽사리 빠졌다. 곧 진왕 정은 형가의 허벅지를 베어 중상을 입혔다. 더 이상 추격이 어려워지자 형가는 비수를 던져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진왕정은 그 비수를 피한 후 형가에게 칼을 휘둘러 여덟 곳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혔다.
이제 형가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실패한 것은 왕을 생포하여 연나라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 위해서라는 독설을 하였다. 그러나 곧 주위의 신하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형가의 마지막 모습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정확지 못하다. 또 중국인들은 허무적인 검객의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매력을 느끼는데, 그런 중국인 특유의 정서가 보태어져 다소 허무하였던 형가의 죽음이 다소 낭만적인 모습으로 서술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형가는 얼마나 절호의 기회를 놓쳣는가? 그가 진시황의 앞에까지 가게 하기 위해 정광과 번어기가 자살하였으며, 또 맹독을 시험하기 위해 이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자신은 대업을 이룰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형가의 말은 겸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형가가 진왕을 암살하는 장면을 그린 한(漢)나라 때의 그림
또 한명의 자객 고점리
또 그가 바친 연나라 국경지도 덕분에, 진나라는 한결 수월하게 연나라를 총 공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지 6년만인 기원전 221년에 이르러서, 진왕 정은 최후로 남은 연과 제를 이따라 격파하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연나라가 패망하고 나서도 여전히 진시황제의 목을 노리고 있던 고독한 자객이 있었다. 바로 형가의 친구였던 고점리였다. 고점리는 형가의 실패소식을 애통해하며, 스스로 태자 단이 비밀리에 양성하는 자객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라가 패망하자 자객단들은 뿔뿔히 흩어졌으며, 고점리도 잡역을 하며 자신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축 연주 실력만은 당대 으뜸이어서, 곧 그 소문은 진시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진시황제는 비록 잔혹한 폭군으로 유명하였지만 로마의 네로황제처럼 음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고점리의 신분은 사전에 들통나고 말았지만, 진시황제는 그의 축 연주를 한번이라도 듣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그의 연주솜씨가 너무도 훌륭하였기 때문에, 진시황제조차도 차마 죽이지 못하고 두 눈을 멀게하여 암살시도를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두 눈을 멀고 나서도 고점리의 축연주는 더욱 완성도가 높아져만 갔으며,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음악을 사랑했던 진시황제는 고점리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점리는 친구의 허망한 죽음을 한시라도 잊은 일이 없었다.
그는 맹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황제 곁에 갈 단 한 번의 기회만을 노렷다. 그리고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를 숨기며 진시황제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연주를 하였다. 한편으로는 형가의 암살시도 이후 더욱더 검속이 심해졌기 때문에, 비수를 숨기고 접근하기는 불가능 하였다. 하지만 고점리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축 악기 속에 납을 부착하여 흉기로 쓸 계획이었다.
고점리의 연주에 점점 매려된 진시황제는, 좀 더 가까이서 연주하도록 하였고, 이제 축을 휘두르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드디어 고점리는 온몸의 감각을 단 한 번의 기회에 집중하여 진시황제를 향해 축을 휘둘렀다. 그러나 형가의 공격도 피해낸 진시황제였기 때문에, 눈 먼 자객의 마구 휘두른 축에 당할리 없었다. 고점리는 마지막으로 축을 진시황제에게 던졌지만 끝내 빗겨가고 말았다. 그리고 고점리역시 형가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리고 사기의 저술자인 사마천은 형가의 전기에 보다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지만, 후대 중국인들은 두 사람을 동등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실패한 도전이긴 하지만, 역사에 있어 반드시 성공만이 존재하거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죽음이 진나라의 중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도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의로운 일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 그 자체를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