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씨. 키스트와 카이스트는 같은 회사지?”
“아니, 전혀 달라. 그리고 두 곳 다 회사가 아니라 키스트는 연구소고 카이스트는 학교야.”
“서로 어떻게 다른데?”
“키스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하여 설립된 과학기술 연구소고, 카이스트는 키스트가 설립한 고급 과학기술 인력 양성기관이야.”
아내는 상굿도 호기심이 왕성하여 다양한 분야에 걸쳐 기습적인 질문을 해댄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때로는 인터넷을 한참 뒤져봐야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있다. 다행히 2002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25년사」를 집필할 때 KIST와 KAIST 설립과 관련된 자료를 숙지했던 기억이 남아있어 즉석에서 대답해줄 수 있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도 KIST에서 분화해 나온 여러 국책연구기관 중 하나이기 때문에 KIST 설립과정도 연구원 역사의 일부로 수록했던 것이다.
1966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적으로 국가경제 발전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이 필수적이라는 판단 아래 연구소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관계기관 공무원 가운데 연구소 설립 경험을 가진 자도 없고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하여 연말이 다 되도록 차일피일하고 있었다. 연말이 되어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박 대통령은 직접 100만 원을 출자하여 서둘러 KIST를 설립했다. 이후 KIST로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필두로 여러 국책연구기관이 분화되어 독립적인 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선도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가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KIST 내 조형물에 인턴으로 이틀 출근한 조국의 딸 조민을 <KIST를 거쳐간 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빨갱이들이 점령한 대한민국이 이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25년사」 얘기를 하고 나니 각중에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자랑스러운 나의 모교인 문경중학교 선배와 관련된 얘기라 이저껀 망설여왔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도가 아니라 지금 아니면 영영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치는 심정으로 털어놓고자 한다. 2000년 여름, 「SBS 10년사」 집필을 마치고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사 편찬을 총괄하던 홍보실장이 내게, ‘태영건설이 30년사 편찬을 계획하고 있는데 남 선생님께서 집필을 좀 맡아주시면 어떨까요?’ 하고 제안했다. SBS는 태영건설이 설립한 방송사이자 태영건설 회장인 윤세영 선생이 SBS 회장이라 그 동안 집필 자세나 사사 내용을 보고 내게 신뢰를 가지게 되어 그런 제안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윤세영 회장은 SBS 세전 이익의 15%를 장학 및 사회사업에 공여하는 존경스러운 기업인이다. 그 분은 유일하게 내가 집필한 원고 전체를 꼼꼼하게 읽어보셨다.
며칠 생각 끝에 나는 마포에 있는 태영건설 본사로 문경중학교 선배인 사장을 찾아갔다.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만 대면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SBS 10년사」를 집필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태영건설 30년사도 성의껏 집필해드리고 싶다고 하자, 그 선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단칼에 거절하고 휑하니 자리를 박차고 사장실을 나가버렸다. 존경하는 윤세영 회장이 설립한 회사인데다가 중학교 선배가 현직 사장으로 재직하는 회사의 사사 편찬이라 누구보다 성실하게 집필해줄 호의를 가지고 찾아간 나를, 그는 학연을 핑계로 청탁이나 하러 온 불순한 후배로 오인한 것이다. 난생처음 행패에 가까운 모욕을 받은 나는 한참을 넋을 잃고 앉아 있다가 간신히 자리를 떴다.
SBS로 돌아가자 잠시 후 홍보실장이 내 집필실로 찾아왔다. 나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경과를 설명했다. 그리고 태영건설 사장이 내 중학교 선배라는 사실도 처음으로 밝혔다. 그는 함께 공분하며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로 내게 사과를 하더니, 마침 퇴근 시간도 가까워오고 하여 나를 여의도의 한 요정으로 데려가 위로酒를 샀다. 나는 아파트에 요정을 차려놓고 황진이 뺨을 치고도 남을 미인이 정중하고도 섬세하게 접대하는 진풍경을 난생처음 경험했다.
한동안 태영건설 사장의 거절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는 오히려 큰 득이 되었다. 그해 가을 정보통신부로부터 「한국정보통신 20세기史」 집필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사장의 호의로 「태영건설 30년사」 집필을 맡았더라면 나와 연이 닿지 않았을 일이었다. 사사를 집필하면 원고지 양에 따라 대가가 지불되는데, 「태영건설 30년사」는 원고량이 800장인데 비해 「한국정보통신 20세기史」는 3800장이었으니 전화위복 아닌가. 더욱이 「한국정보통신 20세기史」를 집필하면서 한국과 세계 각국의 봉수통신을 비롯하여 통신의 역사를 낱낱이 공부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덤으로 정보통신부 사사 담당 부서장의 소개로 2002년 상반기에는 정보통신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25년사도 집필하게 되었고, 「한국정보통신 20세기史」를 읽어본 월드컵조직위원회의 한 부장 추천으로 2002년 하반기에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보고서」 집필까지 맡게 되었다. 「한국정보통신 20세기史」, 「한국정보통신연구원 25년사」 및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보고서」를 집필하는 2년 동안 나는 70평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공부를 하고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인터뷰하며 세상사를 두루 알게 된 충만한 시기였다. 이 가운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보고서」는 영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의 IOC 및 FIFA 관계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따라서 내 이름이 최소한 205개국(FIFA 회원국 수)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사사작가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다. 이 모두가 자랑스러운 나의 모교 문경중학교 선배님인 태영건설 사장의 선견지명에 의한 고마운 거절로 얻은 전화위복이었다. 이런 걸 두고 중국인들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첫댓글 좋은 정보 고맙네
우리 주변에 친구가 있어서 정말 많은 소식과 배움의 시간이 많이 있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