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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교과서 "창씨개명 조선인이 희망" 2005-03-11 (09:43)
종군 위안부 내용은 삭제 | ||||||||||
일본 우익단체 "새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새 교과서를 만들면서 또다시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제시대 당시 창씨개명 정책을 마치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서 이뤄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우익단체 "새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 개정판을 만들면서 일제시대의 창씨 개명이 마치 조선인이 원해서 이뤄진 것처럼 왜곡해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창씨개명은 과연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만 시행되었을까?
창씨개명이 1939년 11월 법률로 제정되기 전인 1937년경 창시개명을 주창한 조선인이 있었다는
설이 암암리에 떠돌지만 민족 자존심 문제로 공론화되지 못한 실정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에 의해 희망되어 실행하게 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이 전혀 사실무근일거라는
믿음도 여지없이 짓밟은 부류가 기독교이다..
한상룡과 박흥수가 창시개명을 주창한 대표적 인물이며
만주지역의 조선인의 요청이 있었던것은 사실이며
일설에는 당시 전북도지사였던 목사 아무개씨가 먼저 주창했다는 설도 있다.....
자발적인 기독교친일인사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대표자 한사람에 대해서 올림.
먼저....기독교에서 선전하는 글부터...
설립자고 김길창 목사
경성대학교의 설립자이신 고 순산 김길창 목사님은 1989년 11월 11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서
태어나 9세 때 그의 집안이 기독교를 처음 접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평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통하여 이를 실천 한 분이다.
김목사님은 일제통치라는 어려운 시절 교회를 건립하고 많은 사람들 에게 선교를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자라나는 우리들의 새싹들 에게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우리의 민족혼을 잃지않게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기독교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상 사회의 건설이라는
높은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평소에 가지고있던 교육관을 이땅에 실천적으로 펼쳐나갔다.
이를 위해 김목사님은 1936년 유아교육을 위해 영산유치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41년에는 경남성경학교, 1947년에는 흥아실무여학원, 1945년에는 지금의 남성여자중학교의 전신인 남선여자중학교를 1948년 에는 계성여자중학교를 1951년에는 광성공업고등학교를 1961년에는 대동중학교를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와 지금의 남성초등학교의 전신인 남성국민학교를 1967년에는 거제중학교를 각각 설립하여 유치원에서 부터 중등교육까지의 모든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없이는 전도없고 교육없이는 애국도, 소망도 없다는 평소의 신념을 실천하였다. 해방후 나라가 발전하기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익히하신 김목사님은 1955년 5월30일 경남사범대학숙이란 이름의 독자적인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이 학교가 지금의 경성대학교의 효시이다.
김목사님은 한평생을 두고 체계적인 모든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기독 교적 사랑이 충만한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그의 교육관을 실현시키고 주의 종으로 봉사하는 오직 한길을 걷다가 1977년12월1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경건했던 신실한 목회자의 생을 마감하였다.
(인정할것은 인정하는 균형잡힌 시각을 갖자고요?)
그다음....실제의 모습을 객관적 기록으로 살펴봄....
인터넷 반민특위에서 퍼온글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金吉昌, 1892~1977
1933~1934년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
1941년 이후 기독교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뇌로 활약
아래 인간은 한국교회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 데에 큰 공헌을 한 자이다.
아직도 생존(生存)해 있는 당시에 ‘같은 패거리’로 놀았던 소위 한국교회의 원로(元老)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단순히 친일을 한 게 아니라 한국교회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우상숭배에 대한 죄악을 강조하는 구약(舊約)이 못 마땅한고로 성경에서 구약을 성경에서 통째로 없앨 것을 제안하기도 한자이다.
그런데 나중 1970년대인가에 자서전(自敍傳)을 내놓았는데 그 자서전의 제목이 기 막히게 “말씀따라 한평생”이다.
정확히 붙이자면 “말씀 거역(拒逆) 한평생”이라고나 해야 했을 것이다.
해방후 교권을 쟁취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뛴 자이다.
우상숭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당하게 만들었다.
50여명이 옥중 순교하고 해방 후 20여명이 살아서 감옥에서 나왔는데 그 옥중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쫓는 데에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그리고 총회는 그들의 예배당까지 탈취하였다.
