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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벨기에신앙고백서 Article 3: The Written Word of God /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
We confess that this Word of God was not sent nor delivered by the will of men, but that holy men of God spoke, being moved by the Holy Spirit, as Peter says.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사람의 뜻을 따라 오거나 전해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씀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성경이 비록 사람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라 해도 이를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당신 자신의 말씀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육적인 지성으로는 절대로 증명해내지 못하고 사람의 육적인 감성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오로지 성도를 중생시키시는 성령께서 신령한 믿음을 주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성도들은 지성으로는 성경 자체의 증거들과, 성경의 기록과 보존과 전수와 번역 등 일반은총으로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로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감성으로는 신령한 지성으로 판별한 증거들을 참되고 진실한 것으로 여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며, 이에 성경을 더욱 넓고 깊게 알고자 하는 마음과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행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의지를 가지게 된다.
만약에 성경이 성령과는 상관없이 단지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면, 기록자 자신이나 가족이나 족속이나 국가의 명성과 유익에 해가 되는 내용들은 빼버리고 오로지 자랑할 수 있을만한 것들만 적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과 관련된 수치스럽고 불미스러운 내용들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거스르게 하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라면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였다. 성경 기록자들이 성경을 기록한 상황은 마치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서 탈취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서 새끼 낳은지 하루밖에 안되는 암소 두마리가 끌고 이스라엘 지경인 벳세메스까지 끌고 가게 한 것과도 같다. 그 암소들은 태생적인 본능으로는 당연히 수레의 멍에를 어떻게든 벗어던지고 새끼에게 젖을 주러 가야했지만, 여호와의 영께서 그 암소들의 본능을 억제하셨기 때문에 그 암소들은 처절히 울면서도 벳세메스까지 수레를 운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 기록자들도 육신의 소욕대로라면 받아들이기 힘들고 버거운 내용은 버려버리고 싶었더라도 여호와의 영께서 그들의 영을 강력히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으로써 육신의 소욕을 억제하며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경 기록자들의 태도는 오늘날 성경을 가르치는 성도들이나 성경을 배우는 성도들이나 한가지로 본받아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목사와 교사들은 육적으로 좋아보이는 내용만 골라서 가르쳐서는 안되고 자신에게 불리하고 유익이 되지 않거나 듣는 자들이 거북해한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으면 소멸하지 말고 과감하고 담대하게 가르쳐야 한다. 성경을 배우는 신자들은 듣기에 기분좋고 위로만 주는 내용만 감탄고토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아픔을 주는 말씀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Afterwards our God-- because of the special care he has for us and our salvation-- commanded his servants, the prophets and apostles, to commit this revealed Word to writing. He himself wrote with his own finger the two tables of the law.
후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돌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종들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 말씀을 밝히고 기록하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 자신의 손가락으로 두 돌판에 율법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성도들의 신앙을 보존 성장시키셔서 그들 모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방법은 통상적으로는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감동을 부여하셔서 그들이 자신들의 성장환경과 지성과 감성과 신앙수준 등에 따라 그들 자신의 어휘들을 가지고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자들이 각자 담당한 성경을 기록한 모든 어휘들은 한 획 한 점까지도 그들에게 내주하신 성령께서 은밀하게 지정하신 것들이었다. 때문에 성경 기록자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제각각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기록한 전체 성경은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것이므로 성경 내에서 상반되거나 상충하는 교훈은 있을 수 없으며,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해석자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오로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사하신 십계명에 대해서만 직접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당신 자신의 손으로 돌판에 적어주셨다. 이는 십계명이 모세 당시에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서 주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그 때까지 영구한 효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Therefore we call such writings holy and divine Scriptures. [2 Pet. 1:21 For no prophecy was ever produced by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 / Non enim voluntate humana allata est aliquando prophetia : sed Spiritu Sancto inspirati, locuti sunt sancti Dei homines. / οὐ γὰρ θελήματι ἀνθρώπου ἠνέχθη προφητεία ποτέ, ἀλλὰ ὑπὸ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φερόμενοι ἐλάλησαν ἀπὸ Θεοῦ ἄνθρωποι.]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록된 것을 거룩하고 신령한 성경이라 부릅니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따라서 성경은 그저 지구상의 모든 고등 종교들 중 하나의 경전으로 치부될만한 저급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감히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한 지식을 하찮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셔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건네주신, 마치 영원 전 영광의 인성을 가지신 독생자께서 여자의 몸에 잉태되시고 태어나셔서 이 땅의 비천한 인성의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과도 같은,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성막이나 성전에 안치되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이 되지만 블레셋이 가지고 있을 때는 참혹한 재앙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성령충만한 교회와 성도들이 다룰 때는 구원 신앙에 유익이 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들이 다룰 때는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될 뿐이다.
