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일 다녀서 익숙했던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아내가 앞서서 간다.
최근 들어 양 무릎이 시원찮아 산책을 한동안 걸렀더니 산책코스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전 산책길에서 대형견과 마주쳤던 일이 싫었던 모양이다.
이쪽 지역은 처음 집을 장만할 무렵
모델 하우스 구경 하느라 자주 다녔어니 내 집과 멀지 않아 낯이 설지 않는 동네인데
황량해 보였던 외진 동네가 그새 주변의 가로수들 모두 거목이 되었다.
'놀라워라, 이 동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세월 참 빠르네'
'그래도 이곳이 온전히 조성된 건 우리 동네 보다 일 년 정도 늦어요'
'그런가 ~'
탄성이 절로 나옴은 아내 의견에 대한 동조이기도 하지만 속절없이 빨리 흘러버린 세월의 아쉬움이다.
'이봐요, 암만해도 내가 당신보다 빨리 죽지 싶어요'
'뜬금없이 이 할매가 뭐라카노? '
'매번 검사에도 이상이 없다는데 평지를 걷는 산책에도 이리 숨이 가쁘고 힘이 드네, 나 죽으면 우짤라요, 장가 한번 더 갈라요?'
'우야면 좋겠소?'
'당신은 할 수 있는 게 달랑 라면 하나 끓이는 건데, 평생을 라면만 묵울 수는 없으니 나 죽으면 마음에 맞는 할마씨 만나 깨가 쏟아지게 한번 잘 살아 보셔유'
'ㅎ 정말이요 그것 좋네, 알았어요'
부쩍 건강이 나빠진 아내
최근 들어 거의 일 년 넘게 검진과 담당 전문의를 만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으니
자기 연민이다.
2.
깜빡 졸았다.
짧았던 한국 방문 후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을 다잡지 못해 당분간 시간제 일을 8월 말까지 쉬기로 했으니
뒤뜰의 등나무 의자에서 게으름 부리는게 일상이다.
초목 움트는 찬란한 계절이라 여유로운 일상이 풍성하지만 두어 달 지났더니 반복되는 매일이 무료하다.
무릎에 펼쳐 놓은 책을 두어 페이지 읽다 어김없이 끔뻑했었나 보다.
이렇게 대낮에 졸다 깨어나면 한동안 멍하니 비몽사몽이 이런 것일 게다.
'여기가 어딘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고?
'뭘 한다고 이리 푹 쳐져 지낼까?
'아고야~ 일 하러 나가야 할 텐데 늦었겠네~ 아니지 당분간 쉬기로 했잖아 ~
'내가 아침은 먹었던가?
'진한 커피 한잔에 담배 한 대 피웠으면 좋겠구먼 (8개월 전에 금연했지만 자다 께면 어김없이 담배 생각이 난다)
슬그머니 주변을 살핀다.
집안 어디에도 아내가 보이질 않으니 이웃이 뒤뜰에 있던 개의치 않고 사정없이 크게 하품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온몸을 비틀듯 크게 기지개를 펴고는
'야야야아~
'아가가 가아~ ' 사정없이 양팔 내 벋치고 고함을 내지른다. 그럼 무척 시원하다.
그런데
찌뿌둥해서 쳐졌던 육신은 목청껏 내질렀던 고함으로 조금 풀리기는 한데
귀한 시간이 속절없이 쑤욱하고 삐져 나가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소중한 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불현듯 솟구치며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기 연민이다.
3.
잠깐 졸았던 무릎 위에
후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어린 새의 깃털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씨앗이 하나 놓였다.
이 가녀린 녀석은 어디쯤에서 날아와 허락도 없이 내 무릎 위에서 머무는 것인가?
작은 바람에도 멀리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솜털같이 가녀린 씨앗 하나.
태어난 곳을 떠난다는 안타까움이 버거워 잠깐 머물다 먼 여행을 준비하는 것일 테지만
이 씨앗은 말라버린 모체를 벗어나는 죽음과 새 새명의 잉태를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어쩌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영혼이다.
그렇다면 새 생명을 위해 먼 여행을 준비하는 깃털 같은 이 영혼을 가볍다 여기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무릎 위의 가녀린 민들레 씨앗과 무거운 내용의 책 한 권의 어울리지 않는 묘한 만남은
우연치고는 무척 대조적이다.
무릎 위에 펼쳐 놓았던 책은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조앤 디디온의 '상실-The Year of Magical Thinking'로
조앤 디디온이 남편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후 약 1년간 작가의 심경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그 시기를 써 내려가며 사랑하는 이를 잊게 되는 것에 괴로워한다.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이는 그 감정을 제대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비애’, ‘비통’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며
그러한 순간이 찾아오게 될 때 어떠할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을테니
책에서 보여주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절절한 비애를
자기 연민이라 할 수 있을까?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
동사해서 가지에서 떨어지는 새 조차도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라는
D. H. 로렌스의 ‘자기 연민(Self-pity)’이라는 시처럼
나이 들어가며 불현듯 자신이 서글퍼 보이는 경우를 마주하더라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4.