오늘날 모든 한국교회의 부정부패(不正腐敗)는 이러한 역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것을 보고 배운 신학생들과 후배 목사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지금이라도 바로 잡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갈수록 더욱 더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이다.
정화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오늘 바로 잡지 않으면 밝은 내일은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죄를 짓는 것이다.
고희(古稀) 넘어 새장가 든 화제의 주인공
1962년 6월, 71세의 목사가 자신의 아들이나 자부보다 나이가 어린 34세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전도사를 지낸 인물과 재혼하여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화제의 주인공이 바로 김길창 목사다. 그는 목사로서뿐만 아니라 세상에 교육가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진 직위로 보아서 영적인 지도자요, 지적인 지도자 행세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가 교계에서나 교육계에서 일반 목사로서는 갖기 어려운 화려한 경력과 '업적'을 가지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무엇을 이룩하였는가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분명히 대단한 '업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 {말씀 따라 한평생}에 따르면, 김길창은 1892년 11월 11일 경남 고성읍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김영수와 어머니 박순이의 8남 2녀 중, 아들로는 제일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경남 창원의 청계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6세 때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가 중단되어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그 후 창원, 칠원 등지에서 선교사 밑에 조사로 있으면서 1917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이듬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중간 생략-
해방 후인 1949년 김길창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증인으로 불려갔던 윤인구의 다음과 같은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문(조사관 심륜) : 김길창의 성격을 잘 아는가?
답(증인 윤인구) : 말하자면 심히 날뛰고 출중하려고 애쓰고 독선적으로 활약하는 성질이고, 이런 인물은 탄압하고 회유하는 일경의 술책에는 응당 이용되었을 것이고, 공명심에 끌려 과한 언행이 있었겠습니다.
3․1 운동과 민족대표 모독
과연 이것이 그 때 그의 심정이었을까?
반민특위 기소의견서에 따르면 "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뇌 인물 ②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이 현저 ③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케 함"이라는 범죄 사실에 덧붙여, "뿐만 아니라 기미년 3․1 운동에 언급하여 3․1 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며, 33인 중의 기독교 대표자에 대하여 교회를 사욕에 이용할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고 했으니 이는 위대한 선열에 대한 큰 모독일 것이다.</font> 조국 광복에 종교계의 공헌이 크다고 하면 할수록 그에 따라 본 피고자의 죄적(罪跡)은 현저할 것이다"라고 기소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길창은 피의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문(조사관 심륜) : 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하여 33인을 모욕한 사실이 있는가?
답(피의자 김길창) : 기독교를 이용하여 33인 중 신앙을 떠나서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은 종교적 입장으로 보아서 오로지 기독교 자체를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33인을 모욕한 것은 아니올시다.
문 : 종교적 입장이든 무슨 입장이든 조국이 있어야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어야 종교가 있는데 종교적 입장만 주창하는 것이 민족의 본의로 생각하는가?
답 : 물론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조국이 광복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윤택해짐은 사실이오나, 독립운동을 방해나 또는 비방한 언사가 아니라 종교적 진리를 말한 것이요, 33인 중 신앙을 떠난 사람 몇몇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의를 망각하고 기독교를 이용하여 기독교 자체를 모독하였단 말이올시다.
문 : 우리 독립운동 열사들은 교회가 가장 안정한 장소라고 교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또는 행동을 시작하였고, 기타 열사들은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살인방화든 모든 역량을 다해서 오직 우리 조국 광복만 위하여 투쟁한 것이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모독이 아닌가?
답 : 대단히 죄송합니다. 본인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3․1 운동을 비방한 사실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려다가 조사관의 질책을 듣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서 실시된 신문에서는 아예 그러한 사실조차 없다고 잡아떼면서 심지어 증인들이 모두 거짓으로 증인했다고 주장하였다.
문(특별검찰관 곽상훈) : 증인 김금순, 동(同) 한익동, 동 김만일, 동 윤인구, 동 박인순, 동 김상순, 동 권세권 등 피의자가 신사참배는 국민된 도리요, 국가의식인고로 적극 찬양한 사실과 신사참배 반대교인을 경찰에 밀고한 사실 및 조선민족성을 망각하고 황국화하기 위하여 일본 기독교와 합류공작한 사실, 친일적 언사 황민화운동 강연, 기미년 3․1 운동은 쓸데없는 장난이었다는 말의 행위를 입증하고 있는데 여하?