#20201120
#선행
교회가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덕성을 아예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인간의 덕행이 무가치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지, 이 덕성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령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덕성을 통해서 성도를 성화시키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자의 믿음만이 중요하고 덕성은 불필요하다며 선을 행하는데 나아지지 않는 자는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중생한 성도가 아니다.
#민수기 #Numbers 11:1-3
다베라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백성이 원망하면서 내뱉은 악한 말은 마치 어린 자녀가 철없이 내뱉은 불평이나 아무 뜻도 모르고 한 비속어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수준이었다면 여호와는 무자비한 폭군처럼 여겨지셨을 것이다. 백성들의 악한 말의 수준은 마치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패역부도한 자식이 부모 면전에서 삿대질 하면서 부모를 저주하는 것과도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망나니 자식은 부모가 직접 장로들에게로 끌고 와서 처벌해 달라고 하고 장로들은 그를 공개처형 하도록 규정하셨다. 백성들은 애굽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이적과 기사들을 분명히 보았고 광야에서는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먹이시고 마시게 하심으로써 자기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설령 어느 정도의 불편함이 있다 하더라도 애굽에서 건짐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함으로 참아내야 했다. 설령 본성의 악함과 연약함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불평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더라도 얼른 용서를 구하며 돌이켜야만 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원망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심한 저주와 비방과 조롱으로써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행하신 일들과 여호와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른 것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한 1차 대상은 아마도 여호와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를 본 적도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해 악한 말을 쏟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백성들은 가장 만만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욕하고 저주하고 조롱했을 것이다. 자기들은 장정만 60만이 넘고 모세와 아론은 매우 적은 수였기 때문에 세력을 이뤄서 모세와 아론을 위협하면 자기들이 넉넉히 이길 줄 알았던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보내신 모세와 세우신 아론을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은 당신 스스로에게 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시고 바로 백성들을 불로써 벌하신다. 이것이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려는 징계인지 악인에 대한 심판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들은 범죄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벌하셨다라는 것만이 중요하다.
오늘날 교인들이 여호와를 악한 말로 원망한 백성들과 같은 죄를 부교역자들에게 저지르고는 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담임목사는 거의 예수님처럼 섬기다가도 부교역자들에게서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대놓고 면전에서나 몰래 뒤에서나 스스럼 없이 악평을 일삼고는 한다. 그러냐 그리스도께서 정당하게 세우신 교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방하는 것은 마치 그들을 보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과도 같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자기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비방하는데 앞장서는 자들을 거짓 교사로 정죄하며 그런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권면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부교역자들을 까닭없이 비방하는데 앞장서는 자들은 한시적으로나 영원하게나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기에 합당하다. 교역자를 판단하는 기준과 근거는 그가 교회에서 얼마나 크고 많은 성과를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성경대로 복음을 전하고 말하며 행하는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설령 복음과 행실에 반성경적인 것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기분 따라 성급하게 단정지어서는 안되고 교회에 정해진 절차를 따라 다방면으로 검증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의 태도는 지극히 온유해야만 한다.
교회 내의 목회자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부 및 지도자들을 함부로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와 아론은 당시 신앙뿐만 아니라 민족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모든 나라의 정부와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와 지도자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들은 또한 동시에 한 명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정부와 지도자에게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정부와 국가 지도자를 향해 악한 말로 원망하고 저주하며 비방하고 조롱하는 죄를 짓고 있다. 그런 교회와 교인들이 지도자를 비방하는 이유는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들과 정치 이념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는 분명 복음보다 정치 이념을 우선하는 우상숭배에 기인한 극악한 범죄이다. 교회와 신자들은 자기 소견대로 성경을 왜곡하여 국가 지도자를 정죄해서는 안된다. 설령 성경에 근거하여 국가 지도자가 반성경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악한 말로 저주하거나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니므로 교회와 성도는 그런 지도자를 두고 선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정의를 세운답시고 뜻이 맞는 교회와 교인들을 선동하여 세력을 규합하여 위세를 과시하거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국가 지도자와 정부 방침을 거스르는 것은 백성들이 악한 말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도록 앞장서서 선동한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진영 끝에서 큰 불이 타오르자 백성들은 자기들이 여호와께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방금까지도 모욕했던 모세에게 나와서 자기들이 잘못했으니 제발 이 불을 꺼달라고 간구하였고 모세는 백성들의 요청대로 여호와께 간구하어 그 불을 꺼주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에게 오기 전에 먼저 불을 꺼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으나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영적인 이유로는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여호와를 비방하였기 때문이고 육적으로는 백성들을 친자녀처럼 돌본 자기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은 몰라주고 걸핏하면 악담을 일삼는 백성들에게 인간적으로 신물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를 전전하다가 드디어 바라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백성들은 이 때처럼 또 모세를 향해 원망하다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불뱀의 공격을 당하게 되는데 이 때도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에게 나아와서 용서를 구하고 불뱀을 없애달라고 요청하기 전까지 먼저 나서서 간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자였어도 끊임없이 퍼붓는 백성들의 불평불만에 지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괜한 겉치레 인사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셋째 하늘에 가는 경험을 했어도 그는 홀로 감옥에 갇힌 처지와 세 번이나 기도해도 없어지지 않는 육체의 가시와 자기만 남겨두고 거의 모두 떠나버린 동역자들 때문에 괴로워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원망하고 벌받은 곳의 지명을 여호와의 불이 내렸다는 뜻인 다베라라고 지었는데, 이는 분명 자기들에게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짓고 무슨 벌을 받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었을 때에도 그 지역을 다투었다는 뜻인 므리바라고 지었는데 이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보인다. 이 땅의 교회와 성도의 삶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제라도 치욕스러운 죄에 빠지게 될 수가 있다. 그럴 경우 대부분 그런 죄와 징벌의 상황이 기억속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으려 하는데, 정작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범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교회가 과거에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수시로 되새기는 것이 마땅하다. 설령 사람의 기억에서는 희미해질지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는 지금 지은 죄처럼 명확하기 때문이다.