노을이 내려앉는 저녁이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 뒤뜰너머 푸른색으로 뒤덮였던 들판이 어느새 색을 바꾸어 가고
먼 지평선 위로는 붉은 석양이 꽃처럼 피고 있다.
영겁을 거슬러 노을은 붉은 꽃을 피웠고 마무리 날짜 하나를 지웠으니
멀어져 달아나는 찰나의 석양은 서럽기도 하다.
그래서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으니 서글픈 자기 연민에 빠져야 할까?
첫댓글 누구나 자기 연민에
빠져 본 경험이 많을거예요.
벌써 이 세상 소풍 끝내고 갈 생각하면
가장 걱정 되는게 배우자일 것 같구요.
제 친구도 작년에 남편 보내고
지금도 힘들어서 죽을둥 살둥 하는거 보면
앞으로 닥칠 일이 슬퍼지기도 하지요.
소소한 자기 연민은 괜찮지만
저처럼 깊게 빠지면 우울증 오니까
단풍님 훌훌 털고 으쌰으쌰 힘내세요.^^
ㅎ 그런건 아니고
알았어요 으쌰쌰 힘내야지요
자다가 일어나서 이상한 단어 하나 고치고 다시 자러 갑니다 ~~ 여긴 새벽 4시 ~~~~~~
처음 본문에는
'기지개' 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기저귀' 라고 했어요
한숨 자다가 깨어서 아무래도 이상하길래 고쳤습니다 ~
참 한심합니다,
자주 사용하는 쉬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지난 2월말에 몸이 안 좋아서
건강 검진받다, 조직검사해라
mri 찍어라, 아휴 진짜 힘들더라고요.
검사 받다 죽겠다 싶었는데
나 죽고나면 저 남자는 어떡하지 싶더군요.
절대 자식들과 같이 살 생각은 말고
괜찮은 사람있으면 친구하고
살라고 했지요.
저런 것도 자기 연민일까요.ㅎ
자기 연민에 자주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먹는 약 덕분에
그런데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녁으로 칼국수 해먹으려고
밀가루 반죽해 놓고 단풍 님 글 읽고
있습니다.
마음이 짜르르 합니다.
가족들 먼저 보내고 너무 아파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호박 숭덩숭덩 썰어 넣고
칼국수나 맛있게 해 먹으렵니다.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 밀러 갑니다.ㅎ
오늘 비가 오니까
면발이 땡기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점심때
칼국수 해 먹었는데
이베리아님은 저녁에? 맛나게 드세요.ㅋㅋ
@제라 제라님, 솜씨꾼~ㅎ
@제라 ㅎ 사진보니 비가 안와도 그 면발 땡깁니다
역시 호남쪽 밥상은 격이 틀리지요
암만해도 찡박아 놓았던 칼국수 맛집 사진 같은데요~ 상호랑 전번 좀 알카 주시우~~~~~~~~
그렇지요
뚜렷한 병명도 모르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검사 아주 힘이 듭니다
특히 이곳의 열악한 병원 시스팀은 진을 뺄만큼 곤혹스러워요
낄~
친구 해서는 안됩니다
부군께서는 새장가를 가야지요 ~~
제 아내가 요즈음 부쩍 약해져서 자기 연민인듯 보이니 바라보는 저도 심란합니다.
애호박 숭덩숭덩 썰어 넣고 ~ 그림같은 장면이 부랍네요 진짜로~
저는 아직 활기차게 움직이는 편이라 그런지
아직 자기 연민은 가져보지 못 한듯 합니다만,
더 나이가 들면 변하겠지요.
저야 말로 라면만 겨우 끓이는 수준인데도
걱정 안 하고 삽니다. 누가 먼저 갈 지는
하늘만이 아는 거고, 내가 오래 산다면 그냥
사서 먹다가 때 되면 떠나려구요 ^^
ㅎ~
한국은 사서 먹어도 괜찮겠네요 ㅎㅎㅎㅎ
여긴 안그렇습니다. 사반세기 넘게 살고 있지만 전혀 음식 적응은 안되네요 ~~
그리고 심신이 건강한 분 같아 보여 부럽습니다.
@단풍들것네 미국에 사시는 듯한데 아직까지 그렇게 단단한
모국어 필력을 가진 게 참 부럽습니다.
아마 독서로 단련된 필력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제 글에 의문을 가진 내용은 비밀 답글로 답을
드렸습니다.
일반적인 궤적과는 다르게 어려서 부터 군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그걸 밝히긴 싫었습니다.
