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깐채-대문간채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입니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백인제가 건축의 특징=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입니다.
정원에서는 당당한 사랑채를, 중정에서는 넉넉한 안채를, 그리고 후원에서는 아담한 별당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백인제 가옥은 우리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한자리에 모인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1913년 한상룡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다고 전한다.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 1906년 가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몇 년에 걸쳐 주변의 작은 가옥 12채를 사들여 집터를 마련하고 1913년 6월 경성부 가회정(町) 93번지(현 종로구 가회동 93-1번지)에 새 가옥을 준공했다.
1976년 문화재 지정 당시 1876년에 건축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착오에 의한 것이다.[5] 한상룡은 준공 4개월 후 일본 천황의 간나메사이(神嘗祭, 신상제 -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맞추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배풀었다. 이때문에 문화재 전문가 황평우는 이 집의 이름을 한상룡 가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상룡은 이 집에 1928년까지 거주하였다.
후에 1935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조선중앙일보 부사장을 역임한 최선익이 사들였다.
개성 출신의 부호였던 최선익은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고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44년 외과 의사이자 흥사단 활동가였던 백인제가 이 집을 인수하였다. 백인제는 1950년 9월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고[8], 이후 백인제의 부인 최경진과 자식들이 계속하여 거주하였다. 1988년 집의 소유권은 아들 백낙조에게 이전되었으며 2009년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였다. 2015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7]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의 촬영 장소로 쓰였다.[13]
◆1899년 1월 28일(음력 1898년 12월 17일)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이리(현 정주시 남양리) 부호마을에서 부호였던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응모(韓應模)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동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붕제가 있으며, 백낙청이 조카다. 고조부 백경해(白慶楷)는 종2품 한성부 좌윤(左尹)[5], 증조부 백종걸(白宗杰)은 정3품 병조 참의(兵曹參議)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백인제는 오산학교 재학 4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오산학교 졸업 후에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경성의전에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죄로 10개월 옥살이를 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출옥 후 조선총독부와 경성의전의 유화 조치에 힘입어 복학하여 결국 전학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2년을 부수(副手)[6]로 근무하고 나면 의사 면허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조선총독부부속병원에서 외과 마취 부수를 하며 마취 기술을 익혔다. 마취과 전문의가 따로 없던 시절이라 마취는 외과 의사한테 중요한 작업이었고, 여기서 익힌 마취 솜씨는 나중에 그가 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8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7] 학위 논문 제목은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전편) : 실험적 흰쥐 구루병의 생성 및 그 일반적 재검색'이었다. 같은 해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 교수 재직 중이던 1930년과 1936년, 두 차례, 약 2년에 걸쳐 독일 베를린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경성의전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 시절의 일본인 스승 우에무라 슌지(植村俊二)가 경영하던 외과 의원을 인수하여 위탁 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1941년에 경성의전을 사직하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정식 개업하였다.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1946년까지 5년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6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설했고 1946년 10월 경성의전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될 때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 교실의 주임 교수를 맡는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여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납북기록] 하지만 출생시기를 생각한다면 현재는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