#20191120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4장.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에게는 수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임에도 가인과 아벨만 언급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드린 제사나 여기에 기록된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이 이 두 아들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담의 자녀들은 가인과 아벨을 각각 대표로 하는 무리로 나뉘었을 것 같다. 땅의 풍요로운 소산에 만족하는 자녀들은 가인에게로,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자녀들은 아벨에게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녀들이 이렇게 상반되게 두 파로 나뉘어 갈등하는 것을 보는 것이 매우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로 인해 부모가 당해야 하는 괴로움 또한 아담과 하와 자기들의 범죄에 대한 저주의 대가인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또한 둘만이 드린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들이 족장으로 있는 부족 전체를 대표해서 드린 것이었을 것이다. 아벨파는 아벨의 믿음대로 가인파와 대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파는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번 제사를 통해서 아벨파를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를 가진 가인파의 제사는 실패하였고 순수한 아벨파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었다. 이로 인해 가인 뿐만 아니라 그 부족의 자녀들은 아벨파를 찍어 누르지 못한 것에 심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제사 후에 아벨과 그 부족의 자녀들이 가인파를 위로하려고 하였으나 대개 완악한 자들이 그러하듯이 의인 아벨의 위로의 손길을 강하게 뿌리치고 분노를 내뿜으며 자기네 거처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일 후에 가인파는 아벨파를 아예 없애버리기로 계략을 세웠던 것 같다. 마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라이벌 아마샤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봐 그와 화친하는 척 하면서 그를 창자가 흘러 나오도록 찔러 죽인 것과 같이, 아마도 가인파는 아벨파와 화해하는 척 하면서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족장인 가인이 족장 아벨을 따로 들에서 만나 그를 죽일 때 가인의 부족원들은 아밸 부족을 침략하여 멸절시키는 양동작전을 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믿음 없는 가인파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아벨파를 불의하게 죽였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부족을 가인의 손에서 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벨파의 육신이 가인파에게 죽임 당하게 두셨어도 그들의 영혼을 천상으로 받아들이셔서 영원한 안식의 낙원으로 들이셨다. 아벨과 그의 부족은 아담과 하와의 자녀로서 자기들의 부모보다 늦게 세상에 나왔더라도 부모보다 먼저 천상의 복을 누리는 영광을 얻었다. 게다가 아벨은 형 가인에 의해 흘린 피로써 자기의 억울함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다. 신자가 가져야 하는 복음을 믿는 믿음이란 이 땅에서 온갖 풍요를 누리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도리어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인과 같은 자들로부터 온갖 불의함과 부당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복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참된 믿음을 가진 참된 신자들은 이 땅에서는 대체로 어려움과 손해를 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불의함과 손해들을 감수하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복된 처소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시리라는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의 안부를 물으시는 것은 흡사 동산에서 범죄하여 나무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며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것과 같다.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더이상 숨기지 못힐 것을 알고 체념하며 나와 모든 것을 실토하였지만, 완악한 가인은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며 도리어 하나님께 화를 내며 항변한다. 자기 죄에 대해 죄책감과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는 자는 그래도 최소한 양심이 살아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죄를 지어도 죄인지 모르고 도리어 뻔뻔한 자는 양심이 3도 화상을 입어 기능을 상실하였으므로 누군가가 자기 죄를 지적하면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분노하는 법이다. 이런 자들의 특성은 자기 죄를 부인하고 발뺌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종국에는 자기가 피해자인 양 코스프레 한다는 것이다. 가인과 같은 자가 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으면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거부하신다. 또한 교회에서 중대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담임목사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온갖 술수를 쓰고 부교역자들을 방패막이로 앞세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을만한 때에 자기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사고대응에 앞장세운 부교역자들을 내쫓아버린다. 그러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서 더이상 믈질적 유익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교회 몰래 다음에 사역할 교회를 불륜 저지르듯이 알아보고 내통하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가수 이용처럼 불륜녀 때문에 조강지처 버리듯이 내통한 교회 때문에 원 교회를 내팽개친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변인들에게는 마치 자기가 교회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것마냥 술수를 쓴다. 