답(진술자 김길창) : 그런 증언은 모두가 거짓이올시다
위세 당당한 친일 거물 목사
1933~34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였다. '진출'의 소원이 일단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 '진출'은 곧바로 '친일'로 연결된다. 즉, 장로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는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는 일제에 '순응'하는 길을 걷는다. 앞에서 인용한 반민특위의 기소의견서는 "피의자 김길창은 목사로서 쇼와 16년(1941) 이래 해방까지, 안으로는 항서교회에서 신사참배 추진, 황민화운동, 민족정신 말살을 추진하고, 밖으로는 조선기독교와 일본전시기독교와의 지도이념 합치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일본 목사 가가와(賀川豊彦)와 도미타(富田滿) 등의 안내역이 되어 한국기독교인의 황민화운동의 추진단체의 수뇌 간부로서 활약하고, 소위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는 경남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혹은 일본경찰과 결탁하여 탄압케 하였으니"라고 고발하였다.
한익동 목사가 반민특위에서 "김길창은 기독교 신도들에게 신사참배하라는 총독부 지시가 있을 적에도 솔선적으로 신도들에게 추진 공작을 하고 보통인보다 배 이상의 활동을 하는 자이오니 주로 고등계 형사 주임들과 교제가 빈번하였으니 이면에서 공작은 여하하였는지 미지이오나 신사참배 반대한 목사와 남녀 신도들이 구금당하였으니 김길창의 밀고 소치의 행위인가도 능히 추찰됩니다. 본인은 어느 날 조용한 좌석에서 김길창에게 대하야 '일제에 너무 아부치 말고 경찰과 과도히 친근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였더니 답왈 '경찰을 배척하면 사업도 못하고 앞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어서 여차한 행위를 하노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한 것도 김길창의 일제 말기의 행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일제 경찰과 어느 정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예이며 또한 단순한 친일파로서가 아니라 반일 신도들을 경찰에 밀고하는 밀정, 그것도 아주 고급 밀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당시 고등계 형사를 지냈던 장세권의 증언을 들어 보자.
문(조사관 심륜) : 그 당시 증인의 직업은 여하.
답(증인 장세권) : 부산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문 : 그러면 당시 김길창은 증인에게 친교하자는 동기가 없던가.
답 : 당시 김길창은 목사 중에도 제1인자인 거물 목사로 경찰계에도 소위 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며 교제가 심하였으니, 위세가 당당하여 본인 같은 말직형사들에게는 조석간에 인사정도이고 접대도 소홀하였습니다.
문 : 그러면 친밀하던 경찰 간부는 누구였던가.
답 : 본인이 아는 자로서는 당시 고등계 주임 하라다(原田:왜인)와 부산서 고등계 주임 아라이(荒井:왜인)였는데, 하판락, 강락중이와도 친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문 : 교제가 심하였다는 증거가 있는가.
답 : 본인이 형사 근무시 어느 날 공무로서 김길창 본가를 찾아가니 김길창은 "지난 밤에도 하라다 고등계 주임이 왔었다" 하는 말을 직접 들은 사실도 있고, 더구나 김길창이 경찰에 출두할 시에도 형사들에게는 인사말도 없이 위세가 당당하게도 직접 아라이 주임을 찾으며, 아라이 주임 역시 김길창에 대한 태도는 마치 귀빈들이나 상관에게 대하는 환영을 하였고, 별석을 이용하야 오랫동안 요담한 사실도 빈번하였으며 대단히 친밀하였습니다.
문 : 김길창은 애국자 또는 신사참배 반대한 신자들을 밀고, 투옥케 하였다는데.