단풍님 글 읽으며 떠오른
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어
댓글 대신합니다.
<조용한 일>
- 김 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그냥 말없이 조용하게
없는듯 있는듯 수더분하게 함께 하는게 고마운 정이지요~~
나도 낮잠자다 눈을 뜨면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서글퍼지곤 하였어요. 부부의 한 쪽을 사별하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하더군요. 부인 건강 잘 챙겨드리세요
무료해서 그렇습니다
바삐 움직여서 낮잠 잘 시간을 만들지 말아야겠어요
그럼요 배우자의 사별은 매우 큰 고통입니다~~
위의 글을 읽고 나니 나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몇년 전에 아내가 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합디다
나는 서슴 없이 새장가를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새장가는 가지 말라고 합디다
왜냐고 물으니 자식들에게 재산 상속이 문제 라고 합디다
나원참
돌아가신 다음에도 바가지를 긁을려고 하나?
곰곰히 생각하니 그 말이 맞기는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 아내 보다는 내가 먼저 돌아가실거 같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합니다
맞습니까?
충성 우하하하하하
맞습니다
부인의 말씀이 어긋남 없습니다
새장가, 새시집 가는기 어디 쉬운 일일까요 , 재산 때문에 자식들의 쌈 박질은 그냥 흔한 일이지요
어느 누가 먼저라기 보다는 두분 오래오래 함께 하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6.12 07:12
요즘 글들이
모두 그늘로 가는 기분입니다.
모두 힘내셔요.
오늘, 좋은 말씀 듣고 왔는데,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네요.
모두 영화를 만들고,
자기가 만드는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고 있다네요.
다시 잠깐이지만, 본질로 돌아 왔다가는
본질은 두드려서 변화를 시키고...
제가 느끼기에는,
글을 쓰고 싶을 때가 본질로 돌아오는
잠깐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옮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좋은 말씀 듣고 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본질을 외면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일까요.
그러게요
탐스러운 계절에 우리 함께 맑은 기운이어야 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제글이 조금 쳐져 보이지요
어디 좋은곳에 다녀 오셨군요
말미의 본질을 외면하고 싶은게 숨겨진 본성이라는 지적이 맞을것 같아요~~
마음 약해지면 누구나 자기연민 감기처럼 접하게 되지 않나 하는대요.
잘 살펴드리고 정성 기울이면 건강도 좋아지고 마음에 강단도 생기시겠지요.
뭔가 이상해서 기지개로 다시 정정하셨다는 위의 댓글을 보니
저의 브라보 다리와 막상막하입니다.
갈갈갈갈~
내캉 난형난제 도찐개찐 맞슴다~
이전 입사 동기중에 특이한 녀석이 있었는데요
마이동풍울 마리동풍
다다익선을 다대익선
결자해지를 결자해결
이 처럼 꼭 한 두글자가 이상해요
미팅할때 여자들은 그게 유머러운지 아주 인기가 많았어요
그런데 사실 글마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 진짜 고사성어를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전설~~우헤헤
누구나 가끔은 자기 연민을 갖게 되는 시기가 있지요.
오랜만에 한국 다녀 오신 일, 시간 여유가 많아서 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
충분히 이해가 되는것은 저도 그렇다는 의미겠지요.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캐나다 거위 깃털을을 보며
단풍님 생각을 했습니다.
캐나다 단풍은 맨날 투덜거리기만 하니
애고오~ 싫어~
이런 뜻인줄 잘 알고 있슴다~
아주 드물지만 제가 정성을 담아 댓글 달아 드리는 경우도 있으니 너무 싫어 하지 마셔유~
장문의 글 잘 읽였습니다.
잘 계신 소식으로 알고
댓글 대신 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ㅎ
맞아요 ~
딱히 할 말이 없을때 중언부언 글이 길어집니다
빨리 일을 시작해야 겠어요
두어달 집에서만 지내니 무력해집니다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6.12 07:15
누구나 거치는 과정일 겁니다.
부인을 사랑하심이 깊어
안쓰러우신 거지요.
자기 연민이 무르익으면
타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요.
나를 가련하게 보는 시선으로
남을 보는 거지요.
잘 읽었습니다.^^
답답해요
활기차고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게 언제인지 ~
내키지 않지만 함께 어디라도 다녀 와야 하겠어요~
평생 일을 해온 사람은 쉬는 것도 쉽지가 않은가봐요.
저는 자기연민을 무료함으로 읽었거든요.
왠지 영원한 내편 부인하고 여행을 다녀오시면 무료함도 사그라들 것같은데요.
무료함을 떨쳐버리고 파이팅이예요!
밖에서폰으로답글달려니어렵네요
맞습니다.무료함이자신에대한연민이지요
오늘부터 여름한철
하안거 들어갑니다
요번엔 득도할성 싶어요 ~ 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