이것이 바로 가인과 같은 담임목사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부인하고 발뺌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벌을 내리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자기가 흘린 피로 호소한 것을 들으시고 가인을 심판하심으로써 그 억울함을 풀어주신다. 여기서 가인이 받는 심판은 마치 아담의 벌과 흡사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는 최소한 땀흘려 땅을 경작하면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라고 하셨으나, 가인에게는 그것마저 금지하신다. 농사를 지어 땅의 소산을 얻었던 가인으로서는 이제 더이상 지금까지 해 온 농사 경험이 전부 쓸모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땅과 친숙하게 지내왔던 가인은 이제는 땅을 피하여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우리가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여 이를 위해서는 서슴없이 불의를 행한다면, 그것이 돈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건강이건 여자이건 지혜와 지식이건 간에, 결국에는 그 의지하는 것을 한순간에 잃고 비참하게 될 뿐이다. 그것을 잃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 울며불며 나아온다면 감사한 일이거니와, 끝까지 반항한다면 그에게는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적지 않은 악인들이 이 땅에서 온갖 불의를 저지르고 많은 것들을 향유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시는가, 공의로우신가 하는 일말의 회의 섞인 의구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넘치는 풍요속에 천수를 누리다 죽은 악인들은 더욱 극심한 지옥불의 형벌을 받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편만한 불의함에 실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본격적인 심판을 받은 가인은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보다 의로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한 자책감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고 떠돌아 다닐 때 그런 자기를 누군가가 죽이려 들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가인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걱정 뿐이었다. 이는 완악한 양심을 가진 악인들의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모습이다.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그로 인해 받을 물질적 손해를 먼저 걱정하는 것이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에게 자녀가 가인과 아벨 밖에 없었다면 가인의 우려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 외에도 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인 부족과 아벨 부족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벨 부족은 가인 부족에게 전멸을 당하였으나, 가인 부족은 이로 말미암아 더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가인과 더불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흔히 악인들이 모이는 집단이 그렇듯이, 가인 부족은 다같이 아벨 부족을 전멸하려는 악한 계략을 세워 실행하였으면서도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자 우두머리인 가인을 향해 죽일듯한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을 것이다. 가인이 걱정한 것은 어쩌면 자기 부족원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죽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에게 일말의 긍휼을 베푸셔서 어떤 표를 주셔서 그가 타인에게 죽임 당하지 않게 하신다. 그 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주홍글씨와 같이 그의 신체 어딘가에 새겨졌거나 아니면 그의 머리 위에 표지판과 같이 떠다녀서 그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나 제 3자에게 흉악한 죄를 지은 자라 하더라도 사사로이 또는 지나치게 우리가 나서서 보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실 때 당신 백성의 손에 피를 뭍히기 싫어하시므로 백성이 아닌 다른 자들의 손을 통해 보복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사회법이나 교회법을 넘어서지 않는 정당한 선에서의 처벌이나 배상에 만족하며 나머지는 하나님의 공의에 믿음으로 맡겨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가인에게도 끊임없이 이야기 하시고 가인 또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가인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점점 더 악인이 되어갔다. 오늘날 기독교인 또는 목사 또는 교수라 하여 성경을 잘 안다 하면서도 정작 그 행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다. 그런 자들은 성경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소통한다고 생각하나 행위로는 거짓을 행하므로 그들의 소통은 가인의 대화에 불과한 것이다. 대체로 그런 경향을 보이는 자칭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 실생활이나 사회 현상이나 국가 정책 등에 알맞게 적용할 줄 모르고 교회지상주의에 찌들어 사회법을 공공연히 어기며 극단적 반공주의와 미국 사대주의에 젖어 성경을 왜곡하여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들은 양민들과 국민들을 학살한 독재자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국가 지도자라 추켜 세우고, 불의하게 300여 명의 자녀들을 떠나보낸 유족 부모들의 가슴에 쇠못을 박으며 친일 매국 행위로 정작 자기가 속한 국가의 명예와 이익을 훼손하는데 앞장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기도가 아니라 그런 자들에게 희생 당한 의인들의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심판의 때를 기다리시며 의인들을 위로하고 계시는 중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