답 : 김길창은 경찰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니 말직형사인 본인으로서는 연락하고 밀담하던 내용을 직접 듣지 못하야 미지이오나 그 당시 국내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로서 목사 남녀 신도들 다수가 투옥당한 사실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 공판 과정에서 김길창은 이런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고, 증인들도 후에 진술을 번복하여 신사참배 반대자를 밀고하였다는 부분은 입증되지 못한 채, 반민특위에 체포된 지 3개월 만인 1949년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나고 말았지만, 그 의혹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 후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학교를 불법으로 불하받아 현재의 부산 남성여중고를 설립하였으며,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는 한편, 남성, 대동, 훈성, 한성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종교계에서뿐만 아니라 교육계에도 발을 넓혀 자신의 탁월한 사업수완(?)을 발휘하였고 또한 능수능란하게 시류를 타면서 공명심을 채운 인물이었다.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을 때 진술한 다음 내용은 그의 종교적․민족적 양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조사관 심륜) : 사이판 섬 황군전승기원제에 종교만으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열렬한 제문(祭文)을 낭독한 사실이 있었지?
답(피의자 김길창) : 황군전승기원제는 교회는 물론 전국적으로 불교나 각계 교회를 할 것 없이 전부가 기원제를 거행하였사오니 보통으로 행사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 소위 목사로서 민족을 팔고 종교를 팔고 양심을 팔아서 기도한 것이 종교의 지도자라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가?
답 : 대단히 미안한 사실입니다. 종교인으로서 하지 못할 행사를 했음은 어찌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만, 민족을 팔고 한 사실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서전에서 '화려한 일생'을 자랑스럽게 늘어 놓으면서도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참회의 글을 쓰지 않았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및 증인신문 조서], 1949.
김길창, {말씀따라 한 평생}, 부산 아성출판사, 1971.
영남교회사편찬위원회, {한국영남교회사}, 양서각, 1987.
첫댓글 짝짝짝~~~!!!!!!!!!!!!!....乃乃乃乃
역시 동포님이시군요... 잘 읽었습니다.
개별적인 인물을 예로 든다면 비기독교인들 중에도 수두룩합니다. 친일파는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이든 간에 각계 각층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현상이며 기독교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입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대종교의 항일운동을 제외하고 기독교만큼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한 종교가 있습니까?
동포님은 기독교인의 일탈행위를 열심히 수집하여 반포하는 데 적극적인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거니까 저에게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주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동포님식의 사고방식으로 특정 종교나 직업군, 계층에 대한 부정적인 사례를 수집하여 접근한다면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집단이 없습니다.
남의 비리를 들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킬 의도는 없습니다. 구구한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정적인 일면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기독교인 모두가 친일을 한 것도 아니고 범죄를 한 것도 아닌 데 기독교가 무슨 범죄 집단이라도 되고, 역사적 파렴치 집단이라도 되는 양 부정적인 사례를 뽑아
이를 극대화시켜 기독박멸에 힘쓰는 님들을 보면 딱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구조적이고 절대악이고 성경이나 교리는 모두 틀려야 하고, 기독교인은 모두가 범죄인이어야 하고 반기독교적인 것은 절대선이라는 논리에 사로잡혀서 속박되어 있는 님들이 딱합니다.
같은 소시민이면서 보는 시각이 전혀 틀리군요. 과거에서 현재까지 기독교가 행한 잘못이 있다면 당당히 고치세요. 잘 한 점은 당당히 말하세요. 간음, 간통하는 목사 있으면 가서 돌팔매질이라도 하세요. 역사왜곡하는 기독인 있으면 역사를 바로 알라고 해주세요.
자신은 그냥 기독교를 믿는 일반 소시민 이라며 칭얼거리는 님의 모습이 저는 더 안타깝습니다.
자신이 믿는 집단 또는 속해있는 집단이 잘 못을 한다면 다들 고치려 노력하는데, 기독교는 거의 그런게 없거든요.
배부른 윗대가리들은 소시민님같은 사람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등쳐먹고 사기치고...
잘들 하십니다요. 언제까지 그런 종교의 우두머리들을 따라다니며 살려고 하십니까...
소시민님께서 말씀 잘하셨습니다. 반기련은 인터넷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욕설과 비방으로 그들의 욕구불만을 배설대 마냥 퍼붓고 있습니다. 그들이 끼치는 저질 네티켓은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박멸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지못하고 부분의 잘못을 전체화하는 오류속에서 오늘도 그들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순환논리 오류의 나그네